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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룡정 원문보기 글쓴이: 봉천명
답글 모음>
천지가 생기기 이전의 것과 접촉되는 것은 불가하다.
지구가 생기기 전의 것과 접촉하고 싶으면 지구를 나가서 수도해야한다.
하지만 이것을 하는 미친자는 없다.
10단이 넘지 않았다면 하는게 아니다.
함부로 말을 하지마라 ..
말로 만이라면 우주나 우주이전이나 어떤 기운과도 하나될 듯이 하지만 도는 엄밀해야 한다.
허황되게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순서와 과정이 누락되고 비약을 감히 한다면 사상 누각으로 수도하는 것으로 결과도 볼것이 없다.
관념적이 말이지 현실에서 전혀 알수 없는 것이고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을 모아서 뭘 이루는 것이 아니다.
양으로 뭘 말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청양지기가 양으로 작다고 말할 것이 아니다.
그런것이 있는지도 알수 없을 뿐더러 무성숙을 이렇게 말하다해도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다.
선천일기를 조금씩 모아서 금단이 되지 않는다.
막대한 양이 필요하고 이것이 어디서 얼마나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정확한 양으로도 측정하는게 아니다.
이런것은 없다.
다만 생각의 즉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
생각하나 잘못함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생각과 마음을 기라고 해야하는데 이미 오해가 심해서 이해못한다.
단전이 형성되면 도르래운행을 한다.
이때를 말하는 것이다. 독맥으로 흐를려고 하는 그때이다.
참 어이없는 이론중에 하나다.
자신이 미망에 빠진걸 남탓으로 하지말라고 해야한다.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지 이상 한것 때문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이런 이상한 것을 몸속에 잇다고 믿고 싶은가 난 비위가 나빠서...
앞에서 설명을 했다.
다들 이런 식의 구분으로 신선을 나눈는데 좀 벗어나야 한다.
별로 지금은 천선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수도한다면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천지의 기운이나 훔치어 신선이나 되겟다고 한다면 너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
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수도라고 하고 싶다.
오직 내안에서 스스로 자긍심과 자존을 느끼고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불굴의 의지로 서서 이타행을 행하는 그 사람
이런 걸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려는 단순함이 있는데 마음의 적정으로 경험하는 주관적인 것이다.
호흡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는데,
그냥 태가 몸에 생기면 하는 들고 남이다.
코의 호흡으로 이해하는게 아니다.
이것을 호흡이 없거나 배꼽으로 하는 호흡이나 하는 설명은 의미없다.
코로 호흡하는 것이 사라지지도 않고 배로하는 것도 아니며 신비한 것도 아니다.
태가 몸을 감싸면 태 스스로 들고 남을 하는 작용을 한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태는 금단이 생성된후 금단이 확대되어서 태로 온몸을 안에서 감싼 것을 말한다.
즉 온몸이 태가 되고 그안에서 바른몸(양신을) 낳고 기른다.
이 단계를 가본 단체들의 수장이 별로 없어서 다들 이해를 못하고 추측으로 말할뿐이다.
도가 수련서의 호흡이 이런 코로하는 호흡을 말하는 것도 있고
이것보다 기의 운행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기의 운행을 말한다.
억지로 9라는 숫자에 맞추는것 같기도 하고..
양기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것도 좀 이해하기가 어렵고
음과 양이라는 개념으로 기운이나 수련의 질을 설명해야하는 이유도 잘모르겠다.
너도나도 성명쌍수를 말하지만 별로 그렇게 수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수련을 설명하는데 깨우침에 관한 것이나
그 방법과 기수련에서 각성의 의미같은 것은 별로 설명이 없다.
단전을 기만 끌어모으고 호흡으로 들이면 된다고 하지
마음을 다스리고 인식의 확장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설명이 없다.
각성이 단전과 연관된다는 말도 안한다.
중맥 이후에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다음단계로 못넘어간다는 것을 모른다.
공을 모르면 금단이 어렵다는 것도 말 안한다.
삼화취정은 각각의 단전은 여러갈래의 기운행길이 있지만
그중에 간단히 세개만 말하면서 이론을 전개한다.
각 세개의 단전의 운행방법은 같다.
이중에 머리의 운행길이 중맥이 열리고
그리고 대주천때 그리고 항상 이렇게 백회로 천기가 들어올때 이것을 받아들이고
내몸으로 흐르게 하는 작용을 수월하게 하는 운행이다
소주천과 대주천의 의미가 모두 다르게 말하는 것은 원리를 모르는 것이 있는데
내가 말한 원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이전에는 아무도 없엇기 때문이다.
내가 잘나서 이런 말하는건 아니다.
어쩌다가 관심갖고 연구한 것일 뿐이다.
대주천은 선계가 열리고 그곳과 연결되는 운행을 말한다.
그뿐이다.이후에 금단이 된다.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지
수련과정 중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삶과 수련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기와도 무관한 일이다.
과장이 심한데 생각보다 중맥개통은 쉽다.
난 중맥을 누군가 열어준다고 더빠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누가 열어주느냐가 더중요하다.
이유는 여기서는 이 다음은 저절로 수련이 진행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중맥을 열어준 사람의 경지까지만이다.
하지만 여기 천기도인은 중맥이상의 경지는 아닌 걸로 보이는데.
중맥개통 할때 수련자의 수도 경지도 맘대로 설정해줄 수도 있다.
스승 맘대로라는 건데 그래서 이건 조심스럽고 걱정되는 문제다.
이게 이렇지도 않다.
거기까지 남의 도움으로 갔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부족해진다.
그래서 나아가기보다 물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처음부터 빡시게 해야 나중에 진짜 힘들고 자기영역을 확보할때 힘을 쓴다.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으면 결코 외부에서 들어오기 않고 들어와도 배출된다.
아니면 병되거나 ...
수련의 진행은 기운의 양으로 하는게 아니다.
마음의 깊이로 하는 것이다.
이게 참 안타까운 지금수련의 오해다.
三삼丹단田전의 위치 (<===금선기공/도인학교 에서 발췌한 글 /읽고 비교해보세요)
◇ 下하丹단田전 :
氣宮 기궁으로써 하복부에 위치하며
人體 인체의 정면에서 보아 양쪽 귀 끝에서 하지 대퇴부 안쪽 선에 대각으로 交교叉차하는 점이 되고
방광 윗부분에 位置 위치하며
後面 후면에서 보아 양쪽 신장의 1/3 하단부 中央 중앙이 된다.
氣穴 기혈로는 기해혈 회음혈 명문혈 사이의 혈
則 즉 관원, 곡골, 장강, 요양혈, 등이 분포 되어 있다.
수행 시 의식( 觀관)하는 점은 下丹 하단전 中央 중앙이다.
◇ 中중丹단田전 :
人體 인체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며, 대개의 경우 가슴부위와 복부의 상부가 된다.
全面 전면에서 보아 천돌과 중완 사이의 충맥혈 부분,
後面 후면에서 보아 대추와 협척 사이를 말한다.
심장, 폐, 위장, 간장 비장 등의 내부 장기가 집중된 곳이다.
기혈로는 천돌, 옥당, 단중, 중정, 중완, 거궐, 대추,
신주, 신도, 영대, 심유, 지양혈 등이 분포되어 있다.
수행 시 의식( 관)하는 점은 양공(유체이탈법, 양신법)일 땐 양신이 위치한 부위이며,
음공(양생법)일 땐 단중혈 부위가 된다.
◇ 上상丹단田전의 위치 :
인체의 두뇌 부분을 말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시신경의 접점부위의 안쪽
즉 백회혈과 미간혈(신정혈 부위)이 종과 횡으로 직각을 이루는 점(이환혈)이다.
기혈로는 백회( 大天門 대천문) 전정( 小天門 소천문)인당, 미간, 태양, 아문, 옥침혈 等등이 분포한다.
수행시 의식( 觀관)하는 점은 상단전 중앙 (이환혈)이 된다.
任임督독二이脈맥氣기道도( 小소周주天천氣기道도)
임독2맥 기도는 인체의 생명을 얻게하는 주요 기혈도이며,
임맥 24기혈, 독맥28기혈, 합계 52기혈로 이루어져 있다.
인체의 정면에서 보아 承漿 승장에서 會陰 회음까지의 기도가 임맥에 속하며
인체의 陰部 음부에 속한다.
( 천돌, 옥당, 단중, 중정, 중완, 기해, 회음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인체의 후면에서 보아 長强 장강에서 尾樞 미추(꼬리뼈)를 지나 척추(요추) 경추(목뼈)를 거쳐
百會 백회부위를 지나 은교에 이르는 기도가 독맥에 속하며
인체의 陽部 양부에 속한다.
(장강, 양관, 명문, 협척, 대추, 아문, 옥침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 독맥 삼기도의 주요 기혈은 미려, 협척, 옥침으로서,
기운은 필히 이 삼기도를 통해야 하고
단, 미려는 요유혈(꼬리뼈) 부위를 의미한다.
正法 정법의 小周天氣道 소주천기도는 다음과 같다. (순서는 항상 法道 법도에 따라야 한다)
◇ 순서 : 하단전(기해혈 부위의 氣宮 기궁)→ 회음 안쪽(항문부위)→꼬리뼈 안쪽(장강, 미려, 명문혈)→
脊椎 척추 바로 안쪽(협척, 대추혈 등)→ 경추(목뼈 바로 안쪽)→ 두뇌 뒤 正中線 정중선(아문, 옥침)→
상단전(이환, 백회, 전정 부위)→ 이마 正中線 정중선 선앞 부위(전정, 인당, 미간)→
코와 입 목 正中線 정중선 선앞 부위(비주, 인중, 구신, 인후)→
가슴·배의 正中線 정중선(천돌, 단중, 중정, 중완)→ 하단전( 氣宮 기궁)
※의미 있는 氣道 기도는 미간에 임맥을 타고 내려오는 기운이
비주혈에서 갈라져 코 좌우 안쪽과 正中線 정중선이 구신(입천장 혈)을 통과할 때 혀의 안쪽에 다시 합해져
下降 하강하여 인후(목)로 빠지게 된다.
주의 깊게 관해야 할 점은 심장의 火氣 화기는 임맥(인체의 전면)을 타고 下降 하강하며
신장의 水氣 수기는 독맥(인체의 후면)을 타고 上昇 상승해야 한다.
十십二이經경絡락氣기穴혈脈맥
經絡脈 경락맥이란 인체의 血 혈과 氣기(심장과 신장)가 合합해진 氣運 기운이 유통하는 정류장,
즉 體內 체내를 유통해야 할 脈 맥길을 말하며, 左右 좌우의 1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에 비유하면 經脈 경맥은 줄기에 속하며 絡脈 락맥은 가지에 속한다.
전신과 四肢 사지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氣穴 기혈을 말한다.
주요 經脈 경맥은 中府 중부, 영향, 승읍, 대포, 극천, 청궁, 정명, 유부, 천지, 사죽공, 동자
氣門穴脈 기문혈맥이며 絡脈 락맥은 수없이 많다.
氣기經경八팔脈맥
인체의 총체적인 의미의 氣穴脈 기혈맥으로 몸과 마음과 뜻의 생명에너지 合成 합성및 交流 교류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氣穴脈 기혈맥이다.
氣經八脈 기경팔맥은 任脈 임맥, 督脈 독맥, 대맥, 충맥, 음유, 양유, 음교 양교맥으로 構成 구성되어 있다.
丹田呼吸 단전호흡의 순서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연단의 呼吸 호흡순서는 다음과 같다.
◇ 下丹田 하단전(축기수행): 縮氣 축기시작→임독맥(소주천)유통→소약→진종자→대약( 內丹完成 내단완성)
◇ 中丹田 중단전(누진수행): 음공 時시 충맥 호흡이나 하단전 호흡(순음기운의 누진 時시까지 계속 수행),
양공時 기 陽神道胎 양신도태와 出神 출신에 따라 도태 시엔→ 중단누진,
出神 출신시엔→ 상단 개발을 병행한다.
◇ 上丹田 상단전(개발수행): 음공이나, 陽攻 양공모두 呼吸法道 호흡법도는 같다.
상단전 완성 개발 법도에 따라하며,
陽神出神 양신출신 子자는 陽神 양신의 眞理求 진리구함에 따라 修行 수행한다.
◇ 大周天 대주천(도원수행): 天地人 得度神功 천지인 득도신공에 속하며
단계별 智慧度量 지혜도량의 연마와 계도를 병행한다.
五通 오통(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신경통, 숙명통)을 얻을 수 있으나
인체 누진이 가장 根本 근본이 되며 탐착됨이 전혀 없이 修行 수행해야 한다.
◇ 聖功修行 (성공수행): 法道 법도와 度量 도량에 의한 단계별 道人修行 도인수행을 말한다.
※ 參禪修行 참선수행이라 함은 上記 상기의 수행과정을 거쳐
精氣神 정기신(무형의 생명에너지)+ 天地人 천지인(유형의 우주진리)⇒
合합一일되어 하나를 이루고 道人 도인의 聖體 성체됨을 얻게 된다.
답글 모음>
음공수행이나 양공수행이라면서 구분하는 것이 별로 의미를 알수가 없다.
양신출신을 기준으로 하는 것같기도 한데..왜그래야 하는지,, 무엇이 다른지 ,,
차이나수련과 그외는 별로 다른게 없어보인다.
삼단전을 구분해서 호흡하고 대주천도 다르게 말하는 것 같아도 역시 별로 의미를 모르겠다.
그래도 모든 수련이 소주천다음엔 무위법을 쓰는데 이런 중단전 호흡을 하는게 이해가 안간다.
임독자개처럼 소주천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기운을 운행하는 것을 안하는데 이 중단전 호흡은 좀 이상하다.
다음의 상단전 호흡도 그렇다.
이 단계에서 양신을 내보낼수 없다.
그래서 양공수행이 불가능한데 그것을 안하고 음공수행만 한다고 하는것은 이해 못하겟다.
이때 나가는 것이 있지만 이것을 양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원래 소주천을 하면 많은 사람이 혼이 나가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연마하면 안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버거워진다.
그리고 중단전은 무엇을 모으거나 지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답답하고 불편해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해 중에 양신을 중단전에서 기른다고 아는데
이말은 중궁에서 지킨다는 차이나 수련서를 오해한것이다.
이것은 심법이지 중단전이 아니다.
중단전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양신이 커지면 하단전도 아니고 그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인데
이건 성장에 따른 크기로 그런 것이지 중단전에서 키우는 것처럼 알면 안된다.
상단전 수련 <===관법에 올리신 글
각성이나 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수련을 할경우가 있다.
이는 단전호흡이나 명상,주문등 어떤수련으로든 하겠지만
그 수련 방법만의 효과나 과정을 중요하게 보지않고
그보다 깨우침이 더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깨우침은 머리로 한다.
가슴은 대상들과 일체감을 느끼거나 거리감을 없애는 것이고
배는 확보한 힘이다.
그래서 나오는 신뢰이다.
깨우침은 상단전수련이라 과거부터 우도방의 수련이었다.
이처럼 하게될 경우 상단전이 수련을 이끌게되어
다른 단전들보다 가볍고 자유로워 먼저 저만치 앞서 가게 된다.
중단전과 하단전이 조금만 받쳐주면 최소한 축기만이라도 좀되면
상단전은 스스로 한참을 앞서가게 되는데 소주천을 열고 중맥을 따라 머리위로 분신을 내놓게 된다.
이것은 다른 수련보다 속도가 빠르며 바로 이와같은 경지로 건너 뛰는데
이 분신을 상단전이 만든것이라 상당히 가볍고 맑고 힘은 약하며 감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잎사귀 5개의 받침과 꽃잎을 5층으로 8장, 9장, 10장, 11장, 12장을 밑에 깔고 그위에 앉아 있고
이 연꽃은 중맥과 함께 오무리고 펼쳐지며 호흡을 한다.
이것은 임독타통이 되면 누구나 이렇게 머리위에 올리고 다닌다.
내생각에는 최대 5층으로 누적하여 쌓는다.
하나가 있으면 2단이고 2개면 3단...5개면 6단 7단부터는 다르다.
왜이런 것이 가능한지는 연구를 더해봐야한다.
사람은 자기 복제가 가능하다.
존재하기 위한 욕망일것이다.
어떤것이든 성과가 있으면 자기를 복제하여 그러한 성과를 획득한 몸으로 만듣는것 같다.
수련하다보면 첫경험이 힘들지 나중에는 내 깨우침이 큰 마디를 지날때면
다시 내 형상으로 복제하여 가진다.
또 다른 이유는 이것으로 내 두정으로 하늘기운을 인도한다.
하늘에 내 분신을 놓고 그것으로 내가 기를 받아들인다.
분신 하나가 하늘하나이다.
바른몸은 깨우친몸으로써의 가치와 더듬이처럼 더 나은 것을 찾는 것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상단전의 몸은
나중에 하단전과 중단전이 상응하여 수련을 완성해야 온전한 바른몸이 되지만
역시 그성과가 빠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스스로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잇다.
생각으로 밝은 빛이나 어떤형상을 떠올리며 하는 것도 상단전을 이용한 수련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라고 계속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상단전을 따로 수련해야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로 신경써서 그렇게 할수도 있지만 일반적 다른 어떤 수련도 위와같은 과정을 밞아간다.
삼단전의 위치
삼단전은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을 일컫는다.
동양침술의 경혈학적 측면에서 볼 때,
십이경락과 기경팔맥 중에는 임맥이라는 매우 중요한 선이 있는데,
이 선은 우리 몸의 정 중앙에 위치하며 경혈수는 전 24혈이다.
지면사정이나 본서 주제의 일관성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한방적 차원에 관한 고찰은 다른 기회를 이용하여 피력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삼단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24경혈이 위치해 있는 임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도해에 자세히 그 위치와 각 경혈마다의 명칭을 소개한다.
도해를 보면, 우리 몸의 정면으로 중앙에 한의학적 차원에서의 중요한 선이 있는데,
이 선상에 회음으로부터 승장에 이르기까지 24개의 경혈이 위치해 있고,
그 중에서
하단전은 석문,
중단전은 옥당에 자리 잡고 있다.
상단전은 승장보다 훨씬 위의 얼굴 앞이마의 인당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당은 임맥이 아니고 독맥에 속한다.
이 하· 중· 상단전을 하나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단전은 삼단전 중 가장 아래로 위치하는데,
경혈로 볼 때는 관원과 기해사이의 석문이 바로 그 자리다.
하단전은 삼단전의 뿌리에 해당되는데, 정을 생성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삼단전인 상단· 중단· 하단에 있는 세 개의 구슬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하단전에 있는 구슬, 즉 정주를 먼저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상단전의 신주,
중단전의 기주,
하단전의 정주를 찾는 문이 바로 하단전의 석문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정주를 찾지 않고서는 기주와 신주를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단전의 정주를 찾아야
중단전의 기주를 찾을 수 있는 문이 열리고,
중단전의 기주를 찾아야 상단전의 신주를 찾을 수 있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단전의 정주를 찾지 못하면 중단전의 문은 결코 열릴 수가 없다.
하단전의 정주는 참으로 중요한 구슬이다.
任脈(全24穴) (會陰起-->承漿終) (<=== 천서 에서 발췌한 글 입니다 /읽고 비교해보세요)
회음 용문 곡골 중극 관원 석문 기해 음교 신궐 수분 하완 건리
중완 상완 거궐 구미 중정 단중 옥당 자궁 화개 선기 천돌 염천 승장
하단전의 석문! 문자 그대로 굳게 닫힌 돌문을 호흡으로 힘차게 열자. 그곳에 정주가 있다.
<도해>의 경혈 위치를 활용하여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면,
석문은 기해를 위로 하고 관원을 아래로 하여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데,
기해는 음이고 관원은 양이다.
이 음양을 조화시키는 태극의 자리에 바로 석문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석문 단전호흡은 음(기해)과 양(관원)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극(석문)에 변화를 이루게 하여,
우리 몸의 깊숙한 내면에 기운을 일으켜 우주의 기운과 교류를 도모하고
나와 우주와의 합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지자연과 두루 통하게 되면 천지의 정기가 바로 나의 기가 되는 것이다.
본서 2부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겠지만,
현재의 우주는 선천의 시대를 지나 후천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후천의 시대에는 필연적으로 <후천 인간 개벽의 도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문이 바로 이 하단전 석문인 것이다.
하단전의 수련에 집중적으로 정진하다 보면 어느덧 자연스럽게 하단전이 도태되고 중단전이 열린다.
중단전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역시 침술 경혈학적으로 말하자면 임맥의 옥당혈에 중단전이 있다.
실제로 만져보면, 우리의 양 가슴에 젖꼭지(유두)가 있는데,
이 양 젖꼭지를 횡으로 연결하여 임맥과 만나는 지점에 전중혈이 있다.
이 전중혈에서 위로 한 치 육푼이 되는 지점에 옥당이 있는데 이 자리가 바로 중단전이다.
이 중단전이 도태되면 천지만물과 나의 마음이 합일된다.
이러한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나는 오욕칠정을 다스리고,
또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초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단전이 도태되면 상단전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열린다는 것은 도태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새로운 열림은 그 전 과정의 도태를 의미함이다.
침술 경혈학적으로, 상단전은 독맥의 인당혈에 위치한다.
인당혈은 양 눈썹 사이의 정 중간이다.
상단전은 중단전의 도태에 의해서 열린다.
열린 상단전의 하는 일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있다.
깨닫는다(覺)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이치를 안다는 것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단전이 열림으로써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상단전이 열리게 되면 범인들이 볼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능히 보게 된다.
즉 영혼이라든지, 귀신이라든지, 천상계 등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하단전에서 중단전, 중단전에서 상단전으로 세단전이 도태되고 열려서
세 개의 여의주를 찾게 되면 대우주와 소우주가 하나가 되고
우아일체와 신인합일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삼단전을 열어 삼주를 얻게 되면, 선도에서 말하는 양신이 생기게 된다.
이 양신이 생기면 두정을 열고 양신을 머리 위로 출신시킨다.
출신을 처음 시킬 때는 작으나, 수련할 때마다 거듭하여 양신을 출신시키다 보면
그 양신은 점점 성장하여 결국 수련자의 육신만큼이나 커지게 된다.
양신이 일정 크기만큼 성장했을 때 하늘을 보면 흰 빛을 발견하게 되는데,
흰 빛이 보이는 즉시 양신을 타고 그 빛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본서에서 나중에 자세히 피력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영계편에서 말하는 2천 전생계이다.
하여, 이는 선도 수련이 드디어 1천 영계를 뛰어넘어
바로 2천 영계에 들어감을 뜻하는 것이다. <5장과 6장 참조>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삼단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단전이다.
흔히 하단전을 기해나 관원으로 오해하여 수련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막연히 배꼽 밑 세 치(三寸) 또는 5cm 등으로 설명되는 웃지 못 할 경우가 종종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기해는 음이다.
기해는 음이므로, 기해를 단전으로 오해하여 수련하면
수련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약하며 음적이 되어버린다.
반면 관원은 양이므로, 관원을 단전으로 오해하여 수련하면
수련이 힘의 위주가 되므로 강하고 양적이 되어버린다.
기해, 관원, 이 두 자리는 음과 양의 자리를 조화시키는 태극의 자리가
바로 침구학에서 말하는 금기혈인 석문이라는 경혈인 것이다.
단전은 인류와 나를 구원하는 문이다.
내 스스로 호흡을 통하여 굳게 닫혀 있는 돌문을 열어서 끊임없는 정진으로 기운을 통하고,
신인합일하여 구천 삼도계를 보게 된다.
구천 삼도계를 봄으로써 스스로를 구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원의 문, 석문이 아니가.
남녀노소 선악인 구분 없이 누구나가 이 돌문인 단전을 열어 진정한 참 나를 찾아야 한다.
이제 진정 자신을 알고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없는 세월 동안 닫혀 있던 돌문(石門)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 문을 열어 소우주의 길을 걸아야 한다.
비록 그 길이 고족하고 멀더라도······.
몸의 전체적 구조(<===대의련법에서 발췌)
● 하단전
따뜻한 기운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뜨겁지 않으면 기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과거 차이나 수련서는 단전만 기르고 운행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따뜻한 느낌을 기준으로 독맥으로 운행시키는 때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자의적인 면이 있어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사람이 단전이 형성되면 독맥과 임맥으로 흐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위적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에는 단전 지키라고 하거나 폐기라고 하거나 복식호흡이라고 하거나
이렇게 한 두가지만 가르치고 안 가르친 것이 많아
오랜 세월 단전만 지키는 수련자가 많았었던 것입니다.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주는 것이 많아서 입니다.
이런것을 지금도 하는 곳이 있습니다.
단전이나 한두가지 방법만 가르치고 더이상은 알아서 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천이 홀로가는 것이라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것도 배우는 사람이 배울 수 있게 해야하는 것이고
배우려는 사람위주로 항상 변칙적 법을 사용해야 할것 같은데,
자기위주의 방침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은 안될 것입니다.
이러면 단전만 단련하고 이것도 모자라
기운을 단전 이외로는 보내는 것을 막기까지 하는 상황으로 합니다.
지금도 단전이 전부인양 자천하기도 하는데 과거는 더했습니다.
지식이 없고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더 그랬습니다.
기는 생각하는 대로 가는데 다른 곳으로 흐르려는 자연스러운 운행까지도
인위적으로 막으면서 하는 사람이 있다보니 그것을 돌리라고 책에 많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자연스러운 운행을 막는 원인은
소극적으로 아직 단전형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와 단전에 대한 그릇된 오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련서들은 여러 그 당시의 상황에 맞게 쓴 것이라서 지금 상황과는 안 맞는 것이 많습니다.
약을 달이는 이론은 지금은 소용없는 비유입니다.
생로병사를 치유한다는 이유로 약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자천가는 아니라고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이론은 쓸데없는 것으로
화로나 솥 따위의 개념과 뜨거운 기운으로 약을 달이듯이 하는 자천도 필요 없습니다.
수승화강이라는 것도 별의미 없다고 봅니다.
신장을 水라 하고 심장을 火화라 하며 오행론적인 접근으로
자천원리를 설명하는 것도 몰라도 되며 꼭 이런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는 그런 물질적으로 빗대어서 이해한다고 될것이 아니고
더 복잡한 우리 몸의 총체적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지식이 있고 쉽게 접근 가능하니 독맥 운행이나 기운행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때에 따라 책이나 자천법을 자신이 알아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를 열감으로 이해하려는 생각과
그것을 독맥으로 인위적으로 돌려야하는 귀찮은 과정을 억지로 안해도 됩니다.
그리고 약이라고 하고 단이라고 하면서 하단전의 기운을 보물 다루듯이 하기도 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이런 정도의 자천에서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들도 엄청난 정력과 음욕을 느끼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능력을 여자 앞에서 자랑하고
자천으로 솟아나는 정욕을 느끼며 좀더 오래한다거나 정력이 세진다고 하면서 자랑하기를 좋아 합니다.
과거에는 다들 부자이고 힘 있는 집안사람들이 자천을 하지,
힘없고 모르는 사람들은 안했습니다. 여자나 이성을 접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헛짓을 많이 하고 그래서 잃어버리고 기가 빠져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지금도 자천하면 정력과 연관시키고 이성 관계를 자랑하는 못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이없고 이런 사람들이 자천해서 높이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자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 이렇다보니 정을 지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성관계로 인한 소모도 있겠지만 무분별한 생활습관이 더 문제가 될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건전한 해소는 권장합니다.
자연적 현상을 억제하는 것이 옳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겸허하지 못한 것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자천이 아닙니다.
이런 것 외에 악의적으로 사람들의 자천을 빨아가는 타 존재가 또 무수히 많아요
하지만 이 경우도 자신의 생각의 원인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결과적으론 자기 탓이니
나의 어떤 부분이 이런 걸까? 고민해야 하지 외부탓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아니면 개인의 자천의 잘못된 정보와 방법으로 생긴 문제가 있습니다.
이세가지의 경우가 없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자천은 저절로 진행되고 자천을 잃어 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쓸데없이 이런 것에 신경 쓰면 그것이 병이되어서 옆길로 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자천의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보니 본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도움이 필요합니다.
못도와 주어서 괴롭지 도움을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태식은 금단이 우리 신체의 피부밑으로 막을 형성합니다.
몸 자체가 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후에 바른몸이 하단전에 생기는데 이럴 때 하는 호흡을 말합니다.
바른몸을 만들고 성장시키는 호흡입니다.
그리고 내몸 전체가 태가 되면 몸속에 기운행, 혈, 단전들이 사라집니다.
그저 태속 일뿐입니다. 텅빈 듯, 꽉 차있는 듯 또 다른 공간입니다.
이러면 이때부터 심리적 정신적 공허함이나 담담함,
심심하거나 허무에 빠진 듯 별 맛이 없게 됩니다.
기의 느낌도 운행도 마음의 여러 작용도 그저 그럴 뿐 강하고 재미있는 현상들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중의를 따르고 항상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흐려지고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오래 기다리면 태는 바른몸을 기르고 바른몸은 성장할 것입니다.
여기선 지금까지 알던 기수련적인 기운행의 여러 체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감각에 치중 하기보다 전반적 자천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기나 영안이나 모두 지나가는 그때의 몸 상태의 반영입니다.
이런 어떤 영상이나 기감이나 등의 현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렇다고 억제해서 억누르지도 말고 담담히 지나가면 됩니다.
억누름도 하나의 인위적 작용입니다.
이것도 탈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의는 여기서도 사용됩니다.
바른몸에도 내장이 있고
우리 신체와 같은 것이 모두 생성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생에서 한과 정신적, 심리적 고통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 해당부위 그러니까 바른몸의 내장기관이 생길 때 아픔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걱정과 힘든 삶일수록 심장을 만들 때 가슴이 칼로 도려내듯 아프고 찢어질듯 합니다.
두통이 너무 심해 힘들 때도 있습니다.
몸살이나 극도의 피로감도 있어서 바른몸의 장부 형성이 이렇게 힘든 과정일 경우가 있습니다.
태가 생긴 후 바른몸이 완성되기까지
내속의 여러 기관들이 새로 형성되어가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몸속이나 내 몸이나 내 외부 세상,
천지가 내 관념과 함께 새로 형성되는 내적 재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있을 뿐 객관적 상태는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이것을 모르면 눈에 보이는 사물에 현혹되어 그것이 진리인양 알게 됩니다.
내 몸에 용이 보이고 귀신이 있고 애라가 나가면 신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뭐가 보이고 하는데
이것이 내 관념과의 작용을 이해 못합니다.
객관사실과 주관환상 그 중간 지대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신인양 미치거나 자괴에 빠져 퇴행합니다.
그동안 알고 당연하게 여기던 사물법칙도 이제는 다르게 보이고
다시 재정립 해야 할 필요성마저 느낍니다.
자신만의 과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점검하고 실험하며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혜인입니다.
그리고 하단전이 어디인가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정확하게 의학적 혈자리가 대응된다고는 생각 안합니다.
의학하고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학적 이유로 몸을 보면 기해나 석문이나 관원이나 어디한 곳을 지정할지 모르겠는데
자천이 의학이 아니니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크게 벗어나지도 않아서 굳이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난 하단전이 한곳이어서 그곳만 하단전이라고 보지않고
자천의 진척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지금껏 말하지 않는 견해일 것인데
일반적인 사람인 경우는 기해부근이 단전일 것이고
나중에 바른 몸이 생성되면 석문 부근 정도 일거며
대단이 넘어가면 관원근처로 내려갈 거라고 봅니다.
이 단전은 내 몸의 중심입니다.
단순히 기운 모으는 곳이나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중심이며 몸의 작용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서서히 자천의 결과로 내려가면서 우리의 감정이 변해가고 삶도 변해 갑니다.
불교적으로 진여문을 느끼고 중용이나 부동심을 느끼는 원인이
이 하단전이 내려가기 때문에 심리적 변혁이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대단이 넘어가면 감정이 가라앉고 고요하고 삼매가 일상에서 경험되는 묘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야 도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열반이고 마음이 바다같다고 하는 그 광대한 크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이면에 이런 하단전의 내려감이 있습니다.
또 하단전을 단련하는 것은 기운을 뭉치거나 누기하거나 복기해서
어떤 크기로 모아서 형체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내적인 작용을 설명하면 자천을 처음 시작해서
의수단전을 하거나 어떤 자천이든지 처음하면 배에서 기운이 분지 운행을 합니다.
이 운행이 기운을 모으는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생의 운행을 하는데 이것이 되면 단전이 만들어 졌다고 하며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 운행이 기운이 넘쳐 독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이때 이런 생의 운행을 활자시나 양기가 발생 했다고 합니다.
◎ 단전 형성순서
몸 안을 내관할 때 가슴을 하든 목을 하든 머리를 하든
어디를 하는 것에 상관없이 관조하여 집중하면
무겁고 부드러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밝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간다.
그래서 고요하고 두텁고 무거운 것은 하단전에 고이고
밝고 맑은 것은 상단전으로 가고
그리고 비워지고 편안한 것은 가슴으로 가게 된다.
때론 하단전에서 발고 내리기도 합니다.
무겁고 고요함이 근골의 기운으로 몸을 건강하게 하기도 합니다.
단전에 기운이 생길 때
먼저 가슴이 비워지고 편안해지는 것이 있는데
자천 진행으로 보면
가슴이 먼저고
그 다음이 배이다.
하단전이 먼저 기운이 생긴다고 하는데 하단전이 고요하고 물질에 더 가까워서
그렇게 육체적으로 느끼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 알기쉽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가르치다보니 그렇게 아는 것이지
사실은 중단전에서 먼저 기미가 있는 것이다.
즉 단전마다 그 기미의 느낌이 다른데 단전의 특성이 그러합니다.
단전형성 될 때 보살을 보거나 편안해지거나
내가 어딘가에 빠져들거나 선정을 느끼거나 꿈이 신령스럽거나 하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하다.
눈에 빛이나 뭔가 보이는 것도 그렇다.
이건 상단전으로 단전형성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단전형성을 온몸으로 반응하는 것인데 다양한 징조에 관심을 가지고 봐야한다.
앞으로 자천하면서 자신의 신체 반응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단이 형성될 때도
가슴이 먼저고 하단전 상단전 순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상단전, 즉 머리부터 이지만
이것은 인식도 어렵고 설명이나 이해가 난해하니 나타나는 징조는 가슴부터라고 한다.
축기, 누기나 복기, 단전형성, 단전개통, 단전만들기 등등 여러 말로 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기가 모이거나 단전이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마음이 비워지고 시각적, 청각적, 의식적인 묘한 경험도 사실은 기라는 것이 정기신의 총체일 것인데
의념적인 것과 마음과 그리고 몸과의 합일로 인한 그 어떤 것의 탄생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원영이라는 것이나 바른몸이라는 것이나 양신이라는 것이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내 자신의 정수가 모여서 형성된 핵일 것이다.
그 핵을 변하게하고 그로인해 내 전체가 변해가고 다시 핵을 다음 것으로 상승시키는 것이 자천의 과정일 것이고
그 장소가 하단전이며 단전형성등의 의미이고 기라는 것이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단어일 것으로 본다.
다만 내가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혈이나 단전이나 하는 구체적 신체부위를 말한다고 해서
그곳에 지나치게 의미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체적 몸의 이해가 있고 그 다음이 한 부위의 이해가 있어서
전체와 부분의 중의가 있어야지
한곳이나 한단어나 글로 모든 의미를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글도 전체의 내용이나 의도와의 중의가 있어야 한다.
◎ 단전형성횟수
단전에서 기운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한번 생긴 후에
쭉 이어지면서 강화되고 질적변화를 하며
태가 형성되고 바른몸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된다.
▷ 처음 기가 발생된 후 이것이 한번, 정기 精氣
▷ 독맥, 임맥 개통 후 한번, 이것이 두번째 충기 充氣
▷ 중맥이 열리고 한번인데, 이것이 진짜 단전이 생긴 것이다.
형태나 색이 온전한 것이 이때가 처음이다. 전단 專團
▷ 다음에 금단이 생기면 이것이 또 한번, 이것이 네번째 금단 金丹
▷ 이 금단이 확장되어 태가 만들어지고 이 포태에서 바른몸이 작게 탄생되면 이것이 다섯번째이다.
▷ 그 다음에 바른몸이 온전해지면 이후에는 정광이 나오는데
이것이 여섯번째이고 이후는 크기만 커진다.
● 정기신
신은 자천의 최고 지향점을 바라보아야한다.
그것은 절대이고 그것을 무극, 허무적멸, 태허, 홍몽, 혼원 같은 말로 표현하고
지금은 절대자, 신성, 종교적 의미나 사랑 같은 감상적인 것도 할 수 있다.
즉 상위개념이다.
기는 의지이고 마음의 역동적 표현이다.
감정이고 느낌이며 변하고 움직이는 힘이고 오고가는 감응이며 존재의 생존근거이다.
변화하는 흐름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형체가 없다.
그나마 기는 파동이나 움직이는 어떤 흐름을 말할 수 있어요,
즉 감정적 움직임으로요 하지만 이건 세상사람들의 설명이고 전 이것만을 기라고 안봐요
그래서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함을 느끼는데
그래도 뭔가 시도라도 해볼려면 형체를 이루고 구현시킬 실재적 기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이다.
고요함을 주로해서 모양이 되고 바탕이 되며
모든 신과 기의 토대가 되어 그 흔적을 알게 하고 오고가는 이치를 보게 한다.
신체가 느끼고 알게 해주는 감각은 이 정이 해주는 것이다.
신체적 감각은 정이하고 감정적 느낌은 정을 바탕으로 한 기가 한다.
그래서 하단전에 신과 기가 모여들게 하고
여기서 신과 기가 정에 융합되어 정기가 형성되는데 이를 양기라고 하기도하며
단전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정기를 온몸으로 보내 불리고 단련해서 신기정의 일체로 된 몸을 만드는 구조로 만든다.
곧, 신과 기는 정에 의지해서 형체를 드러낸다.
이것이 기미이고 활자시이고 양기 발생이다.
그냥 차이나의 수련서나 국내의 수련서에 나오는 것을 말해 본 것이다.
● 외부기, 원천
내부의 원리는 앞에 설명한 것인데
즉, 머리와 가슴의 신과 기가 내려와 하단전에서 정으로 형체를 삼아 생기는 것이다.
이때 하단전 부근의 여러 혈인 회음이나 선골이나 기타 다른 혈을 중심으로 기운을 뽑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치우친 기운으로 나중에 온전한 기의 질적 순도를 장담하지 못하고
이것이 원신과 전령, 신령의 원만함을 보장할 수 없게 한다.
다음은 외부의 기를 설명한다.
외부의 것도 정기신의 융합이다.
이것은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고 '구올'이라고 하며 순수한 원형의 무엇이다.
다만 층에 따라 그 성질이 다른데 하늘의 상승된 층이 있다.
하늘의 순수함의 차이이고 근원으로 올라가는 단계적 층이다. 그래서 원천이다.
지계가 우리가 접촉되어 있는 하늘이다.
사람의 키가 다르지만 이 하늘은 주관적인 면과 객관적인 면이 섞여 있으며
모든 사람의 머리에서 조금 위 까지가 지계이다.
그다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정계가 있다.
객관적인 것은 모든 사람의 머리위에 있다는 것이며
주관적인 것이란 그 높이가 사람마다 키 때문에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자천해서 두정을 열거나 처음 하늘을 열면 연꽃이 피고
그 위에 자천에 진행되면 사람의 형상이 앉게 된다. 대단 까지 만이다.
그 후엔 사람이 없다.
이사람은 의지의 발현이다.
그래서 의지가 불분명하거나 욕구가 희미하면 불명확하다.
지계, 정계, 선계, 모계...
처음에는 지계의 정기신이 들어오고
이것이 다되면 더 높은 하늘의 구올을 내가 원할 수 있으며,
이때 원하는 것은 자천의 성장에 따른 자연적 바람이다.
이 '구올'은 마음과 의식이 다 있는 것이지만
내안의 것보다는 순수해서 내가 자천하는 하나의 재료로써 사용되고
또 그 하늘과 동일한 순도를 상승되어 일치가 되어야 하는 기준도 된다.
이건 내가 지계와 합일해야 정계를 열고
또 정계의 '구올'을 받아 자천하여 정계와 같은 '구올'으로 합치될 때 선계가 열린다.
이것이 누적되듯 층층이 있는 것이면서도
정계를 열고 그곳에서 자천을 안 하면 선계는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은 아래에서 자천이 되어야 위의 것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이런 하늘이 층층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천과정에 맞추어 하나씩 생성되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보통은 잠재되어 보이지 않는 거 같다.
원천은 사람을 둥글게 막처럼 싸고 있고 층층이 사람을 중심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지계는 세개의 층으로 나뉘는데
발의 정강이 부분은 노란색이고
그 위에서 머리부근까지는 보라색이고
그 위는 흰색이다.
차례로 생명, 욕구, 이성을 뜻한다.
지, 정, 선, 모, 천, 허, 인, 대인, 방, 고, 소, 주, 해, 매, 자, 전, 오, 세, 미, 지, 이,....
근원적 순수신성이 외부에도 있으며 내속에도 있다고 본다면,
즉 안에도 순수 정신이 있고 바깥에도 순수정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안에 있는 순수정신은 표층의식이 심층의식으로 깊어져가면서 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건 머리에서 가슴, 또 배로 내려가는 부위적 차이의 의미와 감각이 있으며,
그 깊어져가는 것도 단계적이고 이런 것이 외부에서는 이 원천으로 대응해서 점점 상위로 올라간다.
그러니 정계로 올라가면 내 의식도 그만큼 안으로 깊어진 것이고
선계로 올라간다면 내적 순수정신도 또 다른 깊이가 되면서 진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원천이 사람마다 층의 높이나 단계가 ,
즉 영향을 주고받는 층이 다르다는 것인데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보편적 순수하늘 마저도 상대적으로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니면 이것위에 절대보편성을 첨가 해야 하거나...
이런 건 상위적 관념이 아니라 역설적 되먹힘으로
위면서 안이고 외부면서 안으로 넘나들 것이다.
생각하기 편해서 층 논리를 쓰는 것이다.
안이 바깥이고 위가 아래이고 이것이 저것으로 서로 먹혀 있고 포함하고 있는 것 일뿐으로
근원적 순수들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곳에 내 주체를 담아 가는 것이 자천이니 복잡하기 이를대 없다.
인격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지만
나는 이말을 성취가 높은 것을 말함이지
좋은 인간이나 훌륭한 사람으로 윤리적인 인간을 말한 건 아니다.
즉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착함이란 생각보다 실천과 현명한 판단이 서야하는 어려운 것으로 본다.
얼마나 독립적이고 얼마나 자주적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얼마나 원천을 획득해서 자신의 것으로 했는지가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것이 된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것을 밝히기만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나오게만 하면 된다고 하는 식의 자천은 무책임 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안에는 별로 볼게 없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고, 하고 싶은지가 더 중요하다.
이것은 끝없는 과정을 만들고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가장 가치있는 존재 그자체이다.
이 욕망이 부처가 되게 하고 신선이 되게 하는 것이지 안에 무언가 있어서 그것이 신선이고 부처는 아니다.
이 욕망을 부처나 신선이라고 할 수는 있을려나...
원천중에 지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현상계의 모습이다.
정계는 단이 만들어지는 곳인데,
지계에서 ,즉 처음 자천부터 다시하고 단까지 완성하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선계는 그 존재의 형상만큼 새로운 신체를 만든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지금의 자기 모습으로, 즉 처음부터 또 다시 자천해서 몸까지 만든다.
모계는 그 존재의 선천이나 태극이나 그런 근원이 되는 곳이고,
즉 처음 자천부터 다시 하며 근원까지 완성한다.
항상 하나의 원천을 넘어 가면 다시 자천하는 것을 반복한다.
그래서 계제가 올라가면 원신이 하나씩 더 생기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계는 근원의 근원으로 무극이나 태일이나 근원의 근원이라는 최상위 개념이다.
즉 또 반복해서 자천하며 해본 경지까지 오면 그 계제의 정식 자천으로 보며
새롭게 나아가는 것부터 진짜 그 계제의 자천이다.
모계까지 온 것을 다시 자천해서 여유가 생기면 진짜 대단은 넘은거구
이후부터 대단으로 여기부터 진짜 이 계제의 자천이다.
타수련서들이 몸안에서 선천기가 나오고
안에 있는 원기를 단련하는 것처럼 하는것에 조금은 다른 견해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의 천지에 산재한 기운이나 타기운을 들이는 것과도 좀 다른 견해를 말하고 싶어서 이다.
어느 것만 맞다고 하진 않고 모두 다 맞으며 그중 한두개 만을 옳다고 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 10신身
우리 몸을 층층으로 보는 것입니다.
피부를 중심으로 안으로 4개 밖으로 4개 이지만
피부는 두개가 겹쳐 있어서 결국 안으로 5개 밖으로 5개됩니다.
상자 안에 또 상자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몸도 몸 안에 몸이 있습니다.
몸 외부에도 나와 같은 몸이 겹쳐서 있습니다.
그래서 각 경맥이 층층이 있게 됩니다.
독맥을 예로 들면 피부를 타고 오르는 경맥이 있는데,
여기서 피부 안으로 그리고 척추 안으로,
척추 앞으로 등등 이렇게 여러 흐르는 경로가 있는데
이건 외부로도 그렇게 되며 이것을 우리 몸이 이렇게 겹쳐 있어서 입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다고는 못하지만 안쪽운행과 바깥운행이 반대로 흐릅니다.
안이 내려가면 바깥은 올라갑니다.
때론 자천의 어떤 경지에서 이 바깥 몸을 느끼게 되면
신인합일이나 물아일체 세상과 하나가 되거나 몸이 없어지거나 무아를 느낀다고 합니다.
느낌이 그럴 뿐 외부 몸을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은 과장되게 되어서 그럴 겁니다.
이 감정적 과장을 자천과정에서 잘못 이해해
대단한 깨우침을 얻은 듯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눈으로 본 것이든 인식적 각성이든 모두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 현상임을 알아야
더 높은 이상을 추구 할 수 있습니다.
10개라고 해서 10신이라고 한다.
● 구정球庭
우리 몸을 중심으로 앞뒤, 좌우, 상하의 구체가 있습니다.
크기는 두팔을 둥글게 안듯이 해서 손끝이 닫는 정도의 크기일 것입니다.
대충 이런 구체가 6개가 있습니다.
이것은 집에서 마당에 해당할 것입니다.
외부의 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교류에서 일차적인 완화작용을 하고 인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구정입니다.
● 사중
하나의 흐름은 좌우, 상하로 3개의 흐름이 더 있습니다.
또다시 독맥을 예로 해 봅니다.
독맥이 있으면 이것에 좌로3개의 독맥이 더 있고
우로도 더 있고 밑으로 위로 이렇게 3개씩 더 있습니다.
입체적으로 보면 단면을 잘라서 봤을 때 독맥을 중심으로 3개의 층이 더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옆의 경맥의 흐름에 중복되고 겹치지 않냐고 할 것입니다.
독맥 옆에 족태양방광경이 있는데 이것도 3층이 있으니 두껍죠
서로 간섭되고 섞어 보이는데 이건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경맥이 경맥을 중심으로 보며 옆의 경맥과는 무관한 흐름이며
다시 말해 물질적인 방법으로 보지 않고
비물질적으로 봐서 옆의 경맥과의 거리가 무한하며 서로 상관 없기도하지만
반대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상관있기도 한,
두가지 상반된 면이 있는 이치가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3층과 중심을 합쳐 4층이 되어 4중이라고 합니다.
● 단전들..
삼단전의 모양은 구형입니다.
크기는 사람마다 신체적인 여건으로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원형을 원영이라고 하는데 세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색은 파란빛을 띠며
크기는 한손으로 들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으며
이것도 존재마다 다를것으로 생각해요
이 하나가 사람으로 태어날때 세개로 분리되어서 나오는데
상,중,하단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단전은 생각과 모색,이해,구분,분별등으로
외부와의 접촉으로 교류하는 작용을 지향하는 것을 위주로 형성되었고
중단전은 감정과 욕구, 욕망, 의지, 등으로
내적 일관성과 의미를 주고 가치형성에 판단기준으로 작용하는것을 주로 해서 형성되었고
하단전은 말 그대로 원형이며
신체유지와 생리활동을 하며 몸을 보존하고 중단전과 상단전의 활동근원으로써
즉, 토대로써 작용함을 위주로 형성된다.
각 단전은 원영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이런 각각의 성향에 특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무엇이 더중요하고 더 근원적인 거라고 하기 어렵다.
이렇듯 원영에 해당하는 것을
원신(사람형태이면)이나 단원丹元(구형이나 무형적이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체라고 설명했지만 몸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전을 새개가 아니라 네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자체가 단전이 된다는 것으로 사실은 이것이 더 근원이 됩니다.
이것으로 자천하는 방법도 있는데 최후의 법입니다.
역사상 결단코 이 법이 논의 된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천은 이 단원을 새단원으로,즉 새로운 단원으로 하는 과정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