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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우리 반남박씨는 호장공이 반남에서 사셨던 관계로 호장공 이후의 우리 선조는 출신이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으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문정공과 평도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으며 평도공을 비롯한 많은 선조님들이 실제로는 나주 반남에서 출생은 하지 않았고 서울 기타 지방에서 출생을 하셨어도 출신을 나주로 하였다. “<高麗史>.《1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 § 박상충(朴尚衷)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고 또 세종실록 기록에는 “ 세종4년 1422 5월 9일 금천 부원군 박은의 졸기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 위에서 보면 본관이라고 하기보다는 출신지역을 말하고 평도공의 호가 많이 불리우기는 조은(釣隱)이라고 하지만, 평도공께서 강원도 관찰사로 강릉에 게실 때 편찬하신 “신간표제공자가어” 말미에 보면 潘溪朴訔誌(반계박은지) 글이 있다. 우리의 반남박씨 선조가 처음으로 역사상에 부각되기 시작한 문정공(文正公) 휘 박상충(朴尙衷))의 호가 반남 이란 것도 이에 기인(起因) 한 것으로 반남선생 이라고 했고. 평도공이 태종2년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더 받고, 관계를 올려 반남군(潘南君)에 봉하진 일도 본관의 고향이 반남이기 때문이다. 태종7년 반성군(潘城君) 으로 고쳐졌으며, 그러던 중에 평도공 때 반남현이 나주에 속해짐에 따라 나주로 바꾸게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12년12월13일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나주로 정해 주다》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 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위와 같이 태종 12년에 반남현이 나주로 합쳐짐에 따라 관향이 반남에서 나주(羅州=錦城)로 바꾸게 되었다 반남이 나주로 바뀐 이후로부터 는 우리 선조님들 에게 의빈의 위호. 군호(君號)를 봉할 때마다 나주가 신라시대에는 금산이었기에 앞 글자에 금(錦)자(字)가 꼭 들어가게 됐다. (예로 금양위 금창부위. 금평위.금성위.금능위, 금주군,금능군.금원군,금완군 등등)평도공 이후의 선조님 들의 관향은 나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주박씨에서 반남박씨로 바뀐 이유와 시기는 우리 반남박씨 족보가 현재까지 7차례 나왔는데 처음에 출간된 금양위가 편찬하신 임오보(1642년)에는 표지에 “나주박씨세보”로 기록 되어있고 두 번째 출간한 서계공이 편찬한 계해보(1683년)에는 표지에 “반남박씨세보”로 되어 있으며 계해보 서문(序文) 기록 중에“반남박씨세보증수범례(潘南朴氏世譜增修凡例)” 두 번째 내용 중 다음과 같이되어 있다. 舊譜稱羅州朴氏吾朴氏本出潘南卽高麗舊縣至我 朝?於羅州故舊譜云然然據輿地勝覽羅州姓氏有本州 朴從義朴潘南朴伏龍朴押海朴任城朴之異若但稱羅州無以自別於他族而惑致混淆僞冒之患今謹改羅州曰潘南 [구보칭나주박씨오박씨본출반남즉고려구현지아 조?어나주고구보운연연거여지승람나주성씨유본주 박종의박반남박복용박압해박임성박지이약단칭나주무이자별어타족이혹치혼효위모지환금근개나주왈반남]
임오보(壬午譜)에서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라 한 것을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해 반남(潘南)으로 고친다. 위와 같이 기록 되 있으며 그이유가 “여지승람의 나주 군지(郡誌)의 성씨에는 이 고을 박씨중에 반남박씨 (潘南朴氏)는 박복룡(朴伏龍),박압해(朴押海),박임성(朴任城)의 박씨와는 다르다는 뜻을 따른 것이다. 만약 나주라고만 한다면 다른 종족(宗族)과 구별 할 수가 없으므로 혹은 혼동이 되어서 허위로 남을 속일 폐단이 있기 때문에 나주(羅州)를 반남(潘南) 이라고 개칭(改稱)한 것이다. “위에와 같은 기록을 보면 우리의 반남박씨의 본관이 반남으로 확정된 것이 1766년 계해보 발간 이후이기에, 계해보 발간 이전 기록에는 우리의 선조 분이라도 반남박씨가 나주박씨로 기록된 기사가 남아있다.(1683.년) 그 예로 문과방목(과거급제자 명단) 이나 사마방목 합격자(생원과 진사합격자 명단)의 『본관』에서도 숙종 이전에는 반남박씨라도 본관이 나주 박씨로 합격하셨고 숙종 이후에부터 반남박씨 합격자가 등장하면서 나주박씨를 본관으로 쓰시는 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숙종 이후에 본관을 나주 박씨라고 하는 합격자의 신상명세를 조사하면 실상은 반남박씨 였기에 숙종 이후에도 많은 분들이 본관을 반남과 나주박씨를 함께 쓴 것이다.
위의 결과를 검토해보면 처음에는 관향을 반남(潘南)으로 했으나 태종 12년에 반남현이 나주(羅州)로 흡수되면서 관향이 나주(羅州)로 되어 본관이 나주였으나 숙종 9년 서계공(西溪公)이 계해보(癸亥譜)를 출간하면서 반남으로 관향을 변경함으로 그때부터 우리의 본관이 반남으로 정해진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2004년 정신문화연구원(현재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으로 개칭)에서 발표한 문과 급제자 중 반남박씨 177명 나주박씨 15명 라주박씨 5명 본관미상 4명 의 기록이 있었으나 여러 종인들의 노력으로 본관 나주박씨를 반남으로 고쳐져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발표에는 201 분 모두가 반남박씨로 발표하고 있다.
금성박씨와 반양박씨 2007.11.11일 권도현이라는 분이 종중사무실을 방문하여, 권씨의 선조중에 금성박씨의 할머니가 계신데 금성박씨와 반남박씨 관계에 대하여 문의가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금성박씨와 반남박씨는 동일하고 문헌에 보면 잠시 금성박씨를 쓴 경우가 발견된다. 사마방목에 보면 금성박씨가 있다. 우리 선조중에 사마방목에 기록된 생원 진사 합격자중에는 반남박씨 : 282 명 나주박씨 : 163 명 금성박씨 : 13 명 반양박씨 : 1 명 본관미상 : 1 명 모두 460명의 합격자가 있고 사마방목에 기록된 금성박씨의 13분은 다음과 같다 1 박세혁(朴世爀) /孝宗 05(1654) 式年 生員 맹지-춘간-수-맹하-홍수-문휴-세혁 2 박태징(朴泰徵) /孝宗 08(1657) 式年 進士 소-응천-동현-병-세기-태징 3 박세장(朴世樟) /孝宗 08(1657) 式年 進士 소-응복-동량-유-세장 4 박세혁(朴世爀) /顯宗 01(1660) 式年 生員 여-세혁 5 박세당(朴世堂) /顯宗 01(1660) 增廣 生員 소-응천-동선-정-세당 6 박사(朴㴲) /顯宗 01(1660) 增廣 進士 소-응복-동량-사 7 박태소(朴泰素) / 顯宗 03(1662) 增廣 生員 소-응천-동선-정-세견-태소 8 박세봉(朴世封) / 顯宗 03(1662) 增廣 生員 소-응천-동현-병-세봉 9 박세희(朴世熙) / 顯宗 03(1662) 增廣 生員 빈-세희 10 박태손(朴泰遜) /顯宗 03(1662) 增廣 進士 소-응순-동언-황-세楠-태손 11 박세량(朴世樑) /顯宗 04(1663) 式年 進士 潾-세량 린 12 박태첨(朴泰詹) /肅宗 05(1679) 式年 生員 맹지-춘간-수-맹하-홍수-문휴-세혁-태첨 13 박태서(朴泰舒) /肅宗 05(1679) 式年 生員 소-응인-동위-여-세준-태서 금성박씨로 기록된 분들의 내용 중 두 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박세혁(朴世爀) / 孝宗 05 式年 生員 》 【시험년도】 효종(孝宗) 05 (1654) (式年生員) 【합격등위】 3등 0074 【본인성명】 박세혁(朴世爀) 【본인 자】 분경(賁卿) 【본인생년】 신미(辛未) 1631 【본인본관】 금성(錦城) 박(朴) 【본인거주】 산음(山陰) (현 산청)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박문휴(朴文休) 【부친관직】 /유학(幼學)
《박세당(朴世堂)顯宗) 01 (1660) 증광(增廣)生員) 【합격등위】 2등 0012 【본인 자】 계긍(季肯) 【본인생년】 기사(己巳) 1629 【본인본관】 금성(錦城) 박(朴)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문과】 경자(庚子) 1660 증(增) *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박정(朴炡) 【부친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 【부친관직】 이조(吏曹)/행참판(行參判) 【부친봉작】 정사(靖社)/금주군(錦洲君) 【안항(형)】 朴世圭, 朴世堅), 박세후(朴世厚)
위의 자료를 보면 서계공께서도 금성박씨라는 본관을 사용하신것이 이채롭다. 13분의 사마시에 합격한 분들의 시대를 검토해보면 1654~1679년 사이에 금성박씨를 쓰셨으며 이시기는 금양위 께서 임오보를 만드신 1642년과 서계공 께서 만드신 계해보가 출간된 1683년 사이로 본관을 나주박씨에서 반남박씨로 바꾸기 전에 잠시 금성박씨라고 불리었던 것 같다. 금성박씨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자료가 모아지는 데로 더 깊이 연구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며 참고로 퇴계(退溪)선생이 은곡(隱谷)선조(휘 진(璡) 에게 한 만사(挽詞) 중에 “금성문벌의창후 錦城門閥宜昌後 금성의 높은 가문이니 당연히 후세가 창성 할 것이요”라는 만사에 우리 반남박씨 가문을 금성 가문이라고 부른 역사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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