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망 빠져나간 '변형 SSM' 판쳐 … "권리금·시설비도 못 건지고 폐업도 생각"
27일 오후 5시께 성북구 정릉동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정릉시장은 한산했다. 한파 탓이라고 하지만 설 전 대목을 체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장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그랜드할인마트가 눈에 들어왔다. 1700㎡에 가까운 55평짜리 슈퍼였다. 이 슈퍼를 운영하는
박은호 씨는 "할인마트라고 해야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서 2층의 좁은 다락방으로 기자를 인도했다.
◆'변형 SSM'의 위협 = 컴퓨터 한 대, 복사겸용 팩스기 한 대가 갖춰진 좁은 다락방에 들어서자 마자 박 씨는 '세계로마트'에 대해 성토했다.
이마트에브리데이가 시장근처에 터를 잡으려고 했던 게 2008년 8월이었다. 박 씨 등은 수퍼슈퍼마켓(SSM)에 대한 사업조정신청을 접수시켰다. 결국 이마트의 SSM은 입점에 실패했다. 1년간의 싸움이었다.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게 '세계로마트'다.
박 씨는 "이마트에브리데이는 1층짜리 점포를 생각해서 구조를 거의 만들어놨지만 세계로마트는 이미 만들어진 건물을 부숴
2층짜리로 더 확대했다"면서 "이마트 피하려다 더 큰 적을 만났다"고 설명했다.
같은 SSM이면서도 이마트에브리데이는 입점이 안 되는데 반해 세계로마트엔 허용되는 이유를 물었다. 박 씨는 "세계로마트에 들어와 있는 법인들은 대표자는 같지만 한 법인이 아니다"라면서 "매출이 200억원이상이 돼야 사업조정을 신청해 상권주민들과 협의를 하게 할 수 있지만 마트 안의 각 사업부문을 여러 법인으로 쪼개 매출을 나누는 방법으로 법망을 피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생법에서 체인점형태는 사업조정신청이 가능토록 하고 있어 포괄적으로 법을 적용하면 가능할 텐데도 서울시, 구청, 중소기업청 등은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다는 답변만 보내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성북구청은 세계로마트 현황조사를 통해 "세계로마트는 상시근로자 200명 미만 또는 매출액 200억원 이하로 중소기업에
속하며 대기업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며 중소기업판정을 내렸다.
◆유동인구 60% 줄어 매출 '뚝' = '변형SSM'이 들어서면서 박 씨가 운영하는 슈퍼의 매출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박 씨는 "SSM에서 7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일 600~700만원하던 매출액이 300만원대로 줄었다"면서 "이미 정육점 3곳, 슈퍼 2곳, 야채가게 2곳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변형SSM이 들어선 것은 지난해 9월 6일이었다.
그는 매출전표를 꺼내보여줬다. 8월 30일의 매출액은 710만원이었지만 9월9일엔 322만원으로 줄었다. 또다른 슈퍼는 262만원에서 208만원으로 감소했다. 매출액 차이가 큰 전표를 보여줬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SSM의 피해가 적지 않음을 시사하는 증거로 충분해 보였다. 그는 "변형SSM업체가 육가공업체까지 가지고 있어 주변의 정육점은 가격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됐다"면서 "1월에만 세일을 두 번째 하고 있는데 어떻게 경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재래시장 유동인구가 줄어들다보니 슈퍼뿐만 아니라 호프집, 순대집 등 모든 재래상인들의 얼굴은 울상이다. 그는 "유동인구가 60%정도 줄어들었다"면서 "시장에 들어와야 물건도 사고 둘러보면서 이것저것 구매하는데 아예 들르지 않으니까 장사가 될 리가 없다"고 털어놨다. 이어 "매출은 줄어들지만 월급 임대료 전기세 등 고정비는 오히려 늘어난다"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물건) 회전이 빨라야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고 특히 야채나 고깃집은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팔리지 않으면 피해가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변형SSM이 정릉뿐만 아니라 울산 청주 안산 광명 상암동 화양동 홍제 방학 등에 퍼져있어 이런 피해는 이쪽만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27년간의 장사인생 = 박 씨는 장사를 평생직업으로 삼고 일해 왔다. 65년생, 만 44세다. 성북구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기도 전인 3학년 2학기때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는 "집안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상고를 나오면 대부분 증권이나 은행에 들어갔는데 고졸학력으로 진급이나 벌이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취업원서가 왔을 때 혼자 손을 들어 건어물 장사에 발을 담갔다"고 말했다.
청계 4가와 5가 사이에 있는 중부 도매시장에서 일했다. 그는 "처음엔 포장, 운반을 주로 했다"면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 것은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이었고 북어만 10여년간 팔았다"고 회고했다. "총각 때라 돈은 못 모았다"고 서둘러 말했다.
결혼한 후에야 제 가게를 차릴 생각을 했다. 1년간 구두장사 해물탕집 간판집 등에 손을 댔다가 결국 정육점으로 잡았다. 32살이었다. 고향인 보문동 등지에서 7년간 정육점을 운영했다. 정릉시장으로 들어온 지도 7년째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일매출액이 500만~600만원정도 됐다. 권리금 시설비 합해 2억5000만원정도 들었다.
◆선택의 기로에 서다 = 건어물장사에서 정육점, 슈퍼로 이어진 박 씨의 장사인생은 새로운 기로에 섰다.
그는 "가게 팔고 나갈까도 생각하고 더 크게 만들어서 (SSM과) 경쟁을 해볼까도 생각했다"면서 "다른 곳에서 슈퍼를 해보려고 해도 모두 SSM때문에 죽을 맛이어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면서 "더 크게 만들게 되면 다른 상인들이 '경쟁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을 더 죽인다'면서 욕할 게 뻔하고 특히 40억원정도 드는 확장사업을 할 만큼 위험을 부담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구조조정도 골치다. 박 씨는 아내, 직원 3명과 같이 일하고 있다. 그는 "한명정도를 감원해야 하는데 2명은 6년 넘게 같이 일했고 결혼까지 한데다 모두 월세에서 사는데 어떻게 그만두라고 하냐"면서 "또 다른 한명은 막내인데 지난해 더울 때 들어와서 올해 추운데서 저렇게 고생하는 데 그만두라고 하기 어렵다"며 복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그는 "일매출 100만원마다 직원 1명씩 두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이미 5명이 일하고 있다"면서 "매출 300만~400만원인데도 이렇게 직원을 많이 가져가긴 어렵다"고 말했다. "사교육비도 한 달에 최소 150만원 들어가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자영업 구조조정, 반대하지 않아 = 박 씨는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속도를 늦춰 자영업자들이 경쟁력을 키울만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옛날엔 자영업자도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었다"면서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을 벌기 어렵다. 오전 8시30분에 나와서 밤 11시 30분에 들어가지만 적자"라고 말했다. 그는 "모아놓은 돈마저 없으면 폐업할 수밖에 없고 시설비 권리금도 제대로 챙기기 어렵다"면서 "시장이 죽어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을 대책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가장 좋은 대책은 유사SSM 등을 상생법을 적용해 차단해야 한다"면서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의 흐름을 막기가 어렵다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이라도 속도를 늦춰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물론 재래시장도 변해야 한다. 그는 "6월에 간판을 바꾸고 공공화장실도 만든다"면서 "조금씩 바꾸긴 하겠지만 잘 될 지는 잘 모르겠다"고 유보했다. 그는 "SSM은 깨끗하고 주차장, 포인트카드, 친절도 등이 강점"이라며 "상인들이 똘똘 뭉치면 막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그는 "자영업자가 많다고 하는데 사회구조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40대만 되면 명퇴를 걱정해야 하고 나와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무작정 자영업자 구조조정만 얘기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자영업자들이 구조조정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봤습니까. 비정규직으로 돈벌이를 하게 되고 이는 사회불안을 일으켜 전반적인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