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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는(1503-13) 미켈란젤로를 불러서 자신의 영묘를 꾸미는 일을 맡기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길이가 10m, 폭이 7m, 높이가 16m인 설계도를 그려서 바쳤다. 방의 가운데에 교황의 석관을 놓고, 주변은 40개의 석상과 청동부조 그리고 회화로 장식을 할 예정이었다. 미켈란젤로도 대리석을 구하고, 일할 장인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1505년에 로마에 간 미켈란젤로에게 영묘 사업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교황이 영묘 사업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 영묘를 만들기로 한 장소에 성당을 짓고, 영묘에 소요될 예산을 성당 건축에 사용하려 했다. 실망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가버렸다.(이 과정에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계획 외에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작업이었다. 이곳은 교황의 선거 장소이고, 교황이 추기경을 접견하는 장소이다. 시스투수 6세(1471-1484)의 이름을 따서 성당 이름을 지었다. 많은 화가들이 성당의 장식을 담당하였지만 천정은 비워두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천정화를 맡기려 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회화보다 더 우수한 예술이라고 믿었다. 회화를 소홀히 했으므로 회화 작업은 별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집요하게 맡기려 하였으므로, 미케란젤로는 자신의 라이벌들이 자신을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조각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없는 회화를 맡기로록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 들였다.
1508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투나 성당의 천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천 평방미터의 넓이에 300여 명의 인물을 그려 넣는 작업이었다. 비계(-건축 공사 중에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무나 쇠 파이프로 가로 세로로 얽어서 만든 시설) 위에 몇 년 간을 누워서 그렸다는 전설은 거짓말이다. 조수를 여러 명을 쓴 것은 사실이나 섬세한 부분은 자신이 일일이 붓질을 하여 그렸다. 완성된 천정화는 미켈란젤로의 손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시스티나 천정화는 세계 미술사에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이 그림에 그려진 남자의 근육질 인체는 미켈란젤로 회화의 양식이 되었다)
제대 위에서 시작해서 출입구 쪽으로 옮겨 가면서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방주에 이르기의 전치창조 과정을 아홉 장면으로 나누어서 완성했다.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은 돋보였다. 하느님은 근육질의 그리스 영웅과 같은 모습을 한다. 우주에 생명을 주는 존재인 하느님을 고대 조각으로 부활시켜 표현했다. 빛과 어둠을 가르고, 하느님은 손끝에 창조의 불꽃으로 아담을 창조한다. 다음은 이브를 창조한다. 낙원에서 추방으로부터 대홍수까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천정 아래의 벽면에는 페루지노가 그린 모세에서 예수까지의 삶이 있다. 천정과 이 벽면의 사이에 있는 구약의 유디트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를 미켈란젤로가 그렸다. 이와 같은 전체적인 구도는 미켈란젤로 혼자서 한 것이 아니고 카톨릭 교단의 계획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6세기 말엽에 카톨릭 교회가 종교 재판을 시작할 즈음에 이 그림의 누드를 수정하거나 아예 지워버리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 그림이 너무나 탁월하여 없애버리기는 아깝다는 중론으로 살아남았다. 수 백 년 동안 교회에 밝혀 둔 촛불의 그을음으로 천정 그림은 우중충하게 보였다. 최근에 와서 그을음을 씻어내고, 퇴색한 부분을 보수하고, 수리한 후에서야 이 그림이 얼마나 화려하고, 빛니며, 위대한 그림이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색에 대한 지식이 아주 많았음도 새롭게 알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작업을 4년이나 했다. 1512년에 작업이 끝나지 로마 시민들은 그림을 구경하려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1512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 교황에 올라서 레오 10세가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시스 2세의 영묘 작업에 끈기 있게 매달렸으나 영묘는 처음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묘를 완성하는데 40년이 걸렸고, 40점의 조각상은 겨우 5개로 끝났다. 율리우스의 후손들로부터 끝없는 소송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율리시스 영묘의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명작들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