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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5월 2일)
술을 마시고 밤늦게 까지 대화를 나누며 늦게 잤지만, 여행의 긴장감과 설레임 탓인지 오늘도 4시 40분에 잠에서 깼다. 아침에 일어나 밀렸던 답사일기를 쓰고, baidu.com에서 환인시내를 두루 검색했다. 신채호가 근무했던 동창학교의 위치를 찾기 위함이었다. 2005년 답사에서는 동창학교 터에 있었던 천균대주점이란 건물을 사진에 담았는데, 지금은 그 건물이 사라졌다. 길거리뷰를 통해 같은 형태의 건물을 일일이 찾았지만, 그 건물이 있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번 답사에서는 동창학교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환인의 호텔 식당은 좀 특이했다. 커피는 직원에게 특별히 주문해야 먹을 수 있고, 대신 아침부터 맥주를 팔고 있었다. 오늘 방문할 오녀산성 박물관이 8시부터 개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여정에 나섰다. 동창학교는 옛 환인현성 서문 부근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부근을 지날 때 버스 안에서 동창학교를 간략해 소개를 했다. 윤세복이 창건한 동창학교에는 박은식, 국어학자 이극로와 함께 신채호가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민족교육학교였다. 특히 신채호가 환인에서 집안까지 학생들을 이끌고 수학여행을 한 것으로 동창학교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신채호는 집안시에 고구려 유적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 미창구무덤, 지금은 환룡호에 묻힌 고력묘자무덤떼나 장강마을, 상고성자무덤떼, 하고성자성 등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시대의 한계였을까? 신채호가 오녀산성을 몰랐던 것처럼, 어쩌면 후세인들에게는 상식이 될 것을 지금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유적을 답사하는 우리들의 부족한 안목 탓에 알아주기를 바라며 손짓하는 소중한 유적이나 유물들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것도 많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바로 보자.
오녀산성 박물관을 관람하고, 답사 전용차량에 올라 오녀산성 서문입구에 도착했다. 오녀산성은 1999년 첫 번째 답사를 한 이래로 거의 10번쯤은 방문한 듯하다. 익숙한 오녀산성이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해발 600m 고지에서 버스에서 내려 절벽 사이로 난 991개 계단을 열심히 올랐다. 여름철도 아닌데 땀이 흠뻑 났다. 하지만 계단 코스를 지나면 답사에는 어려움이 없다. 해발 800m 고지에 둘레 2㎞ 넘는 평지가 펼쳐져 있는 이곳은 매번 올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서문을 시작으로 1호, 2호, 3호 대형 건물지를 비롯해 천지 연못, 군사 주둔지, 전망대 등을 두루 돌아보았다. 최근 중국에서 발굴을 많이 한 듯 곳곳에 트렌치를 넣은 곳이 많았다. 최근 발굴 결과는 아직 입수되지 않아 무엇이 더 발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 아쉽다. 2003년 오녀산성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은 신석기 말, 청동기 말, 고구려 초기, 4~5세기 고구려 후기, 금나라 시기 5개 문화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워낙 특별한 지형인 만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있음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고구려 초기뿐만 아니라 후기에도 문화층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종교적 성지로 고구려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한 곳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대에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거대한 구리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아래 동네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추어 주었을까? 아니면 이곳에서 거대한 불을 피우면서 어떤 의식을 했을까? 상상은 상상으로 그쳐야 할 뿐, 어떤 의식을 했다고 여겨지는 유적과 유물,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니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하지만 오녀산성에 오를 때 마다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멈추기 어렵다.
환룡호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환룡호 속에 수몰된 고구려 초기 무덤들과 마을 유적을 생각하면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다. 언젠가 수몰된 유적에서 고구려에 관한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해본다. 단체 사진들을 찍고 잠시 쉬고 있는데 이영복 선생님이 캔맥주를 사주셨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슬슬 입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오녀산성의 전설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답사보다 연애에 빠졌던 어떤 인간의 러브스토리.
오녀산성 동벽쪽으로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해발 600m 지점에서 햇빛에 반사되어 하얀 빛이 나는 동벽과 만났다. 오녀산성은 지형을 이용해 꼭 필요한 부분에만 성벽을 만들었다. 그래서 성벽이 길지는 않다. 계단에서 내려와 지친 일행들이 쉬는 틈을 타서, 동벽을 조사했다. 돌로 만든 동벽 끝은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그것을 보고 말았다. 동벽의 기저부분도 확인하고, 전에 못 보았던 성벽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일행들이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유적을 조사하는 것을 양해해주고 기다려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답사가 가능했다. 재작년에는 시간에 쫓겨 동벽 부분을 보지 못하고 오녀산성을 답사를 마무리해서 너무나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오전부터 답사를 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성벽을 다양하게 사진을 담았다.
1999년 이후 여러 차례 오녀산성에 오르면서 가졌던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곳은 거대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노략질하던 초기 약탈집단인 고구려의 산채라는 생각. 산적의 소굴과도 같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고구려의 모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고구려가 어떻게 대륙을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우리가 배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오녀산성을 본 후, 고려성에서 식사를 했다. 고려성은 환인에서 한국인들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식당이다. 식당은 비류수에 접한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오녀산성을 사진 찍으면 정말 멋진 그림이 나온다. 다만 식당과 산성 사이에 높은 굴뚝이 있어서 멋진 풍광을 가리곤 했는데, 이번에 보니 높은 굴뚝이 사라졌다. 그간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상고성자무덤떼를 답사했다. 현재 남아있는 20여기의 무덤들 가운데 높이가 가장 높은 무덤도 1m도 되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 오면 풀들에 뒤덮여 제 모습을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봄이라서 그런지 무덤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고구려 초기 무기단식 적석총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하고성자 성터 유적은 워낙 볼 것이 없으므로 버스를 타고 곧장 집안시로 달렸다.
버스에서 환인현 현지가이드의 노래를 들었다. 환인현을 답사하는 단체 여행객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반드시 현지가이드를 이용해야 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우리 버스에 올라타고 동행했고, 오녀산성에도 오르지 않은 정말 한 일도 없는 현지가이드. 환인현 일자리 창출 정책의 만든 정말 꽃보직인 셈이다. 그래서 그냥 집안시를 떠날 때 말도 없이 보내려다가, 이 친구가 중간에 읊조리는 노래 소리를 들으니 너무 잘 불렀던 것이 인상적이어서 차에서 노래를 시켰다. 그랬더니 이름도 모르는 그 가이드는 첨밀밀 노래를 정말 잘 부른 후, 버스에서 내렸다.
이어서 내가 허가이드에게 노래를 부르게 시켰더니, 그 역시 북한 노래를 잘 불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차안에서 오락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영복 선생님의 사회로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거나 자기소개를 하기도 했다. 특히 심충성님의 ‘잊지는 말아야지’, 남경숙 선생님의 ‘남행열차’ 노래가 기억에 난다.
오락시간이 지난 후, 모두들 차에서 잠을 잤다. 환인에서 약 2시간 반을 달리다보니, 압록강이 보였다. 그리고 현지시간 5시 15분쯤 서대총에 도착했다. 환인에서 일찍 출발한 탓에, 서대총과 천추총, 칠성산 211호분을 모두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서대총은 99년과, 2005년에 이어서 12년 만에 제대로 답사를 했다. 무덤을 샅샅이 조사하고,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무덤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에서 千자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쓴 글자인지, 아니면 우연히 씌인 것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유의미한 명문기와는 아닌 듯해서, 발견한 기와는 그곳에 놔두고 왔다.
중국 학계에서는 서대총을 고구려 15대 미천왕의 무덤으로 본다. 서대총은 무덤 한 가운데가 크게 파헤쳐 있다. 342년 모용황이 이끈 모용선비족이 고구려를 침략해와 미천왕의 시신을 약탈해간 사건이 있는데, 이것과 결부시켜 서대총의 주인공을 추정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조상들의 시신과 무덤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무덤이 파헤쳐진 것을 그냥 놔두었을 까닭이 없다. 역시 가운데가 움푹 파진 칠성산 211호분의 경우도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13대 서천왕의 무덤으로 보지만, 이것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도리어 20세기 초 일본군이나, 20세기 중반 국공내전 때에 무덤이 파헤쳐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집안시박물관과 태왕릉 앞 가게에서 팔고 있는 장복유 선생의 『고구려왕릉통고』 책에는 집안 지역 왕릉급 무덤의 주인공을 죄다 비정해놓고 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왕들의 무덤이 모두 집안지역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내 입장에서는 중국학계의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부 타당성 있는 주장도 있지만, 서천왕과 미천왕의 무덤을 너무 단순하게 추정했고, 강서대묘, 강서중묘와 같은 고구려 후기 왕릉급 무덤을 무시하고 보장왕을 제외한 모든 고구려 왕의 무덤들이 환인과 집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된 듯해서 신뢰하기 어렵다.
명문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무덤이 어떤 사람의 무덤인지를 밝히는 것은 무척 어렵다.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단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의 무덤인가는 수수께끼로 남겨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물론 서대총, 천추총, 칠성산 211호분, 태왕릉, 임강총 등이 왕릉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말이다. 서대총, 태왕릉에 오르면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어떻게 돌로 만들었을까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을까? 고구려가 멋진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도 하층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계급사회였다는 사실을 서대총을 둘러보며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3개의 초대형 무덤을 관람한 후, 저녁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교자집에서 식사했다. 식사 후 집안시에서 가장 좋은 자두원호텔에 도착했다. 2년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았던 호텔. 그런데 올해에는 다 좋은데 유독 와이파이가 안 되어서 좀 실망이었다. 밤에는 저명한 드라마 작가이신 김운경 선생님과 술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밤 12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오녀산성의 유구를 덮어놨던 시설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일부는 치워진 것 같고...안에 물이 잔뜩 차서 사진이 안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