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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2장,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시록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장의 중심점은 도표에서 보시는 바대로 단연,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체주제(진실로 속히 오리라)와 각 단원의 제목을 연결해서 대지를 파악해보면,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첫째 단원) 하십니다.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주님은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둘째 단원)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셋째 단원) 하고 화답함으로 오시기까지 계시록적인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본 장의 대지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 장은 “약속과 권면”이 됩니다. 약속은 “진실로 속히 오리라”로 주어졌고, 권면은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상”이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마지막까지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7)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둘째 단원(8-15)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셋째 단원(16-22)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첫째 단원(1-7)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①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1-2상) 합니다. 1-5절까지는 21장의 계속으로 “이기는 자”가 상속하게 될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인데,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상기시키면서 강조합니다만, 성경 전체의 문맥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오자 4장에서 즉각적으로 “어린 양”이 들어와 죽어 제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성경 마지막 책, 마지막 장에서까지,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1-2상),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3) 하고, 이어지는 문맥이라는 점을 대하면서 형제의 깨달음과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창세기에서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창 2:10)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고, 에스겔서에서는 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겔 47:1) 흘러나온다고 말씀하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씀합니다.
②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하)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도,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즉 죽었던 것이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수강”을 마치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한강과 같은 양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생명수강의 근원(根源)이 “어린 양”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6) 하신 어린 양이 치심을 받으심으로 열리게 된 생명수요,
㉡ 스가랴 선지자가,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한,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샘물이요,
㉢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한 “구원의 우물 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강을 “생명수의 강”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생명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합니다. 14절에서는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고 말씀하는데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약속하십니다. “생명수와, 생명나무”라는 이미지는 창세기 3장에서 상실했던 축복이 회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점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생명수와, 생명나무” 열매가 재림 이후에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에게 이제도 성령으로, 말씀으로 공급되고 있으며 그 날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③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3) 합니다. 창세기 3:17절에서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했는데 다시 저주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저주가 없다" 하심이 그냥 된 것도 아니요, 주님의 재림의 날에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으로"(갈 3:13) 다시 저주가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씀하는데 이 은혜의 깊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20장으로 가보아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수여하시는 내용인데 하나님께서는 율법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하십니다.
율법만을 주셨다면,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한 대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인데, "번제를 드리라, 복을 주리라" 하십니다. 복을 주심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번제, 화목제"로 드려지는 제물이 대신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기 때문인데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명백한 예표인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제도,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우리 가운데 있으며, 자녀로서 그를 섬기고 있다”는 점에 확고해야만 합니다. 다만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고전 13:12) 될 것입니다. 이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계시록에 나오는 전쟁이나 약속이 현재와는 상관이 없는 종말의 삼 년 반에 되어 질 일로 여기는 해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④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4상) 하십니다. 누구의 얼굴입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 한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이는 영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리니” 라는 묘사는 이기는 자에게는 지고(至高)지선(至善)의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함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4하)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인데 "인침"은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러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이 그 이마에 없는 자들은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이를 대하면서 짐승의 표를 받느냐? 하나님의 인침을 받느냐, 다시 말하면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도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새삼 절감하게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 한,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 것도 유대인에 국한(그렇게 말하는 해석이 있기에)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하신 현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제의 이마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붙어있을 터인데, 우리는 이 이름의 영예를 얼마나 의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든지, 아니면 모독을 받으시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⑤ 21:7절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하고 시작이 된 축복이 22:5절에서 끝나고 있는데,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5하) 라는 말씀으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천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만년도 아닙니다. “세세”(世世)토록 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이 한 말씀 안에 이기는 자가 누리게 될 모든 유업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세세토록”을 위해서 지금은 “잠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계시록의 격려입니다.
이제 생각해 봅니다. 다윗이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이리저리 유리방황 할 때에도 다윗은 엄연히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신분이었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은 그를 왕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형제가 처한 현재의 상황과 겉 사람이 아무리 초라해 보인다 하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형제는 “왕 같은 제사장” 신분임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말씀합니다. 아직은 그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신서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1-3) 라고 말씀합니다.
⑥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심이라”(5상) 합니다. 여기서도 강조점이 밤이 없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나라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론이 주제인 에베소서 강해(영광스러운 교회)를 통해서 모형으로 주어진 모세의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 모세가 들어갈 수가 없었고(출 40:34), 솔로몬의 성전에도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대하 7:2)고 말씀하고 있다면, 모형이 아니라 실제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더욱 충만 충만하겠느냐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심이라”(5)하신 그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나라에 “햇빛”이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둘러 비친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하신 대로 우리의 몸도 영광스럽게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형제는 영화 된 형제의 몸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보셨습니까!
⑦ 그러므로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6) 하십니다. 21:5절에서도,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십니다. 19:9절에서도 “기록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십니다. 믿음이란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를 목전에 두고 기록한 마지막 서신에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부인하시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주 하나님은 절대로 그러하실 수가 없는 분이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⑧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7상) 하십니다. 12절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하십니다. 20절에서도,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약속입니다.
⑨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7) 하십니다. 계시록은 시작하면서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1:3)고 말씀했습니다. 읽는 자란 교회 앞에서 낭독하는 지도자, 즉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켜야 할 예언의 말씀이 무엇인가? 계시록 전부입니다. 그 중에서도 2-3장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요약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4장 이하에서는 이기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둘째 단원(8-15)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①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10) 하십니다. “인봉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알 수 있도록 전해주어 지키게 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인봉하지 말라” 하심은 계시록이 결코 비밀문서와 같은 책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 열려진 책임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봉하지 말라”는 말씀은 계시록의 내용들이 종말의 극히 짧은 기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즉시(卽時) 발효시켜야 할 내용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긴급(緊急)한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을 난해하게 여기고 이를 제쳐놓게 되는 것은 중심주제는 소홀히 한 체,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계시록의 중심주제를 부각시켜 단순화시킴으로 모든 성도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총사령부로부터 작전명령이 휘하(麾下)부대에 하달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문서를 인봉 한 체 내버려두는 그런 부대를 상상이라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계시록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전투하는 교회들에게 보내진 작전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십니다. 전사들에게 “칭찬과 책망과 격려와 약속과 경고”를 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부지런히 가르쳐서 계시록의 말씀으로 무장시켜 이기는 자가 되게 하라는 의미가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 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계시록의 말씀은 교회가 이해할 수 없도록 작성된 비밀문서가 아닙니다. 어려운 것은 해석이 아니라 계시록의 명령을 “지키는”(1:3, 22:7)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계시록을 전해주었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는 자와 회개치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 한마디로 짐승을 추종하는 자와, 어린 양을 따르는 자의 두 부류로 갈라져서 두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③ 그러므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12) 하십니다. “행한 대로(12)와, 값없이 받으라”(17)의 조화와 균형을 잃지 말아야만 합니다. 구원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지만, 상급은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이런 조화와 균형은,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21:7)는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유업(遺業)은 상속하는 것이지만, 이긴다는 것은 쟁취(爭取)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④ “상 주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목적의식(目的意識)이 분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 바치면 축복 받는다는 그런 식입니다. 이 말이 왜 잘못된 것이냐 하면 자기중심(自己中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정신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요, 자신은 관리자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바른 목적의식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위해서 헌신하며 헌금함을 뜻합니다.
형제는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전사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0-12)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小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즉십자가 군병인 형제에게 한 것이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마가복음 9:41절에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하시는 것입니다. 상은 아무에게나 덮어놓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상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다는 올바른 목적의식을 가지고 수행한 데 대한 보상(報償)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라”(13) 하십니다. 21:6절에서는 이 말씀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하는 말씀과 결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주님이 재림하지 않는다면, “알파는 되시나 오메가는 되지 못하는 것이 되고, 시작은 되시나 끝은 맺지 못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을 다짐하십니다. 현대교회 중에서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입으로 말고 삶을 통해서 나타내는 증거 말입니다.
⑥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14상) 하십니다. 이점에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분명해야만 합니다. 기우(杞憂)에서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말을 찬송가 가사에서는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 합니다. 그렇다면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를 물리적으로 생각하는 잘못 된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생수” 통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두루마기를 빤다, 죄를 씻는다”는 말은 구약적인 개념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禮法)일 뿐이며 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행해지던 상징적인 묘사를 문자적으로 받아드리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뜻은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속하여졌을 뿐만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뜻입니다. 이런 은총을 입은 자는 그 예복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힘쓰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주님과, 나 같은 죄인을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열망하는 자입니다. 또한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아버지의 이름과 가문에 모독을 돌린 것을 애통해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⑦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하) 하십니다. “성에 들어갈 권세”라는 말은 즉각적으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한 창세기 3:24절의 추방당함에 대한 해답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니, 무슨 공로, 무슨 자격으로 말입니까?
이점에서 주님께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하신 말씀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이 “문과, 길”이 되신다는 점을 모르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해서 문과 길이 되어주셨는가 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점을 성경은,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육체를 찢으셨을 때 1500년 동안이나 막혀있던 휘장이 열려졌습니다. 그리하여 “문”이 열리게 되었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로운 산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⑧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 합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드린다면 혼란에 빠지고야 말 것입니다. 최후심판(20:12) 이후, 새 예루살렘에서도 성 밖에는 이런 자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22장이 천국 묘사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유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20장 끝 절과, 2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1:27),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합니다.
셋째 단원(16-22)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①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16) 합니다.
16절은 읽기만 해도 굉장한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우선적으로 “나 예수는”,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엄숙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내 앞에 스셔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교회들을 위하여” 하십니다. 계시록에는 “교회”라는 말이 20번 이상 등장하는데, 교회로 시작하여(1:4), 교회로 마치고 있는(22:16) 것이 계시록입니다.
이는 계시록이 교회에 보내진 메시지요, 주님의 관심이 온통 교회에 있다는 점을 말씀해줍니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엡 5:25). 이점이 계시록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1:5하),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5:9하)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도 “교회를 보양”(保養)하고(엡 5:29) 계십니다. 이점이 계시록에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2:1)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②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16중) 하십니다. 이는 계시록의 기록목적을 밝혀주고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록목적을 요한이 말씀하는 것(요 20:30-31)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고 명하신 분이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들에게 주어진 것이 계시록인데, “이 말씀을 읽어(가르쳐) 듣게 하여 지키도록”(1:3) 힘써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③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16) 합니다. 이는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는 자기계시입니다. 5:5절에서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말씀할 때는 장로 중 하나가 한 말이고, 여기서는 “다윗의 뿌리”라는 말에다가,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는 말씀이 첨부되어,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뿌리”,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고 언약하신 다윗의 뿌리로 오신 분이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요 1:9), 광명한 새벽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벽별”이란 여명(黎明)을 알리는 별입니다. 신천 신지의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④ 여기 아주 특별한 말씀이 나오는데,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17상) 하십니다. 이 한 절 안에는, “오라”는 말이 세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간절한 초청(招請)임을 나타냅니다. 초청자가 누구인가?
“성령과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구속사역을 증언하는 일은 성령의 사역인데, 성령께서는 교회를 들어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으니”(12:11) 한 증언 사역이 성령과의 동역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교회라 말하지 않고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이는 19:9절에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신 “청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 오라, 오라”고, 목마른 자들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하는 초청인이 “성령과 신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신부”로부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마 22:4). 하나님께서 잔치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마련하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⑥ 그러므로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17하) 하십니다. 이는 복음초청이요, 이 초청은 계시록을 심판의 책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심판이란 “오라, 오라, 오라”고 초청을 하여도 끝내 거부하는 자들에게 불가피하게 임하게 되는 징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복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이 한가지만으로도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촉구하는 바는 복음 증언입니다. “인, 나팔, 대접”의 재앙을 내리는 의도가 무엇인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복음초청인 것입니다.
㉠ 구약성경을 통해서는 성부께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고 초청하시고,
㉡ 복음서에서는 성자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고 초청하시고,
㉢ 계시록에서는, “성령과 신부(교회)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17)고 초청을 합니다. 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와, 계시록을 통한 일관된 초청입니다. 이 복음을 외면하고 음녀의 유혹을 쫓아간다면 그 종말은 “불과 유황 못에 던짐 받게”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⑦ 복음 초청에 이어서 18-19절에서는 강력한 경고가 나타나는데,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18상)라고, 경고도 요한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하신 경고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고가 무엇인가?
㉠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18하) 하십니다. 이 경고가 복음 초청에 뒤이어서, 즉 설교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이 말씀이 자신과는 무관(無關)하다고 여기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하는” 것이 되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純全)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이 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초대교회 당시에 “수다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다면, 현대교회는 어떠하겠는가?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리라”(19), 즉 성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많이 “제하여 버리는” 시대에 처하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성경을 인간의 이성(理性)과 합리적(合理的)인 잣대로 재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모든 권위가 무너져 내린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중에서도 인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데 교회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내부에 있는 신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또한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설교자들도 복음을 옆으로 밀어놓은 체, 성경을 교훈적으로, 기복적으로, 위인전기나 자기계발서 인양 다루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중심주제를 제하여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로는 성경의 권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설교들은 논어나 불경이나 삼국지, 심지어 춘향전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설교들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가 기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주목적은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證明)”(행 17:3, 요 5:39)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성경을 가감(加減)하는 과오를 범하는 일입니다.
⑧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20상) 하십니다. 이 말씀이 계시록에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때가 가까움이라”(1:3)고 시작하여 “속히 오리라”는 확약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교회의 화답입니다. 주님 환영합니다. 오시기까지 계시록의 말씀을 명심하여 “이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와 신부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아가서는,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아 8:11), 즉 신랑이 포도원을 청지기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로 가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가서도,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즉 빨리 오소서.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즉 노루같이, 사슴같이 빨리 달려 오소서 라는 말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간구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⑨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 1:1-7절이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요한의 신앙고백이 담겨있다고 보았듯이, 21절도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6) 한 “저주”로 마치고 있는데, 신약성경의 마지막 말씀은 “주 예수의 은혜”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씀드릴 것밖에는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요
구주 예수 그리스도 크신 팔을 벌리고
너를 도와주시려고 서서 기다리시니
너 어서 나오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