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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5 15:58 http://blog.naver.com/abcd4737/9004661 |
立志시대 ( 147-156 ) 만주군관학교시절 박정희의 사상이나 인생관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최남근외에도 홍사익(洪思翊) 중장과 일본인 교관 간노 히로시(管野弘)가 있었다. 조선인 장교로선 일본군 내에서 최고의 계급 에 올랐다가 종전후 연합군에 의해 억울하게 전범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홍사익 장군이 박정희 가 2학년 초일때 군관학교를 방문해 온 일이 있었다. 고도의 친일행위를 하지 않고선 조선인의 처지에 어떻게 일군의 장성이 될 수 있었겠느냐는 조선인 일부 군관생도들의 의문을 깨끗이 불식 시켜 줄 정도로 홍사익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조선인 생도들만 별실에 모아놓고 홍사익장군은 가끔 조선말을 섞어가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했었다. "어느 분야이건 조선 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대우는 있다. 군대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군대와같은 폐쇄사회, 조직사 회일수록 드러나지 않는 차별이 더 존재한다. 그러나 선택된 조선청년인 군관생도 여러분들이 차 별을 이기려면 저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인, 즉 백의민족의 우수성을 과시 하는 것만이 차별을 이기는 첩경임을 여러분은 명심해주기 바란다…"마치 문중의 큰 어른이 집안 의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홍사익의 연설에 모두들 감격하 는 표정이었다. 이때 벌떡 일어나 일동을 대신해 답사의 말을 하는 생 도가 있었다. 2기생 박정희였다. 그는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로 통용되는 창씨개명한 공용의 이름을 제쳐놓고 스스로 조선이름 박정희라고 자신을 소개한뒤, 이렇게 말했다."각하께서 원로에 저희들을 찾아주시어 뼛속 깊이 새겨들을 좋은 말씀을 해 주신데에 대해 군관학교내 조선인 생 도들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들은 비록 각하를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는 처지이오나 각하께서 만난을 무릅쓰고 쌓아오신 신망에 부끄럼없는 후배들이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심신을 연마할 것을 맹세합니다. 모쪼록 가까이 계시지 않더라도 간접으로나마 좋은 말 씀 종 전해 주시길 바라오며 조선인 군관생도 일동과 함께 각하의 더 나은 무운장구를 빌겠습 니다" 박정희가 자청해서 답사에 나선 것이 동기및 선후배 생도들에게 조금도 건방진 행태로 비치지 않을 만큼, 패기와 박력이 넘치는 열변이었다. 그를 아는 군관생도들은 평소 과묵하던 그 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즉흥적이고 감동적인 열변이 쏟아지나 하고 놀랐을 정도였다.홍사익장군 의 군관학교 방문을 계기로 박정희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일본 군대내에서도 자신이 하기에 따라 조선인도 얼마든지 장성의 계급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지금까지 홍사익이 그런 예라는 것을 막연히 말로만 들어오다, 진중하면서도 의연한 홍장군의 실 체와 대면하게 됨으로써 노력에 따라선 자신에게도 언제인가 그러한 위세의 날이 없지 않으리라 는 확신이었던 것이다. 홍장군을 만난이후 지난날 이병주 등과 재미삼아 보았던 관상쟁이 영 감의 점괘가 되생각 났다. '삼군질타지상장'에 '치천하지대두령'이라던 바로 그 점괘였다. 가끔 생각나다가도 너무나 엄청나고 허풍스런 뜻풀이여서 기분이 우울할 때의 위안거리로나 떠 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지어보던 점괘였다. 글자 그대로라면 오히려 홍장군 보다 더 높이 올라갈 가능성 도 없지 않았다. 공상은 즐거웠다. 공상은 자유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알고 있었다. 홍사익장군이 결코 하루아침에 오늘이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에게 다가올 수많은 날들이 어느 것 하나 시련의 실오라기로 짜여짐이 없지 않으리란 것을. 그런 뜻에서 홍사익과의 만남은 박정희로 하여금 다 시 한번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군관학교시절의 박정희에게 또 한사람의 반면교사(反面敎師)였던 사람이 일본인 교관인 간노 히 로시였다. 교관이라곤 하지만 그는 일종의 촉탁강사여서 교직원 공식명단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 는'2·26사건'을 일으킨 황도파 청년장교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상급자인 대위급은 주모자 로 처형되었으나 소위로 참가했던 덕택에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 인물이었다. 간노의 처지를 동정 한 일본육사 동창들의 도움으로 멀리 만주군관학교로까지 일자리를 얻어 오게된 것이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였다. 1학년말인 어느 일요일, 박정희가 모처럼 아리가와 대좌가 대장으로 있는 신경근교의 제3수 비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간노와 개인적인 상면을 하게 되었다. 간노는 주로 2기생들을 상대로 한 전술교관 중의 한 사람이어서 이미 교내에서 얼굴이 익은 사이였다. 그러나 박정희와는 개 인적인 대화가 없던 처지였다. 그런 그를 아리가와 대좌의 숙사에서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선객 인 간노와 이야기하고 있던 아리가와는 박정희의 방문을 반기며 말했다. "오, 복꾸세이끼. 마침 잘 왔네. 간노교관은 잘 알테지?""알다 뿐입니까? 저희들의 전술교관인데 요. 간노교관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귀관이야말로 여기까지 웬 일인가?"간노가 좀 의외란 표정으로 반문하자 아리가와가 웃으며 말했다."두 사람 다 엉뚱한 곳에서 만나 이상하다는 얘기 지. 그러나 사람은 다 인연의 끈에 매달려 움직이는거야. 아 참 다까기 마사오로 창씨개명했다지 만 나는 옛 이름대로 부르겠네. 그래 복꾸군, 젊은 복꾸군에게 무언가 큰 도움이 되기 위해 간노 교관이 여기 나타난 걸로 해 둘까? 복꾸군. 대구사범시절 우리가 한번 2·26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 있지? 그때 내가 간노군에 대해서 이야기했던가? 대구보병 80연대의…"말이 끝나기 전 에 박정희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은사인 아리가와의 말에 급히 끼어 들었다. "예, 기억납니다. 이소베 아사이찌(磯部淺一)대위라 하셨지요? 2·26사건때 거사한 분 중의 한 분으로, 보병 80연대에 계실 때 자주 만나셨다는…. 그리고 아 참, 이제 생각나는군요. 이 소베대위님과 함께 대좌님께서 대구에서 가끔 만나셨다던 분이 간노소위님이었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간노교관님의 첫 수업시간때 어디선가 들은 이름같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던 까닭도 이제사 알 것 같습니다""맞았어. 역시 복꾸세이끼군은 알아줄만해. 보통의 기억 력이 아니야"아리가와가 박정희의 회고담을 듣고난 뒤 감탄해 하는 말이었다."귀관이 스쳐가는 대 화였다는데도 나를 기억해주니 정말 고맙군. 대좌님, 이 먼 변방의 군관학교에도 가끔은 이런 비 범한 인재가 있어 교관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암, 그렇고 말고. 복꾸군은 사범학교때부터 눈에 뜨이는 인재였어. 특히 교련동작은 일품이었어. 훌륭한 장교가 될 자질을 지녔으니 간노군이 특 별히 지도해주게. 복꾸군도 앞으로 간노교관을 자주 만나 군관학교에서 못 배우는 비장의 가르침 을 전수받도록 하게" 군관학교에서 못배우는 비장의 가르침이 어떤 내용인지 알 리 없었으 나 박정희는 은사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임을 알고 무조건 고마움의 뜻을 표했다. 이날 세사 람은 아리가와가 간략히 마련한 주효를 들며 만주의 정세와 일본내 군부의 동향, 그리고 만주생 활의 희비 등에 관해 서로의 소견과 소감들을 주고 받았다. 그러자 대화의 폭이 넓어질수록 간노가 가담했던 2·26사건에도 화제가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노가 불콰한 얼굴로 흥분조로 말했다."대좌님, 저는 자다가 생각해도 억울해서 벌떡 일어나는 판입니다. 글쎄 다 된 거사였는데 해군놈들이 딴전을 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독점재벌들이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사리는거 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아 글쎄 그 뱃놈(해군)들이 팔짱을 낄 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더 바짝 밀어붙이는건데…""죽은 자식 나이 헤아리는 짓이야. 그만 술이나 들게" 아리가와 대좌의 숙소에서 만남 이후, 박정희는 간노에 관해 비상한 흥미와 궁금증을 함께 느꼈 다.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그가 주동장교의 한사람으로 가담했던 2.26거사가 어째서 3일 천하로 실패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박정희와 그런 문제에 허물없이 말할 사이라고 믿었던지 뒷날 간노 는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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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급 청년장교들만이 주동한 것이 잘못이었네. 위관급은 패기있는 행동파는 될지 몰라도 장년층 이상의 보수파들을 안심시키기에는 경륜도 권위도 모자랐던 거야. 좌관급(영관급)은 당연하고 들러리로나마 장성급을 몇사람 끼워넣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어. 게다 가 사실 해군에도 뜻맞는 동지들을 포섭했어야 했어. 거사에서 소외된 세력이 반대파로 돌아서지 못하게 말이야""대신들을 즉결처분한 것도 좀 과하지 않았을까요?"박정희가 물었다. 그도 줄곧 2 ·26사건에 관한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읽어와 대강의 경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쿠데타 봉 행동 즉시 사이또 내대신, 다까하시 장상, 와다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좋은 지적이네. 역시 경륜이 모자랐고 혈기만 앞섰던 탓이었어. 가두어만 두어도 되었을건데 피를 보게한 것은 지나쳤어. 쿠데타 초기에는 물렁하게 넘어가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공포감을 줘 서도 안되는 거였어. 적대층을 결속시켜 반발하도록 한것이 잘못이었어. 요컨대 주동세력을 전술 ·전략적으로 지도해 줄만한 권위있는 리더를 갖지 못한 것이 최대의 실책이었지. 그만큼 계획 이 치밀하지 못했던거지""그렇지만 일단 당일의 거사는 그만하면 완벽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1천4 백여명이란 소수의 병력으론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운이 좋았지. 막상 실행에 옮겨 보니 그 병력으론 태부족이야. 적어도 그 두배는 됐어야 했어. 반쿠데타 세력의 출동을 견제하는 심리적 인 효과면에서도 말이야. 그러나 어쨌든 운이 좋아 일단은 거사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뒷심이 부족했어. 그 원인은 아까 말한대로야"박정희가 20년 뒤 5·16을 일으키게된 역사적, 심리 적인 배경에는 간노 히로시와 나눈 이같은 대화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아리가와가 "사람은 다 인연의 끈에 매달려 움직이는거야"하며 간노를 소개하던 것도 20년 뒤를 겨냥할 때 참으로 적 중한 예측이었던 셈이다. 간노로부터는 이 밖에도 쿠데타 당일의 마음가짐, 거사 실패 직후의 허 탈감 등에 대해서도 소감을 들었는데, 실패한 직후에는 누구나 '셋부쿠'(切腹·절복)할 결심이었 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더군.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만주의 낭인신세지"자 조의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간노의 얼굴에는 패자의 비애와 함께, 어딘가 인생을 체념한 것 같은 깊은 허무감이 배 있었다. 그래서인지 간노는 통제파군부가 쥐고 흔드는 현재의 일본은 얼마 못 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박정희에게 다음과 같은 엄청난 이야기를 귀띔하곤 했다."일본이 손을 들면 자네들의 운명도 180도 달라지고 말 것이다. 그날에 단단히 대비해야지 행여 일본을 위해 몸 바친다는 생각은 말아라. 복꾸군은 특히 중국인(만주계) 생도들과 친해 두어 조선과 만주 가 일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때를 대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군관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경제, 사상, 군사관계 책들을 주며 열심히 읽어두도록 당부하곤 했다. 나중 알게 되었지만 박정희에게 뿐만 아니라, 민족혼이 강해보이는 몇몇 중국인 생도들에게도 가만히 불러 당부와 격려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간노 히로시는 이처럼 다소나마 민족혼을 깨우쳐 준 의외의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먼 뒷날의 야망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준 훌륭한 반 면교사였다. 5·16의 성공은 박정희의 뇌리에 남아 있던 간노의 실패담에서 교훈적 연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기의 박정희에겐 이토록 인복(人福)이 많았던 편이다. 조선인 생도와 중국인 생도들에게 가만히 민족혼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간노 히로시는 열 렬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런점에서 그는 황도파 다운 철저한 국수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도 했다. "일본이 근년에 가장 잘 한 것이 무엇인줄 아나? 쇼와 12년(1937년) 11월 독일과 이태리와 맺은 3국방공협정이네. 그런 점에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지. 일본도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에 소련의 배후를 공격해 국제공산주의의 심장부터 박멸했어야 했는데 아쉬웠어. 반면에 장개석(蔣介石)의 중화민국정부가 가장 잘 못한 짓이 국공합작(國共合作)선언이네. 장학량(張學良)이 일으킨 서안(西安)사변에 떠밀려 장개석이 어쩔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곤 하나 중국의 천하는 미구에 팔로군(八路軍)의 차지가 될걸세. 따라서 관동군도 관심의 초점을 중국공산당 쪽으로 돌려야 해" "그렇지만 간노 교관님. 공산주이는 왜 안된다는 겁니까? 어떤 점이 무섭다는 겁니까?" 박정희는 진 정으로 궁금해 물어 보았다. 간노이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것 같았다. "자네 정말 몰라서 묻나?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야말로 아편 이상의 종교야. 그들의 소위 유물사관에는 진정한 인간이 들어갈 틈이 없어. 그들의 무산혁 명, 계급투쟁에는 엄격한 규율, 이를테면 당성과 계급성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혁명이나 투쟁은 인간을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거기 인간성이 게재할 틈 이 없으니 혁명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은 결국 소수 지배층, 혹은 1당독재를 위한 구두선에 불과 해. 파시스트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도 데모크라시를 억압하는 점에서는 독재지. 그러나 거기 에는 최소한 개인의 성취욕이며 창의력을 인정하는 시장경제의 길은 열어 두고 있어. 공산 주의는 모두를 공동의 소유로 한다지만 그것은 결국 1백 퍼센트 자신 아닌 남의 소유, 곧 당의 소유야. 당의 소유인 한 결코 분배의 정의는 이뤄지지 않아. 왜냐? 피를 흘려 당권을 쥔 최고 권력자에게 모든 권리와 영광이 돌아가야 하니까…" 간노의 열변에 박정희는 잠시 빨려드는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간노의 논리가 너무 비약적인 까닭도 없지 않았지만 박정희의 넉넉지 못한 독서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가 많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간노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되었고, 간노와 같은 시대의 행동파요, 낭 인이 이해득실이라곤 전혀 없는 식민지 조선 청년인 자신에게 열변을 토해 마지않는 것으로 보 아 공산주의란 함부로 덤벼들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가 마음속으로 존경해오던 최남근의 견해는 간노의 인식과는 사뭇 달랐다. 언제인가 만났을 때 간노와 비슷한 논리를 전개해 보이며 공산주의는 경계해야 할 사상이 아닌가고 비춰본 적이 있 었다. 그러자 최남근은 여느때 답지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나도 뭐 공산주의가 중 뿔나게 좋다고 설명할 밑천은 못 가졌쉐다. 하지만서두 첫째는 그들의 항일정신만은 좋게 보오. 팔로군이건 조선혁명군이건 항일무장투쟁 하나만은 사심이 없어 보인단 말이오. 팔로군은 장개석 의 국부군과는 달리 작전지구의 민폐가 거의 없다지 않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오? 나는 국 공합작선언이야 말로 중국인으로선 최대의 대국인다운 업적이라 믿는 사람이외다. 나나 박형이 나 일본놈, 아니 박형 말 마따나 비록 몸은 왜놈의 번견(番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세상 돌아가 는 이치만은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아야될 것 아니깝세? 공산이건 뭐건 조선민족이 독립하자는 대 명제 앞에선 대동단결 못할게 뭐 있겠소?" 간노와 상반된 최남근의 시각을 통해 박정희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보다 더 이해할 것 같았다. 강덕(康德)9년(1942년·쇼와 17년) 3월23일 월요일 오전10시. 만주육군군관학교가 있는 신경 교외 라라돈(拉拉屯·나나둔)언덕의 동덕대(同德台)에는 우렁찬 군악과 함께 성대한 관병식(觀兵式)이 펼쳐졌다. 박정희가 속한 군관학교 예과2기생들의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부의황 제를 대신해 간(干) 치안부대신과 우(禹)시종무관 등 만주국의 고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거행된 관 병식은 난구모 신이찌로(南雲親一郞·중장)교장의 졸업서류증정 순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씩씩하고 질서에 찬 관병식이 끝나 자 졸업생 일동이 무도장(武道場)에 도열한 가운데 졸업생도대표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강연에 이어 유도와 검도의 시범경기가 행해졌다. 오전 11시50분부터 다시 교정에 모인 졸업생들은 한 사람씩 졸업증서를 수여받기 시작했는데, 우등생 5명이 부의황제를 대신한 우(禹)시종무관으로 부 터 은사상금(시계)하나씩을 전달받았다. 5명의 우등생 가운데는 일계(日系) 2명, 만계(滿系) 2명 과 함께 선계(鮮系·조선인)로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 졸업생이 있었다고 3월24일자 '만주일보 '는 보도했다. 창씨개명한 박정희였다. 이날의 졸업식모습을 '만주일보'는 '육군군관학교 예과생도졸업식/영예의 은사상배수자 5명'이 란 표제 아래 은사상품을 전달하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2면(종합판)의 중간톱 크기로 보도했다. 상품을 전달받는 사진은 공교롭게로 마침 박정희가 대열의 앞에 나와 차렷자세로 경례를 붙이는 순간의 스냅이었다. 지금까지의 박정희 전기류(傳記類)에는 이날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가 졸업 생을 대표하여 '어전강연'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의황제는 이날 처음부터 참석하 지 않았고 졸업생을 대표한 강연도 일계 졸업생 오까미 외에, 고야마(小山)란 같은 일계 졸업생이 행한 것임을 '만주일보'의 보도를 통해 알수 있게 된다. 박정희는 따라서 일계와는 별도의 만 계 졸업생 2백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한 것일뿐, 어전강연설은 와전이었다. 만계 중에서 수석 으로 졸업하게 된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우선 나이나 학력, 경력면에서 동기생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뿐더러, 빈부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동일한 조건하에서의 성적경쟁이었던 만큼 기질적으로 군인적성인데다, 야심만만했던 박정희를 동기생들이 따라잡기는 어려웠기 때문 이었다. 박정희와 함께 은사상을 받은 만계 졸업생은 유보선(劉寶善)과 장금당(張金堂)이었는데, 유보선은 1년뒤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중 병사하는 바람에 박정희와 장금당만 임관하게 된다. 그 런데 일설에는 박정희가 군교 2기 졸업생 중에서 일계·만계를 통털어 전체에서 수석을 했다고 도 한다. 4기 졸업생인 강문봉(姜文奉·뒷날 중장·2군사령관)은 영화관의 뉴스프로에서 "황제폐 하의 상을 받게된 영광의 수석졸업생 박정희생도"라는 호명을 받자 박정희가 다부지고 침착한 모습으로 나와 상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이에 자극받아 강문봉도 군관학교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인데, 신문보도와는 다른 개인의 기억이 어느정도 정확할지는 의문으로 남는 다. 한편 졸업성적이 10위권 안팎에 든 조선인으로는 이한림, 이섭준, 김재풍등이 있었다. 이 들은 나중 박정희와 함께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졸업식에서 있은 황제 하사품의 수상을 계기로 박정희의 흉중에는 새로운 자신감이 치솟았다. 그 이유로 첫째, 그의 중 학시절인 대구사범 재학시절에 여러번 짓밟혔던 자존심을 회복했던 까닭이다. '나도 하면 된다'' 나도 해 내었다'는 자신감은 다가올 앞날에 대한 용기있는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이때 얻 은 자신감이 갖는 의미는 컸다. 둘째, 어차피 군인으로 일생을 살기로 한 이상 개인 인사고과표 에 기록될 만계 수석이란 예과졸업성적은 어디를 가나 자신을 보증해 줄 신표(信標)였기에 든든 했다. 그리고 셋째는 아리가와며 강재호, 최남근, 정일권 그리고 간노등 자신을 격려, 성원해 준 만주의 지인은 물론 고국의 친지들에게도 이 정도로 나마 1차적인 마음의 빚을 갚았다는데서 오는 후련함이 그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무렵 승진하여 변경의 국경수비대로 나가 있던 강재호소교(소령)는 1기때 박임항(朴林恒)이 수석을 한데 이어 박정희가 다시 수석을 차지한 것을 보면 조선인의 기개는 결코 시들지 않았다는 축하의 편지를 보내왔다. 아리가와는 간노와 합석하 여 마련해준 축하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가 더욱 중요하네. 자신감과 자만심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간노도 격려와 함께 경계의 말을 덧붙였다."대좌님 말씀이 맞네. 골목씨름에 자만 해서는 결코 요꼬즈나(橫綱·일본 씨름꾼의 최고위)가 될수 없네"간노가 자신의 1차적 성취를 골 목씨름에 비유했지만 박정희는 섭섭키는 커녕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맙게 들렸다. 예과를 마친 군관학교 졸업생이 본과에 진학하기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부다이스키 (部隊付), 즉 약칭 `다이스키'(隊付)였다. 다이스키는 견습군관으로 직접 부대에 배속되어 부대의 운영이나 사병의 통솔 등, 자신이 소속된 병과에 걸맞은 실습을 하는 것을 뜻했다. 요즘 말로 하 면 장교수습근무인 셈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박정희의 경험에 비추면 졸업전 나가는 교생(敎 生)과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의 예과졸업 다이스키 기간은 자그마치 6개월이었다. 1기 때에 비해서나, 군관 학교의 통상 교육과정에 비해 두배의 기간이었다. 일본육사에 유학가기로 선발된 졸업생의 경우, 그해 10월로 잡힌 입학일자와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의희망 같아서는 조선인만으로 구성 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나, 간도둔림대(間島屯林隊)에 배속되었으면 했었다. 국내의 정세며, 재 만 조선동포의 실태, 그리고 조선독립군의 동향등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다. 특히 간도특설대에 는 최남근중위가 근무하고 있어 배속희망이 간절했다. 단지 그 정도였을 뿐, 특설대와 같은 특수 부대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1939년에 설립된 간도특설대와 같은 특수부대는 조선 인처럼 그 지역 실정에 밝은 소수의 단일 민족만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었다. 소부대를 운용하 여 기동성 있는 유격활동을 하게하려는 취지였다. 만주에는 이 무렵 간도특설대 외에, 1937년에 설립된 백계(白系)러시아인 부대인 아사노(淺野)부대와1939년에 생긴 회교도 부대, 그리고 오로촌 공작대(오로촌족)가 있었고, 1941년에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이소노(磯野)부대도 생겨났었다. 관동 군이 각 민족의 장점을 활용해 모략적인 작전에 사용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그 성과가 사실상 실 패로 끝난 부대들이었다. 그 대신 박정희는 하얼빈에 있는 관동군 보명 제30연대 177부대, 일 명 다까다(高田)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의 시바다 기요시(紫田淸)중위 밑에서 다이스끼(隊體) 근무를 하는 동안 만주군과의 연락업무를 맡아보면서 만주군의 실상을 알게된 것이 수확이었다. 그가 다이스게근무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관동군과 합동훈련을 벌이고 있는 만주국군의 자질이 생각밖으로 형편없다는 사실이었다. 가까이서 접해보니 사병의 대부분이 빈곤한 가정의 출신이라는 것과, 영내 생활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었 다. 그러나 만주군 일반 사병의 심리가 전투기피의 심리로 가득 차 있는데다, 교육훈련 중에도 상 당수의 도망자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먹고, 자고, 노는 것을 군대생활의 낙(樂)으로 알고 있는 것 이 큰 문제였다. 하급간부의 심리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유부단하며 결단력이 결 핍되어 있기 보통이고, 자기의 의지와 합치되지 않는 일에는 적극적인 의사표시는 커녕 `하오 (好.좋다)란 한마디로 넘기고 마는 것이었다. 또 맨즈(面子), 즉 체면을 필요이상 들고 나오는데는 기가 막혔다. 뿐만 아니라 영(營.대대)장, 연(連.중대)장 등은 부대의 제비용을 중간 착취하기가 버 릇이었고, 겉으로만 번드레할 뿐 거짓말은 예사로 했으며,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 기 보통이었다. 바다 기요시 중위도 혀를 차면서 박정희의 관찰에 공감을 표했다. "다가끼 마사오, 어때? 자네 눈에도 오합지졸로 보이지? 공산계의 팔로군(八路軍)은 지금 사기가 오를대 로 올라있는데 만주군은 이 모양인데다가 향락주의에 젖어 있고, 공과 사를 혼동하며, 금전에만 관심이 깊으니 당해낼 수 있겠어? 어떻게 보면 시나진(支那人.중국인의 비하)들이 우리 일본인들 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저런 태업(怠業)을 하는것 같은 생각도 들어. 어리석은 척하면서 저들은 일만일덕일심(日滿一德一心)이니, 왕도낙토(王道樂土)니 하는 우리의 구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사실 누가 누구를 속이는지 모를 때가 많아" 결국 다이스키생활 6개월 동안 박정희는 만주군 의 실상을 파악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동시에 자신과 같은 조선인 출신 군관이 앞으로 해 야할 일의 영역이 어느 정도인가도 대략 짐작된 것 역시 견습군관근무에서 얻은 수확이었다. 야, 복세이끼. 이기 얼마마(만)이고" "니가 오늘 찾아 오겠다는 편지를 받고 깜짝 놀라고도 반갑았다. 정말 육사에 유학하로 온 기 틀림없제?" 왕학수가 거듭 경탄해 마지않는 말에 박정희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한 뒤, 방안 을 둘러 보았다. 문학부 철학과에 다닌다는 소문대로여서인지 책꽂이에는 철학서적들이 태반이 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더 이마가 벗겨진 왕학수의 희멀끔하면서도 구김살 없는 얼굴표정은 꽤나 세상의 철리를 깨닫고 있는 젊은 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8년 전 대구사범 閨냅 입학식 날 맨처음 그와 인사말을 나누던 아득한 기억이 떠올라 박정희는 새삼 반가움이 치솟았다. 박정 희가 물었다."세월 참 빠르다. 니는 그래, 동경에 온지 한 4년 되제?" "니가 만주군관학교에 시험쳤다는 그 해 초가을이니 벌써 그렇게 되네. 대학입학은 3년째지만"" 동기들도 이곳에 지법 있다 카던데 더러 만나나""응, 긴쇼기찌(김종길)가 주우오대(中央大) 전문부 법학과를 작년에 끝내고 본과 경제학부에 다니면서 고문시험을 준비하고 있지. 그라고, 고쇼깡 (홍종한)과 고류슈(황용주)가 와세다대학을 거의 마쳤고, 하꾸니찌세이(백일성)가 메이지(明治)대 학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이야. 참, 니 하꾸니찌세이와 고쇼깡이 처남매부 사이가 된거 아 나?" 왕학수의 마지막 말에 박정희는 잠시 놀랐다. 금시초문이자 좀 뜻밖이었다."그기 참말이 가? 사범학교 때는 두 사람이 그리 친한 사이가 이니었는데?""동경서 유학하면서 부쩍 친해진 모 양이더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것이 방학때 귀국하면서 홍이 백의 집을 놀러가게 되었 고, 그러다가 백의 중 킹 경북고녀를 갖 나온 백의 누이동생과 혼사가 이뤄졌다카데. 신접살림도 동경 어디선가 하고 있다카던데 아직 몬 찾아봤다. 니도 왔으니 언제 한번 쳐들어가야지""고쇼 깡, 고놈 참 재주 좋은 놈이다. 하꾸(백)도 그만하면 매부 잘 얻었고""그래. 남 줄것 있나? 좋은 혼처이면 끼리끼리 해 묵으면 누부(누이)좋고 매부 좋은기지, 안그래? 하, 하, 핫" 왕학수의 너털웃음에 박정희는 따라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내심으론 어딘가 심란하고 쓸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애써 잊어온 이정옥이 문득 생각나서였다. 친구의 누이동생이란 인연 때문이긴 하지만 홍종한은 저렇듯 쉽게 고녀 출신 여인과 결합하는데, 나는 일껀 사귀어 놓고도 손도 한번 못 잡아본채 헤어져야 했으니 하는 자괴심에서였다. 그 뿐인가. 마음에도 없는 아내와 의 사이에 딸까지 낳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에 놓인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났다."요즘 전선의 확대로 군대생활이 더 힘들다 카던데 사관학교는 안 그런가?"다행히 왕학 수가 화제를 바꾸는 질문을 해 옴으로써 박정희는 우울한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어논 술잔을 입으로 털어 넣은뒤 박정희는 왕학수 앞에다 한잔 가득히 술을 따르면서 천천히 대꾸했 다. "와, 아이겠노? 말이 났으이까 하는 말이지만 만주군관학교 예과생활도 참 힘들었다. 한 겨울이면 수은주가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혹한, 혹서, 지옥훈련, 수수밥,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기 없었지. 이곳 육사도 더하면 더했지, 만군시절 못지 않을거야. 그렇지만 괜찮아. 장교가 될 라믄 그만한 각오는 해야지. 더구나 공짜로 믹(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불평할기 없지"체념한 것 같 기도 하고, 달관한 것 같기도 한 박정희의 말에 왕학수는 가슴이 뭉클한가 보았다. 그는 저도모 르게 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감동이 담긴 소리로 말했다."정희야. 니 참 고생 많았구나. 앞으로 휴 일때마다 꼭 놀러 오거라. 내 동경에 있는한 니 술 기갈은 내가 풀어 주께" 박정희가 '다이스끼'(견습부대근무)를 마치고 일본육사 본과에 입학했을 때의 조선인 동기로는 이 한림, 이섭준, 김재풍 등이 있었다. 중국인 생도는 유보선 장금당 장문선(張文善)등 30여명에 이르 렀으며, 일계 졸업생은 1백46명이었다. 입교 당시 1백70명이던 일계 생도들 가운데도 질병, 학칙 위반, 중도포기 등 갖가지 사유로 24명이나 탈락했던 셈이다. 막상 육사에 입교하고 보니 일본내 에서 육사예과를 졸업하고 곧 바로 본과에 올라온 입교자수만도 무려 1천6백87명에 이르는데 박 정희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은 유학파들과는 강의실이나 숙사가 달랐다. 또 이들 가운데는 항공병과이거나 경리장교 후보생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항공후보생 들의대부분이 졸업 직후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로 뽑혀, 그중 7백여명이 전사함으로써 '비운의 57기'란 탄식의 말을 남기게도 된다. 입교 첫날, 제36대 육사교장인 우시지마 미쯔루(牛島 滿)중장은 특별히 만주군관학교 예과출신 생도들에게 들으랍시 고, "육군사관학교는 대일본제국 남아에게 천황을 위해 죽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다"고 경구성 엄포를 늘어놓았다. 박정희에겐 모처럼 선택된 장교교육 과정을 밟게된 이상 철두철미 일본군 인이 되라는 소리로 들렸다. 다분히 기분나쁜 소리였지만 저항이 느껴지거나 위축되지는 않았다. 행사때마다 일상 그 비슷한 소리를 들어온 바였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전국(戰局)으로 보아 그 정도의 엄포는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되어서인지 정작 우시지마는 자신이 말한대 로 3년뒤 오끼나와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전사하고 만다. 교실과 기숙사는 달랐지만 군교예 과졸업생이건 육사예과 졸업생이건 교관이나 교과과목은 똑 같았다. 교수부에서 가르치는 전술 학, 전사, 군제학(軍制學), 병기학, 사격학, 항공학, 축성학, 교통학, 측도학(測圖學), 마학(馬學), 위 생학, 교육학, 외국어 등 13개 학과가 우선 동일했다 또 훈육부에서 가르치는 교내외 훈련, 진중 근무, 사격, 검도, 체조, 마술, 전령범(典令範), 복무제요(服務提要)도 같았는데 다만 시간 배정이 약간 달랐을 뿐이다. 따라서 졸업하면 다같은 57기가 되었다.51기때부터 동경의 교외 가나가와껭 자마(神奈川縣 座間)로 옮겨와 '상무대'(相武臺)로 불리던 육사본과의 수학기간중 박정희는 만주 시절보다는 급식사정이 좋아져 한시름 놓였었다. 육사예과 출신이나 군교 출신의 일계(日系)와는 달리, 만군계에겐 육사당국이 외국인 유학생 대접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학생이라고 특별식을 배식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고량밥 아닌 백미 혼합에다가, 무엇보다 양껏 먹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 말기의 날로 쪼들리는 식량난 아래에서 세끼를 그런대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만도 여간 행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인 생도들은 그런 외국인 유학생들을 몹시 부러워 했다. 한 기 후배인 58기 때는 급식사정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일계들과 한 기숙사에서 같은 대우를 받은 군교 3기 출신인 최주종(崔周鍾.뒷날 육군소장 최고희 의의원)은 하도 배가 고 파, "내 아들은 절대 육사에 안보낸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그의 동기생들은 졸업식날 육사정문 에 소변을 보고 가자고 공론했을 만큼, 굶주리며 보낸 수학기간에 치를 떨었던 수난의 기수였다. 실제로 육사 58기생 가운데는 6명이나 밥을 훔쳐 먹다가 들켜 중도퇴학당했으며, 입교때 75㎏이 던 최주종은 졸업때 61㎏로 야위었을 정도였다.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던 박정희등 2기생 조선인 유학생들은 오히려 일요일 외출 때 도시락에 밥을 잔뜩 눌러 담고 나와, 자취를 하면서 여고에 다니고 있던 이섭준의 누이동생에게 주는 여유까지 있었다. 육사생도들의 월급은 만주군 관학교 때처럼 9원이었다. 맥주 1병에 82전, 우유 1병(1합)에 12전, 면양말 한켤레에 46전 할 정도 로 도쿄의 물가가 비싸 만주에서처럼 요긴히 쓰기엔 모자라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외출 때는 누가 뭐래도 그 돈으로 술과 담배는 빼놓지 않고 사마시며 피웠다. 술과 담배, 여자는 삼금 (三禁)으로, 엄격히 금하던 육사의 교칙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인이 박인 술과 담배를 즐겼으며, 용케도 걸리지 않고 마시고 피우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육사본과의 강의시간은 체조와 검술의 경우 1회에 1시간 30분, 마술(馬術)은 2시간, 교련만은 반 나절이었을 뿐, 나머지 학과는 거의 1회에 50분이었다. 육사가 가장 역점을 둔 학과는 전술학, 전 사(戰史), 군제학이었는데 2년 과정동안 이 3과목의 강의횟수는 모두 4백60회였다. 그 다음으로 중요시한 과목이 병기학, 사격학, 항공학으로 총 2백66회를 가르쳤으며, 축성학, 교통학, 측도학은 세번째 비중을 두어 모두 1백80회의 강의시간을 배분했다. 이 가운데 박정희생도 가 좋아한 과목은 전술, 전사, 병기, 사격, 축성, 측도, 군대교육, 외국어, 교련, 검술, 마술 등이었 다. 전술학은 전투 및 진중근무에 관한 제반 원칙과 요세전술의 개요를 터득하는 내용이었다. 이 를 위해 도상전술, 현지전술을 실시하고, 각종 전쟁의 실례를 인용해 배웠다. 또 전사(戰史)는 일 본이 참전한 주요 전역(戰役)의 개요와 내외의 저명한 전투를 골라 이를 연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전투정신을 도야하고 전장의 실상을 체득하게 되어 있었다. 병기학은 주된 병기의 구조및 기능에 관한 일반원리와 일본병기의 성능 및 구조 등을 익히는 내용이었다. 또 사격은 주로 포외탄도 (砲外彈道), 사탄산포(射彈散布) 및 사격수정에 관한 학리와 사격효력, 사격준비, 사격관측 및 각 종 사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한편 측도학은 지도조제의 원리 및 현지에서의 각종 측도방법, 지 형감식능력 등을 기르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전쟁·전술에 관한 학과공부는 기질적으로 군인취 향인 박정희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함께 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뿐 만 아니라, 군대교육학은 각종 군대교육의 목적, 정신, 교육실시의 요령 외에, 일반교육학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미 정규의 사범교육을 받은바 있는 박정희로선 쉽게 친근해 질 수 있는 내용 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또 외국어는 영어, 불어, 독어, 노어, 지나어(중국어) 중에서 택일하게 되어 있었는데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점과, 졸업후의 근무지를 고려해서 박정희는 자연스레 만주현지어 인 지나어를 선택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학생시대부터 검도에 열중해온 박정희였던 만큼, 육사본과의 검술수업시간이 누구보다 기다려지곤 했다. 검술은 일반 군도술(軍刀術)교육은 물론, 총검술과 그 교육법의 요령을 배우는 내용이었는데, 검도에 단련된 그로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훈육부에서 가르치는 정신훈화 시간은 박정희로 하여금 일본무사도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실감있게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장교로서의 덕성배양과 부하통솔 상의 능력을 기르는 내용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궁극적으로는 무사정신을 언급하게 되었고, 일본군인 의 사생관(死生觀)에까지 담론이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사도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앞서 교관들은 "의(義)는 산악보다 무거우며, 죽음은 깃털보다 가벼운 것임을 명심하라"는 1882 년 명치유신 시절의 '군인칙유'를 곧잘 들먹였다. 또 무사도란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란 1710 년 시절의 '하가쿠레'(葉隱)도 자주 인용했다. 이와 더불어 무사도에 관한 연구서적들을 읽고 그 감상문을 써 내도록 권했는데 박정희는 교관들의 권유에 ┨茶 보다 스스로가 흥미로워 관련서적 들을 찾아 읽었다. 이 무렵 박정희가 독파한 무사도 관련 서적으로는 1834년에 간행된 다이도오 지 유우장(大道弄友山)의 '무도초심집'(武道初心集)과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의 '무교전서강독'(武 敎全書講讀), '사규칠칙'(士規七則)등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야마시가 소유끼(山鹿素行)의 '사도 '(士道)와, '무교소학'(武敎小學)등도 즐겨 읽었다. 그 옛날 나폴레옹의 전기를 탐독했던 것처럼 무사도에 관한 각종 서적을 즐겨 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본육사 입교를 계기로 박정희는 군 인정신의 추구에 몰두해 가고 있었다. 육사란 특수사회 안의 팽배한 기류는 말할 것 없고, 전쟁 말기의 군국주의 치하의 일본사회 전체가 광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풍 조였던데 영향을 받았던 까닭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가 일본육사 본과에 입학했을 당시 본과에는 만주군관학교를 1기로 졸업한 7명의 선배들이 재학중이었다. 이주일(李周一) 박임항(朴林恒) 최창언(崔昌彦) 김민규(金敏奎), 최창윤(崔昌崙) 조 영원(趙永遠) 김영택(金永澤)등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시절 후배들에게 걸핏하면 기합 잘 주기로 유명했던 최창윤과 박임항은 본과 신입생 박정희를 만나자 누구보다 반가워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 기합을 주고 받는 사이 남아로서의 끈끈한 우정이 싹 텄나 보았다. 1942년 10월 중순의 어 느 일요일, 2기생들을 위한 환영회식 석상에서 최창윤이 반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야, 박정희. 잘 왔다. 정말 반갑다야. 임자가 만계 2기 중에서 수석을 했다는 소식을 날래 들었지. 역시 임자는 대단 해"이어 박임항도 반가움의 말을 했다. "맞구 말구. 조선사람이 당연히 1등을 해야잖구. 1기와 2기 가 그랬으니 3·4기도 자꾸 그래야 조선사람 값이 올라가지" 박임항 은 1기졸업때 만계에서 수석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듣기에 따라선 수석을 한 자기자신을 떠벌리는 소리같이 들릴법 했으나 그 역시 기합끝에 정이 든 박정희에게 진정으로 장하다는 뜻을 전하기 위한 뜻임을 박정희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박임항의 기대와는 달리 3기때는 수석을 놓쳤 으나 4기때는 장은산(張銀山·뒷날 포병대령·50년대초 사망)이 수석을 차지했고, 5기 때는 강 문봉(姜文奉)이 잇달아 수석을 차지함으로써 조선인의 기개를 드높여 주었다.1기 선배들의 티없는 호의의 말에 박정희도 꾸밈없이 고마움을 표했다. "다 형님들이 지도해주신 덕택아입니까. 형 만한 아우가 없다지 않습니까?"듣고 있던 이주일이 감탄하는 말투로 끼어들었다."저 사람은 언제 나 저런 말 솜씨 때문에 호감이 더 간단 말이야. 어이, 한림이, 준섭이, 재풍이 자네들도 박정희처 럼 같은 생각인가?""아무렴 여부가 있습니까? 다 형님들 덕분이지요" 이준섭이 뜻밖에 큰 소 리로 대답하는 바람에 좌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만주군관학교 졸업생 1기는 일본육사 56기에 해당되었다. 일본육사 56기에는 조선인으로 이형근(李亨根·뒷날 대장예편), 최창식(崔昌植·공 병대령 6·25때 한강폭파책임으로 사형), 김종석(金鍾碩·중령·숙군때 사형), 최정근(崔貞根·전 사)등이 있었으나 박정희 기들과는 재학시 거의 접촉이 없었다. 계통이 달라도 만날 기회는 있 었으나 56기와 57기는 한 교정에서 함께 있은 기간이 불과 두달밖에 안될 정도로 너무 짧았던 탓이었다. 56기는 박정희가 입교하기 두달만인 1942년 12월에 졸업하고 떠났으므로 만군계 선배 들처럼 일부러 만남의 기회를 만들지 않고는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육사예 과 57기로, 박정희와 동기가 되는 예과 출신 본과생 가운데 김영수(金泳秀·김석원 소장의 2남· 필리핀서 전사), 김호량(金鎬梁·6·25때 전사), 정상수(鄭祥秀·전사)등 조선인 3인은 영친왕 이 은(英親王 李垠)이 마련한 '계림회'(鷄林會)휴게소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의 각 부·현 (府·縣)에서는 각각 자기고장 출신 육사생들을 위해 '일요 하숙'의 성격을 지닌 휴게소 겸 만남 의 장소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사고무친인 조선인 생도들은 갈데가 없어 당시 도쿄에 있던 영친왕 이은의 사저를 방문함으로써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이에 영친왕이 조선인 육사생도 친 목단체인 '계림회'를 위해 육사근처에 방을 하나 장만해 준 것이 계림회 휴게소였다. 영친왕은 방자(芳子)여사와 함께 가끔 들릴때마다 먹을 것을 내놓았으며 생도들도 추렴하여 생선초밥 등 을 사먹곤 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로 곧바로 들어온 1년 후배기인 58기의 정래혁(丁來赫·육 군중장), 박원석(朴元錫·공군중장), 신상철(申尙徹·공군소장), 안광수(安光銖·육군대령), 한용 현(韓鏞顯·공군대령), 최복수(崔福洙·6·25때 전사)등도 여기서 만났으며, 만주군관학교의 1년 후배로 유학온 최주종(崔周鍾·육군소장), 강태민(姜泰敏·육군준장)도 이곳에서 해후, 군교시절 의 회포를 풀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