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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사 순 절 기 도 ...
글 : 시인 이 해인 수녀
아직은 빈손을 쳐들고 있는 3월의 나무들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건한 기도를 바치며
내가 나를 타이르고 싶습니다.
죄도 없이 십자가 나무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억하며
가슴 한켠에 슬픔의 가시가 박히는 계절...
너무 죄가 많아 부끄러운 나를 매운 바람 속에 맡기고
모든 것을 향해 화해와 용서를 청하고 싶은 은총의 사순절입니다...
우리 모두 나무처럼 고요히 서서 많은 말을 줄이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 주십시오...
나무처럼 깊숙이 믿음의 땅에 뿌리를 박고 세상을 끌어안되
속된 것을 멀리하는 맑은 지혜를 지니게 하십시오...
현란한 불꽃과 같은 죄의 유혹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온 날들...
기도를 게을리 하고도 정당화하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절제가 부족했던 시간들...
이웃에게 쉽게 화를 내며 참을성 없이 행동했던
지난날의 잘못에서 마음을 돌이키지도 않고
주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뉘우침도 없이
적당히 새날을 맞으려고 했던 나쁜 버릇을 용서하십시오...
이젠 다시 사랑으로 회심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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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2013. 3. 3
루카 13. 1-9
♠ 복음 연구
* 1절 : 어떤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을 예수님께 보고했다. 이 갈릴래아 사람들은 과월절 동안 순례하러 와서 아마 과월절의 어린양을 도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율법에 따라 평신도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사제들의 앞마당에서 매년 과월절 희생제사용 짐승들을 제물로 잡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빌라도는 이 갈릴래아인들이 짐승을 도살하는 동안 군인들을 시켜서 그들을 학살했다. 빌라도가 성전 뜰에서 사람의 피를 짐승의 피에 섞은 만행을 종교박해로 보고 격분해서 예수님께 보고한 것이다. 특히 그들은 살해된 갈릴래아 사람들과 같은 고향인 예수님께서도 분개하여 그 사람들의 편을 들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 2-3절 : 유다인들은 길릴래아인들이 대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벌을 받아 학살당했다고 여겼다. (탈출기 20.5, 요한 9,2-3참고) 범죄와 벌의 상관관계는 율법학자들의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부인하시며 갈릴래아인들이 당한 학살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회개하라는 훈계를 이끌어 내신다. 죽음은 갈릴래아인들처럼 갑자기 닥치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갈릴래아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회개의 삶으로써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루가 3,8, 15,7)
* 4-5절 : 예루살렘의 다른 모든 시민들보다 더 큰 빚을 진 사람들은 즉 하느님의 뜻을 어겨 빚진 사람들(루가 7,41)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더 큰 죄인들은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이다. (루가 13,6-9)
* 6-7절 : 포도밭 주인의 태도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거부반응을 상징한다.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아 인격 성숙을 도모하지 않는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은 빌라도 손에 살해된 사람들과 실로암 탑의 붕괴로 우발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운명보다 훨씬 더 가혹한 불행,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 8절 :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심판을 보류해 주실 것을 간청함을 의미한다.
* 9절 : 세상종말의 심판을 지연시키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 신속하게 회개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닥쳐올 죽음을 예상하여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이미 때는 늦어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갈릴래아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회개의 삶으로써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자기 생명을 살리는가? 혹은 파괴하는가 하는 것은 회개 여부에 달려 있다. 회개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단절이라는 죄를 자각하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결단을 뜻한다.
♠ 대화 방향 :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부족했던 점을 회개하고, 개선해야 할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경의 세계 신약
▪ 루가복음해설 4 (박영식 신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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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2013. 3. 10
루가 15,1-3. 11-32
♠ 복음 연구
* 1-3절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하신 예수님은 회개의 토대가 된 그들의 착한 마음을 보시고 반겨 맞아 들이셨으며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부정한 자들과 사귄다면 그 사람도 부정한 자가 될 것 아닌가?’하고 멸시의 눈길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 11-16절 :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드릴 효도와 감사를 미뤄두고 제 욕심을 채우러 돈을 요구한다. 이것이 악으로 가는 첫걸음이었고, 헛된 자유와 쾌락을 찾아 떠나 전혀 절제되지 못한 생활로 인해 결국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유다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수치인 ‘돼지치기’를 통해 얼마나 비참한 타락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 17-19절 : 이런 비참이야말로 그의 회개의 시작이 되었고 아버지께 지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러 결심을 하며 회개의 그 겸손한 말에서도 아직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 20-24절 : 아들은 그 결심을 ‘곧’ 실천에 옮긴다. 집에 없는 아들,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게 하였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본래의 권리와 지위)을 다시 주고 반지(특별한 권위와 명예)와 신(자유인의 표시, 종들은 맨발이었음)을 주며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을 나누었다.
* 25-30절 : 그런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큰 아들의 자리이다. 돌아온 큰 아들은 그 사실을 듣고 나서 아버지의 처지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하며 자기 태도를 변호하고 아버지의 태도를 강경하게 따지고 있다.
* 31-32절 : 아버지는 그의 성실성과 끊임없는 봉사를 부인하거나 모르지 않으며 항상 나와 함께 하며 행복을 누렸지만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에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몹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설득하고 있다.
♠ 복음 요약 : 이 비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아름답고 감동에 넘치는 비유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父性的)인 너그러우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용서에 앞서서 죄인의 생활과 회개하게 되는 과정을 뛰어난 심리묘사와 감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느님, 작은 아들은 죄인 혹은 이방인, 형은 바리사이파 사람 혹은 유다인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며 하느님의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죄인’인 사람을 찾아가시되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은 그대로 방관하신다.
♠ 대화 방향 : 1. 나름대로 각자 열심은 우리 F.B인의 모습 안에 숨어있는 큰 아들의 어두움을 깊이 바라보고 성찰하며 나누어 봅시다.
2. 나의 지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두움에서 벗어나 참된 회개와 용서를 체험한 것을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루카복음 해설(성바오로 출판사)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크리스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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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2013. 3. 17
요한 8, 1~11
♠ 복음 연구
* 1-2절 :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당신을 생수의 샘으로 계시하신 다음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가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에 와서 당신 주위로 몰려온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 3-5절 : 그 때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기혼녀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분의 뜻을 물었다. 또한 사람들이 그 여인을 돌로 때려 죽이려 한 것은 기혼녀가 간음을 한 경우에 적용된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의 간음죄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율법을 어기시게 된다. 또한 율법규정에 따라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신다면 사형집행권을 독점한 로마 총독과 알력관계를 자초하시게 된다. 예수님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녀를 볼모로 잡았음을 알고 계셨다. 그들은 간음한 그 여자가 회개했는지 회개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를 단죄하기 위해 광분했던 것이다.
* 6-7절 :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는 상징행동을 보이셨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행동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간음한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거듭 묻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각자 자기의 죄를 돌이켜 보고 죄없는 이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이르셨다. 이는 재판관이 죄가 없어야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간음에 대한 율법규정을 격분한 상태에서 강행하려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의 취지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명하셨다.
* 8-11절 :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셨는데, 이는 하느님이 심판주이시고 죄인의 죄를 먼지 속에 쓰신다는 뜻이다. 그러자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리를 떴다. 그래서 현장에는 예수님만이 간음한 여자 곁에 남아계셨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용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간음한 그 여자는 용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이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다. 용서는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기 위한 방법이다.
♠ 복음 요약 :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들킨 여인을 앞세우고 예수님께 그 처리를 묻는다.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며 아무 말씀이 없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신 대답은 좀 전에 보여 준 그 무언의 가르침을 말로 표현하신 것이다. 하느님 앞에 죄인인 주제에 다른 죄인을 심판하려고 우쭐거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죄지은 이유 등을 묻지 않고 단순하게 죄를 용서하시고 앞으로 잘하라고 하신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여인을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변모시키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며 새로운 삶을 주신다.
♠ 대화 방향 : ① 죄의식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체험이요 구원의 시작이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성찰해 봅시다.
② 예수님은 해방자요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해방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가톨릭 신문사) ․
▪ 말씀의 두레박(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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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2013. 3. 24
루가 23,1-49
♠ 복음 연구
* 1-5절 : 유다의 관습에 따르면 고위층 사람들의 대대적인 논쟁은 공적인 경우 언제나 로마 당국 앞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파스카 축제 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로마에 대한 유다인들의 저항불길을 쉽게 잡을 목적으로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 와 있곤 하였다. 사헤드린 의원들은 고발장을 써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갔다. 예수께서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고발내용이었다. 사실 예수님은 유다인 특권층이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여 누리는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뒤흔들어 놓고 계셨고 그들이 불의한 경제적, 정치적 실천을 숨기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이념적 구실을 폭로하고 고발하셨던 것이다. 빌라도는 냉정하게 정치적 이유만을 따져 묻고는 유다 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이 사실무근이며 예수가 위험한 인물이 결코 아님을 깨닫지만 유다 지도자들과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싶지 않은 미묘한 상황에 처한다.
* 6-12절 : 바로 그때 갈릴래아의 영주인 헤로데도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빌라도는 재판해야 할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되돌려 보냄으로써, 헤로데와의 소원한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헤로데는 예수님의 유죄나 무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호기심만 발동해서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어떤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조롱과 비웃음속에 끝나고 헤로데는 빌라도에 대한 답례로 예수님을 놀림감으로 쓸 임금으로 꾸며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낸다.
* 13-25절 : 예수님을 되돌려 받은 빌라도는 대사제들과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하지만 그들은 다시 한 번 고발한다. 그래서 빌라도와 헤로데는 이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이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매질한 다음 놓아주려 하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며 무장 혁명가이며 폭도로 잡혀있던 바라빠를 놓아 달라고 한다. 빌라도는 마침내 군중의 살기를 통한 함성에 지고 만다. 앞서 호산나를 불러대며 예수를 옹호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케 하던 광적인 아우성이 진실을 질식시키고 마침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빌라도는 총독으로 하여금 군중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압박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적으로 반란범으로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떠한 정치적 범죄에 대해서도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 있었다. 25절의 “넘겨주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관과 끝만이 아니라 수난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넘겨지시고 인도되시는 것은 어느 인간적인 대행자의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 26절 : 형벌은 선고가 된 후 즉각 실시되었다. 판결내용(유다인의왕)이 적혀있는 판을 잘 보이게 목에 걸고 가시는 예수님은 기진 맥진하셨다. 그러자 키레네 출신 시몬이 징발되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시몬은 스스로 십자가를 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표본이 되었다.
* 27-31절 : 예수께서는 여인들의 통곡에 당신만을 위해서 울지 말고 무죄하게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계획이 배척당하고 있기 때문에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배척한 대가는 66-70년 사이에 벌어진 참화, 즉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이 로마에 완전히 예속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수님과 하느님의 계획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다.
* 32-34절 : 로마인들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처형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두 사람들도 악인들, 죄인들이었다. 예수님은 두 죄수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로마인들에게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며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눈에 메시아나 하느님의 축복 받은 아들이 아니라 온 나라를 더럽히는 하느님의 저주로 비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신 바를 실천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예수님도 자비로우셨다 처형당하는 자들은 발가벗기운 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들의 옷가지와 소지품들은 형 집행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형 집행자들은 제비를 뽑아 자기에게 떨어질 몫을 결정하였다.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한 제비뽑기는 수난 시편에 나오는 말로 묘사되고 있다 (시편 22,18) 그것은 예수님이 극도의 빈곤과 치욕 중에 죽으셔야 한다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환이었다.
* 35-39절 : 사람들이 침묵속에 지켜보고 있는 동안 지도자들, 군인들 그리고 강도의 조롱과 모욕적인 말들이 뒤따른다.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인지를 시험 당하셨던(4,1-13) 그분의 삶 마지막 순간이 이르른 지금 또다시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존재에 대한 시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신앙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서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유혹들 가운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하나의 도전인 것이다.
* 40-43절 : 예수님은 헤로데처럼 기적이나 놀라운 일들에 의한 증명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을 지키신다. 가장 큰 기적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기적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침묵이외에 어떠한 대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열어 용서를 간청한다. 패배와 무기력이 절정을 이루는 이 시점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로 인식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오늘이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쁨과 승리가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당신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실 때 죄인들, 저주받은 이들, 창녀들, 역사의 폭력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죄한 희생자들을 함께 데려가실 것이다.
* 44-46절 : 루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매우 단순하게 묘사한다. 어둠, 빛을 잃은 태양 등(아모8.9-10 요엘 2.10, 3.3-4 참조)예수님의 죽음에 앞선 징표들은 야훼의 날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전형적인 징표들이다. 성전 휘장이 갈라진다. 이제 하느님은 더 이상 국가적 성전 안에 갇혀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든 사람들의 증거와 그 증거를 보이는 모든 장소에 현존하여 계신다. 그 모든 표징은 상징적인 것으로서 하느님이 심판을 내리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개입하고 계심을 가리킨다. 현실의 정체를 벗기고 진실과 진리를 드러내는 심판이고 누가 정의로운 사람이지 불의한 사람인지를 가려내는 심판을 하실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시편 31.6에 나오는 간구하는 기도를 외치시면서 숨을 거두신다. 예수님은 당신 영혼을, 생명의 매체인 영혼을 아버지께 완전히 내어드리셨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포기, 복종, 신뢰의 표시로 끝났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하느님께서 다시 새 생명을 주실 분으로 찬양하였다. 유다인들 생각에 의하면 사람은 생명의 숨결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산다고 믿었다. 잠과 의식의 상실은 죽은 것과 같으며 아침이 되면 다시 호흡으로 되돌아와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시는 예수를 당신 성령으로 죽음 뒤의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 47-49절 :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보고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셨음을 고백한다. 백인대장은 군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인 지배 권력에 예속된 사람이다 . 그런 그가 예수님의 무죄함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군중들도 가슴을 치면서 뉘우친다. 그들은 자기네가 저지를 커다란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며 진정한 자유와 생명을 주실 분을 배격하고 죽였음을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친지들과 여인들은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거리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깨닫기 위해 먼저 유심히 바라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장차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 복음요약 :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겪어야 할 수난과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인간은 수난을 통해 현실적인 타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삶에 있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삶의 길이다. 결국 십자가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며, 하느님의 섭리이다. 인간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순수해 질 수 있고 그렇게 순수해 질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높임을 받고 새로운 삶에, 부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 대화방향 : 1. 우리 삶의 여정에서 오는 모든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절실히 구하며 하느님을 철저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2. 예수님의 수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나의 모습과 비슷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인물에 속합니까?
♠ 참고문헌 : ▪ 루가에 의한 예수 (렌초 인판데/성 바오로 출판사)
▪ 루가복음 읽기 (이보 스토르니올로/성 바오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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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 대축일
2013. 3. 31
요한 20. 1-9
♠ 복음 연구
* 1-2절 : 막달라 마리아는 동이 트기도 전에 무덤으로 달려간다. 밤새 슬픔에 잠겼던 막달라 마리아는 동이 트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덤이라도 가 보아야 할 만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입구가 열린 것을 발견한 막달라마리아는 두렵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하시던 제자에게 알린다.
* 3-5절 : 두 제자는 경쟁하듯이 달려간다. 여기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복음저자인 요한이다. 요한은 무덤에 먼저 도달해 무덤 안은 살피지만 들어가지는 않는다. 베드로를 먼저 들어가게 하기 위한 배려였으며, 이는 베드로의 수위권, 즉 예수님이 주신 권위와 부활증인으로서의 역할과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 6-7절 :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확인한 것은 염포들이나 수건이 아니다.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한 것이다. 시신이 있지 않고 시신을 싸맸던 염포, 머리에 둘렀던 수건만이 놓여있었다는 것은 천상의 새로운 실존을 취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는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8절 : 사랑받던 제자도 무덤에 들어와 보고 믿었다. 무덤안의 상황은 예수부활의 표징인 동시에 증언의 역할을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무덤 안의 정황만으로 믿었다는 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주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기에 이 사랑의 힘으로 빈 부덤과 수의에 감춰진 모든 사실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 9절 :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이 구절은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빈 무덤이나 수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던 부활에 대한 말씀과 성경 말씀을 깨닫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깨달음을 통해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 복음 요약 : 마리아 막달라의 빈 무덤 발견과 두 제자가 무덤 안에서 발견한 수의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게 되지만 사실 우리는 성경 말씀만으로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빈 무덤 사화>로 이해해야 한다. 빈 무덤은 하나의 표징이며,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만으로도 즉시 믿었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을 깊게 해준다.
♠ 대화 방향 : 부활의 기쁨을 이웃과 함께 어떻게 나눌 것인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신약성서 영적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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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2013. 4. 7
요한 20, 19~31
♠ 복음 연구
* 19~23절 : 이 단락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 장면과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장면은 루카 복음서의 보도 내용과 가장 가깝다. 아마도 원래는 독립된 전승 자료였을 것이다. 그런데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발현한 예수의 부활사화에 연결된 듯하다. 막달레나 마리아가 십자가상에 죽었고, 이제 부활한 예수를 보았듯이 제자들도 바로 그 예수를 보고서 기뻐했다고 복음사가는 서술, 묘사한다. 사실상 두 번째 장면도 부활한 예수의 평화 인사가 반복됨으로써 첫번째 장면과 연결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면에서 복음사가의 관심사가 표명된다. 즉 십자가상에 죽었으나 이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주고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서에는 ‘옆구리’ 대신에 ‘발들’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 24~29절 : 이 단락은 예수의 부활 발현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과 뚜렷한 증거를 요구하는 토마의 의심,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봄으로써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된 토마와 진실한 믿음의 동기에 관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특히 이 이야기의 주요한 구성 요소들은 제자들에게 발현한 예수의 부활사화에서 이미 열거된 것들이다. 마치 그 사화를 확대 묘사하여 보도해 준 듯하다. 그리고 토마의 그리스도론적인 신앙고백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근원적 동기에 관한 언급은 위 대목의 절정에 달한 내용으로서 복음사가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이 대목의 내용은 예수의 부활 발현사화를 전제로 하고서 전개된 것이다. 복음사가는 눈으로 본 제자들의 부활 체험을 토마의 이야기로서 막을 내리고 그리하여 믿는 자들에게 모두 믿음의 참된 길과 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열두 제자는 토마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열두제자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여기서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들은 것이다. 따라서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된 셈이다. 사실 사도시대에도 예수의 부활신앙에 대한 의심은 있었다.
* 30~31절 : 이 단락은 요한복음서의 원래 결말에 해당한다. 21장은 추가 삽입된 부록이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 활동을 표징이란 개념으로 요약 표현한 것을 미루어볼 때 이른바 표징의 책에 속한 결말이 보도된 듯하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표징의 개념으로서만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복음사가의 저술 동기 및 목적이 명시된 점은 특징적이다. 어느 복음서에서도 볼 수 없는 언급이다. 특히 그리스도론적 신학사상에 중점을 두면서 믿음을 촉구한 점에 유의해 볼 만하다.
♠ 복음 요약 : 믿는 이들에게 부활은 언제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며 그분께서 마련하신 진정한 평화의 기쁨을 맛보는 축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전례의 핵심은 지난 주 대축일의 연장으로 부활의 희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언제나 새롭게 간직하며 그 정신을 구현하도록 일깨워주는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주님의 평화는 이처럼 자기를 열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여시는 계기가 됩니다. 이어서 주님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이제 그들의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을 어떻게 증거해야 할지를 손수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즉, 부활은 파견입니다. 부활은 자기 안에 머무는 한시적 기분전환이 아니라 세상과 이웃을 향해 온 몸으로 전하고 증거되어져야 할 매일의 사건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맨 마지막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은 바로 부활의 희소식을 전하는 것이었고, 말씀의 선포로써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이후에 사도들이 초대 교회의 반석을 세우는데 첫 번째 일이었으며,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대화 방향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의 이 신앙고백은 냉담과 불신으로부터 자기 쇄신을 불러일으킨 응답입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신앙쇄신을 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 내 생활 안에서 부활의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함께 나누어봅시다.
♠ 참고 문헌 : ▪ 200주년 성서 주해서 ▪ 보득솔 (가톨릭청년 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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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례회의 스케치 >
2월 전국봉사자 월례회의 내용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기록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이번 2월 월례회합은 수원교구 안산 원곡동성당에서 있었다.
날씨가 제법 차다고 했지만,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닌 상황에서 찾아오신 귀한 손님들, 보니파시아 자매님과 아폴로니아 자매님, 그리고 아폴로니아 자매님의 부군께서 귀한 걸음을 해주셨다.
전례협조가 있어서 일찍 교중미사시간 전에 들러서 전주와 안산에서 오시는 분들을 반겼다.
미사 후에 저희 봉사자분이 준비한 식사를 하고, 콘테이너방에서 코이노니아와 월례회의를 가졌다. 몇 분이 구역장교육 때문에 중도에 가시고 회의에 모이니, 13분이 되었다. 복음이 루까 4,1~13절이니 한사람이 한 절이 읽어갈 수가 있었다. 시작은 성가로 하고, 보나벤뚜라형제님의 대표기도로 시작한다.
코이노니아는 손잡고 호칭기도와 필리피서 4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몸짓과 더불어서 선포하고 나서 복음서를 한절이 읽어 내려간다. 주제발표와 조정봉사자인 보나벤뚜라 형제의 간단한 성서내용을 말함으로 코이노니아는 정리하고, 월례회의로 이어져 내려간다.
팀별보고는 전주교구의 지난해부터 활동한 내용을 소상한 발표하고, 안산 서울 등은 간단한 분위기며 내용 등을 여러분 앞에 발표한다. 서울교구 이문동은 팀명이 정해지지 않은 듯 보인다.
당산동의 산상수훈팀의 할머니 등 독거노인 24분에게 선물을 전달한 일을 듣고 ‘진정으로 생활실천을 하는 팀이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서울교구내의 이문동과 당산동간의 내부교류를 원하셨다. 안산팀은 뇌경색으로 앓고 있는 김마리아자매님을 위해 전국적인 기도를 부탁하셨다. 동계묵상회 평가를 하고 2013년도 연중일정을 조율하고 변동사항은 그때에 확정하기로 하였다. 차기모임은 서울당산동에서 3월 세째주일 11시 미사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안산에서 드린 미사 중에 어린이들의 첫영성예식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오신 분들이 아주 감명 깊은 미사라고 하셨다. 저 개인적으로는 오늘 마사전례봉사와 구역소공동체교육에 해당되었는데
전주및 서울의 귀하신 손님덕분인지 다른 분이 도와주시는 바람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른 것은 성서형제회모임이 진행되어나가면서 팀별 월례보고 절차 및 방법은 차츰 조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두 분의 부봉사자의 역할도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였다.
짧은 시간 밖에 낼 수 없는 월례모임시간을 위해서라도 게시판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업무조정이 필요함을 간절히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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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동계묵상회 후기 >
세상 끝까지 주님말씀 선포하리...
전 FB 전국조정 말씀선포자
박 아폴로니아 (영화)
이번 동계묵상회 때 참 많이 수고들 하셨습니다...준비과정부터 끝마무리까지 고생하신 성서형제회 회원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인사올립니다.
예수그리스도회 수녀원의 안나 원장수녀님, 활짝 핀 수국꽃처럼 아름다운 미카엘라 수녀님, 몸이 많이 불편하시면서도 기쁘게 저희 성서형제회 회원들을 맞이해주신 주윤정 수녀님께도 감사인사 올립니다.
성경 속 인물을 어쩜 그렇게 잘들 표현하시는지... 특히 안산에 김상희 세실리아 자매님의 아픈 베드로 장모님 역활은 짱였습니다. 김치영 아나스타시아 자매님의 유머와 재치는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하는 약방의 감초였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조금 불편하셨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우리 최규업 신부님의 열정적인 삶을 강의해주신 김성자 데레사 수녀님께도 감사인사 올립니다.
여름엔 산새가 깊은 성거산성지에서 열심히 무명성인의 고귀한 피땀이 헛되지 않게 찾아온 신자들에게 희생과 미사로써 수고해주시고, 언제나 성서형제회 회원들이 요청만하면 ‘콜’ 하고 달려오시는 고마운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감사합니다...사랑하는 성서형제회 회원여러분!
그동안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부족한 제가 무엇이기에 기억해주시고, 미천한 저를 어찌 아시고 기도해주셨겠습니까? 성서형제회 <전국조정 말씀선포자>를 하며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그 큰 은혜를 여러분과 앞으로 많이 나누며 살려고 합니다. 성서형제회를 창설하신 우리 최규업 바오로마리아 신부님께서는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마치 무명성인성녀처럼 보이지 않는 삶을 택하셔서 멀고 먼 에콰도르라는 나라에서 31년 세월을 깊은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오로지 복음말씀 실행하기 위하여 일생을 사신 우리 신부님께 감사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주어진 여건이 어렵다 하더라도 FB 창설자이신 최규업신부님의 삶을 깊이 생각하고 저도 세상 끝날까지 주님말씀을 증거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주님의 이름으로 모두 사랑합니다...
‘성서형제회 동계묵상’의 즐거움
영등포 당산동 산상수훈 FB
이 안셀모 (기대)
♱ 찬미예수님
영광이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과 함께 한 동계묵상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질 않습니다.
동계묵상을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항상 새롭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가 없게 합니다.
수녀님의 강론 저의 성경필사의 길잡이로 삼겠습니다.
성극체험 성경의 말씀을 마음에 갈무리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형제, 자매님들의 신앙체험이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각 봉사자님들의 열정 제 자신이 갖추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기도는 제자신은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생각 했으나 오판 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분들의 혼연 일체가 아니면 성서형제회의 성령이 이루어 질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제마음속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어찌 다 갚으리오. 주님의 뜻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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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렇군요! >
2013년 신앙의해 - 기도
* 제1부 : 그리스도의 삶에서 기도가 지니는 의미
"474. 예수님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 예수님은 기도를 가정과 회당에서 배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적인 기도의 한계를 극복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아드님’만이 가질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당시의 여느 유다인 아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의례와 기도 방식에 익숙해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성전에서 겪으신 일(루카 2,41-52 참조)에서 드러나듯이, 그분 안에는 배워서 습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의 근원적이고 심오하며 유일무이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상을 바라셨고,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그 다른 세상의 한 부분이기도 하셨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은총을 청하게 되는데, 그러한 모습들이 이미 그때부터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478.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에게 치유를 간청했던 많은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의 청원에 귀 기울이시며,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에게 전달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다교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은 그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어린 딸은 병들어 죽었고, 더 이상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딸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마르 5,21-43 참조). 확실하게 입증된 치유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표징을 드러내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절름발이와 나병 환자, 눈먼 이가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인들도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에게 어떻게 청원했는지, 또 하느님은 자신들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주셨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자판기가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간청을 들어 주실지는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486. 우리가 하느님에게 청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우리를 샅샅이 알고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곤경에 빠져 그분을 향해 울부짖고 간청하며 한탄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도를 통해 그분과 겨루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청원이 필요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청하려 하지 않고 청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안에 갇힌 사람입니다. 청하는 사람만이 마음을 열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분에게 돌아섭니다. 청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 돌아옵니다. 이처럼 청원 기도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간을 이끕니다."
※ 그리스도인의 기도 자세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몸짓을 통해 자기 삶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합장하거나 두 팔을 벌립니다. 또한 성체 앞에서 무릎을 굽혀 경배하거나 무릎을 꿇고 조배합니다. 그들은 서서 복음을 들으며, 묵상할 때에는 앉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세는 경외심을 표현하고(상급자가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처럼), 동시에 조심성과 준비 태세(즉시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를 드러냅니다. 선 채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는 모습은 본래의 찬양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앉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속에 간직한(루카 2,51 참조) 말씀을 곰곰히 되새기고 묵상합니다. 무릎을 꿇음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느님 앞에 엎드림으로써 인간은 그분께 흠숭을 드립니다. 손을 합장함으로써 인간은 흩어졌던 마음을 모으고,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음을 표현합니다. 합장한 손은 본래 청원 자세이기도 합니다."
"506. 기도는 일종의 독백 아닌가요?
-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나’에서 ‘너’로 중심을 옮겨 가며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되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분은 때때로 우리가 바라거나 기대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은 종종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슬픔을 위로받거나 낙심했던 마음에 새 기운을 얻는 등 자신의 바람이 채워졌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곤경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더 깊은 불안감에 빠질 수도 있고, 평온히 쉬기를 바라지만 임무를 부여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하느님과 기도에 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508. 기도할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심지어 기도에 대한 반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기도할 때 드는 분심이나 내적인 공허감, 무미건조함, 심지어 기도에 대한 반감은 기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성실하게 견뎌 내는 것 자체가 이미 기도입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오랫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녀가 죽기 얼마 전, 어느 날 밤에 셀린느 언니가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셀린느는 데레사가 자기 손을 묶어 놓은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뭐하고 있어? 잠을 자야지.” 그러자 성녀가 대답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도하고 있지요.” “예수님께 뭐라고 말씀드렸는데?” 언니의 물음에 성녀가 말했습니다. “전 그분께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저 그분을 사랑할 뿐이지요.”
"509.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닐까요?
- 기도하는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현실 전체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는 현실을 견뎌 낼 힘을 하느님에게 직접 받습니다. 기도는 아주 먼 여정과 어려운 도전에 맞서기 위한 에너지를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더 깊이 관여하게 합니다. 기도는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는 시간을 배가하며 본질적인 의미로 그 시간을 채우게 합니다."
- 자료 정리 제공 : 권 토마 (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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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3년 1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