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리 원숭이나 될까보다
이원익
적으나마 한 때 초롱초롱하던 젊은 날의 총기라는 것을 완전히 어디 갖다 버리신 분이 아니라면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시의 세 가지 분류라고 할까, 장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배운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시에는 크게 보아 뭐가 있다?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아니 그런 외형적인 것 말고 시의 내용으로 보아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나누기도 하지 않나. 그 중에서도 오늘은 서사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웬 뜬금없는 서사시 얘기냐고 하면 우리의 뿌리인 한국의 고유문화, 그 가운데서도 국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심사가 일었기 때문이다. 반만년 역사라고 하지만 사서삼경을 좔좔 외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도 맹탕 남의 나라 글자와 말만 가지고 긴긴 세월 음풍농월한 시간이 대부분이고 제 말로 제대로 된 제 문학을 한 역사가 일천한데다 사회의 엘리트란 선비들조차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의식마저 아예 없었으니 얼마나 헛똑똑이들인가!
이 금수저들은 저 나머지 99프로 흙수저들이 오랜 세월 읊고 즐기고 전해준 그 질박하고 절절한 살아있는 구전문학들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기는커녕 이를 천시 폄하하고 채록에 인색하였으며 심지어 있던 기록들조차 남녀상열지사니 뭐니 하며 뒤틀고 없애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소중화의 맥을 잇는 적자로 자처하였으니 단재 선생의 말마따나 ‘아’와 ‘비아’의 분별조차 흐릿한 어린애 시절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행복하긴 했을 거다.
그 결과가 지금 한국의 고전 국문학이다. 이것 전공 시켜서 과연 몇 사람 밥 먹여 줄 수 있나? 폭을 좀 좁혀 제 나라 말로 된 시나 노랫가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하여 일단 분량만 가지고 따지더라도 너무나 남아 있는 게 빈약하여 꿇리는 바가 많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자와 시, 문장의 나라 중국은 두고 일본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8세기 초에 나온 만엽집만 해도 사천오백 수 이상의 노래가 담겨 있다. 한시가 아니라 일본말 시다. 한국엔 뭐가 남아 있나? 고유어로 된 시가 중 가장 오래 된 것이 향가 스물다섯 수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삼대목이란 시가집이 있었다고 하나 제목만 있고 내영은 전하지 않으니 이렇게 수십 개 제목만 있고 사라진 시가집이나 역사책이나 사료, 이를테면 고구려의 유기나 신집, 백제의 서기 같은 것들 중 한두 개라도, 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외에 더 남은 것이 있다면 한단고기의 진위 판별은 물론이요 지금 우리 사는 꼴이 이렇지가 않을 것이다. 오호 통재라.
소심하고 무심 무지했던 조상님들이 이런 저런 이유와 염려로 제 손으로 불사르거나 감췄다 사라진 것도 많고 중국, 몽고, 왜적 등 이민족들의 노략질과 질시와 사악한 전략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파괴 되고 탈취 되어 사장 된 것도 많으리라. 그 가운데 끈질기게 살아남은 일부는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빼돌려져 아마 지금도 일본 황실 저장고에서 비밀히 관리 받고 있으리라. 일본의 죄악이 정신대를 부정함만이 아니다. 정신대, 동경대지진 조선인 학살, 만주에서의 생체실험을 비롯한 숱한 인면수심의 죄악을 시인하고 참회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감추어 둔 사료의 사본의 하나라도 환한 대낮에 내어 놓고 좋은 내용이든 싫은 내용이든 있는 그대로 같이 한 번 들여다보자며 이마를 맞대지도 않는데, 개뿔! 화해는 무슨 화해며 우방은 무슨 얼어죽을 우방이며 선진국은 무슨 본받을 게 눈곱만치도 있다고 선진국인가!
격앙을 거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흔히 보는 시가들 중에는 대다수가 서정시이고 서사시는 드물다. 서사시가 뭔가? 어떤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이야기나 영웅담, 혹은 근세에 와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의 전개를 시로 꾸민 것이다.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 같은 것도 해당 되겠지만 아쉽게도 한문문학이다. 그 땐 한글이 없었으니. 이러다 한글이 창제된 후 한국어로 된 한국문학에서는 세종대왕 때의 용비어천가 정도가 약간 서사시적인 면이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근대 서사시의 시도로는 일제시대에 김동환이 지은 ‘국경의 밤’이라는 시가 처음이라고 한다. 고등학생 때 원문은 안 보여 주고 그렇게 외우라고 해서 제목만 외웠다. 함경북도 북청이라든지 오지에는 그 때까지 외양은 완전히 조선화 되었지만 여진족의 정체성을 간직한 후예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들은 그 때까지 꼭 저희끼리만 혼인하여 혈통을 지켰다고 하는데 그 마을의 한 처녀가 그 전통을 깨고 주류 조선 청년과 사랑에 빠져 얼어붙은 국경의 강, 두만강을 밤에 손잡고 건너는 이야기란다. 김동환도 나중에 친일 행적으로 이름에 흠이 갔지만 이 시 하나만으로도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셈이다. 그 여진족 마을들은 북한에서 김정일 시대쯤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고 한다.
우리가 알기에 서사시 하면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이며, 비록 읽어 보지는 못했어도 다들 대단한 걸로 여기고 있는데 사실 대단하다. 고대 중동에는 오래 된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다. 사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많은 것들이 여기가 새암이다. 중세 유럽으로 가면 베어울프, 롤랑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같은 것들이 있고 그 후엔 파우스트나 실낙원 같은 근대 서사시들이 있다. 이 중에 하나 만으로도 얼마나 우려먹을 것이 많나! 연극, 소설, 영화, 논문, 비평에다 온갖 직간접적인 가지 뻗기를 비롯하여 이것으로 밥 먹고 사는 인구가 아마 수십만 수백만일 것이다. 가히 문화의 공장이요 반영구적인 문명의 발전소, 대규모 공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게 없어서 아쉽지 무슨 대륙간탄도탄이나 최첨단 사드 설비를 못 만들어 아쉽고 이지스함 항공모함이 모자라 부족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동양 사람이면서 동양에도 위에 든 중동이나 서양의 여러 서사시들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서사시들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데 일례로 인도의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라는 대표적인 두 서사시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다. 들어는 보셨겠지만 그 비중과 내용까지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두 서사시들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 없이는 인도나 동남아 여행 하나마나다. 우리가 뭘 모르면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요 명문거족 삼대독자 대동보 족보도 멸치장수 포장지 묶음일 뿐이다. 돈 들여 시간 들여 가족 이끌고 더운 나라 추운 나라 유적지를 쏘다녔어도 그저 그렇고 그럴 뿐, 제법 공들여 복잡하게 잘 만들었지만 쳐다보니 괴상한 우상 소굴일 뿐이요 안내원의 설명은 들어도 그 때뿐, 찰칵 찰칵 증명사진 몇 장 찍는 찰나에 새까맣게 다 날려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된 데는 인도나 힌두교, 인도 문명 전반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자리하지만 그런 장애물들을 눈높이 낮춰 팔 걷고 치우려는 사람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돈 안 받는 관광 안내원 노릇을 좀 해 볼까 한다. 책상 앞에 앉아서, 혹은 소파에 기대어 하는 역사, 문화 여행이니 마음 편히 가지시고 얘기 삼아 들어 주시기 바란다. 특히 불자라면 이런 얘기들은 기초로 좀 알아 둘만 하다. 기독교의 뿌리가 유태교이듯이 불교의 그루터기도 힌두교의 원형인 브라만교다. 거기에서 돋아나 그것을 부정하고 참된 다르마의 새 뿌리를 내리고 울창하게 바깥으로 자라난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 쓰는 많은 용어, 일화, 세계관 등 문화적인 요소들이 브라만교에서 묻어 와 그것들과 서로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해야 더욱 또렷이 이 둘의 서로 같고 다름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부터 간단히 소개하자. 어느 정도냐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합한 것의 열 배 정도의 분량이 마하바라타이다. 사뭇 옛날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던 여러 이야기를 기원전 4세기쯤부터 모아 짜서 기원후 4세기쯤 완성 되었으니 주워 모아 꾸미는 데만 8백년이 걸린 셈이다. 통상적으로는 비야사라는 사람이 편집했다고 한다. 인도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세상 모든 것은 마하바라타에 있고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도 없다고 한다. 알 만하지 않나! 약 이백 오십만 단어에 이십만 행의 고전 인도어인 산스크리트로 된 시가인데 제목은 위대한 바라타 족이라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끔 자기들을 배달민족, 배달나라라고 하듯이 인도 사람들은 자기들을 공식적으로 바라트라고 한다. 인도 돈에 보면 그렇게 찍혀 있다.
이 마하바라타는 인도 고대 아리안 족 조상쯤 되는 바라트족의 집안 전쟁 이야기인데 그냥 싸움박질하는 얘기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온갖 철학, 도덕, 종교 이야기가 있어서 인도 정신문명의 하나의 중대한 중추를 이루는 시가다. 총 십팔 편으로 돼 있는데 제 6 편에는 바가바드기타라고 해서 특히 유명한 문서가 있다.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이것이야말로 인도 사람들의 성경이라 할 만하다. 간디가 암살 되는 날 아침까지 읽었고 그의 비폭력, 불복종 사상도 바로 이 바가바드기타에서 나왔다고 한다.
뜸 그만 들이고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인도 고대에 살았던 쿠루 족의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드리나타슈트라와 이복동생 판두였다. 왕이 죽자 장남이 왕이 되어야겠지만 그는 눈먼 장님이어서 관례에 따라 차남인 판두가 왕이 되었다. 눈이 멀었지만 여자 보는 눈은 따로 있었는지 형님에게는 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도 없이 왕이 된 판두는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애꿎게도 사슴사냥 하나 잘못 하다 저주에 걸리고 만다. 그 사슴이 보통사슴이 아니라 성자 부부가 변신해서 놀고 있던 사슴이었단다. 미리 말 좀 하지. 아무튼 그래서 받은 저주가 여인과 침실로 들어가는 순간 판두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점잖게 말해서 그렇지 사실상 복상사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을 치를 수가 있나. 그래서 고심 끝에 왕위를 임시로 형님에게 맡기니, 실은 형님의 맏아들인 두료다나가 맡기로 하고 자기는 저주를 풀려고 히말라야로 간다.
히말라야는 참 괜찮은 곳인가 보다. 저주는 풀리고 늦었지만 부지런히 해서 판두는 다섯 아들을 낳고 죽는다. 자기가 낳은 맏아들 유디스트라가 왕위를 되찾기로 돼 있다면서.
아무리 임시로 맡았다고 하지만 한 번 맡은 임금 자리를 선뜻 도로 내놓기가 어디 쉽나! 장님 형님의 아들 백 명은 맏아들 두료다나를 중심으로 사촌인 다섯 형제들을 해치려고 한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게 벌어지는 이들 백 명의 형제들과 다섯 명의 사촌 형제들 간의 싸움이 마하바라타의 큰 줄거리다.
겨우 살아난 이들 다섯 형제는 그 나라를 떠나 여러 왕국을 돌아다닌다(얘들이 결국 바라트 족의 시조가 된 것 같다). 다서 중에 장남 유디스트라보다는 둘째인 아르주나가 더 똘똘했나 보다. 아르주나가 드라우파디란 아내를 맞았는데 우애가 한량없는 건지 본래 콩가루 집안인지 다섯 형제가 드라우파디를 공동 아내로 삼는다. 또 야다바 족의 족장 크리슈나를 만나기도 한다.
이에 장님 큰아버지는 자기 아들들과 조카들을 불러모아 화해를 시키고 왕국을 여러 개로 쪼개 고루 나눠 준다. 그런데 정작 자기 맏아들인 두료다나는 끝내 탐욕을 삭일 수가 없었나 보다. 사촌 유디스트라를 꾀어 주사위 도박을 하고 속임수로 이겨서 공동 아내인 드라우파디를 빼앗는다. 참 빼앗을 게 따로 있지 제수씨를 빼앗다니! 그것도 공동으로 쓰는 제수씨를!
아무튼 유디스트라는 동생보다 좀 띨띨했었나 보다. 두료다나의 도박에 또 걸려들었는데 이번에도 져서 다섯 형제 모두 숲으로 쫓겨나 12년 동안 살아야 하고 13년째는 1년 동안 신분을 숨겨야 하는 내기란다. 만약 신분 노출이 돼 버리면 또다시 12년 동안 숲에 들어가 살아야 한단다. 참 희한한 내기도 있었네. 하여튼 내기는 내기니까, 그리고 졌으니까 이 다섯 형제는 숲에 들어가 열두 해를 살고 13년째는 나와서 살았는데 조심조심해서 사람들에게 신분이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촌형에게 갔다. 우리 아버지 유언대로 이제는 왕국을 돌려 달라고!
이래서 어마어마한 싸움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쿠루 평원의 양쪽에서 인도의 여러 동맹국들과 그리스, 중국 등 먼 외국들까지 어느 한 쪽을 편드는 국제전으로 번지는데 결국 오형제 중에서 똘똘했던 아르주나의 주도로 승리를 눈앞에 둔다. 그런데 이래서 전쟁에 이겼다는 얘기라면 뭐가 그리 대수롭겠나! 마하바라타의 진가는 이때부터다.
아르주나는 자신들과 같이 뛰놀던 사촌들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비통해 하며 전의를 상실한다. 이때 그에게 충고를 하고 독려하는 이가 아르주나의 마차를 모는 마부 크리슈나인데 야바다 족의 족장이기도 하다. 그러다 충고가 아니라 점점 설교가 돼 버리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크리슈나가 바로 천신인 비시누가 이 세상에 와서 사람으로 몸바꿈 하여 된 아바타였던 것이다. 연전에 대 히트를 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라는 영화, 생각나실 것이다. 이렇게 신이 인간의 몸으로 나툰 것을 아바타라고 한다. 이 아바타의 설교가 저 유명한 바가바드기타, 간디뿐만 근세의 서양 철학자나 사상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영혼을 속 깊이 울린 신의 노래다. 어떻게 사촌 형제들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문서가 위대한 경전이 될 수가 있나! 원문을 샅샅이 안 읽어 보니 당장은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 인도의 신들 중 중요한 계보를 말하자면, 아주 옛날부터 본래 인드라라는 신이 있어 한자로 제석천이라고 번역 되는데 우주 어디에 계시든가 아니면 우주 그 자체인 천신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인드라 신은 브라만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우주의 근본적 실재라든가 진리를 가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나의 실재는 아트만이라고 하여 이 아트만이 알고 보니 결국 브라만이다, 즉 범아일여를 깨치는 것이 브라만교의 명상이나 수행의 목표가 됐었다.
그러다 또 세월이 한참 흐르자 이전의 철학적인 신관은 좀 세속화 되어 우주의 창조주를 상정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브라만이 아니라 창조주 브라마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창조주는 창조하고 보니 임무 끝, 할 일이 없어진다. 그래서 잊힌 신이다. 지금 인도에서 이 브라마를 모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그 두 아들이라 할까 분신이라 할까, 파괴와 죽음과 춤의 신인 시바, 그리고 보존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신인 비시누가 전면에 나선다. 이 두 신 중에 하나를 주신으로 끔찍이 모시는 힌두교인들은 수억씩이나 된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그라져 갈 때 이 힌두교도들은 부처님마저 자비로운 비시누의 화신으로 치부하여 부처님 상을 만들어 자기들 신전의 한 쪽 구석에 나란히 얹어 버렸다. 정체성이 헷갈린 불교도들은 좋은 게 좋다고 힌두교 신전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나중에는 아무 신에게나 두루 경배를 올렸는데 결과는 정체성 상실이고 자멸이다. 이런 과정을 어려운 말로 습합이라고 하는데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세 가지 큰 이유 중 하나다.
물론 힌두교에 시바, 비시누 이 두 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남신은 신인데도 혼자서 살기에는 적적했었나 보다. 시바는 검고 무시무시한 아내인 칼리 신을 두었고 머리는 코끼리요 몸은 사람인 가네샤라는 아들 신까지 두었는데 이 아들의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이겨내게 함이다. 비시누 신은 그에 걸맞게 풍요와 부, 승리의 여신인 락스미를 아내로 두었다. 아들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의 여러 신들은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 인도의 모든 신들은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사에 관심이 많아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하고 몸이 달아 걸핏하면 하계로 내려온다. 아바타로 오는 것이다. 와서는 인간처럼 행동한다.
그건 그렇고 사촌간 전쟁의 결말이 궁금하시다고?
이렇게 설교를 하던 크리슈나는 자신이 바로 비시누의 화신임을 커밍아웃 한다. 죽이라, 죽이라. 네가 죽이지 않아도 비시누는 결국 이 생명체를 다 거두어들인다. 삶과 죽음보다 다르마가 더 중요하다고. 거 참, 그런가?
그리하여 오형제와 크리슈나 외에 족장들은 다 죽었고 벌판과 골짜기는 통곡으로 가득 찼다. 맏이 유디스트라는 왕위에 올랐다가 둘째 아르주나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동생 손자가 제 손자 아닌가?) 공동 아내와 오형제 모두 히말라야로 간다. 거기서 우뚝 솟은 수미산을 통해 신들의 도시로 올라갔다는 꿈같은 이야기다.
마하바라타만 가지고도 숨이 차는데 라마야나까지 하려니 글 시작한 게 은근히 후회도 된다만 나 아니면 누가 해 드리겠나, 내친 김에 달려 보기로 하겠다. 기본 지식 브리핑은 돼 있으니 조금은 쉽겠지. 발리나 앙코르와트 여행 잡히신 분들은 지금부터 더 눈여겨 읽어 보시기 바란다. 발리나 인도네시아의 그림자 연극인 와양 쿨릿, 남자들이 모여 앉아 추는 원숭이 케착 춤, 앙코르 사원의 부조 조각 등이 다 이 라마야나 아니면 마하바라타 이야기다.
분량이 마하바라타 만큼은 아니라는데도 라마야나를 이루는 시편은 약 이만 사천 행이나 된다. 역시 산스크리트로 돼 있고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구전 돼 오던 것이 문자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2 세기경이라고 한다. 발미키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하지만 편집을 한 것 같고 그것도 혼자서 다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아직도 수많은 문학작품, 연극, 영화가 라마야나에서 소재를 딴다. 할리우드와 함께 세계 영화계의 쌍벽을 이루는 볼리우드가 이리 찍고 저리 찍고, 갖은 교성, 교태의 떼춤과 떼창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어도 그 샘줄기는 마르지를 않는다. 우리나라 춘향전은 이제 몇 번쯤 영화로 찍혔나? 춘향전, 성춘향, 열녀 춘향, 퓨전 춘향…
그렇다면 도대체 라마야나가 뭔가? 라마 왕자의 여행기라는 뜻이다. 일사천리로 대충대충 소개하겠다.
옛날 스리랑카에는 라바나라고 하는 걸출한 왕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로 걸출하냐고 하면 하늘의 신들이 속된 말로 뿅 가서 너무 기특하고 귀여워서 자기들 손으로도 죽이지 못하는 특권을 내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창조주인 브라흐마가 인가를 해 버렸으니…, 짐작하시겠지만 해 놓고 신들이 후회를 많이 했단다. 왜냐? 라바나가 오만해져서 올챙이 시절을 모르고, 아나 아나 했더니 할애비 상투를 잡는다고 라바나가 이번엔 시바 신이 사는 카일라사 산까지 뒤흔들었단다. 무엄하게도 신계를 넘본 거지.
이에 신들은 모여 의논하되 신의 힘으로는 쟤를 죽일 수 없으나 인간으로 환생해서는 가능하다. 누가 갈 거냐, 비시누가 좋겠다. 이리하여 이번에도 비시누가 뽑혔다. 어디서 태어날 거냐? 보아하니 아요디야 왕국의 다사라타 왕이 아들을 바라는구나. 그래서 그 장남인 라마로 태어난다. 잘생기고 머리 좋은 라마 왕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마하바라타에서는 비시누가 주인공의 어드바이저인 크리슈나로 오지만 여기서는 직접 주인공인 라마로 태어난다.
왕자의 스승이 왕자가 마녀 타라카를 물리쳐야 된다고 하자 왕은 허락한다. 스승과 함께 길 떠난 라마는 타라카를 물리치고 어느 나라에서 시타라는 공주를 숙명적으로 만나 아내로 삼고 데리고 온다. 라마와 시타 이 둘이 주인공이다.
궁에 오니 계모인 카이케이가 자기 소생인 바라타가 왕위를 잇도록 계략을 꾸민다. 이에 휘말린 라마는 숲속에서 14년간 은거해야 하는 고행의 길을 떠난다. 인도에서는 걸핏하면 숲으로 내쫓았나 보다. 물론 시타도 따라간다. 이복동생 바라타는 죄스러워하나 라마는 오히려 달래며 자기가 떠난다. 다른 두 이복동생, 락쉬마나와 사트루 왕자도 옳은 길을 좇아 라마를 따른다. 고난을 함께하는 부부간의 끈끈한 사랑, 우애가 감동적이다.
숲에서 라마 왕자는 스리랑카 라바나 왕의 여동생 슈르파나카를 만난다. 라마에게 한 눈에 반한 이 여동생은 노골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고 호소하고 유혹하지만 라마는 단호히 거절한다. 무심한 남자! 연모가 증오로 돌변한 슈르파나카가 라마에게 덤벼 싸우다 귀와 코가 잘린다. 라마를 차지하기는커녕 어디 시집도 못 가게 생겼으니 더욱 원한에 사무칠 밖에. 오빠에게 달려가 복수를 호소하지만 시큰둥해 하자 술수를 쓴다. 숲에 천하미인 시타가 있다고. 뺏어 오라고.
이에 회가 동한 라바나가 나서자 숙부인 마리차가 말린다. 점잖은 제왕이 유부녀 약탈에 나서서야! 하지만 라바나는 도리어 숙부에게 임무 수행을 엄명한다. 갑이 저러니 을이 할 수 있나! 마리차는 숲에 가서 예쁜 사슴으로 변신해 시타를 유인한다. 유인에 걸려든 시타에게 라바나가 나타나 유혹하지만 사태를 깨달은 시타가 거절한다. 자존심이 상한 라바나는 하늘을 나는 마차에 시타를 강제로 태워 빠이빠이, 스리랑카로 향한다.
시타를 잃어버린 라마와 락쉬마나 형제에게 독수리가 행방을 알려 준다. 하늘을 날다가 라바나의 마차와 접촉사고를 냈단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라마와 라바나, 양측 군사들의 전쟁 시작인데 여기에 참 재미있는 군사들이 참전한다. 원숭이 부대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신들만이 아니라 원숭이들도 꼭 사람같이 행동했나 보다. 그 원숭이 나라에도 왕위찬탈 사건이 있었고 그 싸움에서 죄 없이 모함 받고 쫓겨난 원숭이 왕자가 수그리바이고 그 원숭이 부하가 하누만인데 이 하누만의 활약이 사람 뺨친다. 중국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도 이 하누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란다. 동남아 어디 가서 원숭이가 나오는 연극이나 조각 등을 보거든 이 하누만 부대 이야기인 줄 알면 대차 없다. 아무튼 라마는 수그리바에게 왕위를 찾아 주는 대신 수그리바는 시타를 찾는데 협조하기로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원숭이 간의 종간계약이 맺어진다.
스리랑카 왕 라바나에게는 비비샤나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과 달리 도덕감, 정의감의 사나이다. 형을 말렸는데도 듣지 않자 돌아서 라마 편에 선다. 라마로서는 이너서클을 아는 중요한 정보원이다. 일이 이쯤 되자 하늘의 신들도 한 다리 끼려고 안달이 나서 이번에는 단체로 원숭이로 환생해서 원숭이 부대에 편입 된다. 장군이 보병으로 재입대하는 것도 아니고…, 되게 급했나 보다. 아무튼 아군의 전력이 막강해진 건 물론이다. (신들도 이러는 걸 보니 나도 맨날 돈 몇 푼에 찌질거리지 말고, 자질구레 인간관계에 맘 상해 하지 말고 인도로 가서, 서사시의 숲을 찾아 야호~ 후릭 후릭! 종횡무진 원숭이 용병이나 될까 보다.)
하지만 적군도 만만치 않았다. 라바나에게는 그 애비에 그 아들, 인드라지트라는 출중한 왕자가 있어 기상천외의 전술로 전세를 뒤집기 일쑤다. 엎치락뒤치락, 예측불허다. 심리전, 선전전, 정보전 등 온갖 술수가 총동원 된다. 라바나는 라마가 죽은 것처럼 꾸미나 시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게다가 라마는 인드라지트에 체포 되어 전의를 상실하기까지 한다. 거의 패망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늘나라의 새인 가루다가 날아와 이들을 풀어 준다. 게다가 너희가 틀림없이 이길 거라고 라마에게 예언까지 해 준다. 새 치고는 참 능력 있고 고마운 새다. (가루다는 지금 인도네시아 항공사의 이름이 되었다.)
라마가 살아서 돌아오자 원숭이 군단은 단박에 사기가 오른다. 생각해 보라, 수십만의 원숭이들이 짹짹거리며 한꺼번에 환호하는 소리를! 이때부터 하누만의 더욱 눈부신 활약이 펼쳐진다. 라마와 락쉬마나 형제를 한두 번 구해내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라바나는 시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들인다. 또 술수를 써서 시타가 죽은 것처럼 꾸미니 심약한 라마는 또 전의를 상실한다. 하지만 라바나의 동생 비바샤나가 정확한 내부 정보를 물어다 주니 라마가 기운을 차린다. 결국 라바나의 아들 인드라지트부터 죽이고 라바나와 맞대결한다. 좀처럼 죽지 않는 라바나도 결국 브라흐마 신이 보내준 비장의 무기로 라바나의 손에서 죽는다.
이렇게 전쟁은 끝나고 비바샤나가 스리랑카의 왕이 된다. 시타는 당연히 사랑하는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돌아는 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 참! 라마가 시타를 의심하는 것이다. 라바나에게 잡혀갔을 때 무슨 일 없었을까 하고…, 못난 넘!
갖은 고행을 견디며 수절한 시타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그녀는 훨훨 타는 불속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도 라마는 말리지도 않는다. 이에 신들이 놀라 맨발로 지상으로 내려와 라마에게 일러 준다. 네 마누라가 실은 비시누 신의 아내인 락스미라고. 그리고 너 몰랐지? 넌 임마 비시누라고! 비시누 신의 환생이라고! 정신 차려 임마!
이에 라마는 금방 입이 헤벌어져 시타를 끌어안고 왕궁으로 돌아와 왕자에 올랐다는 것이 마지막 얘긴데 이 비시누 신의 약했던 심지 탓에 인도에서는 그 후로 수천 년 동안 숱한 아낙들이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 불에 걸어 들어가 타죽었다. 자기의 정절을 못난 남편 앞에서 증명해 보인답시고! 이 마지막 장면이 빌미가 되어 전통적인 악습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뭐든지 잘못 해석 되고 적용 되면 기나길고도 끈질긴 비극의 씨앗을 낳는 법이니라.
이로서 우리의 난삽한 관광안내도 마감을 해야겠으니 혹시 팁을 주시려거든 몇 푼 안 드는 불교 잡지 끊지 말고 꾸준히 구독하시는 걸로 대신하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