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위 경제발전
콘스탄티노플은 중요한 원료 시장이기도 했는데, 제국의 안팎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금속, 상아, 보석 및 기타 원료들은 모두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구입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요리의 필수품이었던 향신료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와 중국의 생강, 몰루카 제도의 정향, 말라바르의 후추, 실리시아의 사프란 풀, 키프로스의 설탕뿐 아니라 꿀, 견과, 건포도 등의 수출되는 특산품들 그리고 쪽빛 염료인 인디고, 붉은 빛의 연지벌레, 사프란 풀, 브라질 나무, 명반 같은 염료 고착 재료나 착색 재료도 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당시 의로계에서 사용되던 약재도 중요했다. 대체로 정화제 용도인 갈링게일, 계피, 알로에, 센나 잎차, 쓴 쑥, 대황 등이 있었다. 중세 상인들은 양념, 염료, 약재 그리고 심지어 원면과 흑설탕까지 모든 것을 향신료로 총괄해서 취급했다.
많은 배들이 항구를 가득 채우고, 아케이드와 시장이 여러 인종으로 뒤섞인 것은 바로 도시가 거대하고 복잡한 시장의 기능을 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랍비 투델라의 베냐민은 1161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수많은 상인들로 소란스럽고 부산하다. 이들은 무역을 하러 육지와 바다를 통해 전 세계에서 왔으며 그중에는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상인들, 러시아와 헝가리에서 온 상인들 그리고 서유럽에서 온 상인들도 있었다.”
무역은 서유럽 암흑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10세기에는 부활하고 있었다. 로마는 제국의 그림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종교 중심지로서 가톨릭의 미사를 위한 도구와 교회의 물품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게르만의 왕족들의 궁전과 그들이 세운 수도원, 성당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생산품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이들이 물품을 얻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서유럽 도처의 성당과 박물관에서 발견된 훌륭한 비잔틴 공예품들과 부식된 채 남아 있는 빼어난 비잔틴직물의 잔재들이 증명하고 있다. 서유럽은 이러한 상품과 일상품을 얻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어떻게 동방의 시장에 잘 접근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에 대해 어떻게 대가를 잘 지불할 수 있는가 였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외부인의 접근은 주의 깊게 통제되었고, 관세는 높았다. 허가를 받았다고 해도 무역업자들은 제한규정에 묶여 있었으며, 오직 단기간 방문만 가능했다. 10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나폴리, 아말피, 가에타, 라벤나, 살레르노,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중 도시는 북쪽의 침입자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고,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이 경우 콘스탄티노플은 그 도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마침내는 특권을 몰수했다. 섬으로 고립된 베네치아만이 비잔틴 제국의 충성스런 신하로서 계속해서 북쪽의 침입자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교섭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서유럽의 통치자들에게는 동방의 상품을 제공했고, 콘스탄티노플에게는 충성과 지지를 내보인 것이다. 11세기 말에 베네치아는 비잔틴 제국의 거의 전 영역에서 비관세 무역의 특권과 콘스탄티노플 성벽 내에 자신들만의 영속적 구역 내지 집단 거주 구역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12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에는 1만 명 가량이나 되는 베네치아 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베네치아 자체의 인구는 대략 10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5세기에 내륙에서 온 피난민들의 정착지로 시작했고, 바다와 접한 소택지에서 얻은 소금 무역으로 약간의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위치 및 해로와 육로로의 접근성에 있어서 동방의 상품을 서유럽으로 전달하기에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은 대가로 제공할 만한 중요한 제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이 원할 만한 원료도 거의 없었다. 서유럽은 약간의 철과 목재,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금 조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세된 남자와 노예를 가지고 무역에 나섰다. 노예는 대부분 중부 유럽에서 잡혀온 슬라브인이었고 여기서 ‘노예’란 말이 유래되었다. 리우트 프란트 주교가 동로마 황제에게 바친 선물에는 거세된 네 명의 젊은 사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노예 무역으로 특화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 사업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서방에서 동방으로 쉽게 팔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북서 유럽의 비가 많이 오는 지역,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동방의 어느 지방보다 훨씬 좋은 질의 양모를 생산했다. 12세기경에 이 양모는 주로 플랑드르에서 직조되어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앞으로 몇 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무역과 도시생활을 발생시키게 될, 비록 유일하지는 않지만 가장 주요한 요소가 확립되었다. 비단과 향신료가 동방에서 서유럽으로, 모직물이 서유럽에서 동방으로 전해짐에 따라 서유럽의 직물 산업은 성장하고 번창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