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빚어낸 그곳에는 옛 정취가 물씬
(한산오일장)
한산으로 간다. 먼 길이다. 장거리 운행하기에 차도 낡아 부담스럽다. 기상 예보에서는 눈발까지 날린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조건에도 고집을 부리는, 마력 같은 이 끌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른 아침에 출발해 네 시간여 만에 도착한 한산면. 오일장 터 주위의 고즈넉한 농촌 풍경은 느긋한 충청도 억양을 풀어놓은 듯 푸근하다.
기대했던 오일장날 풍경이 여느 시골 장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한산오일장터 주위는 깊고도 넓게 그러면서도 조용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동안 모습이 희미했던 옛것들은 사라져 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시 돌아볼 때까지 몸을 낮추며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때가 된 것일까. 곳곳에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린다. 대장간의 망치에서, 소곡주 뜨는 아낙네의 손끝에서, 베틀의 장단에서 봄기운 같은 생기가 느껴진다. 질펀한 삶을 이어갔던 옛사람들의 입김이 훅 스친다. 더운 여름날 우물 속 두레박 소리처럼 정겹고 반갑다. 타는 목을 축여주듯 작은 시골 장터에 이렇게 가슴 적시는 감동이 있을 줄이야.
장터의 모습. 날씨가 많이 추워 보통 때보다는 사람이 적다
한산오일장은 세모시의 고장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소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일장(1일,6일)이다. 문전성시(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이란 문구를 내걸고 각종 테마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지금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굴하여 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중이다. 주제가 있는 스물두 곳의 가게가 신기한 구경거리다. 테마 기획팀의 일원인 최연희님의 안내를 받으며 구석구석을 돈다.
3대째(100년) 이어가는 아성 대장간
궁금해 제일 먼저 들른다. 대장간을 품은 건물이 상노인이다. 나무를 덧대어 외벽을 만든 오래된 일본식 건물이다. 안을 들어가자 가마에서는 불이 벌겋다. 42년째 같은 일을 한다는 초로의 대장장이(김창남 72세)는 길쭉한 몇 개의 쇳덩어리를 갈탄 불구덩이에 넣고 달구어지기를 기다린다. 억센 고집을 꺾는 중이다. 집게로 집어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그 중 한 놈을 끄집어내어서는 머릿돌에 얹고 망치로 내리친다. 크게 한번 고꾸라진 쇠는 낮은 두들김에도 고분고분한다. 금방 날씬한 낫 모양이 만들어진다. 다시 불구덩이에 넣는다. 완전한 낫이 되려면 몇 번의 반복을 거쳐야 한다. 세월에 인생을 달구며 살아가는 우리도 그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쇠가 익으면 끄집어 내야혀유. 벌건 놈은 아직 멀었고 노르스름한 놈이 익은 놈이여.”
옆에 있던 부인(68세 이순애)이 한마디 거든다. 이어서
“울 할아버지는(시할아버지)는 돈을 엄청 벌었대유. 시집오니깐 아버지 형제들 큰 집 다 마련해 줬다면시 다 잘 살고 있었어유. 그런데 울 아버지(시아버지)랑 이 사람은 돈을 못 벌었어유.”
설명을 들으며 관심 밖으로 밀려난 대장간 안의 진열된 수제품을 본다. 부인의 푸념 섞인 말이 무쇠처럼 무겁다. 그러면서도 저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세월의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옛것을 지켜온 강철보다 강한 대장장이의 뚝심을 생각한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걸 애써 사양한다.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한바탕 눈이 쏟아질 것 같아서다
쇠가 익었는지 살펴본다
대장간에서 만든 각종 제품들
딸에게로 3대째 이어온 어물전
어머니와 딸
어물전에 들를 때쯤 눈발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한다. 세대를 달리한 두 여인이 두터운 앞치마를 두르고 바삐 움직인다. 모녀간이란다. 갖가지 생선들은 제 편한 대로 누워 입을 벌린 채 만판으로 오수를 즐긴다. 그 중 홍어 두 놈을 함께 간 문우가 낚아챈다. 싱싱한 어물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홍어회 만드는 법을 덤으로 챙긴다.
간판없는 철물점
40년간을 간판도 없이 장사하는 철물점.
마땅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간판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눈이 없는 모습같아 답답하다. 그러나 당사자는 진작 느긋하다. 40여 년간을 살아오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다. 사람들은 그냥 학교 앞 철물점이라고 부른단다. 소복이 들어앉은 물건들이 되레 나그네를 내다보며 그 중요한 마음의 눈을 가졌느냐고 묻는다. 그제서야 이곳 사람들의 활짝 열린 가슴속을 짐작한다.
소곡주(백 일 동안 빚는다고 백일주라고도 한다)
술을 뜨는 채(용수)
소곡주 두 병을 산다. 지인과의 통화에서 한산 소곡주를 꼭 사오라는 말을 듣고서다. 어찌 그 유명한 술을 이제껏 몰랐을까. 알고 보니 거의 집집이 담을 정도로 술 만드는 집이 많다. 그중 한 집에 들른다. 독 대신 붉은색 고무통이 넓은 곳간에 즐비하다. 술 익는 냄새가 은은하다. 미모의 여주인이 술이 다 익은 모습을 보여준다 한다. 팔을 걷고 통 안의 술 건더기를 반복해 파헤치자 갇혀 있던 알코올 성분이 술과 함께 용암처럼 솟는다. 순간을 포착하려 카메라를 들고 있었으나 그만 놓쳐 아쉽다. 서울서 시집왔다는 여주인, 구수한 충청도 억양이 잘 익은 술맛만큼이나 깊게 와닿는다.
그 외에도 17세 때 보부상으로 시작하여 지금껏 60여 년을 이어가는 부부상회, 40년 전 맨바닥에서 칼잠을 자며 배운 시계수리 기술로 고장 난 건 뭐든 고쳐주는 문화시계점, 명함 고무도장 등 모든 걸 수공으로 만드는 대신인쇄소, 여름엔 모시옷을 만들고 한때는 교복도 맞추었으며 지금은 옷 수선을 하는 제일양복양장점 등 22곳이다.
거기다가 오일장 변두리에서 작업하는 짚 공예, 부채 공예, 밀짚 공예 분들도 앞으로 합류할 것이란다. 무엇보다 이곳의 상인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아닌, 거의 지역 주민이라는 것이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명 풍경 하나.
새벽 모시 시장이다. 계절마다 열리는 시간은 다르다. 여름에는 새벽 4시가 되면 횃불을 켜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다. 이슬이 내릴 때라야 습도 덕분에 모시가 부서지지 않기도 하고 또 모시 베의 질을 보려면 어두울 때 불에 비춰봐야 제대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최연희님의 설명을 들으며 먼 길을 이고 지고 모여들었을 옛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3대째 이어간다는 삼거리식당에서 소머리 국밥으로 점심을 먹을 때다.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타지에서 맞는 눈은 환상 그 자체이다. 고맙게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방문객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계속 내리지는 않는다. 필요할 때만 연출하듯 뿌려 준다.
부채
짚 공예
한산모시관
장터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모시관을 들른다. 고풍스러운 기와집 앞에서 맞는 눈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림 속을 들어가듯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할머니 세 분이 유리문 안에서 모시를 삼는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모습인가.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온다. 허벅지가 벌겋도록 삼을 삼던 어른들의 모습이 선하다. 눈앞의 할머니들은 허벅지 대신 모형을 앞에 놓고 비빈다. 멍하니 서서 보고 있으니 할머니 한 분이 눈짓으로 옆으로 돌아들어 오란다. 문고리를 당겨 발을 들여 놓자 방바닥이 따뜻하다. 세월을 빗겨간 공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처녀 적부터 모시 일을 했다는 할머니들의 손놀림은 익숙함을 지나 도가 들어 있다.
할머니들이 모시를 삼고 있는 곳
모시를 삼는 할머니들
고운 모시발
대청에서 내려본 모습
조금 떨어진 초가지붕 아래에 들어서니 처컥처컥하는 소리가 반갑게 방문객을 맞는다. 베 짜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고리를 당기자 육십 대 한 분(직조인 홍경자)과 젊은 여자 한 분이 나란히 베를 짠다. 오랫동안 묵혀진 추억 하나가 꿈틀거린다. 어머니가 작업하는 베틀 아래서 잠이 들었던 그 추억을 어찌 쉽게 끄집어낼 수 있는 일이던가. 주인과 방문객의 주고받는 대화는 씨실과 날실이 되어 재미있는 시간을 짠다. 같이 간 문우의 추임새가 들어가니 점점 흥이 돋아진다. 주위의 부추김에, 작별 인사로 나는 서투른 민요 한 자락을 곁들인다. 문을 열고 나오니 마당에는 아직도 눈이 내린다.
베틀의 모습이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
돌아오는 길도 멀다. 그러나 마음은 즐겁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 푸짐함. 유명한 소곡주 한 잔의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마른 목을 축이듯 한산면에서는 마음을 적셔주는 무언가가 있다. 기어코 먼 길을 택하게 한 마력이 거기에 있다. 세월도 아껴둔 그곳, 한산오일장터 곳곳에는 오랜 시간이 빚어놓은, 옛 정취 물씬 나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첫댓글 옛날엔 아주 흔하디 흔한 것 들이 요즘은 특별하네요. 수작업이 기계에 밀려 겨우 맥을 이어오지만
언제 저 장인정신이 사라질지....안타깝지요~
소곡주 맛은 어떨꼬? ㅎ (한진택배)
ㅋㅋ사진이 많이 어설프죠? 좀 배워야~~
모시를 주문하면 택배(한진택배)로 보내주려 아예 베틀에 붙여 놨나 봅디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너무 좋았습니다~~
ㅎ역마살 끼었는지 혼자 돌아다니는 것 좋아해서~~
그날은 취재차 갔었는데, 바람도 쐬고 같이 가보고 싶다는 문우랑 둘이서 갔었지요~~^^*
역시 오래된 것의 매력이 우리에게는 어울리고 정감이 가네요.
여행 멋졌을것 같습니다.ㅎ
멋진 포토에세이입니다.
수채화같은 담담한 필력으로
장날 풍경을 빠짐없이 담아 주셨네요.
마치 내가 그 곳을 함께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신 찔레꽃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상 잘하고 갑니다.
부채와 짚풀공예에 눈이 많이 가네요. 짚으로 만든 것 하나 가지고 싶어집니다.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