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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닷컴 월간조선 2005년 1월호 기사]
![]() 월간조선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손창식씨. |
사인은 심장마비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망자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전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망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가신」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 |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고 제갈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손창식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손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손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객사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김대중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라 윤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김해 김씨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윤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손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금산제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김대중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대제가 열린 흥무왕릉 앞에는 「김대중」 아닌 「윤대중」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손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김대중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한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손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성씨 문제는 김대중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성씨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김대중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정적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김대중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김대중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김대중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손창식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손귀봉)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손씨 아버지는 손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손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철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손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손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손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적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돕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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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중학을 졸업한 손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광주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손씨는 1968년 조선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손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 |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선태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김선태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대구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대일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유를 구하기 위해 전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유공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유공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대구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거금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가산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김선태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김선태씨가 양일동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김상현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김대중씨가 김씨가 아니고 윤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이희호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손씨는 바로 김대중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광주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이경식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김홍일·한화갑·김옥두·함윤식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손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광주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이희호 여사가 아들 김홍일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저에게도 광주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이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김홍일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사보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민추협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손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에서 김대중씨의 실제 아버지는 윤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손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손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손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손창식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신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전두환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손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김대중씨 가계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김해 김씨로 김대중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전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김경인 전 의원은 김대중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목포에서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손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손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김대중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촌로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김대중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김대중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김대중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김대중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김대중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김대중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김대중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김대중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목포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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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 |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장로도가 제갈성조의 처고, 제갈성조가 죽은 뒤 장로도가 그의 부친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장로도가 1925년에 아버지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장지숙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생모 장로도가 1960년에 김운식과 혼인하면서 김운식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장로도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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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갈성조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김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김대통령 어머니는 윤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김운식을 알게 되었고, 김운식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김운식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김운식은 김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 |
김운식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대본(호적상 이름은 대본인데, 비석에는 대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장로도 집안 사람과 장로도의 「호적상 첫 남편」 제갈성조네 사람들, 그리고 김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 문중 사람들과 장로도와 일시 동거했던 윤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김대중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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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윤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처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장로도가 아들을 낳자, 윤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김대통령 호적에는 윤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윤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 |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윤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장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김운식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윤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김대중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윤씨니, 김씨니, 제갈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김운식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대본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김운식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윤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김운식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장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김운식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김대중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김대중씨 어머니를 위해 목포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김운식 어른입니다』 ―김운식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김운식씨의 큰아들과 김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김운식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장로도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김대중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대본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목포에 있던 김대중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대본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대본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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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식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김대중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장로도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이희호 여사)가 봉투에다 몇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김대통령은 어머니가 김운식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윤씨가 맞겠네요. | |
「김대중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김대중)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김대통령이 제갈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제갈씨라고 했고, 김해 김씨 문중 어른들도 제갈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갈성조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제갈성조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윤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김대중씨라는 것이 김해 금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윤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제갈씨라는 것이지요』 ―제갈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제갈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장로도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제갈성조의 형이 김대중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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