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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은 능숙한 영어로 야구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했습니다. 4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거치면서도 그는 야구를 포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민기자닷컴 |
-1995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
▶그렇다. 너무 어려 그 시즌에는 뛰지 못하고 그 다음 1996년에 도미니칸 서머리그에서 처음 프로로 뛰었다.
-16세면 프로팀과 계약할 수 있는 딱 제한 나이인데.
▶그 나이에 계약을 하면 다음해부터 뛸 수가 있다. 그래서 16세에 계약을 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계약했다면 야구를 아주 잘 했던 모양이다.
▶글쎄, 솔직히 말하면 그렇진 않았다. 나는 키가 아주 컸고 (공을 던지는)리듬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계약을 했을 때 내 패스트볼은 79마일(127Km)에 불과했다. 키는 컸지만 아주 말랐었다.
-대부분 도미니칸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야구를 한 건가.
▶도미니칸 애들은 아주 부잣집 아이가 아니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야구 놀이를 한다. 태어나서 처음 받는 선물이 야구공이나 글러브나 야구방망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뒤뜰에서도 야구를 하고 길거리에서도 하고 빈 터만 있으면 야구를 한다. 길거리에서 차가 지나다니는 데서도 우리는 야구를 한다.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축구를 하듯 우리는 야구를 한다.
-나도 1996년에 윈터리그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박찬호가 거기서 뛴 적이 있다.
▶그런가? 내가 처음 프로야구를 시작한 해다. 박찬호가 윈터리그를 뛰었나? 어느 팀에서 뛰었는가.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산토 도밍고와 산 페드로, 라 로마나, 산티아고 등에서 윈터리그를 한다.
-커다란 휴양지와 골프 리조트가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아, 그럼 라 로마나다. 토로스에서 뛴 모양이다. 아니면 아수카레로스다.
-아, 아수카레로스였던 것 같다. 그럼 로만도 다른 아이들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야구를 했겠다.
▶물론이다. 다니엘이라는 형이 야구를 잘 했다. 다저스와 계약을 했다. 형이 셋 있는데 둘째 형 다니엘이 야구를 잘 했고 다저스와 했지만 메이저리그까지 가지는 못했다.
-형제가 몇인가.
▶4남 5녀, 9명이다. 그 중에 내가 막내고. 다른 형들도 야구를 했지만 프로는 두 명만 갔다. 사실 다니엘 형이 나보다 공은 더 좋았다. 더 빠르고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움직임이 있는 아주 좋은 공을 던졌다. 공격적이고 커브와 슬라이더도 아주 좋았다. 형이 빅리그에 가지 못한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정말 잘 던졌었다. 당시 형은 다저스 캠프에서 라몬 마르티네스,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함께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다저스에서 방출됐고, 밀워키로 갔다가 비자 문제로 또 방출되자 형은 야구를 그만두고 말았다.
-정식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16세 때 계약을 하고 그때부터 정식으로 야구를 배웠다. 그 전까지는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았을 뿐이다.
-그 전에는 고등학교나 다른 팀에서는 하지 않았나.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를 빼먹는 일이 많았다. 나는 농가에서 자랐고,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학교가고 일하고 그러다보면 야구를 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한 건가.
▶아 그건 아니고 바나나, 고구마, 옥수수 그 외에도 많은 작물을 키웠다. 가족이 살아남으려면 남자애들은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다. 우리 4형제는 번갈아 아버지와 함께 농장에서 일했다. 도미니칸은 가난한 나라다. 그 많은 아이들이 야구를 하려는 것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나도 야구를 하게 됐고.
-야구가 삶에서 의미가 아주 크겠다.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나는 야구를 너무 좋아한다. 돈을 받지 못한다 해도 야구를 할 것이다. 야구는 장말 아름다운 게임이고 야구라는 경기를 존경한다.
-브레이브스는 어떻게 당신을 찾아냈나.
▶형을 보려고 찾아왔던 한 사람이 나를 보고는 다시 만나자고 하더니 1주일 후쯤에 르네 프란시스코라는 애틀랜타 스카우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바로 전에 오클랜드 캠프에서 2일간 트라이아웃을 했었다. 1주일 후에 오클랜드에서 연락을 하기로 했는데 연락이 없었고, 프란시스코가 당장 애틀랜타와 계약하자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계약을 했다.
-사이닝 보너스는 많이 받았나.
▶당시 대부분 아이들은 3500달러에서 많으면 5000달러를 받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나는 1만1000달러를 받았다. 127Km를 던지는 깡마른 아이에겐 나쁘지 않은 액수였다. (96년 취재를 갔을 때 도미니칸 직공 하루 일당이 4달러였습니다.)
-프란시스코가 왜 그렇게 투자를 하는지 설명을 해줬을 텐데.
▶내가 투자할만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키도 크고 부드럽고 리듬이 좋다고 했다. 프란시스코는 도미니칸에서 가장 많은 빅리거를 배출한 스카우트다. 라피엘 퍼칼, 오달리스 페레스, 윌슨 베테밋 등 아주 많은 선수와 계약했다. 내겐 아버지 같은 분이다. 빅리그까지 가는데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류엔 내 고향이 몬테 크리스티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 자란 곳은 좀 떨어진 아토 델 메디오라는 150가구 정도가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거기서 빅리그까지의 길은 참 멀었다.
-그때 키가 얼마였나. 지금은 몇인가.
▶그때 190이 다 됐다. 지금은 196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은 100Kg이 넘지만 당시는 70Kg 조금 넘었을 것이다.
-미국엔 언제 처음 간 건가.
▶1996년 가을 폴 리그에 처음 갔다. 비행기를 처음 탔는데 좀 무서웠다. (웃음) 그리고 온통 높은 빌딩과 큰 길과 차들이 질주하는 대도시 마이애미를 가자 입이 딱 벌어졌다.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그러나 나는 빠르게 배워갔다. 그리고 처음에 생각한 것은 영어를 빨리 배워야겠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전혀 몰랐나. 지금은 아주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전혀 몰랐고 영어를 공부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 던져지자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계속 영어도 이야기하고 팀에서도 늘 미국 친구들과 어울렸다. 늘 물어보고 배우고 또 물어보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호텔에 가면 남미 방송을 절대 안 보고 항상 영어 방송만 봤다. 그렇게 하다 보니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었다. 한국어도 노력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나쁜 말도 좀 배웠다. (웃음)
-‘반사’라는 단어도 아주 적절히 쓴다고 동료들이 웃던데.
▶누가 내가 나쁜 말을 하면 ‘반사’라고 말하면서 웃고 즐긴다. 관중석에서 2루타, 3루타, 홈런 하고 소리치는 말도 들리고, 삼진, 삼진 하는 단어도 배웠다.
-언어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에 던져지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속은 언제부터 빨라진 건가.
▶프로 계약하고 1년 후인 17세 때 구속이 90마일이 나왔다.
-그렇게 갑자기? 비결이 있었나.
▶잘은 모르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고 야구에만 집중하고 또 먹기도 더 잘 먹으면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일을 하고 휴식도 거의 없고 음식도 열악했다. 몸도 커지고 웨이트도 조금 했다. 투수는 근육이 너무 커지면 안 되니까 웨이트는 많이 하지 않았다.
-구속이 가장 빠르게 나온 것은 언제이고 얼마나 빨랐나.
▶내 기억으로는 디트로이트에서 뛸 때 101(163Km)마일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때는 구원 투수였다. 선발로는 94~97마일(151~156Km) 정도 던졌다.
콜론은 2000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했고 2006년 말엔 심각한 목 디스크로 뼈 이식과 함께 지금도 스크루를 4개를 목 안에 담고 있습니다.
-빅리그 데뷔는 2004년이었다. 시간이 좀 걸렸다.
▶부상 때문에 오래 걸렸다. 2000년엔 토미존 수술(팔꿈치)도 했다. 내 투구 동작이 항상 위에서 내리 꽂는데 패스트볼과 함께 아주 좋은 커브를 던졌었다. 그런데 너무 높이서 커브를 던지다보니 팔꿈치에 무리가 많이 갔던 모양이다. 그래서 팔꿈치를 다쳤고 그 후로는 커브를 던지지 않고 슬라이더를 던진다. 지금은 패스트볼(투심, 포심), 슬라이더, 스프릿을 던진다.
-그 후에도 큰 수술을 받았다는데.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006년 디트로이트에서 시즌이 끝나고 목 디스크가 와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증상이 너무 심해서 다른 사람의 뼈를 이식해 수술을 받았는데 목에 스크루 4개를 박았다. 그래도 야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뼈를 받아 이식했고, 지금도 스크루가 4개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처음엔 너무 고통스럽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당시 디트로이트가 플레이오프에 갔는데 나는 DL에 올라 뛸 수가 없었다. 뛰기는커녕 숨 쉬기도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야구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다시 돌아가 보자. 빅리그는 애틀랜타에서 시작했다. 첫 경기가 다저스 상대였는데. 기억이 생생하겠다.
▶물론이다. 2004년 여름이었다.(8월 21일) 구원 투수로 나가 3명을 상대하며 삼진 2개와 유격수 뜬 공으로 이닝을 끝냈다.
-첫 등판의 소감이 어땠나.
▶보비 콕스 감독은 항상 컨디션이 가장 좋은 투수를 올린다. 나는 어렸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풀라고 했다. 잘 알겠지만 다저스타디움 원정 불펜은 우익수 뒤쪽 아닌가. 낮 경기였는데 문이 열리고 뛰어나가자 팬들이 야유를 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는데.(웃음) 너무 긴장했는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토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런데 일단 마운드에 올라 첫 공을 던지고 나서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지금도 DVD로 가끔 다시 보곤 한다.
-그 해에 18번 나가 꽤 좋았는데 2005년에는 변화가 있었다. (2승1패 3.32)
▶2005년 개막전 로스터에 들어갔다. 그런데 존 스몰츠가 부상으로 마무리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한 선수와 함께 디트로이트의 구원 투수 판스워스와 트레이드됐다. 디트로이트는 애틀랜타와는 또 정말 달랐다. 그리고 2007년에 다시 캔자스시티로 트레이드됐다.
-2006년에 타이거스에서는 상당히 좋았는데. 풀 시즌을 뛰었나.
▶팔꿈치 통증으로 중간에 한 달을 쉬었지만 괜찮은 시즌이었다. (1선발 포함 20경기 등판 2승 무패 4.89) 그리고 시즌 막판에 목 디스크가 찾아왔다.
-큰 수술이었는데 재기에 얼마나 걸렸나.
▶1년 동안 재활을 했다. 첫 두 달은 목에 캐스트를 하고 절대 안정이 필요해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처음엔 물 잔을 들지 못할 정도로 전혀 팔에 힘이 없었다.
-병원에서 재기할 수 있다고 했나. 야구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재기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야구를 포기한다니. 내 삶에서 포기는 없다. 계속 투쟁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포기하면 패자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재활했나.
▶서서히 서두르지 않고 의사와 트레이너의 지시대로 열심히 재활을 했다. 11월에 수술을 했고, 다음 해 3월에 처음 가벼운 캐치볼을 시작했다. 처음엔 공을 던지는 것조차 잊어버려 재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생각도 했다. 마운드에서 던지는 선수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던졌었는데.’라며 정말 부럽기도 했다. 야구 선수들은 참을성이 반드시 필요한데 많은 선수들이 그것이 부족한 것 같다. 힘들었지만 여유를 갖고 참으면서 계속 재활 운동을 했다.
-다시 90마일대를 던진 것은 언제인가.
▶2007년 후반기에 90마일이 조금 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팀과 약간 문제가 있었고 캔자스시티로 트레이드됐다. 로열스는 나를 선발로 쓰길 원했다. 그래서 그해 가을, 수술 받고 1년 만에 가을 리그에서 이닝을 꾸준히 늘여갔다. 2008년에는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팔꿈치 통증으로 뼛조각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8년 더블A와 트리플A에서 10번 선발 포함 33경기에서 총112이닝 던지면 7승5패 4.74)
-또 수술을 받은 건가.
▶팔꿈치 수술은 간단했다. 뼈조각 제거 정도였으니까. 작년에 무릎 수술을 받았으니 총 4번을 받았다.
-2009년과 올해 초반도 빅리그에서 뛰었는데.
▶작년에는 거의 풀타임으로 43경기를 뛰었다. (2승3패) 그리고 올해 개막전 로스터에 들어가 시즌을 시작했는데 5경기 2이닝 만에 특별한 이유 없이 기회를 안주고 마이너로 보냈다. 그런데 기아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기아에서 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결정이 그렇게 간단했나.
▶한국과 일본 야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시스템도 다르니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멀리 와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웃음)
나는 16세부터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아왔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나 스스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해왔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미지의 세상을 발견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돈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다른 세상에 온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두려움은 없었나.
▶아니, 전혀. 새로운 도전과 경험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 야구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텐데.
▶전혀 몰랐다. 애틀랜타 마이너에 있을 때 봉중근이 그 팀에 있었는데 한국 선수라는 것을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 리그에서 뛰게 될 줄이야.
-한국 야구에 대한 첫 인상은.
▶첫 등판 잠실 LG전에 1회에 마운드에 올랐는데 깜짝 놀랐다. 관중석의 응원은 끝없이 계속됐다. 처음엔 그것이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 즐기고 있다.
-많은 외국인 선수들은 한국 야구가 많이 다르다고 하는데.
▶분명히 차이는 있다. 작은 여러 부분이 다르다. 12초룰, 관중 응원, 콘택트 히터가 아주 많다는 것. 참을성 있고 선구안이 뛰어나다. 그러나 적응에는 문제가 없다. 결국은 똑같이 던지고 똑같이 치고 똑같이 받아야 한다.
-선발 투수들은 투구수가 금방 늘어나 어렵다는 말도 하는데 어떤가.
▶난 별로 모르겠다. 6이닝 던지면서 90개를 넘긴 적은 없다. 난 삼진 투수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많은 스트라이크를 던지려고 한다. 맞춰 잡으면 되고 동료들이 뒤에서 잘 도와준다. 우리 동료들은 매너도 좋고 서로 도우며 늘 열심히 한다. 선후배 예절도 강하고. 그래서 내년에도 이 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콜론은 야구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끝까지 야구를 할 생각입니다. 야구에 대한 존중과 팬에 대한 존경도 아낌없이 드러냈습니다. ⓒ민기자닷컴
-한국 음식과 문화는 적응할 만한가.
▶반찬이 정말 많다. (웃음) 음식은 맛있다. 그리고 집에서는 형과 함께 도미니칸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유격수 김선빈과 제일 친하냐고 묻는 팬이 있었다.
▶그 친구를 아주 좋아하는 이유는 작은 체구지만 정말 대단한 투혼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좀 아플 때도 경기에 나선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선수이고 그래서 참 좋아한다. 그의 정신력이 정말 좋다. 야구를 할 줄 알고 늘 야구를 하고 싶어 한다. 오래도록 선수 생활을 잘 했으면 좋겠다.
-양현종과도 잘 어울리던데.
▶물론이다. 코미디언 같고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그리고 배우려는 의지가 대단하다. 아주 영리한 선수다. 그리고 정말 재능이 뛰어난 투수다. 파이터이고 야구를 존중하며 늘 최선을 다한다. 호세 리마와도 친했다고 말하더라.
-또 친한 선수가 있나.
▶동료 모두와 친하다. 전부 나를 도와주려고 하고 팀으로 뭉쳐서 나가려고 한다. 수천 킬로를 날아와 한국에서 뛰게 됐는데 나를 동료로서 따뜻하게 받아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기아에서 그 친구들과 함께 뛸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팬과도 항상 먼저 인사도 살갑게 지내는데.
▶팬은 정말 소중하다. 매일 매일 운동장에 나와 성원을 보내준다. 이길 때나 질 때나. 돈을 내고 우리가 하는 경기를 보러 오는 분들이다. 당연히 그 분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때론 실망하고 화도 내지만 그건 팬으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 시간에 일부러 야구장을 찾아와 우리를 성원해주는 분들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겸손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한국 팬이 최고인 것 같다. 시간만 나면 사인도 해드리고 사진도 함께 찍으려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
▶계획은 야구를 계속 하는 것이다. 남은 시즌 우리 팀이 잘 할 수 있도록 돕고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것이다. 내년에는 기아로 다시 오게 될지,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될지, 미국이나 고향으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장은 나서는 경기마다 열심히 던져 좋은 인상을 심고 싶다. 우리 팀은 부상이 많았는데 그들이 돌아오면 훨씬 강해진다. 그리고 모든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 김상현, 박기남이 돌아오고 윤석민이 오면 우리는 충분히 포스트 시즌 경쟁을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야구를 하고 싶은가.
▶그건 모르겠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는 않는다. 내가 뛸 수 있고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계속 던질 것이다. 나는 야구를 사랑한다. (I love baseball so much!!!)
-야구 생애가 끝난 후에는.
▶가족과 함께 생을 보낼 것이다. 5살짜리 아들이 누나 가족과 살고 있다. 약혼자가 있어 오프 시즌에 결혼할 지도 모른다. 야구를 그만하게 되면 가족이 모두 모여 살 것이다.
-라몬 콜론에게 야구란 어떤 의미인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다. 아까도 말했지만 연봉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야구를 할 것이다. 내 피안에 야구가 흐르고 있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가려질지 모르지만 상당히 섬세하고 예의가 바르며 야구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철철 넘치는 선수입니다. 자기 공에 대한 자신감도 강하고 국내 리그에 적응하겠다는 노력과 의지도 강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야구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정신력이 투철하게 살아있어 보기 좋았습니다.
외국인 선수의 운명은 훨씬 가혹하고 짧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콜론이 국내 마운드에서 던지는 모습을 언제까지 볼 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혼을 실어 던지는 선수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구장에서 뛰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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