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꿀 때 희망이 생기지만 꿈이 사라질 때 절망이 다가 온다.
1986년, 일본에서 가라데 시합을 참가하고 나서 하나의 꿈이 생겼다. 정상까지 도전해 보겠다는 의욕이었다. 이후 극진공수도 최영의 총재를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존경하는 최영의 총재와 좀 더 의미 있는 만남을 만들기 위해, 약속 몇 시간 전에 서둘러서 강남에 있는 에메랄드 호텔 연회장을 예약하고 자체 뷔페가 없어 출장 뷔페를 불렀다.
전국에 있는 관장들에게 전화를 해서 서둘러 모이라고 했다. 그렇게 70명 이상이 모인 환영 파티를 준비했다. 최영의 총재를 신사동에 있는 리버사이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준비해 놓은 파티장으로 이동했다. 그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총재에게 진지하게 의사를 물었다. "극진공수도 도장을 한국에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최영의 총재는 "한국에는 태권도가 있으니까..."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도 나는 최영의 선생이 한국인들끼리 편을 갈라 다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환영 파티장에서 최영의 총재는 일본인에게 절대 지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일본에서 성공하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일본을 이겨야겠다는 막연한 의욕이 생겼고 독자적으로 '국제격투기연맹'을 조직하여 "격투기로 일본선수들을 모두 꺾어버리겠다!"는 꿈을 꿨다.
그 당시에는 가장 많은 경기를 정동 MBC 문화체육관에서 개최하면서 스폰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은 유명 패션그룹인 (주)논노에서 후원을 받았을 때 나를 잘 알고 있던 회장께서 "자네가 왜 이런 대회를 주최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며 의아해 했을때 나는 "제가 아니면 한국에서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체육관에서 최고 레벨의 선수를 양성해 놓아도 출전 시킬만한 경기가 드물었다.
이후 무에타이까지 도입을 했고 태국 트레이너와 선수들을 초청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질적 양적으로 국내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그런 훈련을 소화해낼 수 있는 선수가 부족했다. 단순히 자질이 있는 선수도 부족했지만, 행여 인재를 발굴했다하더라도 내외부 요인에 의해서 오래가지 못했다. 시합을 지속적으로 개최하려면 흥행 몰이를 할 수 있는 선수층이 두터워져야 했지만 늘 그 자리였다. 자기 체육관 선수가 강하다고 떠들지만 정작 링에서 보여주는 실력은 수준 이하가 많았다.
한국 챔피언을 태국까지 데려가서 시합을 치루기도 했지만 기량 차이가 너무 컸다. 장충체육관에서 킥복싱 챔피언과 내가 태국에서 데리고온 트레이너와 시합을 붙혔을 때는 시작하자 마자 한국선수의 갈비뼈가 부러졌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현역선수도 아닌 트레이너에게도 상대가 될 수 없는 차이를 느꼈다. 절대적인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노력한 것은 훌륭한 선수를 만들 수 있는 트레이너를 초청하는 것이었다. 트레이너의 자질이 선수의 자질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태국에서 최고의 트레이너를 데려왔고 시합은 계속 열었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며 한 두어시간 짬을 내서 배우는 훈련으로는 세계적인 선수를 만들 수 없었다. 선수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선수의 생활비까지 뒷받침을 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번의 시합을 성공시키기 위해 매니저가 짊어지는 책임이 너무 컸다. 큰 돈을 들여서 시합을 주최해봐야 대부분 아마추어 실력들로 시합을 이끌다 보니 시합장은 거의 동네 건달들의 어깨 싸움과 별반 차이도 없었다.
세컨복을 하나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는 관장들과 기량 차이도 별로 없는 시합에서 승패가 엇갈린 선수간의 판정 시비는 시합 때마다 일상다반사였다. 세계적인 선수를 만들어 일본을 꼭 꺾겠다는 초심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증명할 수 없으면 신용할 수 없다는 최영의 총재의 말씀은 힘든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한국적 토양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1990년에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아이키도(合氣道) 2대 도주를 처음 만났을 때 최영의 총재와 비교되는 왜소함을 보고 나이 많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얕잡아 본 것이 사실이다. 일주일만에 다 배워서 오겠다고 혼자서 일본에 무작정 갔을 때에도 아이키도는 나에게 별것 아닌 일본 무술이었다. 27년 동안 전세계 선생들의 깊이와 장단점을 파악하면서 어느새 아이키도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마치 자식을 대하고 있는 부모처럼 그 단점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남편과 30년을 살았던 부인이 신뢰감이 가지 않는 남편을 떠나면서 집에 불을 지른다는 일본 속담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닌 위자료로 퇴직금을 모두 챙겨서 떠난다는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신뢰감이 없으면 분열하게 되어있다. 만약 내가 신뢰감없는 행위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면 불을 지르고 나간 부인처럼 분열되고 망가질 것이다. 오랫동안 만남이 숙성되어 갈 수록 신뢰는 더욱 깊어져야 한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친구가 되어라'는 속담이 있다. 싸움보다는 친구가 되는 것이 옳다. 그것은 국가간에도 개인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본 무도인 아이키도를 만나면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왜 미국과 유럽의 명망가들이 얼핏 봐서는 왜소하고 연약해보이기 그지없는 동양인, 그것도 일본선생들에게 최고의 예를 표하면서 배움을 갈망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는가?
서양사람들이 보이는 동양무술에 대한 테러와 같은 태도는 UFC와 같은 격투기에서 쉽게 나타난다. 이제는 아예 서양의 새로운 무술이 합리성을 갖추고 자리를 틀고있다. 이제 동양무술은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 가는 듯 하다. 격투기는 선수가 상품이다. 상품이 빛나면 그만큼 값어치도 높아진다. 하지만 투견장 같이 생긴 팔각의 링 안에서 무한경쟁을 빛낼 동양의 선수는 보기가 쉽지 않다. 이제 동양무술은 팔각 링 안에서 모두 죽었다.
처음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최영의 총재를 만나면서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의욕으로 피어났다가 만유애호의 도인 아이키도를 통해 동양의 힘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우열을 가리는 오랑우탄의 속좁은 싸움보다 자연과 하나되는 나를 찾고 싶다. 나는 그렇게 아이키도를 만났고 아이키도에서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았다. 이제 모든 문제는 아이키도 안에서 답을 찾는다. 나는 이렇게 아이키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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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로 유명한 김광한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던 날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의사(MD)인 임재우 반장이 미리 손을 써주어 보이지 않았던 위험을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걱정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더 좋은 컨디션으로 돌아온 만큼 더욱 깊어지는 수련지도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윤대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