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커피
최 양귀
커피는 사람 기분에 맞추어 다양한 옷을 갈아입는 사교 여왕이다. 외출해 지인들과 아둘릴 때마다 나서면 눈코를 자극하는 운치와 오묘한 커피향은 이것에 면역이 없는 나러선 그림의 떡이었다. 사회 초년생 첫 출근 날 회식 자리에서 핫쵸코를 주문했더니 아이 같다는 주위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늦가을 골짜기 샘물에 떨어진 낙엽이 길손의 정서를 자극하듯 성인이 된 후부터의 삶에서도 언저리를 배회하는 애물단지였다.
한 모금이라도 마신 날에는 가슴이 쿵쾅 거리고 마음은 붕 떠서 백두산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마음이 흥분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잰걸음으로 같은 장소를 왕래하며 주위 사람에게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는 수다쟁이가 된다. 한밤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여 책을 읽거나, 미뤄 둔 집안일을 하든지, 거실을 서성거리며 후회를 시작한다. 여명에 눈은 천근만근이고 대낮 걸음걸이는 힘이 없다. 이것은 한 달에 한번 민나는 정도였지만 ‘멀고도 가까운 당신’으로 그럭저럭 지내왔다. 그러니 이 귀티 나는 갈색 친구는 최근 이사한 아파트 레스토랑에서도 식사 때마다 정장차림의 근사한 옷을 입고 여러 명의 동지와 줄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추위가 뒷걸음질하는 3월이다. 뷔페식 식사는 정리 공간을 거쳐야 마무리 된다. 공간 왼쪽에는 반들반들한 대리석 진열대 위에 헤이즐넛, 블랙, 디카페인 커피가 흰 선 눈금이 있는 동그란 검은 용기 안에서 달큼한 향기를 날리며 다소곳한 미소로 부드러운 손을 내민다. 정면에는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선택하여 마실 수 있는 정수기가 있고, 그 옆 적외선 소독기 안에는 컵들이 뜨거운 열 찜질을 하며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한다. 오른쪽에는 식판정리대가 여러 대 줄서서 누가 골고루 식사하고 건강한지 보살핀다.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본분에 충실하다.
이곳을 드나들 때마다 미묘한 갈등이 교차한다. 미각을 자극하는 커피향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먼저 식판을 선반에 올리고, 미지근한 물만 먹어야 건강하다는 정수기의 선함을 따라 소독기의 깨끗한 컵을 잡는다. 뜨거운 열을 이겨낸 컵의 따뜻함이 실핏줄 속으로 파고든다. 정수기는 반듯한 생각을 뒤흔드는 헤이즐넛의 향기에 눈을 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입은 물을 마시고, 눈은 산뜻한 차림의 제비 같은 갈색 얼굴을 보고, 코는 그윽한 향수에 도취된다. 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머리에는 차가운 생각이 손은 느낌표와 물음표를 오가며 기울기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한다.
순간의 기분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석이 쇠붙이에 끌리듯 디카페인에 손이 닿는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주 조금 두 세 방울을 컵의 남은 물에 섞어 마신다. 최선을 다해 양을 조절하건만 영락없이 소화불량이 뒤따라온다. 배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고 반성 기도를 한다. 달콤한 것이 심신을 자극하더라도 참아야 하고, 영혼까지 뒤흔드는 짙은 갈색의 속삭임을 멀리할 것을 다짐한다. 오 감각이 작동하기 전에 그 공간을 빨리 빠져 나와야 한다고 발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 공간을 드나들 때 정신은 이성에 집중하고, 애꾸눈으로 그것을 외면하고, 호흡은 잠시 멈춰 매혹적인 향을 무시하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미지근한 물만 마시고 빨리 그곳을 도망치듯 벗어난다. 소화기관은 만세를 부르며 주인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그것에 취하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한다. 암 그래야지 다시는 그 녀석 앞을 지날 때 조심하리라. 며칠이 지나 아주 편안한 소화기관의 즐거운 소리를 들으면 슬그머니 다시 그것이 손짓하는 곳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그 향을 거절하는 의지와의 싸움에서 뒤죽박죽 쳇바퀴를 몇 개월 째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식후에는 의례히 분위기 좋은 찻집으로 옮겨 각자의 기호 따라 따뜻한 차를 주문한다. 한 친구는 질문의 여지없이 늘 아메리카노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연초에 커피를 끊었단다. 여러 건강 사정으로 지난 연말 자녀들 앞에서 마지막커피를 마시며 선서를 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반신반의하며 재차 특이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권해도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핸드백에서 건조한 민들레꽃이 담긴 투명한 유리 실린더를 내민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친구도 할 말이 있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며 심각한 얼굴로
“최근에 소화가 잘되지 않은 날이 많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커피를 마신 날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커피에 대한 소회를 밝히며 굳은 의지를 말했다. 동기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보니 동병상련이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는 동년배 좋은 친구들이다. 혼자서는 실천하기 힘든 일도 친구들이 함께 하니 훨씬 무게가 가볍다. 우리는 뜨거운 물에 꽃차를 우려 편안히 마시며 서로 건강을 챙기자고 말했다. 삼겹줄은 단단하여 쉬 끊어지지 않음 같이 친구들이 힘을 합쳐 그 녀석을 물리친다.
이것의 검증은 끝났다. 우리 친구들 나이테가 너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변신을 거듭해도 할 수 없어, 우리는 단단히 각오를 했다. 애물단지에게 당당히 말한다. 미안하지만 엉거주춤 뒷걸음질만 하던 나도 이제는 입술을 깨물고 영원히 헤어지자고 마지막인사를 한다.
“그동안 불편한 동거로 힘든 적도 있었고, 조금은 풍요롭기도 했어. 너는 사람의 기분을 잘 아니까 너그럽게 받아 주리라 믿어. 이 지구촌에 사랑받는 네 친구들이 많잖아! 힘내! 안녕!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