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10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는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중대 뉴스가 발표되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한 당국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성명 이래 28년만의 일이었다. 그 때는 남북 정상의 대리인이 마련한 공동성명이었지만,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알리는 초특급 뉴스였다.
그런데 이날은 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불과 4일 앞둔 시점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은 40년 정치 역정에서 최대 하이라이트가 되고 또한 정치적 폭발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대중이 굳이 정상회담 발표를 총선 4일 전에 발표한 것은 실책이었다. 북쪽과 협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그렇다. 이것은 피했어야 했다. 지난날 누구보다 공안선거, 북풍선거의 피해를 입어왔던 그였기 때문이다. 실제 총선에서 민주당은 이로 인해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남북정상회담은 합의되었고 마침내 출발날이 왔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은 새벽 일찍 잠에서 깨었다.
분단 55년만에 북쪽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 북녘으로 가는 날이다. 콩나물국과 계란 반숙, 딸기 샐러드, 커피 한 잔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부인이 챙겨준 짙은 감색 싱글에 흰색 와이셔츠, 은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새겨진 빨강 넥타이 차림으로 비서실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청와대를 나섰다.
효자동 분수대 근처 연도에는 수많은 실향민들이 “잘 다녀오시라”며 정부수립 이래 국가원수의 첫 방북길을 축하해 주었다.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백범 김구가 1948년 남북지도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한 이래 처음이었다.
서울공항의 환송식에는 이만섭 국회의장, 최종영 대법원장, 이한동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전국무위원, 국회의원, 실향민, 학생, 일반국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김대중은 서울출발 성명에서 “저는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평양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면서 “반세기 이상 대결로 일관해오던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방북의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시립 소년소녀 합창단이 ‘우리의 소원’과 ‘고향의 봄’을 부른 가운데 3군 의장대와 전통 의장대, 취타대의 사열을 받은 뒤 김대중은 공군 1호기에 올랐다. 부인 이희호와 박재규 통일부장관 등 공식수행원 10명, 김민하 민주평통수석부의장 등 일반수행원 96명, 경호원 등 특별수행원 24명과 함께였다.
행정부와 청와대 수행원은 통일부장관 외에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 한광옥 비서실장, 안주섭 경호실장, 이기호 경제수석비서관, 박준영 공보수석, 김하중 의전비서, 허갑병 주치의 등이다.
특별수행원은 김민하 외에 이해찬 민주당 정책위의장, 이완구 자민련 당무위원, 장상 이대 총장, 강만길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차범석 예술원 원장, 김운용 대한체육회장,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박권상 한국방송협회장, 최학래 한국신문협회장, 박기륜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고문, 김재철 한국무역협회장,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이원호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상근부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 윤종용 삼성 부회장, 구본무 LG 회장, 손길승 SK 회장, 장치혁 남북경협위원회 위원장, 강성모 린나이코리아 회장, 백낙환 인제학원 이사장, 문정인 연세대 통일연구실장, 이종석 세종연구소 남북관계 연구실장이다. 특별수행원은 민주평통, 정당, 여성계, 사회단체, 경제단체, 기업인, 이산가족기업인, 남북문제전문가 중에서 선임되었다.
김대중은 2000년 2월, 일본도쿄방송과 인터뷰에서 “남북한 최고 지도자들의 만남은 필수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것”이라면서 “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높은 식견을 갖춘 훌륭한 판단력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을 내다보면서 상대방을 추켜주는 전략적 발언이었다.
“지금껏 줄곧 숙적으로 비난해온 상대방에 대한 이런 놀라운 발언은 김대중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 내 일부를 포함해 남한 내 보수 진영의 빗발치는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역대 남한 대통령 중에서 지금까지 북한지도자에게 그런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주석 3)
김대중의 정상회담을 향한 내밀한 ‘작전’은 쉼없이 진행되었다.
3월 9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의 연설을 통해 대북지원의 메시지를 공표했다. ‘베를린선언’으로 불리는 이 연설에서 김대중은 ① 북한 무력도발을 용납하지 않는다 ②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③ 남북이 화해ㆍ협력하자는 내용을 밝혔다. 이것이 바로 햇볕정책의 핵심이며 냉전 종식을 위한 주장이라고 선언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씌어졌다.
햇볕정책은 영어로는 Sunshine Policy, 중국에서는 양광정책(陽光政策), 일본에서는 태양정책(太陽政策)으로 불렸다. 북한에서는 초기에 북조선을 고사시키려는 정책이 아닌가하고 거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 용어는 김대중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상징어가 되었다.
김대중은 이와 같은 햇볕정책의 기조 위에서 △북한의 안전보장 △북한의 경제회복 지원
△북한의 국제적 진출을 협력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 대신 북한도 △대남무력 도발 포기 △핵무기 포기에 대한 약속준수 △장거리 미사일 야망포기를 촉구했다.
‘베를린선언’은 북한을 돕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북한의 고속도로ㆍ항만ㆍ철도ㆍ전기ㆍ통신시설 등을 포함한 사회 기간 설비를 확충하는데 정부 차원의 지원을 비롯하여 투자 보장과 이중과세 방지에 관한 기업부문 관련 조약들도 제안했다. 또한 북한의 식량생산을 돕기 위해 비료ㆍ농기구ㆍ관개시설 등의 지원을 제의했다. (주석 4)
김대중의 이와 같은 전격적인 제안은 북한지도층을 움직였다.
유럽 순방에서 돌아온 직후인 3월 14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요청하는 북한의 메시지를 판문점을 통해 전달받았다. 박지원 장관이 협상대표로 임명되었고, 박지원은 3월 17일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북한에서 대남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당 조직인 아시아ㆍ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과 4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주석 5) 남북 정상회담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국정원장 임동원은 베이징을 통해 비밀리에 북한으로 들어가 4시간 동안 김정일과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마친 뒤 두 지도자가 발표할 공동선언문의 내용을 협상하고자 했으나, 김정일은 김대통령과 회담할 때 직접 만나서 문안을 작성하겠다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임동원은 자신이 만나 본 김정일에 관해 여섯 가지 항목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 그는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두 행사에서 만났던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독재자다.
2. 그는 북한체제 내에서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3. 그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다. 그는 회담을 하는 동안 마치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메모를 했다.
4.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고 수긍이 될 때는 과감히 받아들인다.
5.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그랬듯이 그는 주변의 연장자들에게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대한다.
6.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주석 6)
주석
3)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618쪽, 길산, 2002.
4) 통일부, <2001 통일백서>, 345~352쪽 요약, 2001.
5) 돈 오버도퍼, 앞의 책, 619쪽.
6) 돈 오버도퍼, 앞의 책, 621~622쪽.
첫댓글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