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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 평화와 검
마태복음 10:34-39/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자 하고 종교를 선택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해서입니다. 마음이 평안할 수 없는, 갈등과 분쟁과 불화와 불안하고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나 평화롭고자 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여러 종교에서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은 예수님이 평화를 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과 함께 하고 귀신들린 자, 병든 자, 몸이 약한 자들을 고쳐주어서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서 예수님은 ‘피스-메이커’(Peace-Maker)이며, 예수님을 따라서 자신들도 할 수만 있으면 온 세상에 평화가 있게 하는데 기여하는 ‘피스-메이커’가 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선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평화롭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불화와 불행의 고통에 있는 검은 그림자가 걷어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에 있는 것은 자신들이 더 이상 불화와 불행의 고통에 있지 않기를 위하여 불화와 불행의 고통의 요인이 되는 것이 해결될 수 있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부요해지고 힘없는 자는 성공하여서 힘있는 자가 되고 귀신들리고 병들고 몸이 약한 자는 이 모든 것에서 고침을 받아 더 이상 이러한 것으로 불화와 불행의 고통에 처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에서 자신을 행복하고 평화롭다고 여깁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주신 평화
그러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있게 되는 평화는 이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과 관련해서 천사들이 합창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일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평화에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이 평화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니, 이 땅에서 얻어지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평화롭고자 하는 평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로 말미암아 누리는 평화를 지상의 평화의 것에서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피상적인 ‘지상의 평화’를 제자들은 생각하지 말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있게 한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본문에 앞서 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신 말씀과의 연계에 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이 있는 곳에로 보내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에게로 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하며 그분을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전파하고 그에 대한 입증으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행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에 있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 나라의 긍휼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는 그 일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백성들에게서 환영을 받고 환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선생이요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과 동일한 미움과 박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복음의 전파를 위해 보내는 것을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 앞엔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인하여 전하는 진리를 가리거나 가감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어떠한 환경과 그에 따른 핍박 앞에서도 온전히 증거 되어서 여기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져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아는 자로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진리를 온전히 증거 할 수 있기를 위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엡 1:17-19). 이에 있어서 제자들은 흠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지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빌2:15-16).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는 박해에 관해 언급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되며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말하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는 이방인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동족, 같은 종교에 의해서도 오며 심지어 같은 형제, 부모 자식 간에도 복음으로 인하여 적대 관계가 생깁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문이나 혈통이나 인간적인 의지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적대 관계에 있는 것에서 미워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겪으신 박해의 사건(마 9:34)을 염두에 두시면서 복음 전파자에게 당연히 박해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10:25). 그러나 그 박해가 제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며 몸에 해를 가할지라도, 심지어는 목숨을 위협하며 몸에 해를 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음에 처할지라도 천국복음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널리 퍼져나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시는 자들에게로 갈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동네에서 저 동네에로 보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해 증거되는 천국복음은 죄로 인해 죽음의 심판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소식이 될 것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는 평화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냄을 받은 그 때부터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만나 그들의 적대적인 행위로 인해 갈등과 분쟁과 다툼 속에 처하는데, 그러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제자들의 마음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더욱이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의 적대적인 행위로 박해를 받는다 하여도 그들이 비록 자신의 몸은 해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혼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심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누구든지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주이심을 신앙고백한 일로 인하여 몸에 해를 입으며 목숨도 잃을 수 있으나 그 일로 해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의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말하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이렇다면, 이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어떻겠는지요. 예수님 당시에 각종 병들고 귀신들리고 몸이 약함에서 고침을 받아 나음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그들을 억압하던 죄에서 건짐을 받고 사단의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에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죄와 사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자유하게 하는 예수의 영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주인으로 영접하여 섬기는 믿음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함께 계심으로 해서 참생명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권세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자신을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신 의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적 개념에서의 평화, 곧 나라의 정치 및 경제의 자립, 부요, 건강 복지 등등이 실현된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기대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은 죄의 장벽을 허물고 끊어진 관계를 연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의도하셨던 상태로 인간과 온 피조계를 회복시켜 놓는 일 - 구원 - 로 인해 누리게 되는 모든 축복의 상태를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는 그분의 복음 -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 - 이 지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일 때 주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신 평화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평화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빼앗김을 당하거나 잃어버림에 있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섬기지 않는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불화에 있어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는 평화를 붙잡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있음으로써 오직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훼방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는 그러한 의미에서 해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집안 식구,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들 사이의 관계는 공경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직 이러한 공경과 사랑에 있는 가족에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사랑의 우선 순위가 새롭게 형성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말이죠.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간에 있는 공경과 사랑을 대신하고 이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서 참생명과 평화에 있게 된 아들과 그렇지 않은 아버지 사이에, 딸과 그렇지 않은 어머니 사이에, 며느리와 그렇지 않은 시어머니 사이에 예수님을 공경하며 사랑하는 자에게서는 이보다 우선하는 사랑이 없다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며 사랑하고, 딸이 어머니를 공경하며 사랑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데,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딸에게,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며느리에게 예수님이 새로운 가족 관계로 들어옴으로 해서 이 아들, 딸, 며느리에게 참생명과 평화에 있게 한 주가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낳고 양육을 하였습니다만, 참생명과 평화는 그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과 딸에게 해주는 것이 희생적으로 온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아들과 딸과 며느리의 장래를 위하며 성공의 큰 디딤돌이 되고 부모가 원한 대로 잘 사는 사람이 될지언정 정작 아들에게, 딸에게, 며느리에게 아무런 생명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들과 딸과 며느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생명인 영원한 생명과 영원히 의가 다스리는 참된 평화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로 섬겨 사랑함에 있는 것은 아들과 딸과 며느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것에 우선합니다. 이것은 인륜(人倫)을 무시하고 저버리는 것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륜 위에 새로운 가족 관계의 질서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공경과 사랑 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딸이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그 위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새로운 질서인 ‘우선’이 새롭게 형성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르는 믿음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 된 자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 말미암은 참생명과 평화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섬김에 있는 것에서, 딸이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섬김에 있는 것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섬기는 것에서 있게 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그러한 가치관에 있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그분으로부터 오는 참생명과 평화로 말미암은 ‘우선’하는 가치관이 있기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얻고 소유하게 되는 인생의 가치관 위에 있는, 이것보다 더욱 큰, 곧 우월한 ‘우선’하는 가치관이 있기에 이것을 결코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잃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이겠는지요. 공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서, 시어머니에게서, 그래서 이분들 모두로부터 주어진 것에 의해서 존재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이시며 평화의 주이신 예수님을 시인, 곧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한 그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 곧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가 시인할 참생명의 주이시오 평화의 주가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함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것이잖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인륜의 도리가 지닌 지상 최고의 힘으로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주인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분의 나라에 마음이 있지 않고서 부모로부터 오는 것에 온 마음이 쏟아지는 욕망에 있다고 하면 그런 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 어떻게 해야 할 대상인지를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를 것’과 항상 함께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자기를 부인할 것’에서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닌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달리 표현하여 말하면 ‘육의 부정’과 ‘영의 인정’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육의 사람으로 사는 것에서 "육은 육이요"에 그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 사는 것에 있는 "영은 영이요"에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그에게 자리 잡힌 가치관은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모든 것을 버림에 있고 여기에서 떠남에 있는 ‘자기 부인’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것으로 있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는 아들이나 딸보다,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그에게서는 자기 육을 부정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육을 부정하게 하는, 곧 자기 육을 쳐 육에 대하여 죽은 자로 있는 것이 예수님이 그의 주가 되심으로써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에게 검을 주려고 오신 것이 됩니다. 이 검에 의해서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말 것을 종용하는 앞에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공경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따릅니다만, 아버지가 제게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검에 의해서 아들은 아버지가 “애비의 말을 듣지 않는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치는 앞에서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시고 예뻐해 주시며 길러주셨기에 이 몸을 아버지가 집에 있게도 하고 집에서 나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참생명과 평화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오니,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그 나라를 버려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게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아버지가 거하시는 집을 잃어버릴지언정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에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더 사랑하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그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란 날카로운 검은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네가 입고 있는 옷도 내가 준 것이다”라고 아버지가 말할 때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에게 돌려드립니다.” 하면서 입은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드리고, 맨 몸으로 집을 나서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검이 아들이 지닌 모든 것을 포기하여 하나님과 그 나라의 권세에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프란체스코에게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검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검을 자신을 따르는 자의 손에 쥐어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하나님의 의보다 더 사랑하여 온 자기를 부정하게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자기 부정에 있는 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육을 부정함에 있음으로써 자기 목숨을 버림에 있으나 그는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버린 적이 없으니, 예수님에 의해서 그의 생명은 안전히 보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이 진리를 알기에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과 불화와 불행 앞에서도 참으로 평화로우며, 평안히 눈을 감고 평안히 눈을 뜹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