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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사기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秦始皇帝者, 秦莊襄王子也.1) 莊襄王爲秦質子於趙,2) 見呂不韋姬, 悅而取之,3) 生始皇. 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生於邯鄲. 及生, 名爲政, 姓趙氏.4) 年十三歲, 莊襄王死, 政代立爲秦王. 當是之時, 秦地已幷巴、蜀、漢中, 越宛有郢, 置南郡矣;北收上郡以東, 有河東、太原、上黨郡;東至滎陽, 滅二周, 置三川郡. 呂不韋爲相, 封十萬戶, 號曰文信侯. 招致賓客游士, 欲以幷天下. 李斯爲舍人.5) 蒙驁、王齮、6) 麃公等爲將軍.7) 王年少, 初卽位, 委國事大臣.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진(秦)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진(秦)나라의 질자(質子)로서 조(趙)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보고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 시황(始皇)을 낳았다. 시황은 진 소왕(秦昭王) 48년 정월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하자 이름을 정(政), 성을 조(趙)라 했다. 13세 때 장양왕이 죽자 정이 왕위를 계승해 진왕(秦王)이 되었다.
이때 진의 영토는 이미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병합하고 완(宛)을 넘어 영(郢)을 점유해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북으로는 상군(上郡) 동쪽을 거두어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의 군을 점령했으며, 동으로는 형양(滎陽)에까지 이르러 이주(二周)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재상이었는데 10만 호를 봉토로 받았고, 호를 문신후(文信侯)라고 했으며, 널리 빈객, 유사(游士)들을 초빙해 천하를 병합하려고 했다. 이사(李斯)가 여불위의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몽오(蒙驁), 왕의(王齮),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되었다. 진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막 즉위한 터라 국사를 대신들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
晉陽反, 元年, 將軍蒙驁擊定之. 二年, 麃公將卒攻卷,8) 斬首三萬. 三年, 蒙驁攻韓, 取十三城. 王齮死. 十月, 將軍蒙驁攻魏氏暢、有詭.9) 歲大饑. 四年, 拔暢、有詭. 三月, 軍罷. 秦質子歸自趙, 趙太子出歸國. 十月庚寅, 蝗蟲從東方來, 蔽天. 天下疫. 百姓內粟千石, 拜爵一級. 五年, 將軍驁攻魏, 定酸棗、10) 燕、虛、長平、11)雍丘、山陽城,12) 皆拔之, 取二十城. 初置東郡. 冬雷. 六年, 韓、魏、趙、衛、楚共擊秦, 取壽陵.13) 秦出兵, 五國兵罷. 拔衛, 迫東郡, 其君角率其支屬徙居野王, 阻其山以保魏之河內. 七年, 彗星先出東方, 見北方, 五月見西方.14) 將軍驁死. 以攻龍、孤、慶都,15) 還兵攻汲. 彗星復見西方16)十六日. 夏太后死.17) 八年, 王弟長安君成蟜18)將軍擊趙, 反,19) 死屯留,20) 軍吏皆斬死, 遷其民於臨洮.21) 將軍壁死,22) 卒屯留、蒲鶴反, 戮其屍.23) 河魚大上,24) 輕車重25)馬東就食.26)
진양(晉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시황 원년, 장군 몽오가 공격해 반란을 평정했다. 2년에는 표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권(卷)을 공격해 3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3년에는 몽오가 한(韓)나라를 공격해 13성을 점령했다. 그해에 왕의가 죽었다. 10월에는 장군 몽오가 위(魏)나라의 창(暢), 유궤(有詭)를 공격했다. 그해에 큰 기근이 있었다.
4년에는 창, 유궤를 함락시켰다. 3월에 군대를 거두었다. 진(秦)나라의 질자가 조(趙)나라에서 돌아왔고, 조나라의 태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일(庚寅日)에 메뚜기 떼가 동쪽에서 날아와 하늘을 뒤덮었다.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다. 식량 천 섬을 헌납한 백성에게는 작위(爵位) 한 등급을 하사했다.
5년에는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해 산조(酸棗), 연(燕), 허(虛), 장평(長平), 옹구(雍丘), 산양성(山陽城)을 평정해 모두 함락시키고 20성을 빼앗았다.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6년에는 한(韓), 위(魏), 조(趙), 위(衛), 초(楚) 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수릉(壽陵)을 점령했다. 진(秦)이 출병하자 다섯 나라가 군사를 거두었다. 진나라가 위(衛)나라를 점령하고 동군까지 쳐들어가자, 그 임금 각(角)이 일족을 이끌고 거주지를 야왕(野王)으로 옮겨 험한 산세에 의지해 위(衛)의 하내(河內)를 보유했다.
7년에는 혜성이 먼저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 출현했으며, 5월에는 서쪽에 나타났다.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던 장군 몽오가 죽자, 군사를 돌려 급(汲)을 공격했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16일 동안 출현했다. 하태후(夏太后)가 서거했다.
8년에는 진왕의 아우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군대를 이끌고 조(趙)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반란을 일으켜 둔류(屯留)에서 죽임을 당했고, 군관들도 모두 참살되었다. 둔류의 백성들을 임조(臨洮)로 옮겨 살게 했다. 성교 장군이 군영에서 죽자, 둔류와 포고에서 반란에 참여했던 군졸들이 모두 육시(戮屍)를 당했다. 황하가 범람해 물고기들이 육지로 밀려나오니, 사람들은 가벼운 수레와 말들을 몰고 먹을 것을 찾아 동쪽으로 갔다.
嫪毐27)封爲長信侯. 予之山陽地,28) 令毐居之. 宮室車馬衣服苑囿馳獵恣毐. 事無小大皆決於毐. 又以河西29)太原郡更爲毐國. 九年, 彗星見, 或竟天. 攻魏垣、蒲陽.30) 四月, 上宿雍.31) 己酉, 王冠, 帶劍.32) 長信侯毐作亂而覺, 矯王御璽33)及太后璽以發縣卒34)及衛卒、官騎、戎翟君公、舍人, 將欲攻蘄年宮爲亂.35) 王知之, 令相國昌平君、昌文君發卒攻毐.36) 戰咸陽,37) 斬首數百, 皆拜爵, 及宦者皆在戰中, 亦拜爵一級. 毐等敗走. 卽令國中:有生得毐, 賜錢百萬;殺之, 五十萬. 盡得毐等. 衛尉竭、38) 內史肆、佐弋竭、39) 中大夫令齊等40)二十人皆梟首.41) 車裂以徇, 滅其宗.42) 及其舍人, 輕者爲鬼薪.43) 及奪爵遷蜀四千餘家, 家房陵.44) (四)[是]月寒凍, 有死者.45) 楊端和攻衍氏.46) 彗星見西方, 又見北方, 從斗以南八十日. 十年,47) 相國呂不韋坐嫪毐免. 桓齮爲將軍. 齊、趙來置酒. 齊人茅焦說秦王曰:「秦方以天下爲事, 而大王有遷母太后之名, 恐諸侯聞之, 由此倍秦也.」秦王乃迎太后於雍而入咸陽,48) 復居甘泉宮.49)
노애(嫪毐)가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졌다. 노애에게 산양(山陽) 땅을 주어 그곳에 살게 하고, 궁실, 거마, 의복, 원유(苑囿), 치렵(馳獵) 등을 노애가 마음대로 하게 하니, 크고 작은 일이 모두 노애에 의해 결정되었다. 또 하서(河西)의 태원군(太原郡)을 노애의 봉국(封國)으로 변경했다.
9년에 혜성이 나타나서 간혹 하늘을 가로질렀다. 위(魏)나라의 원(垣)과 포양(蒲陽)을 공격했다. 4월에 진왕이 옹(雍)에 유숙했다. 기유일(己酉日), 진왕은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검을 찼다.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위조해 도성의 군사 및 호위군사, 관아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가신(家臣)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진왕이 그 사실을 알고 상국(相國)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노애를 공격하게 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진왕은 그들에게 모두 작위를 하사하고, 참전한 환관 모두에게 작위 한 등급을 하사했다.
노애 등이 패해 달아나자 즉시 전국에 영(令)을 내려 노애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1백만 냥을 하사하고,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하사한다고 했다. 결국 노애 등이 모두 잡혔다. 위위(衛尉) 갈(竭), 내사(內史) 사(肆), 좌익(佐弋) 갈(竭), 중대부령(中大夫令) 제(齊) 등 20여 명은 모두 머리가 잘려 높은 곳에 매달렸고, 사지는 수레에 찢겨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이게 되었으며, 그들의 일족은 다 주살되었다. 가신 및 죄가 가벼운 자는 귀신(鬼薪)의 형벌을 받았으며, 작위를 삭탈당하고 촉(蜀)으로 쫓겨 간 것이 4천여 가구가 되는데 모두 방릉(房陵)에 옮겨 살게 했다. 그 달에 한파가 심해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양단화(楊端和)가 연지(衍氏)를 공격했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났는데 북두성(北斗星)에서 남쪽으로 80일간 출현했다.
10년,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환의(桓齮)가 장군이 되었다. 제(齊)나라와 조(趙)나라에서 사신이 오니 연회를 베풀었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진왕에게 권하기를
“진이 장차 천하를 취함을 큰 일로 삼고자 하는데 대왕께서 모태후(母太后)를 유배시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제후들이 그 일 때문에 진을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했다. 진왕이 옹(雍)에서 태후를 맞아들여 함양에 거하게 했다가, 다시 감천궁(甘泉宮)에서 기거하게 했다.
大索, 逐客, 李斯上書說, 乃止逐客令. 李斯因說秦王, 請先取韓以恐他國, 於是使斯下韓. 韓王患之. 與韓非謀弱秦. 大梁人尉繚來, 說秦王曰:「以秦之彊, 諸侯譬如郡縣之君, 臣但恐諸侯合從, 翕而出不意, 此乃智伯、夫差、湣王之所以亡也. 願大王毋愛財物, 賂其豪臣, 以亂其謀, 不過亡三十萬金, 則諸侯可盡.」秦王從其計, 見尉繚亢禮, 衣服食飮與繚同. 繚曰:「秦王爲人, 蜂準,50) 長目, 摯鳥膺,51) 豺聲, 少恩而虎狼心, 居約易出人下,52) 得志亦輕食人.53) 我布衣, 然見我常身自下我. 誠使秦王得志於天下, 天下皆爲虜矣. 不可與久游.」乃亡去. 秦王覺, 固止, 以爲秦國尉,54) 卒用其計策. 而李斯用事.
진왕이 진나라에 와 있는 유세객(遊說客)들을 대규모로 조사해 추방시키려 했다. 이사가 글을 올려 권고하니 진왕은 축객령(逐客令)을 취소했다. 그리고 이사가 진왕에게 먼저 한(韓)나라를 빼앗아 다른 나라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을 건의하자, 이사로 하여금 한나라를 함락시키게 했다. 한왕(韓王)이 그것을 걱정해 한비(韓非)와 함께 진나라를 약화시킬 것을 도모했다. 대량(大梁) 사람인 국위(國尉) 요(繚)가 와서 진왕에게 이렇게 권했다.
“진의 강대함 때문에 제후들은 다만 군현의 우두머리에 불과할 따름이지만, 신은 다만 제후들이 연합해 군사를 모아서 갑자기 공격해올까 걱정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백(智伯), 부차(夫差), 민왕(湣王)이 망한 까닭입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대신들에게 주어, 이로써 그들의 계획을 혼란시킨다면, 불과 30만금을 잃고 제후들을 모두 소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왕은 그의 계략을 따랐고, 국위 요를 회견할 때는 평등한 예절로 대해 의복과 음식을 그와 같게 했다. 그러자 요는
“진왕의 사람됨이 높은 콧등, 긴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승냥이 소리 같은 목소리에, 인덕이 부족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져서 곤궁한 때에는 쉽게 다른 사람의 아래에 거하지만, 일단 뜻을 얻으면 역시 쉽게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나는 평민신분이거늘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스스로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만약 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이루면 천하 사람들이 다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와 더불어 오래 교유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려 했다. 진왕이 그 사실을 알고서 그에게 한사코 머무를 것을 권유하며 진나라의 국위로 삼아 결국 그의 계책을 채택했다. 이때는 이사가 정권을 장악했다.
十一年, 王翦、桓齮、楊端和攻鄴, 取九城. 王翦攻閼與、橑楊,55) 皆幷爲一軍. 翦將十八日, 軍歸斗食以下,56) 什推二人從軍57)取鄴安陽, 桓齮將. 十二年, 文信侯不韋死, 竊葬.58) 其舍人臨者, 晉人也逐出之;59)秦人六百石以上奪爵, 遷60);五百石以下不臨, 遷, 勿奪爵.61) 自今以來, 操國事不道如嫪毐、不韋者籍其門,62) 視此. 秋, 復嫪毐舍人遷蜀者. 當是之時, 天下大旱, 六月至八月乃雨.
11년, 왕전(王翦), 환의, 양단화가 업(鄴)을 공격해 9성을 빼앗았다. 왕전이 연여(閼與), 요양(橑楊)을 공격하고, 한 군대로 병합했다. 왕전이 18일간 군사를 통솔했는데 군사 중 봉록이 두식(斗食) 이하의 군사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10명 중에 2명을 선발해 종군하게 했다. 업, 안양(安陽)을 빼앗아서 환의가 군사를 통솔했다.
12년에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몰래 매장했다. 그의 가신으로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 중 진(晉)나라 사람은 국경으로 축출했고, 진(秦)나라 사람으로 봉록이 6백 섬 이상인 자는 관직을 삭탈해 (방릉으로) 옮기게 했으며, 봉록이 5백 섬 이하로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방릉으로) 옮기게만 하고 관직은 삭탈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국사를 처리할 때 노애, 여불위처럼 정도(正道)를 따르지 않은 자는 일족을 몰수해 관노(官奴)로 삼는 예를 따랐다. 가을에는 촉(蜀)으로 옮긴 노애의 가신들에게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당시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6월부터 시작된 것이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내렸다.
十三年, 桓齮攻趙平陽,63) 殺趙將扈輒,64) 斬首十萬. 王之河南. 正月, 彗星見東方. 十月, 桓齮攻趙. 十四年, 攻趙軍於平陽, 取宜安,65) 破之, 殺其將軍. 桓齮定平陽、武城.66) 韓非使秦, 秦用李斯謀, 留非, 非死雲陽.67) 韓王請爲臣.
13년, 환의가 조나라의 평양(平陽)을 공격해, 조나라 장군 호첩(扈輒)을 죽이고 10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하남에 행차했다. 정월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10월에 환의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14년, 평양에서 조군(趙軍)을 공격해 의안(宜安)을 빼앗았으며, 조군을 물리치고 조나라의 장군을 죽였다. 환의가 평양, 무성(武城)을 평정했다. 한비(韓非)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자, 진나라에서는 이사의 계략을 써서 한비를 억류하니 한비가 운양(雲陽)에서 죽었다. 한왕(韓王)이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十五年, 大興兵, 一軍至鄴, 一軍至太原, 取狼孟.68) 地動. 十六年九月, 發卒受地韓南陽仮守69)騰. 初令男子書年. 魏獻地於秦. 秦置麗邑.70) 十七年, 內史騰攻韓, 得韓王安, 盡納其地,71) 以其地爲郡, 命曰潁川. 地動. 華陽太后卒. 民大饑.
15년, 진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한 군대는 업에 도착하고 또 한 군대는 태원에 도착해 낭맹(狼孟)을 빼앗았다. 이해에 지진이 발생했다. 16년 9월에 군사를 일으켜서 한(韓)나라 남양(南陽) 땅을 인수하고 등(騰)을 대리 태수로 삼았다.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를 등록하게 명을 내렸다. 위(魏)나라가 진(秦)나라에 땅을 헌납했다. 진나라는 여읍(麗邑)을 설치했다.
17년, 내사(內史) 등(騰)이 한나라를 공격해 한왕(韓王) 안(安)을 사로잡았으며, 그 영토를 다 몰수해 군(郡)으로 삼고 영천(穎川)이라고 이름했다. 이 해에 지진이 있었다. 화양태후(華陽太后)가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이 큰 기근을 겪었다.
十八年,72) 大興兵攻趙, 王翦將上地,73) 下井陘,74) 端和將河內, 羌瘣75)伐趙, 端和圍邯鄲城. 十九年, 王翦、羌瘣盡定取趙地東陽, 得趙王.76) 引兵欲攻燕, 屯中山. 秦王之邯鄲, 諸嘗與王生趙時母家有仇怨, 皆阬之. 秦王還, 從太原、上郡歸. 始皇帝母太后崩. 趙公子嘉率其宗數百人之代, 自立爲代王, 東與燕合兵, 軍上谷. 大饑.
18년, 군사를 크게 일으켜 조(趙)나라를 공격했는데,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경(井陘)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河內)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19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인 동양(東陽)을 모두 평정해 빼앗고, 조왕(趙王) 천(遷)을 사로잡았다.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연(燕)나라를 공격하고자 중산(中山)에 주둔했다. 진왕은 한단에 가서, 일찍이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날 때 외가와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시켰다. 진왕은 태원, 상군을 거쳐서 진으로 돌아왔다. 시황제의 모태후가 서거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로 가서 스스로 대왕(代王)에 즉위했으며, 동쪽으로 연나라와 연합해 군사를 상곡(上谷)에 주둔시켰다. 이 해에 큰 기근이 있었다.
二十年, 燕太子丹患秦兵至國, 恐, 使荊軻刺秦王. 秦王覺之, 體解77)軻以徇, 而使王翦、辛勝攻燕. 燕、代發兵擊秦軍, 秦軍破燕易水之西. 二十一年, 王賁78)攻(薊)[荊]. 乃益發卒詣王翦軍, 遂破燕太子軍, 取燕薊城, 得太子丹之首. 燕王東收遼東而王之.79) 王翦謝病老歸. 新鄭反. 昌平君徙於郢. 大雨雪,80) 深二尺五寸.
20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의 군사들이 연나라를 침략해올 것을 근심해, 두려운 나머지 형가(荊軻)를 시켜서 진왕을 척살(刺殺)하게 했다. 진왕이 그 사실을 알고 형가의 사지를 찢어 백성들에게 보이고, 왕전, 신승(辛勝)으로 하여금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연나라와 대나라가 군사를 일으켜서 진군을 공격했으나, 진군이 역수(易水) 서쪽에서 연나라를 격파했다.
21년, 왕분(王賁)이 초 나라를 공격했다. 진왕은 군사를 증원해 왕전의 군대에 파견하니,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사를 격파하고 연나라의 계성(薊城)을 점령했으며,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이 동쪽으로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늙고 병든 것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했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창평군(昌平君)을 영(郢)으로 옮겨 살게 했다. 큰 눈이 내렸는데, 높이가 두 자 다섯 치나 되었다.
二十二年, 王賁攻魏, 引河溝灌大梁, 大梁城壞, 其王請降,81) 盡取其地.
22년, 왕분이 위(魏)나라를 공격하면서 하구(河溝)의 물을 끌어다가 대량(大梁)으로 흘러가게 하니, 대량성이 파괴되었다. 그러자 위왕이 항복을 요청하므로, 그 땅을 모두 빼앗았다.
二十三年, 秦王復召王翦, 彊起之, 使將擊荊.82) 取陳以南至平輿,83) 虜荊王.84) 秦王游至郢陳. 荊將項燕立昌平君爲荊王, 反秦於淮南.85) 二十四年, 王翦、蒙武攻荊, 破荊軍, 昌平君死, 項燕遂自殺.
23년, 진왕이 왕전을 다시 불러 강제로 기용했다. 그를 시켜 초 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까지의 땅을 점령하고 형왕(荊王)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영도(郢都)와 진현(陳縣)까지 행차했다. 초 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을 옹립해 초왕(楚王)으로 삼았고, 회하(淮河)의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24년, 왕전, 몽무(蒙武)가 초 나라를 공격해 초군을 무찔렀다. 창평군이 죽자 항연도 마침내 자살했다.
二十五年, 大興兵, 使王賁將, 攻燕遼東, 得燕王喜.86) 還攻代, 虜代王嘉. 王翦遂定荊江南地;87)降越君,88) 置會稽郡. 五月, 天下大酺.89)
25년, 진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왕분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했다. 연나라의 요동을 공격하고 연왕 희(喜)를 사로잡았다. 돌아오는 도중에 대(代)나라를 공격해 대왕(代王) 가(嘉)를 사로잡았다. 왕전은 마침내 초 나라의 강남(江南) 지역을 평정해, 월(越)나라의 군주를 항복시키고 거기에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했다. 5월, 천하에 큰 연회를 베풀도록 허락했다.
二十六年, 齊王建與其相后勝90)發兵守其西界, 不通秦. 秦使將軍王賁從燕南攻齊, 得齊王建.91)
26년, 제왕(齊王) 전건(田建)과 그의 상국(相國) 후승(后勝)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경을 지키며 진(秦)과 왕래하지 않았다. 진왕은 장군 왕분을 시켜서 연나라로부터 남쪽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해 제왕 전건을 사로잡았다.
秦王初幷天下, 令丞相、御史曰:92)「異日韓王納地效璽,93) 請爲藩臣, 已而倍約, 與趙、魏合從畔秦, 故興兵誅之, 虜其王. 寡人以爲善, 庶幾息兵革. 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 故歸其質子.94) 已而倍盟, 反我太原, 故興兵誅之, 得其王. 趙公子嘉乃自立爲代王, 故擧兵擊滅之. 魏王始約服入秦, 已而與韓、趙謀襲秦, 秦兵吏誅, 遂破之. 荊王獻靑陽以西,95) 已而畔約, 擊我南郡, 故發兵誅, 得其王, 遂定其荊地. 燕王昏亂, 其太子丹乃陰令荊軻爲賊, 兵吏誅, 滅其國. 齊王用后勝計, 絶秦使, 欲爲亂, 兵吏誅, 虜其王, 平齊地. 寡人以眇眇之身, 興兵誅暴亂, 賴宗廟之靈, 六王咸伏其辜, 天下大定. 今名號不更, 無以稱成功, 傳後世. 其議帝號.」丞相綰、御史大夫劫、96) 廷尉斯等97)皆曰:「昔者五帝地方千里, 其外侯服夷服諸侯或朝或否, 天子不能制. 今陛下98)興義兵, 誅殘賊, 平定天下, 海內爲郡縣,99) 法令由一統, 自上古以來未嘗有, 五帝所不及. 臣等謹與博士議曰:100)『古有天皇, 有地皇, 有泰皇,101) 泰皇最貴.』臣等昧死上尊號, 王爲『泰皇』. 命爲『制』, 令爲『詔』,102) 天子自稱曰『朕』.103)」王曰:「去『泰』,104) 著『皇』, 采上古『帝』位號, 號曰『皇帝』. 他如議.」制曰:「可.」105) 追尊莊襄王爲太上皇.106) 制曰:「朕聞太古有號毋謚, 中古有號, 死而以行爲謐. 如此, 則子議父, 臣議君也, 甚無謂, 朕弗取焉. 自今已來, 除謚法.107) 朕爲始皇帝. 後世以計數,108) 二世三世至于萬世, 傳之無窮.」
진왕이 막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상국 및 어사(御史)에게 이렇게 명했다.
“전에 한왕(韓王)은 영토를 헌납하고 옥새를 바치면서 번신(藩臣)이 되기를 간청했다. 허나 얼마 안 되어 약속을 배신하고 조(趙), 위(魏) 나라와 함께 연합해 진을 배반했기에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토벌하고 한왕을 사로잡았다. 과인은 이 일을 잘했다고 여겨 전쟁이 멈추기를 바랐노라, 그 후 조왕(趙王)이 상국 이목(李牧)을 사신으로 보내 맹약(盟約)했기에 그의 질자(質子)를 돌려보냈거늘, 얼마 후에 맹약을 위배하고 태원(太原)에서 우리 진나라에 모반했다.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노라.
조나라 공자인 가(嘉)가 스스로 대왕(代王)에 즉위했기에 또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격멸했노라. 위왕(魏王)이 처음에는 진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韓), 조(趙) 나라와 함께 진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기에 진의 군사들이 그들을 토벌해 무찔렀으며, 초왕이 청양(靑陽) 서쪽 땅을 헌납했으나 얼마 안 되어 맹약을 배신하고 진의 남군(南郡)을 공격했기에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고 초왕을 사로잡아 마침내 초 나라 땅을 평정했노라.
연왕이 혼미해 태자 단이 몰래 형가를 자객으로 삼아 나를 죽이도록 했기에 군사를 보내 물리치고 연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제왕이 후승의 계책을 사용해 진나라와 왕래를 끊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기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제(齊) 땅을 평정했노라.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군사를 일으켜서 폭란(暴亂)을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았기 때문이며, 육국(六國)의 왕들이 모두 처벌당하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으니, 이제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동안 이루어 놓은 공업(功業)을 드러낼 수 없고 후세에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황제의 호칭을 논의하게 하라.”
그러자 승상 왕관(王綰), 어사대부(御史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李斯) 등이 모두 이렇게 아뢰었다.
“옛날 오제(五帝) 때에는 땅이 사방 천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의 제후가 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때에는 조현하고 어떤 때에는 조현하지 않아 천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잔적(殘敵)을 토벌하시고 천하를 평정해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시켰습니다. 이는 상고(上古)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로 오제(五帝)라고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博士)들과 함께 논의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황공하게도 존호(尊號)를 올리나니, 왕을 ‘태황(泰皇)’이라고 하고, 명(命)을 ‘제(制)’라고 하고, 영(令)을 ‘조(詔)’라고 하며,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이라고 하십시오.”
그러자 진왕은 “태(泰)자를 없애고 황(皇)자를 취하고, 상고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채택해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이며, 다른 것은 그대들이 논의한 대로 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관리가 이를 상주하자) “좋다.”라고 재가했다. 장양왕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추존하고, 또 이렇게 분부했다.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에는 호가 있었고 죽은 후에 생전 사적에 따라서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의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 짐은 이러한 제도를 채택하지 않겠노라. 그래서 지금부터는 시호를 추서하는 법을 폐지하노라.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에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고, 후세에는 수를 세어서 2세(二世), 3세(三世)라고 해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길이 전해지도록 하라.”
始皇推終始五德之傳,109) 以爲周得火德, 秦代周德, 從所不勝.110) 方今水德之始,111) 改年始, 朝賀皆自十月朔.112) 衣服旄旌節旗113)皆上黑.114) 數以六爲紀, 符、法冠皆六寸, 而輿六尺, 六尺爲步, 乘六馬.115) 更名河曰德水, 以爲水德之始. 剛毅戾深, 事皆決於法, 刻削毋仁恩和義, 然後合五德之數.116) 於是急法, 久者不赦.
시황제는 오덕(五德)이 순환 반복하는 순서를 고찰해, 주(周)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었는데 진나라가 주나라를 대신했으니, 주나라의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수덕(水德)을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제는 수덕의 시작이니 일 년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의 하례식(賀禮式)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했다.
의복, 깃발, 부절(符節)의 색은 모두 검은 색을 숭상했다. 수는 6을 기초로 했으니, 부절, 법관(法冠)을 모두 여섯 치로 규정하고 가마의 너비도 여섯 자로 정했으며, 여섯 자를 1보(步)라고 하고 수레 한 대를 여섯 마리의 말이 끌게 했다. 황하(黃河)를 덕수(德水)라고 개명해 수덕(水德)의 시작을 나타냈다. 강인하고 엄혹하며, 모든 일을 법에 의해서 결정하고, 각박해 인의, 은덕, 우호 따위가 없어야 오덕(五德)의 명수(命數)에 부합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법령을 엄하게 해 법을 어긴 자는 오랫동안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
丞相綰等言:「諸侯初破, 燕、齊、荊地遠, 不爲117)置王, 毋以塡之. 請立諸子, 唯上幸許.」始皇下其議於群臣, 群臣皆以爲便. 廷尉李斯議曰:「周文武所封子弟同姓甚衆, 然後屬疏遠, 相攻擊如仇讎, 諸侯更相誅伐, 周天子弗能禁止. 今海內賴陛下神靈一統, 皆爲郡縣, 諸子功臣以公賦稅重賞賜之, 甚足易制. 天下無異意,118) 則安寧之術也. 置諸侯不便.」始皇曰:「天下共苦戰鬥不休, 以有侯王. 賴宗廟, 天下初定, 又復立國, 是樹兵也, 而求其寧息, 豈不難哉! 廷尉議是.」
승상 왕관 등이 말하기를 “제후들을 이제 막 평정했지만, 연(燕), 제(齊), 초(楚) 나라의 땅이 너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사옵니다. 청하오니 황자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윤허해주소서.”라 했다. 시황제가 군신들에게 이 의견을 상의하게 내놓자 군신들 모두 그것이 유리하다고 여겼으나, 정위(廷尉) 이사가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했다.
“주(周)의 문왕(文王), 무왕(武王)은 많은 자제들과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고 멀어져 서로 원수처럼 공격했고, 심지어 제후들끼리 서로 주벌했음에도 주(周)의 천자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神靈)에 의해 통일되어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황자나 공신들에게 국가의 부세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시기에 매우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에 다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를 안녕케 하는 책략이오니, 제후를 설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멈추지 않아 천하가 모두 고통 받고 있는데 이는 제후 왕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신령에 의지해 이제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제 또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는 것은 다시 전쟁을 조성하는 것이다. 안녕과 평정을 구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도다.”
分天下以爲三十六郡,119) 郡置守、尉、監.120) 更名民曰「黔首」.121) 大酺. 收天下兵,122) 聚之咸陽, 銷以爲鍾鐻,123) 金人十二, 重各千石,124) 置廷宮中. 一法度衡石丈尺. 車同軌. 書同文字. 地東至海曁朝鮮,125) 西至臨洮、羌中,126) 南至北嚮戶,127) 北據河爲塞, 並陰山至遼東.128) 徙天下豪富於咸陽十二萬戶. 諸廟及章臺、上林皆在渭南. 秦每破諸侯, 寫放其宮室, 作之咸陽北阪上,129) 南臨渭, 自雍門130)以東至涇、渭, 殿屋複道周閣相屬.131) 所得諸侯美人鍾鼓, 以充入之.132)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어 군마다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백성을 일컫는 말을 바꾸어 ‘검수(黔首)’라고 하고, 전국에 큰 연회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수집해 함양(咸陽)에 모아 놓고, 그것을 녹여서 종거(鍾鐻)와 12개의 동인상(銅人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1천 석(石)이었다. 모두 궁전 안에 놓아두었다. 법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의 궤폭을 통일했으며, 문자의 서체를 통일했다.
영토가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조선(朝鮮)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이르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황하를 근거지로 해 요새를 쌓아서 음산(陰山)을 끼고 요동(遼東)에까지 이르게 했다. 전국의 부호(富豪)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하게 했다. 조묘(祖廟), 장대궁(章臺宮), 상림원(上林苑)이 모두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있었다. 이것들은 진나라가 제후들을 평정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실을 모방해 함양의 북쪽 산기슭에 지은 것인데, 남쪽으로는 위수가 흐르고 옹문(雍門) 동쪽에서 경수(涇水), 위수(渭水)에까지 이르며, 궁전 사이의 구름다리와 주각(周閣)이 서로 연이어졌고, 제후들에게서 뺏은 미인과 종고(鍾鼓)가 이곳을 메웠다.
二十七年, 始皇巡隴西、北地,133) 出雞頭山,134) 過回中.135) 焉作信宮渭南, 已更命信宮爲極廟, 象天極.136) 自極廟道通酈山, 作甘泉前殿. 築甬道,137) 自咸陽屬之. 是歲, 賜爵一級. 治馳道.138)
27년, 진시황은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순무하고, 계두산(鷄頭山)을 지나서 회중궁(回中宮)을 경유했다. 위수 남쪽에 신궁(信宮)을 지었다. 얼마 후에 신궁을 극묘(極廟)라고 개명해 북극성을 상징했다. 극묘에서부터 여산(酈山)까지 길을 뚫고, 감천궁(甘泉宮)의 전전(前殿)을 지었으며, 용도(甬道)를 수축해 함양까지 통하게 했다. 이해에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치도(馳道)를 수축했다.
二十八年, 始皇東行郡縣, 上鄒嶧山.139) 立石, 與魯諸儒生議, 刻石頌秦德, 議封禪望祭山川之事.140) 乃遂上泰山,141) 立石, 封, 祠祀.142) 下, 風雨暴至, 休於樹下, 因封其樹爲五大夫.143) 禪梁父.144) 刻所立石, 其辭曰:145)
28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군현을 순무하던 중에 추역산(鄒嶧山)에 올라 비석을 세웠다. 노(魯) 땅의 유생들과 상의해 비석에 진(秦)의 공덕을 노래하는 내용을 새겼으며, 봉선(封禪)과 여러 산천에 대한 망제(望祭)의 일을 논의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태산(泰山)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토단을 쌓아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는데, 이 일로 인해서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했다. 이어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서 글을 새겼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皇帝臨位, 作制明法, 臣下脩飭.146) 二十有六年, 初幷天下, 罔不賓服. 親巡遠方黎民, 登茲泰山, 周覽東極. 從臣思跡,147) 本原事業, 祗誦功德.148) 治道運行, 諸産得宜, 皆有法式. 大義休明, 垂于後世, 順承勿革. 皇帝躬聖, 旣平天下, 不懈於治. 夙興夜寐, 建設長利,149) 專隆敎誨. 訓經宣達, 遠近畢理, 咸承聖志. 貴賤分明, 男女禮順, 愼遵職事. 昭隔內外,150) 靡不淸淨, 施于後嗣. 化及無窮, 遵奉遺詔, 永承重戒.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밝은 법도를 창제하시니 신하들은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갔으며,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제후들이 신하로서 조현(朝見)하지 않는 자 없었다. 황제께서 친히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까지 순무해 이 태산에 올라 동쪽 끝을 바라보시니, 따르던 신하들이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고 사업의 근원을 생각하며 황제의 공덕을 찬송했다. 치국(治國)의 도가 행해지자, 모든 일들이 마땅함을 얻고 모든 법식(法式)이 생겨, 대의(大義)가 아름답게 드러나 후세에 널리 전해지며, 영원토록 계승되어 변함이 없으리라.
황제께서 친히 정사를 베푸시어 이제 천하를 평정했도다. 천하를 다스림에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밤늦게 주무시면서 백성들을 위해 장구(長久)한 이익을 세우시고, 백성들에 대한 가르침과 깨우침에 전념하셨다. 경전(經典)을 두루 가르치시니 원근이 모두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모두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며, 귀천이 분명하게 나뉘고 남녀가 예의를 따르며, 자신의 직분을 신중하게 준수했다. 안과 바깥이 밝게 구분되고 깨끗하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까지 덕정(德政)이 이어지며 교화의 미침이 무궁하리라. 황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엄중한 훈계를 영원히 계승할지어다.”
於是乃並勃海以東,151) 過黃、腄,152) 窮成山, 登之罘,153) 立石頌秦德焉而去.
그리고 발해(勃海)를 끼고 동쪽으로 향해 황현(黃縣), 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에 오르고 지부산(之罘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진(秦)의 공덕을 노래한 후 떠났다.
南登琅邪,154) 大樂之, 留三月. 乃徙黔首三萬戶琅邪臺下,155) 復十二歲.156) 作琅邪臺,157) 立石刻, 頌秦德, 明得意. 曰:158)
진시황이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라서 매우 기뻐하며 석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백성 3만 호를 낭야산 아래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12년간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낭야대(琅邪臺)를 지어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새겨서 진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자기의 의기양양한 심정을 나타내었다.
維二十八年, 皇帝作始. 端平法度, 萬物之紀. 以明人事, 合同父子. 聖智仁義, 顯白道理. 東撫東土, 以省卒士.159) 事已大畢, 乃臨于海. 皇帝之功, 勸勞本事. 上農除末, 黔首是富. 普天之下, 摶心揖志.160) 器械一量,161) 同書文字. 日月所照, 舟輿所載. 皆終其命, 莫不得意. 應時動事, 是維皇帝. 匡飭異俗, 陵水經地.162) 憂恤黔首, 朝夕不懈. 除疑定法, 咸知所辟.163) 方伯分職, 諸治經易.164) 擧錯必當, 莫不如畫.165) 皇帝之明, 臨察四方. 尊卑貴賤, 不踰次行.166) 姦邪不容, 皆務貞良. 細大盡力, 莫敢怠荒. 遠邇辟隱,167) 專務肅莊. 端直敦忠, 事業有常. 皇帝之德, 存定四極. 誅亂除害, 興利致福. 節事以時, 諸産繁殖. 黔首安寧, 不用兵革.168) 六親相保, 終無寇賊. 驩欣奉敎, 盡知法式. 六合之內, 皇帝之土. 西涉流沙,169) 南盡北戶. 東有東海, 北過大夏.170) 人跡所至, 無不臣者. 功蓋五帝, 澤及牛馬. 莫不受德, 各安其宇.
“28년에 황제께서 처음으로 황제에 즉위하자, 법도를 바로잡아 만물의 준칙으로 삼고 인사(人事)를 밝히시니 부자지간이 화목하고, 성지(聖智)와 인의(仁義)로써 모든 도리를 분명히 드러내셨다. 또한 동쪽 땅을 순무하시고 군사들을 살펴보셨다. 대사(大事)가 다 끝나자 해안지역까지 왕림하셨다.
황제의 공적은 근본적인 대사를 부지런히 힘쓰신 것이며, 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해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마음을 하나로 하고 뜻을 모았다. 각종 기물의 도량(度量)을 통일하고 문자의 서체를 통일했다. 무릇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배와 수레가 다니는 곳은 어디나 황제의 명이 행해지니 뜻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사시(四時)의 변화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오직 황제이시니, 다른 풍속을 바로잡고자 산을 넘고 물을 건너셨으며,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아침이나 저녁이나 게으름피지 않으시고,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니 백성들이 모두 법으로 금한 일을 피할 줄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나뉘어서 모든 정무의 시행이 용이해지고 모든 조치가 타당해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께서 현명하심으로 사방을 두루 살피시니,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모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간교하고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고 모두 충정(忠貞)과 선량함을 힘써 구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을 막론하고 힘을 다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함이 없으며, 멀건 가깝건 혹은 편벽한 곳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오로지 엄숙과 장중함에 힘쓰고, 정직하고 충성되어야만 하는 일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다. 황제의 덕이 사방의 끝까지 안정시켰다. 난리를 일으킨 자들을 토벌해 해악을 제거하고 이로움을 일으켜서 복을 이루셨다.
농번기에는 노역(勞役)을 줄여주니 모든 산업이 번성했으며,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육친(六親)이 서로 의지하며 보살피니 마침내 도적이 없어졌다. 백성들이 모두 교화를 기쁘게 받들며 법령과 제도를 다 이해했다. 천지사방이 모두 황제의 영토이니, 서쪽으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까지 이르며 동쪽으로는 동해(東海)를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나,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는 곳에는 신하라고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황제의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뛰어났고, 은택이 소와 말에게까지 미쳤으며, 은덕을 받지 않은 자 없어 각자 평안한 생활을 영위했다.”
維秦王兼有天下, 立名爲皇帝, 乃撫東土, 至于琅邪. 列侯171)武城侯王離、列侯通武侯王賁、倫侯172)建成侯趙亥、倫侯昌武侯成、倫侯武信侯馮毋擇、丞相隗林、173) 丞相王綰、卿李斯、卿王戊、五大夫趙嬰、五大夫楊樛174)從, 與175)議於海上.176) 曰:「古之帝者, 地不過千里,177) 諸侯各守其封域, 或朝或否, 相侵暴亂, 殘伐不止, 猶刻金石, 以自爲紀. 古之五帝三王, 知敎不同, 法度不明, 仮威鬼神,178) 以欺遠方, 實不稱名,179) 故不久長. 其身未歿, 諸侯倍叛, 法令不行. 今皇帝幷一海內, 以爲郡縣, 天下和平. 昭明宗廟, 體道行德, 尊號大成. 群臣相與誦皇帝功德, 刻于金石, 以爲表經.」
진왕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이름을 세워서 황제라고 칭하고, 동쪽 영토를 순무해 낭야에 이르셨다. 열후(列侯)인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와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인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와 창무후(昌武侯) 성(成),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인 외림(隗林)과 왕관(王綰), 경(卿)인 이사(李斯)와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인 조영(趙嬰)과 양규(楊樛) 등이 황제를 수행하며 해상에서 황제의 공덕을 함께 의론했다.
고대의 제왕들은 영토가 사방 천리에 불과했지만 제후들이 각기 자기의 봉토만을 지키면서 어떤 이는 입조(入朝)하고 어떤 이는 입조하지 않으며, 서로 침략해 폭란을 일삼으며 잔살함이 그치지 않았음에도 금석(金石)에 글을 새겨 스스로를 기념했다.
旣已, 齊人徐市等上書, 言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180)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181)
일을 마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상서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재계하고 나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나서게 하소서.”라고 하자, 서불을 보내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해 바다로 들어가서 신선을 찾도록 했다.
始皇還, 過彭城,182) 齋戒禱祠, 欲出周鼎泗水. 使千人沒水求之, 弗得. 乃西南渡淮水, 之衡山、183) 南郡.184) 浮江, 至湘山祠.185) 逢大風, 幾不得渡. 上問博士曰:「湘君神?」博士對曰:「聞之, 堯女, 舜之妻, 而葬此.」186)於是始皇大怒, 使刑徒三千人皆伐湘山樹, 赭其山.187) 上自南郡由武關歸.188)
진시황이 돌아오면서 팽성(彭城)을 지날 때, 재계하고 사당에서 기도한 후 사수(泗水)에 빠진 주정(周鼎)을 꺼내기 위해서, 천여 명을 보내 물속에 들어가서 정을 찾도록 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러자 서남쪽으로 회하(淮河)를 건너 형산(衡山), 남군(南郡)으로 갔다가, 장강(長江)의 물줄기를 타고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으나, 마침 큰 바람을 만나서 하마터면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진시황이 박사(博士)들에게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 하고 묻자, 박사들이 “요(堯)임금의 여식으로서 순(舜)임금의 아내가 되었는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복역형 죄수 3천 명을 보내 상산(湘山)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해 그 산을 붉은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시황제가 남군으로부터 무관(武關)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二十九年, 始皇東游. 至陽武博狼沙中,189) 爲盜所驚. 求弗得, 乃令天下大索十日.
29년에 시황제가 동쪽으로 행차했다. 시황제가 양무현(陽武縣)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강도 때문에 몹시 놀랐다. 자객을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하자, 10일간 대규모로 전국을 수색하게 명령했다.
登之罘, 刻石. 其辭曰:190)
지부(之罘)에 올라,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維二十九年, 時在中春,191) 陽和方起. 皇帝東游, 巡登之罘, 臨照于海. 從臣嘉觀,192) 原念休烈, 追誦本始. 大聖作治, 建定法度, 顯箸綱紀. 外敎諸侯, 光施文惠, 明以義理. 六國回辟,193) 貪戾無厭,194) 虐殺不已. 皇帝哀衆, 遂發討師, 奮揚武德. 義誅信行, 威燀旁達,195) 莫不賓服. 烹滅彊暴, 振救黔首, 周定四極. 普施明法, 經緯天下, 永爲儀則. 大矣哉! 宇縣之中,196) 承順聖意.197) 群臣誦功, 請刻于石, 表垂于常式.
“29년 음력 2월 봄, 바야흐로 봄기운이 일어나는 때에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지부에 올라서 대해(大海)를 바라보셨다. 황제를 따르던 신하들이 경치를 찬양하며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창업의 공적을 가송했다. 위대한 성군께서 치도(治道)를 만드시고 법도를 제정하고 기강을 분명히 밝히셨으며,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하고 널리 예악제도와 은덕을 베푸시어 대의와 도리를 밝히셨다. 육국(六國)의 군주들이 사악하고 탐욕스러워서 만족할 줄 모르니 학살이 멈추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 무덕(武德)을 크게 떨치셨다.
정의에 의거해 주살하고 신의에 맞게 행동하시니, 황제의 위엄이 사방 먼 지방에 이르러 빛나고 제후들이 신하로서 조현하지 않는 자 없었다. 강포함을 소멸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하시어 천하를 두루 안정되게 하셨으며, 분명한 법도를 널리 베푸시어 천하를 다스리시니 영원토록 법칙이 되었다. 위대하도다. 천하의 백성들이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 순종하도다. 군신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며 비석에 그 공덕을 새겨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전범(典範)으로 후세에 전해지도록 간청했다.”
其東觀曰:維二十九年, 皇帝春游, 覽省遠方. 逮于海隅, 遂登之罘, 昭臨朝陽. 觀望廣麗, 從臣咸念, 原道至明. 聖法初興, 淸理疆內, 外誅暴彊. 武威旁暢, 振動四極, 禽滅六王. 闡幷天下, 甾害絶息, 永偃戎兵. 皇帝明德, 經理宇內, 視聽不怠.198) 作立大義, 昭設備器, 咸有章旗. 職臣遵分, 各知所行, 事無嫌疑. 黔首改化, 遠邇同度, 臨古絶尤. 常職旣定, 後嗣循業, 長承聖治. 群臣嘉德, 祗誦聖烈, 請刻之罘.
동관(東觀)에서 또 비문을 새겨서 이렇게 말했다.
“29년 봄날에 황제께서 행차하시어 먼 지방에까지 시찰하시며 해변에 이르셨다. 마침내 지부에 올라서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셨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황제의 공적을 생각하며 그 치도(治道)가 지극히 밝았음을 회상했다. 황제께서 성법(聖法)을 처음 시행하시어 안으로는 국내를 깨끗이 정리하시고 밖으로는 강폭한 자들을 주살하셨다. 무위(武威)를 떨치시어 사방을 진동시키고 육국의 군주를 사로잡아 주멸했으며, 천하를 통일해 재해를 멈추게 하고 전쟁을 영원히 중지시키셨다.
황제께서 덕을 밝히시어 천하를 다스리고 보고 듣고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며, 대의(大義)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器物)을 설치하시니 신분의 등급마다 모두 장기(章旗)가 생겼다. 신하들은 자신의 직분을 준수하고 각기 자신이 행해야 할 바를 알아 모든 일에 의혹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이 풍습을 개량하고 가까운 곳이나 먼 지방이나 모두 법도를 같게 하니 노년이 되도록 죄를 짓지 않았다. 일상적인 직무가 이미 확정되니 후손들은 선업을 따라 영원토록 이 성스러운 다스림을 계승토록 할지어다.”
군신들이 황제의 덕을 찬양하고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며 지부에 비석을 새기기를 간청했다.
旋, 遂之琅邪, 道上黨入.199)
얼마 후, 낭야에 갔다가 상당(上黨)을 거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三十年, 無事.
三十一年200)十二月, 更名臘曰「嘉平」.201) 賜黔首里六石米, 二羊. 始皇爲微行咸陽,202) 與武士四人俱, 夜出逢盜蘭池,203) 見窘, 武士擊殺盜, 關中大索二十日. 米石千六百.
30년에는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31년 12월, 납월(臘月)을 가평(嘉平)이라고 개명했다. 각 리(里)마다 백성들에게 쌀 여섯 섬과 양 두 마리씩을 하사했다. 진시황이 함양을 미행(微行)하려고 무사 네 명과 함께 한밤중에 궁궐을 나왔다가, 난지(蘭池)에서 도적을 만나서 위험하게 되었으나 무사들이 도적을 물리쳐 죽였다. 이 일로 인해서 대규모로 관중(關中)을 20여 일간이나 수색했다. 이 해에 쌀값이 올라 쌀 한 섬에 1천 6백 전(錢)이나 했다.
三十二年, 始皇之碣石, 使燕人盧生求羨門、204) 高誓.205) 刻碣石門.206) 壞城郭, 決通隄防. 其辭曰:207)
32년,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도록 했다. 갈석산의 산문(山門)에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팠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遂興師旅, 誅戮無道, 爲逆滅息. 武殄暴逆, 文復無罪,208) 庶心咸服. 惠論功勞, 賞及牛馬, 恩肥土域. 皇帝奮威, 德幷諸侯, 初一泰平. 墮壞城郭,209) 決通川防, 夷去險阻. 地勢旣定, 黎庶無繇,210) 天下咸撫. 男樂其疇, 女修其業, 事各有序. 惠被諸産, 久並來田,211) 莫不安所. 群臣誦烈, 請刻此石, 垂著儀矩.
“황제께서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주벌하시고 반역을 평정하셨으며, 무력으로 포악하고 반역하는 자들을 멸했다. 법령으로 죄 없는 자들을 보호해주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황제께 복종하게 되었다. 공로를 헤아려서 소나 말에게까지 상을 내리니 황제의 은택이 전국에 베풀어졌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 제후들을 병합해 처음으로 통일해 천하를 태평하게 하셨다. 성곽을 허물고 하천의 제방을 파서 서로 통하게 해 험난한 지형을 제거하시고, 지세가 이미 평탄해져 백성들의 요역이 없어지니 천하가 다 편안했다. 남자는 밭에서 경작하기를 즐거워했고 여자는 집안일에 힘썼으며 일에는 각기 그 순서가 있었다. 황제의 은혜가 모든 산업에까지 미치고, 오래도록 서로가 협력해 밭을 경작하니 편안한 생활을 누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군신들이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며 이 비석에 새겨서 영원히 전범으로 삼기를 간청했다.”
因使韓終、侯公、石生求仙人不死之藥. 始皇巡北邊, 從上郡入. 燕人盧生使212)入海還, 以鬼
神事, 因奏錄圖書, 曰「亡秦者胡也」.213) 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 略取河南地.214)
이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을 시켜서 신선들의 장생불사 약을 구하게 했다. 진시황이 북쪽 지방을 순무하면서 상군(上郡)을 지나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파견되어 바다에 들어갔다. 돌아와서는 귀신에 관한 일로 인해 참위(讖緯)의 글월을 상주했다. 거기에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군사 30만 명을 일으켜 북쪽으로 호인(胡人)을 공격하게 해, 하남지역을 점령했다.
三十三年, 發諸嘗逋亡人、贅婿、215) 賈人略取陸梁地,216) 爲桂林、217) 象郡、218) 南海,219) 以適遣戍.220) 西北斥逐匈奴. 自楡中221)並河以東,222) 屬之陰山,223) 以爲三十四縣, 城河上爲塞. 又使蒙恬渡河取高闕、224) (陶)[陽]山、北仮中,225) 築亭障以逐戎人. 徙謫, 實之初縣.226) 禁不得祠. 明星出西方.227) 三十四年, 適治獄吏不直者, 築長城及南越地.228)
33년,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집이 가난해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된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을 징발해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해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 등의 군(郡)을 설치하고, 죄를 지어 유배된 사람들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또한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버렸다. 유중(楡中)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44현을 설치했고, 황하 연변에 성곽을 쌓아서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으로 하여금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게 했고, 요새를 쌓아서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게 했다. 유배된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새로 설치한 현을 충실하게 했다. 명을 내려서 제사를 금지시켰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
34년, 시황제는 부정직한 관리들을 유배시켜서 장성(長城)을 수축하거나 남월(南越) 지역을 지키게 했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결한 장성. 현재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축조한 것
始皇置酒咸陽宮, 博士七十人前爲壽. 僕射229)周靑臣進頌曰:「他時秦地不過千里, 賴陛下神靈明聖, 平定海內, 放逐蠻夷, 日月所照, 莫不賓服. 以諸侯爲郡縣, 人人自安樂, 無戰爭之患, 傳之萬世. 自上古不及陛下威德.」始皇悅. 博士齊人淳于越進曰:「臣聞殷周之王千餘歲, 封子弟功臣, 自爲枝輔. 今陛下有海內, 而子弟爲匹夫, 卒有田常、六卿之臣, 無輔拂,230) 何以相救哉? 事不師古而能長久者, 非所聞也. 今靑臣又面諛以重陛下之過, 非忠臣.」始皇下其議. 丞相李斯曰:「五帝不相復, 三代不相襲, 各以治, 非其相反, 時變異也. 今陛下創大業, 建萬世之功, 固非愚儒所知. 且越言乃三代之事, 何足法也? 異時諸侯並爭, 厚招游學.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百姓當家則力農工, 士則學習法令辟禁.231) 今諸生不師今而學古, 以非當世, 惑亂黔首. 丞相臣斯昧死言:古者天下散亂, 莫之能一, 是以諸侯並作, 語皆道古以害今, 飾虛言以亂實, 人善其所私學,232) 以非上之所建立. 今皇帝幷有天下, 別黑白而定一尊. 私學而相與非法敎, 人聞令下, 則各以其學議之, 入則心非, 出則巷議, 夸主以爲名,233) 異取以爲高, 率群下以造謗. 如此弗禁, 則主勢降乎上, 黨與成乎下. 禁之便. 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敢有藏詩、書、百家語者, 悉詣守、尉雜燒之. 有敢偶語詩書者棄市.234) 以古非今者族. 吏見知不擧者與同罪. 令下三十日不燒, 黥爲城旦.235) 所不去者, 醫藥卜筮種樹之書. 若欲有學法令,236) 以吏爲師.」制曰:「可.」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박사 70명이 앞에 나와서 축수(祝壽)를 올렸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나아가 찬양하기를 “이전에 진(秦) 땅은 사방 천리에 불과했으나, 폐하의 신명(神明)과 지덕(智德)에 의지해 천하를 평정하고 만이(蠻夷)를 몰아내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으시니, 사람마다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근심이 사라져, 그 공적을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상고(上古) 이래의 군주들도 폐하의 위엄과 덕망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시황제는 기뻐했다. 제(齊)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나아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은(殷), 주(周)의 왕조가 천여 년 간 지속되면서 자제(子弟)와 공신들을 봉해 왕실을 보위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분들께서는 오히려 평민으로 계시는데, 만약 전상(田常)이나 진(晉)의 육경(六卿) 같은 신하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황제를 보필할 자가 없으니 어떻게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인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일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면전에서 아부하며 폐하의 과실을 가중시키려고 하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시황제가 대신들에게 이 의견을 논의하게 하자, 승상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제(五帝)의 다스림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가 서로 이어받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은 서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해 만세의 공덕을 세웠으니, 진실로 어리석은 유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三代)의 일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으므로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으로 유사(遊士)들을 초치했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었고,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공(農工)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거늘, 지금 모든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며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승상인 신 이사가 황공하게도 아뢰옵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혼란스러워서 어느 누구도 천하를 통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군사를 일으키고, 하는 말마다 모두 옛것을 말해 지금을 비난하고, 허망한 말을 늘어놓아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해 조정에서 건립한 제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지존(至尊, 황제를 가리킴) 한 분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셨거늘, 개인적으로 학습해 함께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법령을 들으면 각자 자기의 학문으로써 그 법령을 의론하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조정을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의논하며,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해 명예를 구하고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며, 백성들을 거느려 비방하는 말을 조성할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금지하지 않으신다면 위에서는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이 형성될 것이오니,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신이 청하옵건대 사관에게 명해 진(秦)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고, 박사관(博士官)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서 천하에 감히 수장되어 있는 『시(詩)』, 『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지방관에게 보내 모두 태우게 하며, 감히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시』,『서』를 이야기하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고, 이 같은 자들을 보고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소서. 명령이 내려진 지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내리어 성단형(城旦刑)에 처하십시오. 다만 불태워 제거하지 않을 서적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에 관계된 서적뿐이며,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에 진시황이 영을 내려서 “그렇게 하라.”라 했다.
三十五年, 除道, 道九原237)抵雲陽,238) 塹山堙谷, 直通之. 於是始皇以爲咸陽人多, 先王之宮廷小, 吾聞周文王都豐, 武王都鎬, 豐鎬之閒, 帝王之都也. 乃營作朝宮渭南上林苑中. 先作前殿阿房,239) 東西五百步, 南北五十丈, 上可以坐萬人, 下可以建五丈旗.240) 周馳爲閣道, 自殿下直抵南山. 表南山之顚以爲闕. 爲復道, 自阿房渡渭, 屬之咸陽, 以象天極閣道絶漢抵營室也.241) 阿房宮未成;成, 欲更擇令名名之. 作宮阿房, 故天下謂之阿房宮. 隱宮242)徒刑者七十餘萬人, 乃分作阿房宮, 或作麗山. 發北山石槨, 乃寫蜀、荊地材皆至. 關中計宮三百, 關外四百餘. 於是立石東海上朐界中, 以爲秦東門. 因徙三萬家麗邑,243) 五萬家雲陽, 皆復不事十歲.
35년, 도로를 수축해 구원(九原)을 지나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바로 통하게 했다. 이때 진시황은 함양에는 사람이 많지만 선왕의 궁전은 너무 작다고 여겨 이르기를, “짐이 듣건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풍(豐)에 도읍하고 무왕(武王)은 호(鎬)에 도읍했다고 하니, 풍과 호 두 지역 사이가 제왕의 도읍지이다”라 했다.
이에 위수의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前殿)을 건축했는데, 동서의 넓이가 5백 보(步)이며 남북의 길이가 50장(丈)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는 5장(丈)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전 아래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통하게 했으며, 남산 봉우리에 궐루(闕樓)를 세워서 표지로 삼았다. 또 구름다리를 수축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서 함양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북극성,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까지 이르는 모양을 상징했다.
아방궁이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이후에 좋은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했다. 결국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궁형(宮刑), 도형(徒刑)을 받은 70만여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驪山)을 조림(造林)하게 했다. 북산(北山)에서 석재(石材)를 캐내고 촉(蜀), 형(荊) 지역에서 목재를 운반해 모두 이곳에까지 이르게 했다. 관중(關中)에는 궁전 3백 채를 지었으며 함곡관 동쪽에는 4백여 채의 궁전을 지었다. 이에 동해(東海) 연변의 구산(朐山)에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 국경의 동문(東門)으로 삼았다. 동시에 3만 가구를 여읍(驪邑)으로 이주시키고 5만 가구를 운양(雲陽)으로 이주시켜서 10년간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盧生說始皇曰:「臣等求芝奇藥仙者常弗遇, 類物有害之者. 方中, 人主時爲微行以辟惡鬼, 惡鬼辟, 眞人至. 人主所居而人臣知之, 則害於神. 眞人者, 入水不濡, 入火不爇,244) 陵雲氣, 與天地久長. 今上治天下, 未能恬倓. 願上所居宮毋令人知, 然后不死之藥殆可得也.」於是始皇曰:「吾慕眞人, 自謂『眞人』, 不稱『朕』.」乃令咸陽之旁二百里內宮觀二百七十復道甬道相連, 帷帳鍾鼓美人充之, 各案署不移徙. 行所幸, 有言其處者, 罪死. 始皇帝幸梁山宮,245) 從山上見丞相車騎衆, 弗善也. 中人或告丞相, 丞相後損車騎. 始皇怒曰:「此中人泄吾語.」案問莫服. 當是時, 詔捕諸時在旁者, 皆殺之. 自是後莫知行之所在. 聽事, 群臣受決事, 悉於咸陽宮.
노생(盧生)이 진시황에게 권하기를 “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아다녔으나 매번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치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하시어 악귀를 물리치시고, 악귀가 물리쳐지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르시는 장소를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받게 될 것입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은 안정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원하옵건대 황제께서 거처하는 궁궐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신다면 아마 불사(不死)의 약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짐(朕)이 평소 진인을 흠모했으니 이제부터 스스로를 진인이라고 부를 것이며 짐이라고 부르지 않겠노라.” 라고 말했다.
이에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백 리 안의 궁관(宮關) 2백 7곳을 구름다리와 용도(甬道)로 서로 연결시켜, 휘장, 종고(鍾鼓),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으며, 모두 등기된 부서에 따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해 머무를 경우,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진시황이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서 승상의 거마(車馬)가 많은 것을 보고 언짢아했다. 황궁의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승상에게 말하니 승상이 그 후 에 거마의 숫자를 줄였다. 그러자 진시황이 노하여,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발설한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하나씩 심문했으나 죄를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그 당시 곁에 있던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도록 명령하니, 이후로는 황제가 행차한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정사를 처리하고 군신들이 결정된 정책을 접수하는 것이 다 함양에서 이루어졌다.
侯生246)盧生相與謀曰:「始皇爲人, 天性剛戾自用, 起諸侯, 幷天下, 意得欲從, 以爲自古莫及己. 專任獄吏, 獄吏得親幸. 博士雖七十人, 特備員弗用. 丞相諸大臣皆受成事, 倚辨於上. 上樂以刑殺爲威,247) 天下畏罪持祿, 莫敢盡忠. 上不聞過而日驕, 下懾伏謾欺以取容. 秦法, 不得兼方248)不驗, 輒死. 然候星氣者至三百人, 皆良士, 畏忌諱諛, 不敢端言其過. 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上, 上至以衡石量書,249) 日夜有呈, 不中呈250)不得休息. 貪於權勢至如此, 未可爲求仙藥.」於是乃亡去. 始皇聞亡, 乃大怒曰:「吾前收天下書不中用者盡去之. 悉召文學方術士甚衆, 欲以興太平, 方士欲練以求奇藥.251) 今聞韓衆252)去不報, 徐市等費以巨萬計, 終不得藥, 徒姦利相告日聞.253) 盧生等吾尊賜之甚厚, 今乃誹謗我, 以重吾不德也. 諸生在咸陽者, 吾使人廉問, 或爲訞言以亂黔首.」於是使御史悉案問諸生, 諸生傳相告引,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254) 始皇長子扶蘇諫曰:「天下初定, 遠方黔首未集,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唯上察之.」始皇怒, 使扶蘇北監蒙恬於上郡.255)
후생(侯生)은 노생과 함께 모의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이 고집 세고 사나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제후 출신으로서 천하를 통일해 마음먹은 대로 일을 행하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소. 그리고 전문적으로 옥리를 임용했으니 옥리는 모두 황제의 친애와 총애를 받고 있거늘, 박사는 비록 70명이지만 숫자만을 충족시켰을 뿐 중용하지는 않았으며, 승상과 대신들은 모두 이미 결정된 일들을 명령받으니 황제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소.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니 천하가 죄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봉록만을 유지하려고 할 뿐이며 감히 충성을 다하려 하지는 않소.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속이고 기만하며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진의 법률에는 두 가지 이상의 방술(方術)을 겸할 수 없게 했으며, 만약 그 방술에 영험이 없으면 즉시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소.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관측하는 자가 3백 명에 이르고 모두 뛰어난 선비들이지만 두려워하고 기피해 감히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 있으며,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황제에 의해서 결정되니 황제가 읽어야 할 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야할 지경이며 밤낮으로 정량이 있어서 그 정량에 이르지 못하면 휴식을 할 수가 없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니 그를 위해서 선약을 구해주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도망쳐버렸다. 진시황은 후생과 노생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문학에 종사하는 선비들과 방술사(方術士)들을 모두 불러 모아 태평성세를 일으키고자 하고 방사들로 하여금 각지를 찾아다니며 선약을 구하게 했거늘, 지금 들으니 한중(韓衆, 韓終을 가리킴)이 한번 가더니 소식이 없다 하고, 서불(徐市) 등은 막대한 금액을 낭비하고서도 결국 선약을 구하지 못한 채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며 서로 고발하고 있다는 소식만을 매일 듣고 있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해 그들에게 많은 것을 하사했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하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도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함양에 있는 이런 자들을 조사해보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써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어사(御史)를 시켜서 이런 자들을 조사하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니, 진시황이 친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 4백 60명을 사형죄로 판결해 모두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그것을 알려서 후세 사람들을 경계시켰다. 또한 유배된 자를 더 징발해 변경을 지키게 했다. 진시황의 장자(長子) 부소(扶蘇)가 간언해 말하기를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귀속되지 않았으며 유생들은 모두 『시』, 『서』를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제께서 법을 엄하게 해 그들을 얽어매시니, 소자는 천하가 불안해질까 두렵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런 사실을 살펴주소서.”
라고 하자, 진시황은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上郡)에 파견해 몽염을 감독하게 했다.
三十六年, 熒惑守心. 有墜星下東郡, 至地爲石,256) 黔首或刻其石曰「始皇帝死而地分」. 始皇聞之, 遣御史逐問, 莫服, 盡取石旁居人誅之, 因燔銷其石. 始皇不樂, 使博士爲仙眞人詩, 及行所游天下, 傳令257)樂人歌弦之. 秋, 使者從關東夜過華陰平舒道,258) 有人持璧遮使者曰:「爲吾遺滈池君.」259) 因言曰:「今年祖龍死.」260) 使者問其故, 因忽不見, 置其璧去. 使者奉璧具以聞. 始皇黙然良久, 曰:「山鬼固不過知一歲事也.」退言曰:「祖龍者, 人之先也.」使御府視璧, 乃二十八年行渡江所沈璧也. 於是始皇卜之, 卦得游徙吉. 遷北河楡中三萬家.261) 拜爵一級.
36년, 형혹(熒惑)이 심성(心星)의 세 별을 침범했다. 운성(隕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백성들 중에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뉜다.”라고 새겼다. 진시황이 그 사실을 듣고 어사를 파견해 하나씩 심문했으나 실토하는 자가 없자, 그 돌 가까이 거주하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그 돌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진시황이 기분이 언짢아서 박사를 시켜 “선진인시(仙眞人詩)”를 짓게 하고, 천하를 순무해 가는 곳마다 전령(傳令), 악사들로 하여금 그것을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가을에 사자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밤중에 화음(華陰),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벽옥(璧玉)을 쥐고 사자를 막으며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에게 갖다 주게.”라고 했다. 이어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걸세.”라고 말했다. 사자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벽옥을 놓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사자가 벽옥을 받들고 진시황에게 그 일을 상세히 보고하자, 진시황은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산귀(山鬼)는 불과 1년간의 일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또 퇴조(退朝)하며 말하기를 “조룡이라는 것은 사람의 조상일 뿐이다.”라 했다. 한편 어부(御府)로 하여금 벽옥을 조사하게 하니 그것은 바로 28년에 순무하면서 장강을 건너다가 빠뜨린 그 벽옥이었다. 이에 진시황이 그것을 점복(占卜)하게 하니 이동하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북하(北河), 유중(楡中)에 3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매 가구마다 작위 한 등급을 하사했다.
三十七年十月癸丑, 始皇出游. 左丞相斯從, 右丞相去疾守. 少子胡亥愛慕請從, 上許之. 十一月, 行至雲夢, 望祀虞舜於九疑山.262) 浮江下, 觀籍柯, 渡海渚.263) 過丹陽,264) 至錢唐.265) 臨浙江,266) 水波惡, 乃西百二十里從狹中渡.267) 上會稽, 祭大禹,268) 望于南海, 而立石刻269)頌秦德. 其文曰:270)
37년 10월 계축일(癸丑日), 시황제가 행차를 나서니 좌승상 이사가 수행하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이 도성을 지켰다. 막내아들 호해(胡亥)가 부러워하며 함께 따르기를 간청하니 황제가 허락했다. 11월에 운몽(雲夢)에 이르러 구의산(九疑山)에서 우(虞), 순(舜)을 제사 지낸 후, 장강의 물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적가(籍柯)를 바라보며 해저(海渚)를 건너서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唐)에 이르렀다. 절강(浙江)에 이르니 물결이 거세져 서쪽으로 1백 20리를 가서 강폭이 좁은 곳에서 건넜다. 회계산(會稽山)에 올라서 대우(大禹)에게 제사 지내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며 그곳에 비석을 세워서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했다. 그 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皇帝休烈, 平一宇內, 德惠脩長.271) 三十有七年, 親巡天下, 周覽遠方. 遂登會稽, 宣省習俗, 黔首齋莊. 群臣誦功, 本原事跡, 追首高明.272) 秦聖臨國, 始定刑名, 顯陳舊章.273) 初平法式, 審別職任, 以立恆常. 六王專倍, 貪戾傲猛, 率衆自彊.274) 暴虐恣行,275) 負力而驕, 數動甲兵.276) 陰通閒使,277) 以事合從,278) 行爲辟方.279) 內飾詐謀,280) 外來侵邊, 遂起禍殃. 義威誅之, 殄熄281)暴悖,282) 亂賊滅亡. 聖德廣密, 六合之中, 被澤無疆. 皇帝幷宇, 兼聽萬事, 遠近畢淸. 運理群物, 考驗事實, 各載其名. 貴賤並通, 善否陳前, 靡有隱情. 飾省宣義,283) 有子而嫁,284) 倍死不貞. 防隔內外, 禁止淫泆, 男女絜誠. 夫爲寄豭,285) 殺之無罪, 男秉義程. 妻爲逃嫁,286) 子不得母,287) 咸化廉淸. 大治濯俗, 天下承風, 蒙被休經. 皆遵度軌, 和安敦勉, 莫不順令.288) 黔首脩絜, 人樂同則,289) 嘉保太平. 後敬奉法, 常治無極, 輿舟不傾. 從臣誦烈,290) 請刻此石, 光垂休銘.
“황제의 공덕이 훌륭해 천하를 통일하시니 그 은덕과 혜택이 장구했다. 37년에 친히 천하를 순무하시며 두루 먼 지방까지 유람하시고, 회계산에 올라 풍속과 습관을 두루 살피시니 백성들이 공경하며 흠모했다. 군신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고 황제의 사적을 생각하며 황제의 고명(高明)하심을 회상했다. 진(秦) 왕조의 성왕(聖王)이 즉위해 처음으로 형벌의 명칭을 제정하시고 옛날의 전장제도를 명백히 밝히셨으며, 처음으로 법식(法式)을 공평하게 하고 맡은 바 직책을 신중하게 구분함으로써 영원불변한 기강을 확립하셨다.
육국의 왕들이 전횡(專橫)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오만하고 사나워져서 무리를 거느려 강력함을 과시하며, 포악하고 방자하며, 무력을 믿고 교만해 수차 군사를 일으켰다. 몰래 첩자를 통해 합종(合縱)을 도모하고 그릇된 행위를 일삼았으며, 안으로는 그들의 사악한 모의를 감추고 밖으로는 변경을 침략해 마침내 큰 재앙을 일으켰다. 정의에 입각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을 주살해 흉포와 반역을 소멸시키니 난리를 일으킨 도적들이 모두 멸망했도다.
황제의 성스러운 덕이 깊고 넓어 천하 사람들이 은택을 끝없이 입었으며,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만사를 다스리시니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모두 태평스럽게 되었다. 만물을 관리하고 사실을 증험해 각기 그 이름을 기록했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의견을 표시하게 해,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앞에서 진술하게 하니, 숨길 일이 없게 되었다. 허물을 숨기고 도의(道義)가 뒤섞여 자식이 있으면서도 재가하는 것은 죽은 지아비를 배신하는 부정(不貞)한 짓이니, 내외(內外)를 나누어 구별하고 음탕함을 금지시키자 남녀가 순결하고 진실해졌다.
지어미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남자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게 하니 남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을 준수했으며, 지아비를 버리고 달아나 재가한 여자는 자식들이 그녀를 어미로 인정하지 않게 하니, 모두 교화되어 정숙해졌다. 위대한 정치가 베풀어지니 풍속이 변화하고, 천하가 교화를 받아들이어 훌륭한 정치의 혜택을 입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규칙을 지키고 평화롭게 서로 권면하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이 선량하고 순결해 사람마다 즐거이 법령을 따르며 태평스러운 생활을 잘 영위했다. 후대 사람들이 법령을 경건하게 이어받아 변함없는 선정(善政)이 끝이 없으니, 수레와 배가 기울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에 수행 신하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며 이 비석에 새기어, 이 훌륭한 비문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간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