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언어>
-김동섭 지음/청아출판사 2022년판/415page
관점을 달리한 역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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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백성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왕가의 가계 혈통만이 중요할 뿐이다. 정략결혼은 왕가의 혈통을 지닌 유럽의 로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인 왕족의 특권과 유럽에서의 권력을 영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전략이었다.
오죽하면 유럽의 근세를 호령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이런 모토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너는 결혼을.
그 이후 합스부르크 왕국은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프랑스 동부, 벨기에, 네덜란드)을 손에 넣었고, 스페인 왕녀와의 결혼으로 스페인 왕국을 수중에 넣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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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게 수중에 넣은 왕국의 통치자로 등극하지만,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 신하와 백성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 나라 백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모르는 왕에 대한 원성과 불만은 아예 뒷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까지 왕가의 혈통은 온통 서로 연루되어 있는데,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는 사촌끼리의 근친결혼으로 후손들이 치명적인 질병을 앓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족간의 정략결혼을 통해 유럽 왕국의 왕위를 서로 나눠가지며 자신의 기득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필요에 따라서는 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자기의 권리를 펼치기도 한다.
유럽은 왕국이 존속되는 한 혈통주의를 강력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아들 대신 딸도 왕으로 앉히기 위해 법률까지 개정하거나 제정하기도 했다.
수많은 왕들이 영토 확장과 통치를 위해 죽음이 난무하는 거친 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감안하면, 단지 순 혈통만을 주장하여 타국을 손쉽게 손아귀에 쥔다는 것은 대단히 수지맞는 장사인 것이다.
이 책 <왕의 언어 : 통치자는 어떤 말을 했는가?>는 자신이 모국어로 쓰는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는, 즉 장차 통치자로 등극하게 될 왕국의 말을 전혀 쓰지 못하는 왕들이 그 나라로 가 다스린 왕국들에 대한 역사와 정략결혼으로 이어지는 유럽 국가들 간에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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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과 민족 사이에 발생하고 사용된 언어의 발생과 계통을 간략하게 알아보는 흥미로운 시간을 제공한다. 오늘날 영국에 사용되는 영어에 프랑스어와 북유럽 노르드어(덴마크, 노르웨이 등에서 사용, 바이킹이 주로 사용했다), 라틴어가 스며들어가 그 흔적을 남긴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영어에 프랑스어 사용 비율이 25% 이상이라고 한다면 일반 독자라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어떻게 프랑스어가 유럽의 역대 강국 중의 하나고, 프랑스와는 라이벌 관계인데 영어에 지배력을 발휘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프랑스어가 정치, 문화어로서 유럽 왕가와 정가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탓이고, 유럽 대부분의 왕가와 프랑스 왕가에 있던 후손이 영국 왕이 되어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들 혼자만 건너갔겠는가. 가신과 궁녀 등을 포함하면 제법 많은 인원이 영국의 핵심세력권으로 파고 들어가 오랜 기간 기득권층에 프랑스어를 전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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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쓴 언어의 관점으로 유럽 민족 간의 세력 이동을 통한 유럽 역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로마 제국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 북유럽 바이킹족의 침략과 이동, 오늘날 프랑스의 형성, 영국 내의 민족 간 유입경로 및 이동, 스페인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형성과정 등 전 유럽의 역사가 함축되어 설명되고 있다. 역사는 관점의 다양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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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는 이제 먼 나라의, 우리와 상관없는 역사가 아니다. 유럽 역사의 변천과 문명과 문화가 과거의 어느 순간 동양으로 고스란히 이동, 침투되면서 오늘날 우리 현재의 모습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역동적이다.
오늘날 서구 문화가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현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유동적이다. 어떻게 이 지구촌에서 변화를 거듭해나갈 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역사는 인류의 생존 이야기다. 향후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자료로서 생명과 생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꾸준히 읽어나갈 분야인 것이다. 관점을 달리해 역사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엮어간 작가의 공이 크다 하겠다.
(2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