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 문학산책]
나의 삶 영화 이야기
임권택
영화감독,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예술대학’ 설립 학장
인생은 영화와 같다는 말이 있다. 지나고 보면 순간순간의 일들이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길게도 살 수 있고 짧게도 살 수 있다. 마치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전남 장성 빈농에서 나주임씨 장수공파 30세 손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시골에서 어렵게 자랐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는 부산 국제 시장에서 노점상을 할 만큼 고생도 했다. 짐 옮기기, 청소하기, 배우들의 가방 들기 등 잔심부름을 하면서 영화 일을 배웠다.
그렇게 5~6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고 흥행에 성공했다. 그 후 10년 동안 50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오로지 영화만을 위하여 시간을 보냈다.
‘화장’이 상영되었을 때 작품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고 할까. 아직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 벌써 85살이 되었다. 이 시점에도 여전히 현역처럼, 영화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토록 많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저력은 그 열정과 의지와 한 길을 가는 꼿꼿한 심지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2015년 102번째 영화는 소설가 김훈의 『화장』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연정을 품은 젊은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50대의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중년 남자의 애환을 그린 것이지만 요새 살고 있는 내 삶의 한 면 같기도 하여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가끔 있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에서 101번째 작품 ‘달빛 길어올리기’(2011)까지 정확히 반세기. 그 사이에 ‘잡초’(1973년) ‘족보’(1979년), ‘짝코’(1980년), ‘만다라’(1981년), ‘씨받이’(1986년), ‘서편제’(1993년), ‘춘향뎐’(1999년), ‘취화선’(2002년), ‘천년학’(2007년)이 있었다.
외국 영화제에 나가서 ‘어떻게 영화 100편이나 찍었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으로 난처했다. 실제로 감독 초기 10년 동안 무려 50여 편을 ‘가케모치(겹치기)’로 찍어내던 남작(濫作)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당시엔 좋은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생각보다는 먹고사는 방편으로 영화를 찍었다. 멜로, 액션, 전쟁물,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거치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아류(亞流)를 지향하려고 했지만 삶과 전혀 무관한 픽션에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앞으로 어떤 감독으로 살아갈 것인가.’ 본질적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 영화를 만들자.’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나는 두 가지를 작심했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 그리고 ‘한국 사람의 삶을 찍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삶과 전혀 무관한 픽션을 거부하고 당대를 살아낸 민초의 수난과 질곡을 영화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영화가 기법상 미숙하다고 할지라도 한국인 고유의 문화적 개성은 돋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 영화와 다른 한국 영화를 찍으려면 속도감과 현란함으로 무장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체질 개선’에 꼬박 10년이 걸렸다. 김창숙에게 아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국책 영화 ‘증언’(1974년)을 찍었을 무렵의 일이다.
이 작품이 대만에서 열리는 아태영화제에 출품됐는데, 고생했으니 영화제에 참석하라는 정부의 허락이 떨어졌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시달리던 나는 이때 생전 처음 외국에 나가게 되었다.
홍콩 국적의 비행기가 공항에서 이륙하자 갑자기 한국어가 사라지고 영어, 일어, 중국어만 들려왔다. 한국은 나에게 영화를 찍을 기회를 제공한 동시에 엄청난 정신적 압박도 가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비행기에 타자마자 그런 한국이 별것 아닌 존재로 바뀐 것이다. 사실 당시 세계는 가난, 분단, 전쟁, 독재의 나라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평소 기회만 되면 일본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의 버림을 받은 이 나라를 나 자신마저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남북으로 갈려 서로 총질이나 하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나마저 조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친다면 이 불쌍한 나라는 누가 사랑해줄 것인가?’
아무리 싫어도 결국 자신이 태어난 이 땅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회심(回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겐 별다른 풍경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에 정(情)을 붙였고, 영화에 그것을 오롯이 담아냈다. 그런데 도리어 세계 영화계는 그렇게 만들어낸 한국 영화를 주목했다.
‘만다라’가 많은 관심을 받더니, 강수연(씨받이), 신혜수(아다다)가 여우주연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변에서 ‘해외에 여배우상만 사냥하러 다니느냐, 이제 네 상도 챙겨야 할 것 아니냐?’라며 비아냥거렸다.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면 내게도 무슨 성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그런 시기에 김두한을 소재로 삼은 ‘장군의 아들’을 찍자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엔 저질 액션 영화를 양산하던 악몽의 시절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서 거절했다.
하지만 ‘흥행도 안 되는 영화를 만들어 해외에 출품하느라 지쳤으니 우선 흥행 영화 한 편만 찍자.’는 제안을 수용했다. 대신 배우 전원을 신인으로 기용하는,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일대 모험을 시도했다. 박상민, 신현준 등 신인을 이때 기용했는데,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깼다.
실제로 그다음에 촬영에 들어간 작품이 ‘서편제’였다. 판소리를 영화로 찍겠다는 것은 감독 초기부터 가슴에 품어온 내 평생의 화두였다. ‘절대 흥행할 일이 없으니 망해도 좋다.’라는 편안한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판소리는 사실 듣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렵지만 그 진미를 맛보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런데 감히 나는 ‘영상으로 판소리가 보이는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찍어야겠다는 구체적 상(像)이 없었기 때문에 제작진 전원이 서로에게 배워가면서 촬영에 들어갔다. 감독도, 스태프도, 배우도 잘 모르면서 엄청난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작업이 술술 풀려나갔다. 예컨대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막막해 할 때도 조금만 이동하면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나는 여기서 ‘귀신이 데려다준 것처럼’이란 표현을 썼다.
김소희 명창은 흥행 기록을 다시 깬 ‘서편제’를 ‘억울하게 살다 간 판소리 명창의 원혼들이 전부 힘을 모아서 보태준 영화’라고 평했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라는 학생들의 반응도 나왔다고 한다.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평하고 싶다.어쨌든 오정해, 김명곤이 열연한 ‘서편제’는 국내 최초 100만 관객 돌파의 기록을 세웠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본격적 영화 ‘춘향뎐’에 도전했다.
신세대 배우 이효정, 조승우를 발탁한 이 영화는 칸영화제 본선과 미국 영화시장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에서 시사회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실험 영화의 대가인 스탠 브래키지가 만나자고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영화 잘 봤다. 각국에는 고전이 있는데 한국의 춘향전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판소리도 처음에는 생경하게 들렸지만 듣다 보니 아주 좋았다. 한국인만 즐겼던 춘향전을 이제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전율을 느꼈다. 우리 조상이 창조한 예술을 영화에 담기 위해 노력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차라리 불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전반기 작품을 제외하고 적어도 후반기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쩔 도리 없이 난 이 영화를 꼭 찍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