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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비정상 난자엔 ‘자폭’ 기능, 나이 들수록 정상 임신 곤란 <32> 가시밭길 고령출산
벨기에 화가 야코프 요르단스의 ‘풍요(Fertility)의 알레고리’. 1623년 작품. [벨기에 겐트미술관 소장] Jordaens Allegory of Fertility
성경엔 놀라운 기록들이 있다. 예언자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자 사라는 ‘쿡’ 웃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 사라는 90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듬해 ‘이삭’이 늦둥이로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랐다.
천지의 창조주가 아이 하나 낳게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겠지만 90세라니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12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지금 여성 평균수명 85세 기준으론 48세에 아이를 낳은 셈이다. 좀 늦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나이는 아니다. 『기네스북』에 따르면 최고령 자연임신 산모는 영국의 59세 여성이다. 비록 시험관 수정이지만 국내에서도 배불러 아이를 낳은 초(超)고령 여성의 나이가 55세였으니 사라의 ‘48세’ 출산은 고개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 남들처럼 서른 넘어 결혼하고 직장에서 자리 좀 확실히 잡으려면 아이는 35세쯤 낳을 예정인데 괜찮겠지, 혹시 잘 안 되더라도 병원에 가면 금방 해결이 되겠지. 이처럼 임신·출산이 피임처럼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옵션’쯤으로 여기는 미혼여성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35세 넘어서 아이를 가지려면 가시밭길을 감수해야 한다. 젊어졌다는 착각이 출산 미루는 원인 필자의 지인 중엔 아내와 아이 사진을 유별나게 많이 찍는 사람이 있다. 부부가 아이를 가지려고 너무 고생했고 그래서 나중에 자식들에게 그런 사실을 꼭 알려야겠다는 것이 사진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부부는 둘 다 대학원을 마치고 아내 나이가 31세일 때 결혼했다. 아내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 임신 상태로 다니기 힘들 것 같았고 아이를 낳아도 맡길 사람이나 보육시설이 마땅치 않았다. 직장에서 자리가 안정되고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주기로 해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할 때 아내는 이미 34세였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아이 소식은 없었다. 피임하지 않고 배란일만 정확히 기억하면 임신은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년을 마음 졸이다가 배란촉진 호르몬 주사, 배우자 간의 인공 수정 등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임신이 안 됐다. 마지막 수단으로 시험관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어쩌다 만난 지인의 부인은 계속된 병원 출입으로 얼굴이 초췌했다. 시댁의 눈치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7세에 첫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쌍둥이라고 하기에 ‘투런 홈런’이라며 축하해 줬다. 나중에 들려온 소식은 둘째가 미숙아라는 안타까운 얘기였다. 부부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의사 말에 희망을 걸고 있다. 물론 지금은 두 아이에 치여 엄마는 직장을 그만둔 지 오래다. 하지만 아이들과 늘 함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부부의 웃음을 본 것은 이들의 결혼 6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부부는 평생을 ‘알콩달콩’ 살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고생을 해 아이를 가진 부부가 그렇지 않은 부부에 비해 ‘평생 짝꿍’으로 잘살 확률이 세 배나 높기 때문이다. 비 온 뒤에 단단해지는 땅처럼 고생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하지만 이 부부는 운이 좋은 경우다. 영화 ‘노아’(2014년·미국)의 여주인공 제니퍼 콜리는 40세가 되던 해에 세 번째 딸을 낳았다. 이미 4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아카데미상 수상식장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20대 같았다. 국내에서도 얼굴성형과 몸매 만들기 붐으로 10대 얼굴과 20대 S라인을 겸비한 30대 여성이 부쩍 늘어났다. 이런 30세 여성의 외모는 나이를 잊게 한다. 하지만 첨단 기술로 젊어진 외모와는 달리 몸은 구석기시대 인간처럼 나이를 먹어간다. 30대 여성이 외견상 20대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은 출산을 계속 뒤로 미루는 요인 중 하나다. 젊은 부부도 10%는 임신이 안 될 수 있는데 30대가 출산을 미룬다면 아이 갖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난자는 나이보다 더 빨리 늙기 때문이다.
고령 임신과 고령 출산은 많은 위험을 동반한다. 일러스트 박정주
노산 땐 사산·유산·기형아 확률 높아 얼마 전 할리우드 스타인 앤젤리나 졸리가 전격적으로 유방절제수술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졸리가 난데없이 수술을 받은 것은 유전자에 손상이 생기면 스스로 고치는 역할을 하는 BRCA1 유전자가 비정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유전자가 비정상이면 세포 내 다른 유전자들의 손상을 고칠 수 없어 나중에 암환자가 되기 쉽다. 이 유전자는 나이든 여성의 난자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여성도 나이 들면 비정상 난자를 갖기 쉽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013년 ‘사이언스 트랜스 메디슨’지). 여성이 출생과 동시에 보유했던 100만 개의 예비 난자는 나이 들면서 급감한다. 30대엔 12%, 40대엔 3%만 남는다. 실제로 예비 난자 중 500여 개만이 여성의 평생에 걸쳐 배란된다. 난자는 왜 이렇게 급격히 수가 줄어드는가?
올해 3월 미국의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아버지가 됐다. 남성은 문지방을 넘을 힘만 있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농담은 사실이다. 정자는 60세가 돼도 성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노익장을 과시한다면 고령에도 배우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 이에 반해 난자는 급속하게 수가 줄어들고 50세 무렵이 되면 스스로 문을 닫는다. 폐경을 맞는 것이다. 다양한 유전자를 가져야 생존에 유리한 정자와는 달리 난자는 수정란을 키우는 인큐베이터이자 ‘생명의 그릇’이다. 행여 난자의 이런 ‘그릇’ 기능에 문제가 있으면 처음부터 가차 없이 버려야 하므로 난자가 조금이라도 비정상이면 세포(난자)는 스스로 ‘자살’을 감행한다. 최대한 좋은 난자를 고르려는 여성 몸 자체의 노력도 나이 앞에선 역부족이다. 35세를 정점으로 여성의 난자 수는 더 급격히 줄어든다. 임신 가능 확률도 22세엔 86%지만 32세엔 63%, 42세엔 36%, 47세엔 5%로 급감한다. 난자의 DNA 손상도 나이 들수록 많아져 늦게 아이를 가지면 조산·사산·유산·기형아 출산 확률이 높아진다. 대표적인 염색체 기형인 다운증후군은 특징적인 얼굴 모습과 지적장애를 동반한다. 30세 산모가 낳은 아이가 다운증후군 환자일 확률은 960명 중 1명꼴이지만 35세엔 이의 3배, 40세엔 12배로 급증한다. 또 40세 산모는 25세 산모보다 일찍 죽을 확률이 3.8배나 높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났지만 난자가 늙는 속도는 크게 변함없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문구가 들어간 1970년의 피임 권장 포스터.
줄기세포 기술로 싱싱한 난자 얻을 수 있지만…
미국 영화 ‘플랜 B’(원제 Back up plan·2000년)에선 여자 주인공이 출산가능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인공수정, 즉 시험관아기 시술로 아이를 가지려 한다. 그때 이상형의 남자가 나타나서 ‘사랑의 열매(자연 임신)’를 맺으려 하지만 이미 배 속엔 다른 아기가 자라고 있다. 임신을 둘러싼 코미디이지만 제목이 더 재미있다. ‘백업’, 즉 임신의 예비수단으로 시험관아기 시술을 고려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임신이 잘 안 되면 대개 병원에선 배란 촉진 호르몬 주사를 놓아 임신확률을 높이려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남성의 정자를 채취, 자궁에 직접 주입하는 ‘배우자 간 인공수정’을 시도한다. 이런 노력에도 임신이 안 되거나 난관이 모두 막혀 있는 불임의 경우 마지막 수단으로 시험관아기를 계획한다. 시험관아기 시술 과정은 이렇다. 먼저 여성의 몸에 호르몬 주사를 놓아 과(過)배란 상태에서 난자를 채취한 뒤 이 난자를 시험관 내에서 정자와 수정시킨다. 이어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시킨다. 과정은 간단하지만 한 번에 성공할 확률은 22.5%에 그친다. 여성의 나이가 많으면 성공률이 더 떨어진다. 35세 이하에선 시험관아기 시술을 통한 출산 성공률이 41.4%지만 41∼42세엔 12.6%로 떨어진다. 시험관아기의 유산율도 산모 나이가 40대 이상이면 50%에 가깝다. 쌍둥이를 낳을 확률은 25∼30%다. 쌍둥이 중에 54%는 저(低)체중 아이고 언청이, 심장벽 이상 발생률도 높아진다.
지난해 말 가수 강원래씨가 13년 만에, 그것도 여덟 번의 시도 끝에 아이를 얻었다. 이처럼 불임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시험관아기 기술은 인류의 귀중한 재산으로, 1978년 노벨상이 수여됐다. 하지만 이 기술은 자연 임신에 대한 ‘백업 플랜’이 아닌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야 한다. 늦둥이나 시험관아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출발은 난자가 늙은 것이며 나이를 이길 순 없다. 최근 난소에서 줄기세포가 발견됐다. 지난해 ‘네이처 프로토콜(Nature Protocol)’이란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난소에서 얻은 줄기세포를 이용하면 다시 싱싱한 난자를 만들 수 있음이 동물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이는 난자의 늙음에 기인한 시험관아기 시술의 실패와 부작용을 극복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그릇인 난자를 실험실에서 마음대로 만든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예민한 문제여서 실제 불임 여성에게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요컨대 건강한 아이를 낳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무리 늦더라도 35세를 넘기지 말고 젊은 나이에 임신하는 것이다. 이는 아이를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엄마의 수명도 연장시키는 방법이다. 싱글이나 아이를 일부러 갖지 않는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s)족 여성들은 암·심장질환·정신질환·사고로 숨질 확률이 자녀가 있는 여성보다 4배나 높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의 절반 이상은 고령 임신이 유산·사산·조산·기형아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여성의 90%는 40세라도 병원에 가면 불임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300만원만 들이면 시험관시술로 ‘뚝딱’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성들을 대상으로 ‘늦둥이의 위험성’에 대한 인터넷 교육을 실시하면 이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고령 임신의 부작용과 위험성을 바로 알리는 것만으로도 여성의 출산을 몇 년 앞당길 수 있고 아울러 한 명 이상의 아이를 갖게 할 수 있다. 물론 보육시설, 직장에서의 출산장려 분위기 등이 선행돼야 예비부모들이 출산 쪽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문명이 가장 진보한 곳에 불임(不姙)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1970년대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가 우리 생활 주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정관수술을 받으면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줬다. 그때보다 훨씬 잘살게 됐지만 지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출산국이다.
[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생활 속 장수 열쇠, 과학자들이 꼽은 건 ‘손주 돌보기’ <33> 노년의 엔돌핀
‘할머니의 생신’. 오스트리아 화가인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발트뮐러(F. G. Waldm?ller)의 1856년 작품, 영국 윈저성 소장. 할머니의 손주 돌봄 덕분에 딸은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할머니 효과(Grandmother Effect)’다. The Grandmother's Birthday Ferdinand Georg Waldm?ller , 1856
하루 종일 손자를 보느라 지친 시어머니가 어느 날 꾀를 냈다. 예전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밥을 입으로 씹어 손자에게 먹인 것이다. 옆에 있던 며느리가 기겁을 하고 아무 말 않고 아이를 데려가더란다. 우스갯소리지만 할머니의 심정이 이해된다. 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봐주긴 해야 하는데 허리 디스크·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니 이거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다. 최근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손주를 봐주는 것이 손주와 할머니 모두에게 유익한 최고의 윈윈 전략이란 것이다. 현재의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라고도 했다. 단, 적정 시간 돌본다는 전제를 깔았다. 과학자들은 ‘손주 돌봄’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발달된 지능을 갖는 등 진화할 수 있었던 원인이고 미래 인간 장수의 열쇠라고 말한다. 무슨 의미인가? 손주 키우는 조부모, 언어 능력 향상 필자와 가까이 지내는 작가의 숙모 얘기는 놀라웠다. 그는 뇌졸중으로 병원에서 오래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과 이별 인사까지 나눴다. 그후 손자가 태어났는데 손자를 바라보는 숙모의 눈빛이 조금씩 살아났다. 손자와 같이 지내면서 자주 웃게 되고 건강이 빠르게 호전돼 지금은 10년째 잘 살고 있다. 손자가 할머니의 생명을 살린 ‘최고의 치료제’였던 셈이다. 웃음이 머리 앞부분의 ‘전두엽 피질’ 부위를 자극해 통증 완화 효과가 있는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2014년 미국 학회지 ‘결혼과 가정’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손주를 돌보는 50∼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의 두뇌 중에서 특히 언어 능력이 향상됐다. 종알종알거리는 손주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어 관장 두뇌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얘기다. 치매의 첫 번째 원인이 뇌를 쓰지 않거나 신체활동이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해 활발한 두뇌 활동은 최고의 ‘치매 예방약’이다. 실제로 1년 이상 손주를 봐준 미국 할머니의 40%, 유럽 할머니의 50% 이상이 치매 예방 효과를 얻었다. 특히 상황을 파악하는 인지능력이 개선됐고, 운동량이 늘어 근육량도 많아졌다. 이는 비단 피가 섞인 손주를 돌본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재잘거리는 초등학생들을 돌봤던 노인들에게도 나타난 현상이다. 아이들이 할머니의 ‘보약’이라면 거꾸로 할머니는 아이의 ‘수호천사’다. 미국 심리과학경향지(2011년)에 따르면 할머니와 같이 지내는 손주들의 15세까지 생존율이 57%나 높았다(할머니와 함께 지내지 않는 아이 대비). 이는 단순히 같이 놀아주는 것이 아니고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켜주는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중한 사이,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스 화가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Georgios Jakobides)의 1890년 작품. 할아버지와 손주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The Favorite - Grandfather and Grandson, by Georgios Jakobides (1890)
또 할머니와 같이 지낸 아이의 발달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는 아이들의 인성 발달에 할머니의 역할이 큼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손주가 먹고 자는 것을 주로 돌본다면, 할아버지는 손주의 정신 발달을 돕는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은 그의 단편 ‘묘예(苗裔)’에서 “손자, 그것은 인생의 봄싹이다. 그것을 가꾸어 내는 일은 좀 더 뜻있는 일인지 모른다”고 썼다. 아이가 어릴 때는 주로 할머니들이 먹이고 재우고 업고 다닌다. 아이들이 더 커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되면 할아버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유럽 할아버지 두 명 중 한 명은 손주들과 놀아준다. 이들은 손주들에게 집안의 내력이나 과학 얘기,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 등을 전한다. 특히 아이와 뭔가를 함께 만드는 활동엔 할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 이는 할머니와는 다른 차원의 두뇌활동을 돕는다. 이문구의 성장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에서도 할아버지는 아이의 두뇌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소설에서 아이 아버지는 하루도 집에 있지 않고 외부로 돌아다닌다. 행여 아이와 함께 있는 날에도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바쁘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요즘은 엄마마저도 바쁘다.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친구들과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살갑게 대하기엔 우선 부모들에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반면에 할아버지·할머니는 할 일은 적고 시간은 많다. 인생의 노하우도 쌓여 있다. 게다가 2대인 손주들에겐 1대인 자식들에게 느끼는 책임감과 압박감이 적어 한결 여유롭게 대할 수 있다. 조부모와 손주, 이런 2대가 잘만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궁합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궁합을 인간이 진화하고 장수하는 원인으로 꼽는다. 딸이 낳은 아이 돌보는 과정에서 인류 진화 침팬지는 인간처럼 45세께 폐경을 한다. 폐경 이후에도 생존하는 침팬지는 3%도 안 된다. 반면에 인간은 동물 중 거의 유일하게 폐경 이후에도 25∼30년을 더 산다. 도대체 무엇이 침팬지와는 달리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을까? 또 침팬지보다 30년을 더 살게 했을까? 그 답엔 ‘할머니’가 있다. 이른바 ‘할머니 효과(Grandmother Effect)’란 학설의 주 내용은 이렇다. 인류가 진화하던 어떤 시점에 폐경 이후에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어떤 여성’이 우연히 나타났다. 비록 이 여성이 폐경 이후에 새 자녀를 출산하진 못했지만 자기 딸이 낳은 아이, 즉 손주를 먹이고 돌보게 돼 딸이 더 많은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여성’의 유전자가 인간의 번식과 진화에 유리해 인간이 침팬지보다 장수하게 됐다는 학설이다. 인간 진화를 설명하는 다른 학설로 ‘사냥설’도 있다. 인간이 사냥을 잘하려면 머리를 써야 하므로 두뇌가 커졌고 이것이 인간 진화의 원인이란 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부시맨들을 관찰하면 ‘사냥설’보다는 ‘할머니 효과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프리카 부시맨들은 지금도 사냥하고 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 다시 말해 이들은 야생 침팬지나 야생 원숭이처럼 ‘수렵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의 원형이다. 이 부족에서 나이 든 여성인 할머니들은 젖 뗀 손주들에게 열매를 따 주거나 식물 뿌리를 캐 먹이는 ‘손주 돌봄’을 한다. 부시맨 여성들은 다른 현대 여성들처럼 폐경 이후에도 전체 수명의 3분의 1을 산다. 여성들이 폐경 이후에도 오래 살아서 장수하게 된 시기는 ‘수렵시대’ 이전이므로 ‘사냥설’엔 허점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012년 미국 유타대 호크스(K. Hawkes) 교수는 ‘할머니 효과’를 컴퓨터 계산으로 증명해 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연구논문보다 시골집의 풍경이 할머니가 인간의 장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보여준다. 3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일은 대개 할머니 차지다. 할머니들이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엄마는 부담 없이 아이를 쑥쑥 낳는다. 할머니들은 손주 보느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팔순이 돼도 근력이 유지된다. 게다가 한두 녀석을 옆에 끼고 잠이 들면 ‘노년의 외로움’이란 단어는 멀리 사라진다. 이런 이유로 복작복작한 3대 시골집은 어느새 장수촌이 된다. 필자의 한 대학 선배는 적어도 자손 번성엔 성공한 모델이다. 딸·아들이 각각 3명·2명의 아이를 낳았다. 부부 한 쌍이 평균 1.19명을 겨우 낳는 지금의 한국의 출산 통계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생산성’을 보인 셈이다. 이 배후엔 선배 부부의 적극적인 ‘손주 돌봄 작전’이 있었다. 선배는 딸이 결혼 후 직장을 잡고 임신하자 딸 집을 바로 친정 집과 합쳤다. 태어난 손주는 친정 엄마와 시댁 부모, 그리고 아이 부모가 각각 분담해 돌봤다. 때마침 정년을 맞은 선배도 손주를 싣고 옮기는 운전사 역할을 톡톡히 해 아이 보는 부담을 나눴다. 이 집에선 ‘손주가 올 때 반갑고 갈 때 더 반갑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주가 떠나 있을 때는 얼굴이 어른거려 얼른 데려오고 싶다고 할 만큼 선배 부부에겐 큰 즐거움이 손주였다. 이런 도움 덕에 선배의 딸은 소녀 적 꿈대로 세 명의 아이를 쉽게 가질 수 있었다. 장가 든 아들도 같은 전략을 썼다. 이번엔 아들 집을 선배 집 근처에 구한 뒤 아들·딸의 손주들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손주 보는 방식은 역시 분담이었다. 탈무드 “노인은 집에 부담, 할머니는 보배”
노동의 분담이 ‘손주 돌봄’의 핵심이다. 할머니 혼자 돌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손주 돌봄에도 최적의 시간이 있어서다. 너무 길어지면 할머니는 피곤해지고 힘들어하며 우울해진다. 결국 며느리 앞에서 손주에게 밥을 씹어 먹이는 등 다른 꾀를 낸다. 식탁 행주로 아이 입을 무심코 닦아주거나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가르치는 ‘묘안’을 실행한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손주 돌봄의 긴 중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손주 돌봄의 최적 시간은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미리 보육시간, 보상 금액, 육아 방향 등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손주 돌봄이 서로의 고통이 아닌 쌍방의 윈윈이 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여러 손주를 동시에 봐주면 아이들의 사회 적응력이 높아진다는 이론도 솔깃하다. 지난해 미국 진화인류학회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어린 손주 여러 명을 동시에 볼 경우 아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을 계속 맞춘다. 조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6남1녀 사이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다. 형제들과 잘 지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상으로 과자를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셋째 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옛말은 셋째 딸의 사회성이 높다는 의미로 읽힌다. ‘부잣집 외동딸’을 며느리로 쉽게 맞지 못하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질 것으로 우려해서다. 아이들은 여럿이 커야 사회성이 높아진다.
“노인이 집에 있는 것은 큰 부담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집에 있는 것은 보배다.” 유대인의 철학과 지혜를 담은 책인 『탈무드』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말 속엔 요즘 우리나라의 최대 현안인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열쇠는 출산 장려, 보육 지원 등 두 가지다. 이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할머니’가 있다. 저출산 문제로 한국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고민을 안고 있는 싱가포르는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에게 연 250만원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일부 구청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지원을 확대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손주 돌봄을 적극 도울 필요가 있다. 이는 국내 출산율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현재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출산 국가이고, 최고로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한국과학창의재단 STS사업단www.biocnc.com에서 바이오 콘텐트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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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fathers Birthday - Ferdinand Georg Waldm?ller, 1849
Grandmother with three grandchildren - Ferdinand Georg Waldm?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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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