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석은 종이를 들었다.
처음엔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를
내려놓는다."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눈물이 났다.
"나는 평화를 선택한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계속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점점 목소리가 안정되었다.
호흡이 깊어졌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눈을 감았다.
이번엔 잠이 왔다.
6. 시집
어느 날, 민석은 서재에서
오래된 시집을 꺼냈다.
김소월 시집이었다.
대학 시절에 샀던 것으로,
노랗게 바랜 책이었다.
그는 무심코 한 페이지를 펼쳤다.
「먼 후일」이라는 시였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젊었을 때 이 시를 읽으면 애절했다.
사랑의 이별이 슬펐다.
그런데 지금 읽으니 달랐다.
이것은 사랑의 시가 아니었다.
놓아버림의 시였다.
체념의 시였다.
아니, 체념보다 더 깊은 것.
수용의 시였다.
민석은 알았다.
그는 지금 이 시의 화자와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다가,
이제는 놓아버리는 것.
아니, 놓아버린다기보다는,
이제 그것이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것.
그는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못 잊어」였다.
못 잊어 생각이 나거든
그래도 그리워 마오
어느 먼 곳에 홀로 가서
진달래꽃을 꺾으려오
민석은 웃음이 났다.
이 시인은 잊지 못하면서 잊으라고 하고,
그리워하지 말라면서 그리워하고 있었다.
모순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모순이 인간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순되어도 괜찮다.
민석은 시집을 덮었다.
그리고 책장에서 다른 책을 꺼냈다.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였다.
이것도 오래전에 산 책이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었다.
그는 한 구절에서 멈췄다.
"죽음을 배우는 것은
노예가 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민석은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무슨 뜻일까?
그는 천천히 이해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그 두려움의 노예가 된다.
명예의 노예,
돈의 노예,
타인의 시선의 노예.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
민석은 창밖을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붉었다.
아름다웠다.
그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노을을 보고,
토마토를 키우고, 시를 읽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7. 수확
가을이 깊어졌다.
옥상 정원의 작물들이 익어갔다.
민석의 방울토마토도 빨갛게 익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았다.
어떤 것은 벌레가 조금 갉아먹은
흔적이 있었다.
민석은 하나를 따서 입에 넣었다.
톡 터지는 과즙. 달고 새콤한 맛.
햇볕과 물과 흙의 맛.
"맛있어요?"
김 여사가 옆에서 물었다.
"네."
"정말 맛있습니다."
민석이 웃었다.
"보세요. 완벽하지 않아도 맛있죠?"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토마토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좋았다.
아니, 훌륭했다.
"제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민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완벽하지 않았어요.
실수도 많이 했고,
후회도 많고. 하지만..."
그는 토마토를 바라봤다.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인생이었던 것
같아요."
김 여사가 민석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럼요. 우리 모두 그래요.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다들 조금씩 깨진 채로 살아가죠.
그런데 그 깨진 틈으로 빛이 들어와요."
민석은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깨진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그는 문득 레너드 코헨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딸 수진이 예전에 들려준 노래였다.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맞다. 우리는 모두 깨져 있다.
상처받고, 실패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바로 그 깨진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연민이, 이해가,
사랑이 들어온다.
8. 거울, 다시
그날 밤, 민석은 다시 욕실 거울 앞에 섰다.
형광등을 켰다.
거울 속에 칠십이 세의 노인이
서 있었다. 주름진 얼굴.
듬성듬성한 흰 머리. 처진 살.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민석은 그 얼굴을 똑바로 봤다.
외면하지 않았다.
"민석아."
"수고했어."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너는 충분히 잘했어.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졌다.
거울 속의 노인도 똑같이 했다.
피부는 거칠었다.
탄력은 없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살아있었다.
"이제 용서해도 돼. 너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눈물이 났다. 하지만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해방의 눈물이었다.
"민석아,"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랑해."
이번엔 진심이었다.
억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불완전한 채로,
실수투성이인 채로,
늙고 약해진 채로.
그는 세면대의 물로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상쾌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는 또 한 번 거울을 봤다.
"내일도 잘 부탁해." 그가 말했다.
거울 속의 노인이 웃었다.
9. 아들의 방문
다음 날 저녁, 아들 준우가 찾아왔다.
민석은 놀랐다. 준우는 지방에 살았고,
일 년에 명절 때나 한 번씩 왔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왜 갑자기?"
"그냥요."
준우가 웃었다.
"보고 싶어서요."
민석의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아들이 자신을 보고
싶어서 왔었던가?
민석은 저녁을 차렸다.
순희가 자주 해주던 김치찌개를 끓였다.
솜씨는 서툴렀지만,
준우는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 요즘 괜찮으세요?"
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민석이 대답했다.
"괜찮아. 요즘은... 좀 나아졌어."
"수진 누나가 걱정하던데요.
우울증이 심하시다고."
"그건 이제 괜찮아.
약은 안 먹고 있는데,
다른 방법을 찾았어."
"무슨 방법이요?"
민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옥상에서 토마토를 키워.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 보고
나한테 잘했다고 말해.
우스운 것 같지? 근데 도움이 돼."
준우는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들었다.
"좋네요, 아버지. 그런 거 하시는 게."
둘은 잠시 침묵했다.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편안한 침묵이었다.
"준우야." 민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하다."
"네? 왜요?"
"네가 어렸을 때, 너한테 잘 못해줬어.
항상 공부하라고만 했고,
일등 하라고만 했지.
칭찬은 한 번도 안 한 것 같아.
안아준 적도 없고."
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희 엄마 장례식 끝나고,
너랑 수진이가 울고 있는데,
나는 울지 말라고만 했어.
강해지라고만 했지.
그땐 그게 맞는 줄 알았어.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강해야 한다고 배웠거든.
근데 그게 아니었어.
미안하다."
준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 준우가 말했다.
"저 괜찮아요.
아버지가 저 사랑하신 거 알아요.
표현을 못 하셨을 뿐이지.
그리고 아버지도 그렇게 배우셨잖아요.
아버지의 아버지한테도."
"그래도..."
"아버지," 준우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충분히 좋은 아버지셨어요.
완벽하진 않았어도,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저 학교 보내시려고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시고.
그거 다 알아요."
민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칠십 평생 살면서 남 앞에서
운 적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멈출 수가 없었다.
"고맙다, 준우야. 이렇게 말해줘서."
준우도 울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울었다.
그날 밤, 준우가 간 뒤,
민석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꿈을 꾸지 않았다. 평온했다.
10. 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민석은 옥상에 다시 올라갔다.
이번엔 봄 작물을 심을 차례였다.
상추, 쪽파, 그리고 다시 토마토.
김 여사가 옆에서 일하고 있었다.
"민석 씨, 많이 밝아지셨어요."
"그래요?"
11. 손주
오월 어느 날,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민석이 문을 열자 준우가 서 있었다.
그런데 옆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버지, 선우예요. 제 아들."
민석은 깜짝 놀랐다.
준우에게 아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본 적은 없었다.
사진으로만 봤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다섯 살쯤 된 아이가 배꼽 인사를 했다.
민석의 가슴이 뭉클했다.
"어... 그래. 안녕, 선우야."
민석은 어색했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 자식들에게도 서툴렀는데,
손주라니.
"아버지, 선우가 할아버지 집
보고 싶대요.
같이 지내도 될까요?
한 달만요."
"한 달?"
"제가 해외 출장 가야 해서요.
와이프도 같이 가야 하고.
선우 맡길 데가 없어서..."
민석은 당황했다.
한 달 동안 다섯 살짜리를 돌본다고?
하지만 선우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은 눈동자.
"좋아." 민석이 말했다.
"여기 있거라."
12. 할아버지와 손주
처음 며칠은 힘들었다.
선우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났다.
민석은 보통 다섯 시에 일어났지만,
아이와 함께 있으려니 피곤했다.
선우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할아버지, 저게 뭐예요?"
"할아버지, 왜 하늘은 파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주름이 많아요?"
민석은 대답하려 애썼다.
하지만 잘 모르겠는 것도 많았다.
"할아버지도 잘 모르겠구나."
"그럼 같이 찾아봐요!"
선우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인터넷을 검색했다.
왜 하늘이 파란지,
왜 주름이 생기는지.
민석은 배웠다.
아이와 함께 배우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다.
어느 날, 민석은 선우를
옥상으로 데려갔다.
"여기가 할아버지 정원이야."
"우와!" 선우의 눈이 커졌다.
"토마토다! 할아버지가 키운 거예요?"
"응."
"저도 키워도 돼요?"
민석은 작은 화분을 하나 주었다.
"네가 직접 심어봐."
선우는 조심스럽게 씨앗을 심었다.
흙을 덮고 물을 줬다.
"할아버지, 이거 언제 나와요?"
"시간이 좀 걸려.
매일 물 주고 기다려야 해."
"저 잘할 수 있어요!"
민석은 손주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기쁨이었다.
순수한 기쁨.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이런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너무 바빴고,
너무 완벽하려 했고,
너무 불안했다.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13. 밤의 이야기
밤이 되면 민석은 선우에게 책을 읽어줬다.
선우는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앉아 들었다.
어느 날 선우가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죽어요?"
민석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응. 언젠가는 죽지."
"언제요?"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선우가 생각했다.
"죽으면 무서워요?"
민석은 깊게 생각했다.
예전에는 무서웠다.
죽음이 두려웠다.
사라지는 게,
잊히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엔 무서웠어.
근데 지금은... 덜 무서워."
"왜요?"
"충분히 살았거든.
좋은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그리고 지금은 선우도 있잖아."
선우가 할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저는 할아버지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민석은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도 그래.
하지만 죽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꽃도 피었다가 지잖아.
사람도 그래."
"그럼 슬프잖아요."
"슬퍼. 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거야.
영원히 있는 건 소중한 줄 모르거든."
선우는 이해한 듯,
안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들었다.
민석은 손주의 잠든 얼굴을 봤다.
평온한 얼굴. 걱정 없는 얼굴.
그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자랄 것이다.
실수도 하고,
고통도 겪고,
후회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것이 삶이다.
민석은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선우에게 줄 편지였다.
지금 주는 게 아니라,
선우가 커서 읽을 편지였다.
선우에게,
할아버지는 네가 다섯 살 때
한 달 동안 같이 살았단다.
너는 기억 못 할 수도 있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평생 기억할 거야.
네가 토마토 씨앗을 심던 날,
네가 할아버지한테
왜 주름이 많냐고 물어본 날,
네가 할아버지 옆에서 잠들던 밤들.
선우야, 할아버지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완벽할 필요 없어.
네가 누구든, 무엇을 하든,
그것만으로 충분해.
실수해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서면 돼.
남과 비교하지 마.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다른 사람이 잘난다고 해서
네가 못난 게 아니야.
자기 자신을 사랑해.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야.
할아버지도 칠십이 되어서야 배웠거든.
그리고 기억해. 삶은 완벽하지 않아.
깨지고, 부서지고, 상처받아.
하지만 바로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와.
할아버지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위대할 필요 없어.
그냥 충분히 좋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사랑한다, 선우야.
할아버지가.
민석은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선우가 스무 살이 되면'이라고 썼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14. 작별
한 달이 지나고 준우가 돌아왔다.
"아버지, 수고 많으셨어요."
"아니야." 민석이 웃었다. "즐거웠어."
선우는 할아버지에게 달려와 안겼다.
"할아버지, 저 안 가고 싶어요."
"선우는 아빠 엄마랑 가야지.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어."
"약속해요?"
"약속한다."
선우는 작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민석도 손가락을 걸었다. 새끼손가락.
차가 떠나고, 민석은 빈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선우가 심었던 씨앗이 싹을 틀었다.
작고 연약한 초록 잎.
민석은 그것에 물을 줬다.
"잘 자라라." 그가 속삭였다.
15. 가을, 다시
또 가을이 왔다.
민석은 칠십삼 세가 되었다.
무릎은 더 아팠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옥상 정원의 토마토가 또 익었다.
김 여사는 여전히 밝게 웃었다.
민석도 함께 웃었다.
어느 오후,
민석은 혼자 옥상에 앉아 있었다.
석양을 바라봤다.
붉고 황금빛 하늘.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위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이렇게, 해가 지는 걸 보고,
바람을 느끼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토마토 하나를 꺼냈다.
오늘 따온 것이었다.
작고,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베어 물었을 때,
맛은 완벽했다.
달고, 새콤하고,
생생했다. 삶의 맛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민석이 중얼거렸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민석은 미소 지었다.
그날 밤,
민석은 거울 앞에 마지막으로 섰다.
"민석아." 그가 말했다.
"고마워.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거울 속의 노인이 웃었다.
주름진 얼굴,
하얀 머리,
반짝이는 눈.
"너는 충분히 좋은 삶을 살았어.
완벽하진 않았지만,
충분했어.
그리고 그걸로 됐어."
민석은 불을 끄고 침대로 갔다.
베개에 머리를 댔다. 편안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우리 모두 깨져 있다.
하지만 그래서 빛난다.'
그리고 잠들었다.
깊고, 평온한 잠이었다.
에필로그
십오 년 후.
스무 살이 된 선우는 할아버지의
서랍을 정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평온하게, 잠든 채로.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봉투가 나왔다.
'선우가 스무 살이 되면'이라고
쓰여 있었다.
선우는 편지를 펼쳤다.
할아버지의 글씨였다.
떨리는 손으로 쓴, 정성스러운 글씨.
그는 편지를 읽었다. 한 줄, 한 줄.
눈물이 났다.
하지만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완벽할 필요 없어.
그냥 충분히 좋은 삶을 살아.'
선우는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가 속삭였다.
창밖으로 석양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그 석양.
선우는 일어나 옥상으로 갔다.
할아버지의 작은 정원은
이제 아빠가 돌보고 있었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선우는 하나를 따서 베어 물었다.
달고, 새콤하고,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좋았다.
그리고 그걸로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