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의 묘비
김길영
팔베개에서 벗어난 밍키가 방바닥에 피를 토한다. 선잠 깬 아이처럼 비실비실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지 실눈을 뜨고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곤 이내 죽고 말았다.
십년 전, 어머니가 밍키를 안고 들어오셨다. 웬 강아지냐고 물었더니 애완견 가게에서 한 마리 얻어 왔다고 하셨다. 반월당에서 남문시장 사이에는 애완견 가게가 여럿 있었다. 어머니는 애완견 가게 앞에 턱을 괴고 앉아 귀여운 강아지들을 눈에서 놓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눈여겨 본 가게 주인이 기르고 싶으면 한 마리 가져다 길러 보라고 해서 안고 왔다고 하셨다.
밍키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들도 좋아라 했다. 좋아라 하면서도 식구 중 누구 한 사람 밍키의 일상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료를 챙겨 주거나 때 되면 목욕도 시켜야 하는데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밍키의 일상을 내가 책임져야 했다. 잠자리에선 내 팔에서 잠이 들고 배고프면 밥 달라고 눈짓을 했다.
동물들은 대개 털을 가지고 있고 계절에 따라 털갈이를 한다. 밍키가 털갈이를 할 때면 온 방과 거실이 밍키의 털로 난장판을 이룬다. 털을 깎고 목욕을 시켜도 묵은 털이 새 털로 바뀌기 까지는 털의 난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 밍키의 뒷바라지를 십여 년 해온 나는 일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밍키가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는 ‘개’라는 동물에 대해서 나에겐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 ‘누렁이’라는 개가 우리 집에 살았다. 때마다 먹고 남은 음식물을 받아먹고 잠자리는 마루 밑이었다. 내가 움직이는 동선 따라 누렁이도 함께 다녔다. 텃밭에 나가 오디를 따먹거나 둑 넘어 개울에 가도 따라다녔다.
내 친구가 되어 준 누렁이가 어느 날 아침 마루 밑에서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마루 밑에 들어가 흔들어 깨웠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섬뜩 했다. 어젯밤까지도 멀쩡하던 누렁이가 죽은 것이다.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 어른들이 나 몰래 산에다 묻어 주곤 다시는 우리 집에 ‘개’라는 동물을 들이지 않았다.
그 이후론 ‘개’라는 동물에 대해 마음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우연찮게 어머니가 밍키를 집으로 들여서 내가 돌보아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십여 년 눈으로 말하고 몸짓으로 정을 나누던 밍키를 그냥 아무데나 버릴 수가 없었다. 창호지로 몇 겹 둘둘 싸서 상자에 담아 봉인했다.
내가 가꾸던 포도밭 양지바른 탱자나무 아래 묘 터를 잡았다. 승냥이의 노림을 피할 요량으로 1미터 깊이로 팠다. 돌멩이를 주어다 석곽을 쌓고 밍키를 안장시켰다. 묘 봉이 없는 평장을 하고 치 오픈 각목에 묘비명을 썼다. ‘내가 사랑하는 밍키 여기 잠들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