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리운 아버지..
충북 제천 송학면의 시곡4리 깊은골에서 9대째 살아온 가난한 농군이던 당신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남다른 ‘신분’으로 대접을 받았었지요.
봄나물이 귀하게 밥상에 오르면 어른들마저 젖혀두고 ‘장손’에게 눈길을 주었고, 고등어자반이나 꽁치구이가 어렵사리 차려진 날에는 아예 저를 불러다 앉혀두고서야 밥상을 들였다죠. 아버지께서는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각오로 어머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시고 어린 저는 할머님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그도 얼마되지 않아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씀’을 따라 ‘장손’은 급기야 서울로 끌려(?) 올라가게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전봇대 옆에 드럼통을 세워두고 고구마나 군밤을 구워서 파셨고,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 아주 작은 구멍가게를 내시더니 어느새 과일까지 그득하게 진열해놓고 파는 제법 번듯한 가게를 내셨습니다.
‘송학상회’라는 간판을 달았던 그 곳에서 저는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추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복숭아가루나 자두의 신맛에 질려서 지금도 복숭아를 보면 공연히 근질거리고, 자두를 보면 입가에 신맛이 돌아 진저리를 치곤 하지요.
그렇듯이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아버지께서는 집안을 다 무너지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보증을 서준 친구 대신에 돈을 다 갚아야 했고 그나마 있던 집까지 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죠.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반감도 컸지만 주렁주렁 달린 식구들 앞에 막막하기만 했을까요. 결국 아버지는 집을 나가 강원도 어느 산 속으로 가셔서 버섯을 따신다고 했고, 저희들은 무허가촌으로 쫓겨나와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난의 시절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님께서는 포장마차를 하셨고, 누나는 식모살이를 떠났고 바로 밑의 여동생은 골목길 모퉁이에 사과궤짝을 엎어놓고 좌판을 벌이고,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저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껌팔이까지 하면서 간신히 살아갔습니다.
무허가집의 골방에서 온 식구가 자느라, 밤늦게 돌아오는 저나 어머님은 발을 뻗고 잘 자리는 커녕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구석조차 힘들었지요.
중학교 3학년이던 해에는 동사무소에서 극빈자들에게 주는 밀가루 배급을 받아서 그저 반죽을 해서 끓여먹었습니다. 그해 석 달간 저희는 밥 구경을 못했습니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서 점심시간이면 저는 운동장 구석에 있던 수돗간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입에 집어넣고 콸콸 쏟아지는 찬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겨울밤이면 연탄재를 버리는 소리가 ‘퍽’하고 들리는 골목으로 조심조심 뛰어나가 거의 타버렸지만 아주 조금 불기운이 남아있는 연탄재를 집으로 가져들어와 아궁이에 넣던 어머님을 실눈 뜨고 바라보곤 했던 눈물어린 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저는 목구멍을 넘어서 식도를 타고 들어가 위장을 출렁거리게 하던 그 수돗물의 차가운 맛을 오늘에 이르러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온몸이 얼어가던 한겨울 밤의 연탄재를 주우러 골목길로 나서던 어머님의 발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그 것들은 제 어린 시절의 목숨이 시리도록 가난했던 피눈물의 기록일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즈음에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게다가 절망감 속에서 술주정만 늘어간 아버지는 밤마다 공포감을 주기만 하던 그야말로 집안의 애물단지였고 아예 ‘웬수’라고 했습니다. 온몸이 부스러져라 행상하며 돈을 벌어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님에게 주정을 하며 당신의 한풀이를 해대는 아버지를 참 몹시도 미워했습니다.
미션스쿨을 다니던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어머님을 교회로 인도해드렸습니다.
그나마 교회생활에 의지해서 버티시지 않으셨으면 아마 어머님은 견뎌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럴 정도로 아버지는 우리를 힘들게 하셨습니다.
장남인 제가 사회에 나와 자리를 잡게 되자 아버지는 제게 사업을 하시겠다며 도와달라고 제안을 하셨고, 집안사람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스스로 잘 아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의 삶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워 자부심과 당당함을 심어드리고 싶었던 저는 아버지의 사업에 적극 찬동하고 나섰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아버지의 건축사업은 주택건설 붐과 함께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두어 꽤 많은 돈을 버셨고, 지금도 어머님께서 타고 다니는 차를 사주기까지 하시며 의기양양하셨죠.
그리고는 중한 병을 얻어 8년여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먼저 떠나가셨지요.
어느날 병원에서 갑자기 ‘내가 네 엄마 마음이나 편하게 하려고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고 핑계를 대시더니 ‘목사를 불러 달라’고 하셨지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님은 한참을 흐느끼셨습니다. 그것이 감사의 눈물이었는지, 죽음을 예견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병실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세례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는 목사님은 보지도 않고 어머님과 저를 보시더니, ‘이젠 되었냐?’라며 희미하게 웃으셨지요. 그게 마지막 인사였던가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떠나시던 날, 모여 있던 가족과 교인들이 함께 마지막 찬송을 불러드렸고 저는 마지막까지 손을 잡아드렸고 우리는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지요.
살아서 우리를 참 모질고 고통스럽게 했던 아버지,
그나마 말년에 사업으로 잠시 일어났던 재산을 도로 다 가지고 떠나가신 아버지,
그렇지만 이제 어머님과 저희들은 모두 아버지를 기쁜 마음으로 추억하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미워했더라도 예수님 품에 안기운 아버지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으셨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소중하고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
내일이면 부활절입니다.
아마 지금쯤은 하늘나라에서 누구보다 더 깊은 신앙으로 참된 부활을 맛보고 계시리라 믿으면서 아버지께 이글을 씁니다.
부활의 은총이 아버지와 또 함께 하시는 모든 이들의 영혼에 기쁨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07년 4월 7일, 충북 제천시에서 장남 이근규 드림
첫댓글 ......................().........................
밝은 미소뒤에도 이런 힘들었던 시절이있었네요...서민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줄 의원님이꼭..꼭 되세요...
가슴 속에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제는 밝게 웃으면서 살도록 하자. 그래야 아버님도 좋아 하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