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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장이 이르되, 한 가문이 백 년을 걷는 동안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남는가.
천육십육년, 게르하르트 에티코넨은 노르트가우의 작은 백작이었다. 열아홉의 젊은이가 물려받은 것은 라인 강변의 몇 개 성과 포도밭, 그리고 선조로부터 이어진 이름뿐이었다. 그의 위로는 슈바벤공 루돌프 폰 라인펠덴이 있었고, 그 위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 잘리어가 있었다. 에티코넨은 제국의 수많은 백작 가문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누가 이들이 백 년 뒤 슈바벤의 공작이 되리라 예견했겠는가.
천백육십육년, 루돌프 2세 에티코넨은 슈바벤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남긴 것은 광활한 영지와 제국 내 확고한 지위, 그리고 '찬탈자'라는 악명이었다. 그의 손자들은 제국의 여러 공작령과 백작령에 흩어져 있었고, 에티코넨이라는 이름은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세가 되었다.
백 년 사이, 네 명의 백작이 이 땅을 다스렸다. 그 중 둘은 자연사했고, 하나는 십자군의 먼 땅에서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하나는 감옥에서 썩어 죽었다. 그들이 남긴 자식들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요절했고, 얼마나 많은 딸들이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었는가. 권력이란 피로 물들고 음모로 얼룩진 계단이니, 오르는 자는 많되 정상에 이르는 자는 적으며, 정상에 선 자 또한 언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
나는 이제 이 백 년의 기록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독자여, 알아두라. 역사란 승자가 쓰는 것이요, 패자는 말이 없다. 에티코넨을 찬양하는 기록도 있고 저주하는 기록도 있으니, 나는 이 둘을 모두 보여주되 진실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으리라 믿는다.
제1대 게르하르트 에티코넨 노르트가우백 (1066-1094) 에기스하임 수도원 연대기의 기록
"게르하르트 백작은 주님의 뜻에 따라 천육십육년 가을, 부친으로부터 노르트가우를 물려받았다. 그는 젊고 힘차며 야심이 있었으니, 가문의 영광을 떨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하였다.
같은 해 겨울, 그는 현명하게도 이웃 순트가우의 스카르폰노이스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 신부 마틸데는 순트가우백 루이스의 차녀로, 양가는 오래도록 우호를 다져왔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결합이었다. 백작은 이로써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가문의 기반을 다졌으니, 이 어찌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천육십팔년, 장남 뤼트베르트가 태어났으되 불행히도 병약하여 나이 넷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는 백작에게 큰 슬픔이었으나, 주님께서는 이후 삼남 에리히를 내려주셨으니 가문의 대는 끊기지 않았다.
백작은 재위 중 가문의 영지를 충실히 관리하였고, 천구십이년에는 동생 휴고를 셀츠의 초대 시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도시의 기초를 닦았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에티코넨 가문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니, 백작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체링겐 가문 연대기의 기록
"노르트가우의 게르하르트는 탐욕과 정욕의 화신이었다. 아내 마틸데와의 혼인은 오직 영지 확장을 위한 술책에 불과했으며, 혼인한 지 불과 몇 해 만에 그는 온갖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천육십팔년, 그는 동생들의 아내까지 탐하는 파렴치함을 드러냈다. 동생 휴고의 처 게르트뤼트와, 또 다른 동생 알브레히트의 처 베르히테를 차례로 유혹했으니, 이는 하느님과 인간의 법을 모두 어기는 대죄였다. 아내 마틸데는 이를 견디지 못해 천칠십오년에는 그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더욱 끔찍한 것은 천칠십오년의 사건이다. 동생 알브레히트가 형의 불륜을 추궁하자, 게르하르트는 그를 폭행하여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알브레히트는 이 년 뒤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는 사실상 형제 살해나 다름없었다. 알브레히트가 남긴 아들 하인리히는 고아가 되었고, 게르하르트는 조카를 돌보기는커녕 내쳤다고 한다.
천칠십구년, 슈바벤공이 된 것은 라인펠덴 가문의 어린 베르톨트였다. 게르하르트는 즉시 권력의 향기를 맡고 달려들었다. 천팔십년, 그는 슈바벤공의 딸 아델하이드 루도핑거와 약혼을 성사시켰으니, 이를 위해 당시 수입의 사십 배가 넘는 거액을 튀링겐공에게 바쳤다. 이 돈은 어디서 났는가? 영지의 평민들을 쥐어짜서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천팔십이년, 체링겐의 베르톨트가 슈바벤공 작위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게르하르트는 재빠르게 슈바벤공 편에 붙었다. 이는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혼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천팔십삼년, 슈바벤공 아델하이드가 사망하고 그녀의 남동생 베렌가르가 공작위를 이었으나, 이듬해 베렌가르마저 '의문의 사고'로 죽었다. 이로써 게르하르트의 약혼녀였던 장녀 아델하이드가 슈바벤공이 되었으니, 어떤 이들은 게르하르트가 이 죽음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수군거렸다. 증거는 없으되, 그가 이득을 본 것만은 분명했다."
테오도리쿠스의 평
수도원장이 이르되, 인간은 짐승과 천사 사이 어디쯤에 있는가.
두 기록을 읽노라면 마치 다른 사람을 말하는 듯하다. 하나는 현명한 영주를, 다른 하나는 타락한 괴물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대개 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법이다.
게르하르트가 정욕에 빠진 자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러 사료가 일치하며, 그의 아내 마틸데와의 관계가 파탄났다는 기록 또한 확실하다. 동생들의 아내를 탐했다는 이야기 역시 단순한 중상만은 아닐 것이다. 동생 알브레히트와의 폭력 사건은 더욱 명확하니, 이는 에티코넨 가문 내부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그가 무능한 폭군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카르폰노이스 가문과의 혼인은 실제로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이 동맹은 삼 대에 걸쳐 유지되었으며, 후에 삼 대 지크프리트가 순트가우백 작위를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셀츠 시장 임명 역시 실제로 가문에 이득이 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팔십 년의 혼인 공작이다. 당시 수입의 사십 배를 바쳤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에티코넨 가문의 재정 기록을 보면 이 시기 거액의 지출이 확인된다. 이는 무모한 낭비인가, 아니면 대담한 투자인가?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 에리히는 슈바벤공 아델하이드 2세와 혼인했고, 손자 게르하르트는 슈바벤공이 되었다. 백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에티코넨은 슈바벤을 지배한다. 게르하르트가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를 평가해야 하는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들었으니, 자기 사랑은 하느님 멸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사랑은 자기 멸시에 이르기까지"라고. 게르하르트는 분명 자기 사랑에 빠진 자였다. 그러나 그의 자기 사랑은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현되었고, 그것이 후손들에게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추악한 욕망으로 시작된 것이 찬란한 왕조의 기초가 되고, 고결한 의도로 시작된 것이 파멸로 끝나기도 한다. 게르하르트의 음란함은 분명 죄악이되, 그의 야망은 에티코넨 가문에게는 축복이었다.
도덕과 권력은 다른 척도로 재어진다. 교회의 강단에서는 게르하르트를 비난할 것이요, 정치가의 서재에서는 그를 칭찬할 것이다. 나는 수도사이자 역사가이니, 양쪽을 모두 이해하되 어느 한쪽만을 택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은 기록해둔다. 게르하르트는 천구십사년, 아들 에리히가 슈바벤공 아델하이드 2세와 혼인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식 기록은 '우울증'이라 하나, 어떤 이는 말한다. 그가 마침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견딜 수 없었다고. 혼인식에서 아들이 공작의 딸과 맞잡은 손을 보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이 더럽힌 모든 것들이, 결국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했을까. 아니면 마침내 자기혐오가 그를 집어삼켰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목표를 달성한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제2대 에리히 에티코넨 노르트가우백 (1094-1116) - 노르트가우 궁정 필사본의 기록
"에리히 백작은 천구십사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서거 후 노르트가우를 계승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이십이었으나, 이미 슈바벤공 아델하이드 2세 루도핑거와 혼인한 상태였으니 가문의 지위는 격상되었다.
백작은 타고난 용모에 결함이 있었다. 언청이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겁이 많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약점을 덕목으로 승화시켰으니, 바로 공정함과 근면함이었다.
천백오 년, 백작의 공정함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평민 여인이 백작의 친족이 간통했다며 고소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친족을 감싸거나 고소인을 처벌했을 것이나, 에리히 백작은 달랐다. 그는 친족을 며칠간 감옥에 가두어 경고하고, 평민 여인에게는 정당한 보상을 지급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영지의 백성들은 백작을 공정한 재판관으로 여기게 되었다.
천백오년, 백작은 군힐다 폰 안데흐스와 재혼하였다. 이는 명문가와의 연대를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다. 군힐다는 비록 직접적인 작위는 없었으나 바벤베르크 방계 출신으로, 영재이며 신실한 여인이었다. 둘 사이에서 천백칠년 오남 요한과 천백팔년 육남 헤리베르트가 태어났다.
천백십년은 백작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프랑스에서 카페 가문의 앙리 2세가 반란 진압 중 전사하며 왕국이 분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는 남성 우선 분할상속제를 취하고 있었는데, 왕의 사망 후 두 세력이 각각 다른 상속자를 옹립하며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이를 본 에리히 백작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슈바벤의 상속법을 남성 우선 분할상속제에서 남성 분할상속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로써 딸들은 작위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영지가 분할되더라도 아들들 사이에서만 나뉘게 되었다. 이는 가문의 영지를 보존하는 혁명적 조치였다.
천백십삼년, 백작은 예루살렘 십자군이 선포되자 즉시 참여를 결정했다. 많은 이가 말렸다. 그는 겁쟁이로 알려져 있었고, 전투 경험도 부족했으며, 영지를 떠나면 혼란이 올 수 있었다. 게다가 장남 게르하르트와 차남 지크프리트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둘 다 야심이 있었고, 둘 다 슈바벤공의 손자였다.
그러나 백작은 단호했다. "나는 겁이 많소. 그러나 주님 앞에서만큼은 담대하고 싶소"라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천백십사년, 그는 슈바벤공 게르하르트 1세의 참사회에서 물러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천백십팔년 십자군이 성공하는 데 기여했다. 이 원정 중 백작은 '욕심많은' 트레잇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더욱 검소하고 경건해졌다.
천백십육년, 백작은 예루살렘 원정 중 풍토병에 걸려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힘도, 시간도 없었다.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묻혔고, 영혼은 주님 곁으로 갔으리라."
호엔슈타우펜 궁정록의 기록
"노르트가우의 에리히는 슈바벤공 아델하이드 2세의 남편이었으나, 공작의 실권을 쥔 적은 없었다. 그는 언청이로 태어났고 겁쟁이였으며, 공작부인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천백이년, 슈바벤공 게르하르트 1세(에리히의 장남)가 에티코넨의 슈바벤 지배를 공고히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미 그때부터 차남 지크프리트는 형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는 카리스마 있는 협상가였고, 성직자 교육까지 받은 자였다. 그는 자신이 형보다 더 슈바벤공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형제 사이의 긴장은 궁정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천백십삼년, 예루살렘 십자군이 선포되었을 때, 에리히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두 아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벌어질 참극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앙'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도망친 것이었다. 게르하르트와 지크프리트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결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천백십사년, 그는 슈바벤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백십육년, 그는 예루살렘에서 풍토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어떤 이는 말한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힘이 있었음에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성지에 남아 주님을 섬기다 죽기를 택했다고.
들리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 아닌가. 그는 겁쟁이였으니, 고향에서 벌어질 권력 투쟁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차라리 이국땅에서 '순교자'로 죽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오 년 뒤인 천백이십일년, 예상대로 게르하르트 1세가 매독으로 죽고, 지크프리트가 조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만약 에리히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들들의 싸움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한쪽 편을 들어 가문을 더욱 분열시켰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편리하게도 그 선택을 하기 전에 죽었으니 말이다."
테오도리쿠스의 평
수도원장이 이르되, 겁쟁이와 지혜로운 자는 다른가, 같은가.
에리히 에티코넨은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정반대였다. 게르하르트가 야심과 정욕으로 가득했다면, 에리히는 겁과 신앙으로 가득했다. 게르하르트가 권력을 향해 달렸다면, 에리히는 권력을 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둘 다 에티코넨 가문을 위해 기여했다. 게르하르트는 슈바벤공과의 혼인을 성사시켰고, 에리히는 그 혼인의 결실로 슈바벤공의 남편이 되었다. 게르하르트는 씨를 뿌렸고, 에리히는 거둔 것이다.
에리히를 비겁자라 부르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의 공정한 통치는 여러 사료에서 일치한다. 친족과 평민 사이의 분쟁에서 법을 지켰다는 일화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당시 귀족이 평민의 호소를 경청한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천백십년의 상속법 개혁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프랑스의 분열을 보고 즉시 교훈을 얻어 제도를 바꾸었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개혁이 없었다면 슈바벤은 이후 수십 년간 분할되고 약화되었을 것이다.
십자군 참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호엔슈타우펜 기록은 이를 도피라 보지만, 과연 그런가?
첫째, 천백십삼년 당시 상황을 보자. 장남 게르하르트는 슈바벤공으로 재위 중이었다. 가문은 겉으로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내부에는 긴장이 있었다. 게르하르트와 지크프리트, 두 아들은 모두 야심이 있었고, 둘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이 있었다.
에리히는 이를 보았다. 아버지로서 그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그는 알았을 것이다. 언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을.
둘째, 그의 성격을 고려하자. 그는 겁쟁이였다. 갈등을 싫어했다. 결단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그에게 두 아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은 버거운 것이었다.
셋째, 십자군이라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것은 명예로운 도피구였다. 주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에리히의 십자군 참여는 도피인가, 신앙인가?
나는 이렇게 본다. 둘 다였다.
인간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다. 에리히는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싶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슈바벤의 정치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 두 욕구는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나는 주님을 위해 간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게도 더 나은 일이다."
십자군에서 그는 실제로 싸웠다. 천백십팔년 예루살렘 함락에 기여했다. 그리고 '욕심많은' 트레잇을 잃었다. 성지에서 그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백십육년, 그는 풍토병으로 쓰러졌다.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의학적으로 보면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의술로는 많은 풍토병이 치명적이었다. 먼 여정을 감당할 체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돌아갈 수 있었다 해도, 그가 돌아갔을까?
이것이 핵심적인 질문이다.
천백십육년 당시, 슈바벤의 상황은 아직 안정적이었다. 게르하르트 1세는 슈바벤공이었고, 지크프리트는 아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에리히가 돌아간다면 단순히 노르트가우백으로서 평온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알았을 것이다. 형제간의 긴장이 언젠가는 폭발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날이 오면 자신이 중재해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 짐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남았다. 병이 그에게 핑계를 주었고, 그는 그 핑계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비겁함인가?
키케로는 말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리히는 용감하지 못했다. 그는 두려워했고, 피했다.
그러나 동시에 성 베네딕토는 말하지 않았던가. "겸손이 제일 가는 덕이다"라고. 에리히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자신이 가문의 분쟁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비켰다.
이것이 겸손인가, 아니면 무책임인가?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다만 사실만을 말하겠다.
에리히는 천백십육년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즉각적으로는 아무 영향도 없었다. 게르하르트 1세는 계속 슈바벤공으로 재위했고, 지크프리트는 노르트가우백을 계승했다.
그러나 오 년 후인 천백이십일년, 게르하르트가 죽고 어린 에리히 1세가 즉위하자 지크프리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만약 아버지 에리히가 살아있었다면 이를 막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에리히의 성격상 그는 지크프리트를 설득하려 했을 것이나, 지크프리트의 야심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에리히 자신이 갈등에 휘말려 고통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리히의 부재가 오히려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권위가 없었기에, 지크프리트는 자유롭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고, 루돌프는 자유롭게 노르트가우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에리히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가문의 미래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에리히의 선택은 지혜로웠던 것인가?
역사는 결과로 판단된다. 에리히가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가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그의 부재는 권력 공백을 만들었고, 그 공백 속에서 지크프리트와 루돌프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것이 에리히의 의도였는가?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피곤했고, 두려웠으며, 평화를 원했다. 성지에서 주님을 섬기며 죽는 것이 고향에서 정치적 분쟁에 휘말리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그러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선택은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성인인가 죄인인가? 현자인가 겁쟁이인가?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에리히 에티코넨은 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약함이 때로는 폭력보다 나은 결과를 낳았다. 그가 공정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가 신실했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가 도망쳤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그는 예루살렘 땅에 묻혔다. 이국의 땅에서, 가문의 무덤이 아닌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진정 원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의 무게에서, 선택의 고통에서, 가문의 짐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카시오도루스는 말했다. "때로는 행동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다." 에리히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가문을 지켰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도, 칭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인간이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의 최선이 타인의 눈에는 비겁함으로 보일지라도.
역사는 영웅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자도 기억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다. 에리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완벽하지 않아도, 용감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의미를 남길 수 있다고.
제3대 지크프리트 에티코넨 노르트가우백 (1116-1126) 에기스하임 수도원 연대기의 기록
"지크프리트 백작은 천백십육년, 부친 에리히의 예루살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트가우를 계승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하여 성지에 있었으니, 십자군 전사로서의 명예를 얻은 후였다.
백작은 카리스마 있는 협상가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한때 참사회 사제의 신분으로 잘못을 저질렀으나, 깊이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한 후 순결 트레잇을 얻었다. 이는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천백십칠년, 그는 순트가우백 마리아 스카르폰노이스와 결혼했다. 이는 조부 게르하르트 때부터 이어진 두 가문 간의 오랜 우호의 결실이었다. 마리아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경건한 여인이었으니, 둘은 신앙으로 맺어진 부부였다.
천백십팔년, 예루살렘 십자군이 성공하자 백작은 개선하여 노르트가우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슈바벤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전투 중 부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다 사망한 것이다. 새로운 황제 아르놀트 폰 안데흐스가 즉위했으나 그 역시 전투 중 부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천백십팔년 시리아 지하드가 발발했다. 같은 해, 슈바벤에서도 변고가 일어났다. 슈바벤공 게르하르트 1세(지크프리트의 형)가 매독과 광증에 걸렸고, 천백이십일년 사망했다. 그의 장남 에리히가 에리히 1세로 슈바벤공을 계승했다.
이때 백작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슈바벤공 작위가 장자상속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슈바벤은 남성 분할상속제를 취하고 있었으니, 형의 아들들이 모두 작위를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공국을 약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백작은 슈바벤의 유력 영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천백이십일년, 그는 뷔르템베르크백 아그네스 폰 라인펠덴과 슈비츠백 하이크 폰 라인펠덴 등에게 선물을 주며 자신의 명분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슈바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제국이 혼란한 이때 강력한 슈바벤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천백이십일년 말, 백작은 마침내 조카 에리히 1세를 상대로 '슈바벤 공작위의 장자상속'을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카를 상대로 칼을 빼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백작은 대의를 위해 사정을 버렸다.
전쟁은 어려웠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였고, 고용한 용병도 투입 시기를 잘못 잡아 각개격파 당했다. 천백이십이년, 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슈바벤백 에크베르트 폰 호엔슈타우펜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슈바벤공 에리히 1세를 협박하여 공작위를 강탈한 것이다. 에리히 1세는 울름백으로 강등되었다.
이제 전쟁의 명분이 사라졌다. 지크프리트 백작이 싸우려던 조카는 이미 공작이 아니었고, 찬탈자 에크베르트가 슈바벤을 장악했다.
천백이십삼년, 백작은 전황이 -58%에 이르자 더 이상의 확전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항복 조건으로 그는 슈바벤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 생활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천백이십삼년부터 피해망상이 시작되었다. 한때 순결하고 친절하며 카리스마 있던 협상가는 점점 의심 많고 두려워하는 죄수가 되어갔다.
천백이십육년, 그는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공식적으로는 질병이나, 일부는 옥사라고 기록한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대였다.
그는 대의를 위해 싸웠으나 패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동생 루돌프가 이후 슈바벤공을 찬탈했을 때, 지크프리트가 주장했던 '강력하고 통일된 슈바벤'의 이상은 실현되었다."
호엔슈타우펜 궁정록의 기록
"지크프리트는 야심가였다. 아버지 에리히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는 형의 작위를 탐냈다.
젊은 시절 그는 참사회 사제였다. 거룩한 신분이었으되 그는 하녀를 임신시켰다. 스캔들이 터지자 재빨리 고해성사를 하고 순결을 맹세했다지만, 이미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가? 그의 '순결'은 위선의 가면이었다.
천백십팔년, 그는 형 게르하르트 1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바벤의 유력자들에게 접근하여 파벌을 만들었다. 겉으로는 '슈바벤의 장자상속'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자신이 슈바벤공이 되기 위한 음모였다.
그는 교활했다. 처음에는 '장자상속 파벌'과 '나를 옹립하는 파벌'을 따로 만들었다. 전자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실제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을 일으킬 때는 장자상속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이는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한 술책이었다.
천백이십일년, 형 게르하르트가 죽고 조카 에리히가 즉위하자, 그는 즉시 선전포고했다. 조카는 불과 어린아이였다. 삼촌이 어린 조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대의'인가?
전쟁은 처음부터 무모했다. 수적 열세가 명백했고, 슈바벤공 측에는 더 많은 지지자가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유대인 상인에게서 막대한 빚을 내어 용병을 고용했으나, 전술이 미숙하여 용병을 잘못 투입했다.
천백이십이년, 예상대로 참패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슈바벤백 에크베르트 폰 호엔슈타우펜이 혼란을 틈타 어린 슈바벤공 에리히를 협박하여 공작위를 강탈한 것이다.
이는 지크프리트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에크베르트는 명백한 찬탈자였고, 정통성이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이제 '찬탈자를 물리치고 조카의 권리를 되찾는 삼촌'으로 명분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이미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야심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다.
천백이십삼년 항복했을 때, 그는 감옥에 갇혔다. 거기서 삼 년을 보냈다. 감옥에서 그는 점점 미쳐갔다.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벽을 긁으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한때 카리스마 있던 협상가의 최후는 비참했다.
천백이십육년, 그는 죽었다. 어떤 이는 병사라 하고, 어떤 이는 독살이라 하며, 어떤 이는 자살이라 한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그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아내 마리아 스카르폰노이스는 과부가 되었고, 두 딸만 남았다. 순트가우백 작위는 마리아가 가졌으나, 남편 없는 여백은 힘이 없었다. 결국 그의 야심은 가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테오도리쿠스의 평
수도원장이 이르되, 야심과 대의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지크프리트 에티코넨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어떤 이는 그를 이상주의자로, 어떤 이는 야심가로, 어떤 이는 비극적 영웅으로, 어떤 이는 무모한 바보로 본다.
진실은 무엇인가?
먼저 사실관계를 정리해보자. 지크프리트는 분명 야심이 있었다. 그가 '슈바벤공 옹립 파벌'과 '장자상속 파벌'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자신이 공작이 되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명분도 허황되지 않았다. 당시 슈바벤은 실제로 남성 분할상속제 하에서 분열의 위기에 있었다. 게르하르트 1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고, 이들이 모두 영지를 나눠 가진다면 슈바벤은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을 옹립하는 파벌'보다 '장자상속 파벌'로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지크프리트 개인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내세운 원칙을 원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크프리트는 진심으로 대의를 추구했는가, 아니면 대의를 야심의 도구로 사용했는가?
나는 이렇게 본다. 둘 다였다.
인간은 복잡하다. 순수한 이타심도, 순수한 이기심도 드물다. 대부분의 행동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지크프리트는 슈바벤이 강해지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 강한 슈바벤의 지배자가 자신이기를 원했다. 이 둘은 그의 마음속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슈바벤의 강화'와 '자신의 집권'이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야심가의 특징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 추구를 공공의 선과 동일시한다. "내가 권력을 잡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문제는 현실이었다. 지크프리트는 협상가였지 군인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켰으나 전술이 서툴렀다. 용병을 고용했으나 운용을 잘못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할 전략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에크베르트 폰 호엔슈타우펜의 찬탈이었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크프리트가 '찬탈을 막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의 혼란 속에서 진짜 찬탈자가 나타난 것이다.
천백이십이년, 에크베르트가 에리히 1세로부터 공작위를 빼앗았을 때, 지크프리트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에크베르트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조카를 위해 싸운다고 명분을 바꾸는 것. 둘째, 에크베르트와 협상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 셋째,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
그는 셋째를 택했다. 왜?
호엔슈타우펜 기록은 그가 이미 전력이 고갈되어 더 싸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 본다.
지크프리트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전쟁이 초래한 결과를. 그가 슈바벤을 강화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약화시켰다. 그가 찬탈을 막으려 했으나, 실제로는 찬탈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명분과 결과가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 깨달음이 그를 항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의 삼 년은 이 깨달음이 그를 서서히 미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감옥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는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옳았다. 슈바벤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틀렸다. 내가 분열을 초래했다."
"나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싸웠다."
이 목소리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구별이 안 되었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대의와 야심이, 정의와 욕망이 뒤섞였을 것이다.
피해망상은 이렇게 온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다른 모든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천백이십육년, 그는 죽었다. 병사인가, 독살인가, 자살인가?
나는 혼합이었다고 본다. 육체는 질병으로 쇠약해졌고, 마음은 자기혐오로 무너졌으며, 외부의 적의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을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원인의 합작품이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는 순결을 맹세했으나 이미 죄를 지은 뒤였다. 십자군에 참여하여 영광을 얻었으나 돌아와서는 내전을 일으켰다. 슈바벤을 강화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약화시켰다. 친절하고 카리스마 있는 협상가였으나 말년에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죄수가 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두 딸과 과부, 그리고 패배의 기억.
아니다. 그는 또 하나를 남겼다. 교훈을.
동생 루돌프가 이후 슈바벤공이 되었을 때, 그는 형의 실패를 교훈 삼았다. 루돌프는 전쟁을 일으켰으나 훨씬 신중하게 준비했다. 유대인에게서 차관을 받고, 용병을 고용하고, 동맹을 구축하고, 그리고 승리했다.
지크프리트의 패배가 루돌프의 승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실패한 자의 뼈 위에서 성공한 자가 일어선다.
그렇다면 지크프리트는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야심은 좌절되었으나, 그의 이상은 동생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가 주장했던 '강력하고 통일된 슈바벤'은 루돌프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비극적 선구자. 이것이 지크프리트에 대한 나의 평가다.
선구자는 대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닦은 길을 후대가 걷는다. 지크프리트는 감옥에서 죽었으되, 그가 꿈꾸던 슈바벤은 살아남았다.
이것으로 족한가? 본인에게는 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게는 족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 지크프리트의 실패는 에티코넨 가문의 성공이 되었다. 그의 야심은 죄악이었으되, 그 죄악이 열매를 맺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야심가로? 이상주의자로? 실패자로? 선구자로?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인간이었다고.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선하면서 악하고, 현명하면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고. 그가 저지른 실수는 경계해야 하되, 그가 품었던 이상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감옥의 어둠 속에서,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그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옳았더라면..."
역사는 대답한다. "네가 옳았다. 다만 너무 일찍, 너무 약하게."
제4대 루돌프 에티코넨 노르트가우백, 후 슈바벤공 (1126-1166) 셀츠 수도원의 편년기
"루돌프 백작은 천백이십육년, 형 지크프리트의 옥사 후 노르트가우를 계승하였다. 그의 나이 이십육이었고, 이미 뷔르템베르크 남작가의 유타 아스페르거와 혼인한 상태였다.
백작은 자비롭고 인내심이 깊었으며, 정원을 가꾸기를 좋아하는 평화로운 성정이었다. 형 지크프리트가 전쟁으로 가문을 위기에 빠뜨렸던 것과 달리, 루돌프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천백이십육년 당시 후계자는 그의 막내 동생 에른스트였으나, 루돌프는 형의 딸 구트룬(순트가우백 마리아의 장녀)과 에른스트의 결혼을 주선하여 가문의 단합을 도모했다.
천백이십구년, 백작은 보헤미아의 콘라트 프르셰미슬로부터 슈바벤공 헤르만 5세 폰 호엔슈타우펜 암살 계획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는 위험한 음모였다. 그러나 백작은 신중히 고려한 끝에 참여를 결정했다.
일부는 이를 비난하나,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지크프리트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에티코넨을 억압하고 있었다. 헤르만 5세는 울름백으로 강등된 에리히 에티코넨(루돌프의 조카)의 작위마저 빼앗으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루돌프가 이를 막기 위해 극단적 수단을 택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천백이십구년 말, 헤르만 5세는 병으로 수행불능 상태에 빠졌다. 암살 계획이 성공한 것인지, 정말 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루돌프는 섭정으로 임명되어 슈바벤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천백사십년, 헤르만 5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벨프가 슈바벤공이 되었다. 루돌프는 계속 섭정직을 수행하며 슈바벤을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천백사십일년, 루돌프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슈바벤공 벨프에게 '슈바벤 공작위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명분은 이러했다. 그의 어머니 아델하이드 2세 루도핑거가 슈바벤공이었고, 따라서 그에게는 모계를 통한 계승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신중하게 준비되었다. 루돌프는 형 지크프리트의 실패를 교훈 삼아, 유대인 상인에게서 충분한 차관을 받았고, 아일랜드 용병단을 고용했으며, 철저한 전략을 세웠다.
천백사십일년부터 천백사십사년까지 삼 년간의 전쟁에서, 루돌프는 스트라스부르크, 프라일부르크, 라이네크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특히 라이네크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천백사십사년 사월, 마침내 슈바벤공 벨프는 항복했고, 루돌프는 슈바벤공작위를 회복했다. 이로써 에리히-게르하르트 1세 계열이 잃었던 공작위가 다시 에티코넨 가문으로 돌아왔다.
백작은 관대하게도 패한 벨프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벨프는 슈바벤백으로 강등되었으되 생명과 명예는 보존되었다.
천백사십사년부터 천백육십육년까지 이십이 년간, 루돌프 2세는 슈바벤을 현명하게 다스렸다. 그는 '찬탈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실제로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비망록
"루돌프 에티코넨, 이 이름만큼 역겹고 위선적인 것도 드물다.
그는 '자비로운' 척했다. '인내심 있는' 척했다. '정원사'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온화한 가면 뒤에는 냉혹한 책략가가 숨어 있었다.
천백이십구년, 그는 보헤미아의 콘라트로부터 우리 주군 헤르만 5세를 암살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고민했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가? 아니다. 그는 즉시 참여했다.
헤르만 5세가 '병으로' 수행불능이 되었다는 것을 누가 믿는가? 독살이 분명했다. 루돌프는 섭정이 되어 권력을 맛보았고, 이것이 그의 야심을 키웠다.
천백사십일년, 그는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어린 슈바벤공 벨프, 고인이 된 헤르만 5세의 유복자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명분은 '정당한 소유권'이라고? 루돌프의 어머니가 슈바벤공이었다는 것이 무슨 명분인가?
그렇다면 왜 진작 주장하지 않았는가? 왜 헤르만 5세가 살아있을 때는 입도 뻥긋 안 하다가, 어린 아들이 계승하자마자 칼을 빼들었는가? 비겁하고 교활한 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 끔찍한 것은 그가 이 전쟁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가 하는 점이다. 형 지크프리트는 충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패했다. 루돌프는 삼 년을 준비했다. 돈을 모았고, 용병을 고용했고, 동맹을 구축했고, 전략을 세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섭정이 되자마자, 아니 어쩌면 형 지크프리트가 감옥에 있을 때부터, 이미 찬탈을 계획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계산이었다. 온화한 척, 자비로운 척, 인내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전쟁은 일방적이었다. 어린 벨프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루돌프는 삼 년 동안 슈바벤을 유린했다. 스트라스부르크, 프라일부르크, 라이네크... 도시마다 피로 물들었다.
천백사십사년, 벨프는 항복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돌프는 '관대하게도' 그를 석방했다? 이 또한 연극이다. 벨프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공작위, 권력, 명예. 루돌프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자비가 아니라 계산이다. 죽은 적보다 무력한 적이 더 유용하다. 벨프를 슈바벤백으로 남겨둠으로써, 루돌프는 '나는 호엔슈타우펜을 멸족시키지 않았다'고 선전할 수 있었다.
이후 이십이 년간 루돌프는 슈바벤을 다스렸다.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공작'이라 불렀다. 평화가 왔고 번영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 그 평화는 찬탈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 번영은 피로 물든 것이다."
테오도리쿠스의 평 - 찬탈자, 그리고 평화
수도원장이 이르되, 정의롭지 않은 평화와 정의로운 전쟁 중 무엇이 나은가.
루돌프 에티코넨. 그는 '찬탈자'라 불렸다. 이 별명은 정확하다. 그는 실제로 슈바벤공작위를 무력으로 빼앗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십 년 가까이 노르트가우백과 슈바벤공으로서 평화로운 통치를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전쟁이 없었고, 백성들은 안정되었으며, 가문은 번영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암살 음모부터 살펴보자. 천백이십구년, 루돌프가 헤르만 5세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이것이 성공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헤르만 5세는 '병으로' 수행불능이 되었다가 천백사십년 사망했다. 독살인가, 실제 질병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루돌프가 음모에 참여할 의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비로운' 루돌프가 암살을 계획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중성이다.
왜 그랬을까? 셀츠 수도원의 변호는 일리가 있다. 당시 호엔슈타우펜은 에티코넨을 억압하고 있었다. 루돌프의 조카 에리히(울름백으로 강등된)마저 작위를 잃을 위기였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극단적 수단도 불사해야 했다.
이것이 정당화가 되는가? 물론 아니다. 암살은 암살이다.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다. 루돌프는 도덕과 가문 사이에서 가문을 택했다.
두 번째 문제는 천백사십일년의 전쟁이다. 이것이야말로 '찬탈'의 핵심이다.
루돌프의 명분을 검토해보자. 그는 어머니 아델하이드 2세가 슈바벤공이었으므로, 자신에게 모계를 통한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적으로 이것이 타당한가? 애매하다. 슈바벤은 당시 남성 분할상속제를 취하고 있었다. 아델하이드 2세는 여성이었으되 공작이 되었으니, 여성도 계승할 수 있다는 선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게르하르트 1세가 이미 공작을 역임했고 사망했다. 그 후 에크베르트와 헤르만이 차례로 공작이 되었으니, 루도핑거-에티코넨 계열의 권리는 이미 소진된 것 아닌가?
반대로 생각하면, 에크베르트와 헤르만 모두 '찬탈자'였다. 에크베르트는 어린 에리히 1세를 협박하여 공작위를 빼앗았고, 헤르만은 그 에크베르트의 동생이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전체가 정통성이 없다면, 루돌프가 다시 찬탈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
법은 해석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힘이다.
루돌프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힘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형 지크프리트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 돈, 용병, 동맹, 전략. 삼 년의 준비 끝에 일으킨 전쟁은 삼 년 만에 승리로 끝났다.
호엔슈타우펜 기록은 이를 '치밀한 계산'이라며 비난한다. 그렇다, 계산이었다. 그런데 계산이 나쁜가? 무모한 충동보다는 신중한 계산이 낫지 않은가?
지크프리트는 충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패했고 감옥에서 미쳐 죽었다. 루돌프는 신중하게 전쟁을 일으켜 이겼고 사십 년을 통치했다. 누가 더 현명한가?
세 번째 이중성은 승리 후의 처리다. 루돌프는 패한 벨프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호엔슈타우펜 기록은 이것이 연극이라고 한다. 맞다. 연극이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연극이었다. 루돌프는 자비로운 승자의 이미지를 얻었다. 벨프는 목숨을 건졌다. 슈바벤은 더 이상의 유혈 없이 안정되었다. 모두가 이득을 본 것이다.
이것이 정치다. 정치는 도덕의 영역이 아니라 효용의 영역이다.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후의 사십 년이다.
루돌프 2세의 재위 기간(천백사십사-천백육십육)은 평화로웠다. 그는 내정에 집중했다. 천백사십오년, 그는 정원사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천백육십일년, 노르트가우에 막사를 건설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음모를 꾸미지 않았으며, 영지를 잘 관리했다.
천백오십오년, 그는 슈바벤의 상속법을 다시 개혁했다. 남성 분할상속제를 유지하되, 더욱 명확하게 했다. 이는 지크프리트가 주장했던 방향이었다.
천백오십이년,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베렌가르 폰 안데흐스에게 투옥되었다가 거액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천백삼십년에도 토너먼트에 참석했다가 투옥되었다. 권력자들은 그의 부를 탐냈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돈으로 해결했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갈등을 피하고, 타협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것.
천백오십오년, 그는 카린 기스킹과 재혼했다. 그녀는 노르웨이 왕가의 일원으로, 오스틀란데트공 상속권이 있었다. 이로써 에티코넨 가문의 영향력은 북유럽까지 뻗어나갔다.
그는 자식들을 전략적으로 결혼시켰다. 장녀는 보헤미아 왕에게, 이후 키예프 대공에게. 삼녀는 폴란드 왕에게. 손자들은 각종 공작가와 백작가로. 에티코넨의 혈통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
천백육십육년, 그는 육십육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긴 생애였고, 성공적인 생애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루돌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찬탈자인가? 그렇다.
현명한 통치자인가? 그것도 그렇다.
비열한 음모가인가? 일부는 그렇다.
자비로운 공작인가? 일부는 그것도 그렇다.
모든 것이 참이다. 그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할 때 잔혹하고, 필요할 때 자비로우며, 도덕보다 실리를, 명분보다 결과를 중시했다.
그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통치자였다.
역사가 그를 '찬탈자'로 기억하는 것은 공정하다. 그러나 동시에 '평화를 가져온 자'로도 기억해야 한다.
천육십六年부터 천백육십육년까지 백 년, 에티코넨 가문은 노르트가우의 작은 백작에서 슈바벤의 공작으로 도약했다. 이 과정에서 게르하르트는 욕망을 제공했고, 에리히는 공정함을 제공했고, 지크프리트는 이상을 제공했고, 루돌프는 현실을 제공했다.
네 사람 모두 필요했다. 게르하르트의 야심이 없었다면 슈바벤공과의 혼인도 없었을 것이다. 에리히의 공정함이 없었다면 가문의 내부가 분열했을 것이다. 지크프리트의 이상이 없었다면 슈바벤 통일의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루돌프의 현실감각이 없었다면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순수한 선도, 순수한 악도 아니다. 야망과 이상, 욕망과 도덕, 현실과 명분이 뒤섞여 앞으로 나아간다.
에티코넨의 백 년은 이것을 보여준다. 추악한 시작이 찬란한 결말로 이어질 수 있고, 고결한 의도가 비극적 실패로 끝날 수 있으며, 비열한 수단이 평화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교훈 삼아야 한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결과를 인정하며, 인간의 복잡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루돌프 2세 에티코넨, 찬탈자이자 평화의 건설자. 그가 바로 에티코넨 백 년의 완성이었다.
논찬 - 백 년의 의미
수도원장이 이르되, 역사의 장 하나가 여기서 닫힌다.
천육십육년부터 천백육십육년까지, 노르트가우의 에티코넨은 슈바벤의 에티코넨이 되었다. 작은 백작가는 대공가가 되었고, 지역 세력은 제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것은 성공의 이야기인가? 그렇다.
이것은 덕의 승리인가? 아니다.
내가 이 백 년의 기록을 펼쳐 보인 것은, 독자에게 단순한 영웅담을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복잡성을, 인간의 모순을, 권력의 양면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게르하르트는 음란하고 폭력적이었으되, 가문의 기초를 닦았다.
에리히는 겁쟁이이고 도피자였으되, 공정하고 신실했다.
지크프리트는 이상주의자이고 협상가였으되, 야심으로 파멸했다.
루돌프는 찬탈자이고 암살 공모자였으되, 평화를 가져왔다.
이 네 사람을 단순히 선인 또는 악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없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말했다. "선은 온전함에서 오고, 악은 어떤 결함에서든 온다." 그렇다면 에티코넨의 네 백작은 모두 결함이 있었다. 욕망, 두려움, 야심, 비열함.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온전함도 가지고 있었다. 야망, 공정함, 이상, 현실감각.
결함과 온전함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인가? 키케로는 말했다. "Salus populi suprema lex esto" - 인민의 안전이 최고의 법이라고. 루돌프는 이 원칙을 실현했다. 비록 그 과정이 비열했을지라도, 결과는 인민의 안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Remota j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 정의가 제거된 왕국은 거대한 도적떼와 무엇이 다른가? 루돌프의 왕국은 정의로웠는가? 아니면 성공한 도적질이었는가?
나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 스스로 판단하라.
다만 이것만은 말하겠다. 에티코넨의 백 년은 계속된다. 루돌프 2세의 손자들이 슈바벤을 이어받을 것이고, 그들은 더 큰 야망을 품을 것이며, 결국 왕이 되고 황제가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덕이 필요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악이 저질러질 것인가? 얼마나 많은 이상이 좌절될 것이며, 얼마나 많은 현실이 승리할 것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게르하르트의 욕망, 에리히의 두려움, 지크프리트의 야심, 루돌프의 찬탈이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다만 이름과 시대가 바뀔 뿐.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반복을 막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그 반복 속에서 지혜를 찾기 위함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쉽게 선악을 나누지 않는 것이다.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노르트가우의 백 년은 끝났다. 슈바벤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시대가 올 것이다.
모든 권력은 올라가고 내려간다. 모든 가문은 흥하고 망한다. 에티코넨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 천백육십육년, 루돌프 2세 에티코넨이 숨을 거두고 그의 장남 안드레아스가 슈바벤공을 계승한 이 순간, 에티코넨은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역사는 계속된다. 나는 이 펜을 내려놓고, 다음 백 년의 기록을 시작할 것이다.
독자여, 이제 그대가 판단할 차례다. 에티코넨의 백 년은 영광인가, 치욕인가? 성공인가, 타락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인가?
에티코넨 가문사 노르트가우백 본기, 끝
셀츠 수도원 문서고에 보관 천사백삼십삼년, 성 갈루스 축일 수도원장 테오도리쿠스
첫댓글 뭔가 끝에 추가하는게 이상해보여서 댓글로 적는데, 작성해준 글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스샷도 제대로 못넣었네요. 정말 저보다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