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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궁궁통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 전서 13장 4절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곡을 입혀서
노래로도 많이 불립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사랑의 속성을 전했다. 곡을 입혀 노래로도 많이 불린다. 백성호 기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그런데
오래 참으라는 뜻은 알겠는데,
온유하다는 대목은
살짝 애매모호합니다.
무언가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느낌은 있는데,
누가 정확한 의미를 물어오면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온유’라는 단어를
차동엽 신부와의 인터뷰에서도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세 번째 복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팔복교회의 정원에 꽃이 피어 있었다. 백성호 기자
저는 차 신부에게
‘온유’의 뜻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궁궁통2
차동엽 신부는
‘온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꺼냈습니다.
“온유함은 히브리어로
‘아나브(Anab)’다.
온유하다는 건
‘겸손함’의 뜻을 담고 있다.”
온유함은
겸손함이다.
그래도 뭔가 손에 딱 잡히는,
더 정확한 뜻이
궁금하더군요.
“온유함의
더 구체적이고,
더 정확한 의미가 뭔가?”
차동엽 신부는 “온유함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 물음에
차 신부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온유한가, 아닌가
그걸 알려면
식당에 가보면 된다.”
엥, 갑자기 웬 식당일까요.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습니다.
“‘뭘 드실래요?’ 하고 물을 때
‘아무거나’ 하고 답하는 건
온유한 게 아니다.
그건 우유부단한 거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네가 시키는 걸 먹어볼게.’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거다.”
이 말끝에
차 신부는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가장 성숙한 사랑이 뭔가?”
저는 차 신부의 눈만
말똥말똥 쳐다봤습니다.
살짝 눈웃음을 짓던
차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상대방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거다.”
예수께서 탄생한 베들레헴의 한 교회에서 순례객이 초에 불을 붙이며 기도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그러니까,
온유함은
단순한 겸손뿐만 아니라,
가장 성숙한 사랑과,
또 상대방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까지
연결돼 있더군요.
#궁궁통3
차동엽 신부의 답은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답과도
맥이 통했습니다.
김 교수는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아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유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거라고
답했습니다.
“이걸 해, 저걸 해”가 아니라,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어.
너는 어떤 걸 선택할래?”라고
선택의 기회를 주는 일.
김 교수는
그렇게 아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김 교수도,
차 신부도 똑같이 말합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차동엽 신부는 팔복 중 하나만 고르라면 온유함을 택하겠다고 했다. 백성호 기자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모 자식 관계 같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또 다릅니다.
거기에는
가까운 곳에서
주고받은 상처와
아물지 않은 응어리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상처와 응어리가
왜 생겼을까.
이런저런 사연이야 많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자유의지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자유의지가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궁궁통4
궁금하더군요.
그걸
종교의 눈으로 보면 어찌 될까.
온유함에는
어떤 의미가 담기게 되는 걸까.
차 신부에게
그 물음을 던졌습니다.
“온유함을
종교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뜻이 된다.
만약 누가 저에게
여덟 가지 복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온유’를 고르겠다.”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오병이어 교회의 정원에 있는 올리브 나무. 가지가 풍성하다. 백성호 기자
저는 꽤 놀랐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딱 하나만 고른다면,
차 신부는 주저 없이 “온유함”을
꼽았으니까요.
대체 거기에 담긴
어마어마한 뜻이 뭘까요.
“온유함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녹아 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겟세마네의 고백이
온유함에 담겨 있다.”
저는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하느님) 뜻을 따르는 게
왜 중요한가?”
“내 뜻은 항상 생각이 짧다.
그러나
당신 뜻이 이루어지면 다르다.
거기에는
큰 지혜와 큰 능력이 흐른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무한 지혜와 무한 능력이
흘러드는 거다.”
결국
문을 여는 일이더군요.
하늘이 들어오게끔
나의 문을 여는 일,
그게 온유함이더군요.
나의 고집,
나의 잣대로
자물쇠를 꼭꼭
잠그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온전히 여는 일.
그게 온유의 깊은 뜻이더군요.
차동엽 신부는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열고 바둑 100단의 훈수를 따른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차 신부는 ‘바둑’에 빗대서
그걸 설명했습니다.
“인생을 바둑이라고 치자.
우리의 바둑은 18급이다.
18급은 100단의 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다르다.
자신을 열고
100단의 훈수를 따른다.
그런데 고집이 센 사람은
어떤 훈수가 와도
자기 바둑을 고집한다.
그는 결국
18급 바둑, 18급 인생에
머물게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 노래를
속으로 읊조렸습니다.
“사랑은 언제 온유하며…”
발을 뗄 때마다
울림의 파도가
내 안에서
출렁거렸습니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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