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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입니다.
교회 절기중 가장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이지요.
이 절기에 꼭 들어 보아야 할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총 연주시간이 3시간이 넘는 대곡인데요.
우선 제1부를 올립니다.
지휘자는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중의 한 사람인 독일의 칼 리히터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생애와 음악유산 진 영 철
J. S.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음악의 성서로 여기고 있었던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라고 올바른 평가를 하고 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2)의 서거 25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의 모든 크고 작은 도시의 연주회장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성당에서도 바흐의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뮌헨(München)의 중심가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바흐일가의 작품들이 거의 입장료 없이 음악애호가들에게 상연되었고 다른 교회들에서도 바흐의 파이프 오르겐(Orgl) 작품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3명의 거장들, 즉 바흐와 헨델(G. F. Händenl) 및 스카를라티(P. A. G. Scarlatti)는 기묘하게도 모두 1685년에 태어났고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고 교회와 연주를 위해 작품을 쓰고 연주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고, 헨델은 영국에 귀화해서 활동하였고, 스카를라티는 이태리에서 많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바흐에 의해서 탄생한 귀중한 음악유산은 200곡이 넘는 칸타타를 포함하여 1000여 곡에 이르고 그 중에서도 <평균율 클라비어곡집>(Wohltemperiertes Klavier),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ische Konzerte BWV. 1046-1051), 4개의 <관현악 모음곡>, <토카타와 푸가>(Toccata und Fuge BWV. 565), <무반주 첼로소나타 제1번>(BWV. 1007), <G 선상의 아리아>,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BWV. 1014-1019), <이탈리아 협주곡>(BWV. 971), <프랑스 모음곡>(Franche Suiten BWV. 812-817), <영국모음곡>(Englische Suiten BWV. 806-811),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2), <b단조 미사곡>(BWV. 232), <요한수난곡>(Johannes-Passion BWV. 245), <마태수난곡>(Matthaus-Passion BWV. 244)은 항상 우리가 방송이나 영화 속에서 다가갈 수 있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특히 바흐가 라이프치히(Leipzig)의 토마스 교회에서 1727년에 발표한 <마태수난곡>은 서거 100주년을 맞는 철학자 니체(F. Nietsche)도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였음에도 한 주일에 3번이나 들었다는 작품으로 만년의 <음악의 헌정>(Das Musikalische Opfer. BWV. 1079) 및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과 함께 바흐가 인류에게 남긴 값진 유산이다.
바흐의 생애와 그가 남긴 작품들을 성악곡(칸타타)와 독주곡 및 실내악곡으로 나누어 먼저 살펴 본 뒤에 바흐에 대한 시인들의 찬사들을 약술하려고 한다.
바흐의 생애와 예술작품
막스 레거(Max Reger)는 바흐의 음악을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 이라고 극찬했고 심지어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마저 <마태수난곡>에 도취되어 “더 이상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감동적인 작품은 없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바흐의 최초 전기작가인 포르켈(Johann Nicklaus Forkel 1749-1818)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은 다른 민족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귀중한 국가 유산이다” 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속의 영웅들의 반유태주의를 위해 토마스 교회의 성가대장인 바흐를 이념적으로 오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 속의 유태민족>(Das Judentum in der Musik)에서 바흐의 유태계 재발견자인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을 다른 모든 유태인처럼 표현능력이 없기 때문에 바로크의 거장을 모방할 뿐이라고 혹평한다. 아도르노(Theoder W. Adorno)는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마치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다”라고 바흐를 무척 옹호한다. 바흐의 유산이 쇤베르크(Arnold Schounberg)와 베버른 (Anton Webern)의 12음계법의 기초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 바흐의 생애
어린 요한 세바스찬에게는 미래의 직업을 선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흐의 일가친척은 원래 독일중부에 위치한 튀링겐지방에 거주하는 연주자들로 마을의 결혼식이 있을 때나 영주의 궁정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교회의 오르겐을 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들이다.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6째 아들로 태어난 요한 세바스찬은 라틴어학교(Lateinschule=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1년에 한 번 모든 친척들이 모여 잔치를 할 때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가 9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잇달아 잃게 되어 오르트루프(Ohrdruf)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에게 위탁된다. 큰 형은 장차 교회 오르겐 주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오르겐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어린 동생에게 가르친다. 부모를 잃은 슬픔이 어린 바흐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는 기록된 것이 없으나 죽음에 대한 계속되는 불안이 그의 내면생활 한 복판에 틀림없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바흐는 두 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무려 20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10명은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바흐가 1707년 22살 때 결혼한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바바라(Maria Barbara)는 6촌 누이동생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3명만 성장했을 뿐이다. 바흐가 영주 칼스바트(Karlsbad)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35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으며 약 1년 반이 지난 뒤 1722년 12월에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와 재혼해서 13명의 아이들을 갖게 되고 그 중 7명만 성장한다.
바흐는 뮐하우젠(Mulhausen)과 할레(Halle) 등지에서 오르겐 주자로 일하다가 1714년에 바이마르(Weimar) 궁정악장으로 임명된다. 그 후 그는 1717년에 쾨텐(Kouthen)의 영주 레오폴트(Leopold)의 초청으로 궁정작곡가로서 일했고 마침내 1723년부터 1750년에 죽을 때까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성가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창작에 전념한다. 유명한 토마스 교회의 소년합창단을 이끌면서 거의 매주 예배용 칸타타를 한 곡씩 작곡해야만 했다.
이처럼 바흐는 바로 신의 실체를 증명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평생을 음악에 바쳤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2) 성악곡 (칸타타)
오늘날 독일인의 음악생활은 바흐의 칸타타 없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독일의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에서 주말에 열리는 교회연주의 레파토리는 바흐의 칸타타가 항상 중심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연주회가 수없이 열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서민들이 연주장을 가득 메우는 한 독일은 참된 음악문화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바흐가 활약하던 18세기 전반에도 이 같은 상황이었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바흐의 칸타타는 오늘날처럼 연주용으로 쓰이기보다는 매주 일요일이나 축일 예배의 일부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고 몇 시간이 걸리는 당시의 예배를 장식하는 바흐의 칸타타는 작은 파리(klein Paris)로 자처하던 라이프찌히의 시민에게는 두터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군주인 작센(Sachsen) 선 제후 등의 탄생일이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당시 라이프찌히에서 유행하던 카페하우스에서는 바흐가 직접 지휘하는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 협주곡뿐만 아니라 칸타타도 연주한다.
이 같은 칸타타를 <교회 칸타타>와 구별하기 위해 <세속 칸타타>라고 부르고 있다.
바흐의 생애 중 칸타타가 점유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바흐의 사후에 나온 밋츨러(L. Ch. Mitzler, 1711-1778)의 추도기에 의하면 바흐는 약 300곡의 칸타타를 작곡했다고 한다. 바흐는 뮐하우젠시대(1707-1708)로부터 바이마르시대(1708-1717), 쾨텐시대(1717-1723)를 지나 라이프치히시대(1723-1750)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칸타타를 발전시켰기에 바흐 예술의 진수는 바로 칸타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흐가 남긴 <b단조 미사> BWV. 232는 1749년경에 완성되었고 다른 4개의 소규모 미사곡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걸작으로 바흐음악의 모든 요소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결합시킨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바흐가 30년에 걸쳐 사용한 여러 음악양식의 백과전서라고 마샬(Robert L. Marshall)은 평가하고 있다.
바흐는 5곡의 수난곡을 남겼다고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요한수난곡>과 <마태수난곡>뿐이다.
바흐의 교회음악을 대표하는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마태수난곡>BWV. 244은 바흐가 죽은 뒤에 1829년 3월에 베를린의 징아카데미가 젊은 멘델스존의 지휘아래 연주해서 바흐 음악의 부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2개의 부분으로 구분된 것은 바흐 시대에는 2개의 부분 사이에 설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1부는 29곡으로 구성되어있고 제2부는 39곡으로 되어있어 전부 68곡의 엄청난 구성이다.
3) 독주곡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푸가 예술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뷜로(Hans von Bulow, 1830-1894)가 이 작품을 구약성서에, 그리고 베토벤의 소나타를 신약성서에 비유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바흐가 괴텐에서 영주 레오폴트의 궁정악장으로 있던 시기(1717-1723)에 바흐의 실내악 및 클라비어곡이 거의 모두 작곡되었다. 15명의 단원을 이끌었던 악장이 이렇게 풍부한 클라비어음악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전부 24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든 곡이 다시 프렐류드와 푸가의 2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은 클라비어를 위한 6곡으로 되어 있다. 바흐가 라이프찌히로 옮기려는 시기에 그리고 또 새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는 의도로 이 곡을 썼으며 클라비어를 활용하는 세련미가 보인다. 프랑스라는 명칭은 아마 가볍고 우아한 느낌이 전체를 지배하고 프랑스적인 감각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바흐는 실제 프랑스를 가 본 일도 없고 독일의 국경을 넘어 간 일도 없다. <영국 모음곡>은 1722년 이전에 작곡된 것으로 18C말엽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그 유래는 명백하지 않다. 바흐가 안나 막달리나를 후처로 맞이했고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그녀는 어머니(Maria Barbara)를 잃은 아이들을 잘 돌보는 착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남편의 창작활동을 도울 수 있는 음악적 재능도 갖고 있었다. 바흐가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선사한 2권의 소곡집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이다.
끝으로 바흐가 1735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2부에 넣어 발표한 <이탈리아 협주곡> BWV. 971은 이탈리아 취향의 협주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음악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음악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에서 비발디가 완성한 협주곡의 양식을 도입하여 협주곡을 쓰거나 편곡한 것이 이 곡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4) 실내악곡
바흐는 일찍부터 음악이 넘치는 베를린에 마음이 끌려 그곳을 방문하려고 노력하던 중 음악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음악에 열심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대왕의 플루트 반주자로써 대왕의 신임을 받은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도 만날 겸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에 도착해서 바로 궁정으로 안내된다.
그는 대왕 자신이 준 테마를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해서 대왕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베를린의 신축가극장의 음향효과를 시험한 뒤에 라이프찌히로 돌아왔고 대왕이 준 테마로 카논 5곡, 3성의 리체르카레를 작곡하여 대왕에게 바쳤다. 바로 이 창작물이 <음악의 헌정>BWV. 1079로 왕의 테마를 6성의 푸가로 만들고 또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등을 작곡하여 이 작품 속에 넣었던 것이다.
<푸가의 기법>BWV. 1080은 바흐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테마를 위해 <음악의 헌정>을 작곡한 뒤 하나의 테마를 여러 가지로 변형시키는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다. 1747년에 착수된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고 아들 프리데만이 마무리해서 출판했으나 실패했다.
인간이 창조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한 기교로 만들어진 푸가집이 이와 같이 당시에 비참한 상황에 빠진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에 맡길 수 밖에 없다.
5) 바흐와 시인들
독일의 어느 시인보다도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 속에 살면서 자신의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바로크음악,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음악작품들을 묘사하고 있는 작가는 아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토마스 만(Thomas Mann)과 함께 언제라도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헤세는 1959년 아들 브루노(Bruno)와의 대화에서 두 개의 미사곡과 <푸가의 기법>은 모든 시대를 망라해서 서양음악이 만들어 낸 최고의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헤세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BWV. 565를 듣고 자기의 감정을 다음처럼 시속에 담고 있다.
<Zu einer Toccata von Bach>9)
Urschweigen starrt... Es waltet Finsternis.. Da bricht ein Strahl aus zackigem Wolkenriss,
Greift Weltentiefen aus dem blinder Nichtsein Baut Räume auf, durchwühlt mit Licht die Nacht...
<바흐의 토카타에 붙여>
태고의 침묵이 응시하고... 온통 주위가 캄캄한데... 구름 사이로 뚫고 나오는 한줄기 빛
눈 먼 미물을 심연에서 구해 주고 공간을 만들어 주며 빛으로 밤을 몰아낸다.
헤세가 바흐의 <토카타>에 붙인 이 시는 음악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악이 우리에게 생각게 하는 어떤 모습, 즉 빛의 창조에 관한 모습이다. 그것은 혼돈을 비추는 빛이며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빛이다.
밝음과 어두움, 육체, 앞과 뒤, 이런 것은 바흐의 음악이 이미 완벽하게 우주적 모습을 하고 있는 동안 다이나믹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괴테는 바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에 곧 잊혀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직접 바이마르근교의 베르카(Berka)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슈츠(J. H. F. Schutz)와 자신의 비서 첼터(K. F. Zelter) 그리고 멘델스존으로 하여금 바흐음악을 연주토록 해서 바흐의 르네상스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J. S. 바흐로부터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 매일 슈츠로 하여금 그들의 작품을 연주시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다른 합창곡집을 구입해서 슈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도 했다.
<평균율곡집>에 붙인 괴테의 헌시에서 바흐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읽을 수 있다.
Lass mich hören, lass mich fühlen Was der Klang zum Herzen spricht;
In des Lebens nun so kühlen Tagen spende Wärme, Licht.12)
듣게 해 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괴테의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829년 3월에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거의 백 년 만에 멘델스존의 지휘로 다시 공연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흐의 르네상스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J. S. Bach는 당시의 교육 제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즉 연주 기교와 함께 이론까지도 섭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천재소년은 운명을 개척하고 친척에게 보내졌다. 요한 세바스찬은 모범생으로 월반도 하고 학교 밖에서도 교양을 쌓아 나갔다. 그는 오르겐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당시 최대 악기인 오르겐의 개조에 전문가처럼 몰두했다.
그는 영주에게 추가 청구서를 제출하고 통행세에 대한 불평을 쓰는 것이 그의 편지 내용이다. 그는 이태리 여행도 하지 못했으며 괴테처럼 제젠하임의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도 해보지 못하고 오직 비둘기 집에 사는 자녀들의 양육에 매달리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독일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남긴 거장인 것이다.
바흐의 왕국, 즉 그의 작품들은 질병, 죄악 그리고 죽음에 인간이 마주칠 때 위안이 되기 시작한다. 냉냉하고 약삭빠른 설교자나 고집쟁이들은 한 해가 시작되고 끝나도 <마태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에 심취하는 일이 없다.
바흐의 음악 속에는 신의 실체를 증명하고 전달해 주며 참된 부성과 모성에의 동경을 일깨워 주는 지고의 힘이 담겨있다.
☞ 출처 : < http://deutsch.donga.ac.kr >
마태 수난곡 (Matteus Passion)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20세의 청년 멘델스존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을 무대에 올렸다. 바흐의 서거 이후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은 채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해묵은 악보가 다시금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거장의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자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은 모두 뜨거운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 헤겔은 이 음악회를 보고 나서 이렇게 기록했다. “바흐는 위대하고 진실한 신교도였으며, 강인하고 박식한 천재였다.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의 음악을 완전한 형태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크 음악 모든 종류의 형식을 총망라한 대작
전곡 연주 시간만도 3시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대작이니만큼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거의 2년 동안 리허설에 매달려야 했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결코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은 아니다. 이 하나의 작품 속에 르네상스 마드리갈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다성 합창이 있는가 하면 교회 예배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순하고 화성적인 코랄이 있고, 화려한 오페라 아리아 못지 않은 서정적인 아리아들이 있는가 하면 섬세한 레치타티보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음악학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가리켜 “바로크 종교 성악곡과 세속 성악곡을 통틀어 모든 종류의 음악 형식을 다룬 만화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만화경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음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난곡’이라는 독특한 음악 장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래 수난곡(Passion)이란 교회의 수난 주간 동안 연주되는 음악인데,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묘사한 극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난곡의 종류는 많지만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작곡되었던 18세기 전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수난곡이 있었다. 그것은 수난 오라토리오와 오라토리오 양식의 수난곡으로서, 어떤 텍스트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별된다. 전자는 자유롭게 시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지만, 후자는 네 개의 복음서 구절에 기초한 텍스트를 사용한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마태복음 26, 27장을 기초로 작곡된 수난곡이므로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전곡이 완전히 복음서의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피칸더’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헨리키의 시적인 텍스트도 사용되었다.
바흐는 이 방대한 [마태 수난곡]의 텍스트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제1부를 예수 수난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해 예수의 체포로 끝맺는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예수를 팔아 넘기려는 배반자 유다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와 그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스러운 기도는 모두 1부에 속한다. 서정적인 음악으로 표현된 제1부는 마치 제2부에서 펼쳐질 폭풍의 전야와도 같이 고요하고 엄숙하다.
반면에 제2부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2부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된 예수를 염려하며 찾아 헤매는 시온의 딸들의 슬픈 합창이 들려온다. 곧 재판이 시작되고 예수를 증오하는 유태인 군중 합창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공포를 몰고 온다. 한편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슬픔은 가슴을 저미는 듯한 바이올린의 흐느낌이 되어 인간의 나약함을 일깨워준다. 배반자 유다의 비극적인 최후, 그리고 빌라도 앞에 선 예수의 평화로운 침묵과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고통스러운 골고다 언덕과 십자가. 그 모든 것은 그대로 생생한 인간 드라마가 되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복음사가의 풍부한 레치타티보, 웅장한 합창의 충격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곡을 통해 가장 활약이 돋보이는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바로 장엄한 합창과 아리아들 사이사이에 나타나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노래하는 ‘복음사가’이다. 그는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를 통해, 때로는 초연하게 때로는 극적으로 복음서 내용을 읊조린다. 레치타티보는 대부분 복음사가가 노래하지만 때때로 예수와 베드로, 유다 등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각기 자신의 대사를 노래하는데, 바흐는 특히 예수가 등장하는 부분에 현악기의 반주를 곁들여 좀더 풍부하고 장엄하게 처리했다.
실제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레치타티보이지만, [마태 수난곡]의 백미는 역시 웅장한 합창이다. 제1부의 첫 도입 합창으로부터 제2부의 마지막 합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합창들이 계속되면서 예수 수난의 이야기에 깊이를 더해준다. 바흐는 각 장면에 따라 다양한 양식의 합창을 선보이는데 그 효과는 매우 놀랍다. 예를 들어 제54곡은 사형 판결을 받는 예수의 이야기가 레치타티보와 합창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합창은 매우 강력한 푸가로 제시되고, 제59곡에서 이 푸가는 다시 한 음 높아진 B음에서 시작되어 점점 거칠어지는 군중의 분노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준다.
또한 제33곡에서는 이중창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합창이 짧게 응답하는 독특한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 곡에서 소프라노와 알토가 ‘마침내 나의 예수는 붙잡혔다’는 내용의 이중창을 부르는 동안 합창단이 ‘그를 풀어 주라! 그만 둬라! 묶지 마라!’는 내용의 짧은 악구들을 노래하며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후반부에서는 두 개의 합창단이 모방 악구가 포함된 대위법적인 다성 합창을 부르며 안타깝고 복잡한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두 개의 합창단을 배치하여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는 이중 합창 기법은 초기 바로크 시대에 주로 유행했던 것이었지만 바흐는 이를 [마태 수난곡]에서 적절하게 활용하여 큰 효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깊은 감정을 전하는 코랄, 유려하게 흐르는 아리아
[마태 수난곡]에는 이러한 다성적인 양식의 합창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교회 성가와 같이 부드럽고 화성적인 코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복잡한 다성 합창과 단순한 레치타티보를 유연하게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코랄은 예수의 수난 사건을 지켜보는 신도들의 느낌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제21곡의 경우 음악이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 반복되어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숨을 거두시는 예수를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 이 코랄의 화음은 반음계적으로 변형되어 깊은 슬픔 속에 빠진 신도들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하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주는 또 하나의 기쁨은 유려하고 표정이 풍부한 다양한 아리아들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슬픔이 가득 배어 나오는 제48곡 알토를 위한 아리아는 인상적인 바이올린 독주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명곡이다. 또한 플루트의 활약이 돋보이는 제58곡은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프라노 아리아로 꼽힌다. 이러한 아리아들 역시 화성적인 코랄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합창과 조용한 레치타티보 사이에 끼어들어 달콤한 선율미를 통해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추천음반
[마태 수난곡]의 대표적인 명반으로는 칼 리히터가 지휘하는 뮌헨 바흐오케스트라의 고전적인 음반(Archiv)을 꼽을 수 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를 비롯한 성악진이 대단히 뛰어난 연주다. 헬무트 릴링 / 바흐 콜레지움 슈투트가르트 (Hanssler) 또한 잘 다듬어진 연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밖에 가디너가 지휘하는 몬테베르디 콰이어의 음반(DG)은 선명한 사운드가 인상적이며 필립 헤레베헤가 지휘하는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harmonia mundi)의 음반도 대단히 감동적이다. 이 밖에 오토 클렘페러, 아르농쿠르, 마사키 스즈키, 쿠이겐, 톤 쿠프만의 연주도 명연으로 손꼽히고 있다.
음악용어 해설
마드리갈(madrigal)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세속음악의 장르로 본래는 2성부의 성악곡이었으나 나중에는 성부가 더 늘어났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유행한 마드리갈은 문학적 수준이 높은 가사와 음악이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들이 많다.
코랄(choral)
본래 루터교의 찬송가를 가리키는 용어이나 찬송가 풍의 화성적인 음악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레치타티보(recitativo)
오페라와 같은 극적인 음악작품에서 낭독하듯 노래하는 방식을 뜻한다.
챔발로(Cembalo) = 클라비코드 = 클라비어 = 하프시코드 : 피아노의 전신인 고악기
BWV : 바흐의 작품 번호
마태수난곡(BWV244)에서 5번이나 울려 나오는 멜로디.
합창. [O Haupt voll Blut und Wunden]
찬송가 145장의 원전이라 할 수 있지요.
1.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지셨네
1. 주 당하신 그 고난 죄인을 위함이라
내 지은 죄로 인해 주 형벌 받았네
내 주여 비옵나니 이 약한 죄인을
은혜와 사랑으로 늘 지켜주소서
2.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것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