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대지도론 산책] 〈1〉시작하면서
‘울창한 숲’으로 함께 거닐어 볼까요?
‘백유경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잠시나마 연재물에서 손을 떼고
그간의 내 글쓰기에 대해 되돌아볼 생각을 하던 중에,
또 다른 경전을 하나 택해서 계속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사양하였지만, 욕심이 또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속수무책입니다.
게다가 공부도 무르익지 않은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이거야말로 대형사고입니다.
어떤 경전을 선택할까 궁리하다가
어쩌다 <대지도론>이 딱 떠올랐는지 모를 일입니다.
<대지도론>은 아마존과도 같은 거대한 숲입니다.
아마존의 밀림이란 것이 어찌나 울울창창하고 빽빽한지
아마존 사람들에게는 파란 하늘색과 푸른 나뭇잎색의
구별이 없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 위를 보아도
새파란 하늘색이 아니라
짙푸른 녹색이 허공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지도론을 펼쳐보면 꼭 아마존의 밀림에 던져진 것만 같습니다.
이리를 보아도 저리를 보아도 온통 짙푸른 불교이야기입니다.
그 푸른 녹음이 너무 짙고 깊어서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대지도론은 나처럼 미숙하고 일천한 학생이
만지작거릴 문헌이 아닙니다. 십중팔구 숲에서 길을 잃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앞뒤로 거침없이 읽고 외고
논할 정도의 학식과 사색이 쌓인 사람만이
그 총림(叢林)을 산책할 수 있습니다.
‘8종 조사’ ‘제2의 붓다’ 만나
번뇌의 균을 털어내려 합니다.
왜 이렇게 대지도론에 겁을 먹냐구요? 자, 한 번 따져봅시다.
무엇보다 대지도론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대(大)는 마하(Maha-), 즉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지(智)는 지혜인데, 그냥 지혜가 아니라 반야(prajn~a-)입니다.
도(度)는 건너가다, 건너가 도달하다. 라는 뜻의 바라밀다(pa-ramita-)입니다.
론(論)은 글자 그대로 ‘논서’입니다.
그러니 ‘대지도론’이라는 이름은 ‘마하프라쥬나파라미타’
즉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대한 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대지도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야경’에 대해
충분한 공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반야는 일체의 자성이 비었다는, 모든 것은 빈 것(空)이라고
직관으로 꿰뚫어 아는 지혜 즉 직관지입니다.
아, 어렵습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신문연재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대지도론>을 지은 사람은 저 유명한 용수보살입니다.
대소승 불교사상에 워낙 해박하였고,
그가 쓴 논서로 인해 중국에서 불교철학이 화려하게 꽃피었기에
‘8종(宗)의 조사’라고까지 추앙받으며,
더 나아가 ‘제2의 붓다’라는 별명까지 얻은 분입니다.
그리고 용수가 쓴 대지도론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구마라집입니다. 너무 뛰어난 인재여서 왕들이
그의 후사를 보려고 파계시키는, 그 엄청난 난리를 겪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대지도론이라는 문헌은 산스크리트본도,
티베트본도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정말 용수인지에 대하여 학자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으며,
구마라집이 번역하면서 끼워 넣은 부분도 상당수 있어
대지도론이라는 텍스트에 대해서 따져야 할 논쟁거리는 태산 같습니다.
아무튼, 대지도론이라는 울창한 숲을 산책하겠다는
나의 생각은 처음부터 엄청난 벽에 부딪쳤습니다.
저 엄청난 사상의 고갯길을 넘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산책은 말 그대로 산책입니다. 학문적인 논의는 전공자들에게 맡기고
나는 ‘대지도론’이라는 밀림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려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균을 죽이고 심폐기능을 강하게 해준다는
그 피톤치드를 말입니다. 울창한 대지도론 숲을 산책하면서
번뇌라는 균을 털어버릴 작정입니다. 함께 나서시겠습니까?
2012년 2월 8일
이미령 | 동국역경원 역경위원ㆍ책 칼럼니스트
불교신문
[출처] 관문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