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슬퍼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중에서 가장 강한 뜻을 가진 것이 ''오뒤르모스'' (odyrmo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슬픔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애통하다'', ''절통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통하고 절통한 일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영이 가난한 사람''과 앨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결국 이 슬픔을, 이 울음을, 이 눈물을 달래줄 분은 오로지 하느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내려다 볼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슬픔을, 그들의 울음을, 그들의 눈물을 절대로 그냥 지나쳐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를 만날 것입니다.
애통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애통하고 절통한 슬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슬픔은 회개하는 슬픔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서는 가장 강력한 수식어들을 동원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 13).
야고보서에는 이런 표현도 나옵니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순결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야고 4, 8 - 9).
그런데 우리는 성서를 읽다가 가끔 곤혹스러운 구절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야고보서의 표현과 반대되는 듯한 권고가 또 신약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1데살 5, 16).
그러나 사실 문맥으로 들어가서 문장 안에서 읽어보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 됩니다. 사도 바울로는 어떤 궂은일에도, 어떤 탄압에도, 어떤 어려움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는 지금 우리가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해서, 일들을 적당히 무마하면서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살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와 허물로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를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보고 그것을 본 만큼 슬퍼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
첫댓글 웃음 뒤편에 감춰져 있는 슬픔!!!!!!!
울고 싶어도 마음놓고 울지 못하는 우리들의 현실!!!!!
우는 방법을 배워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