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2장 8-14절
설교제목 : 시험하는 자와 시험 받는 자
실험의 결과물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요즘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주 문학계의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강씨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분은 모든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였습니다. 전쟁 속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데 축하잔치처럼 기자회견을 열 수 없어 간략하게 출판사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사상과 삶이 여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의 그런 정신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그 작품세계를 열어젖힌 동력인 듯 합니다. 노벨상 심사위원은 그녀를 노벨문학상 선정자로 뽑힌 이유를 설명합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 강렬한 시적 산문을 남긴 한국 작가 한강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다.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했다.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고리에 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다.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 녹아있는 시적이고 실험적인 혁신가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1970년에 태어나 1993년에 등단하여 끊임없이 저술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만의 삶의 궤적을 따라 만든 값진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30년 가까이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흘러간 자에게 주어진 보상일 것입니다. 자신만의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다보면 그 결과물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삶의 궤적이 만든 값진 실험의 결과물들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25년의 긴 기다림을 통하여 때로는 실망도 하고 의심도 하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기쁨이란 이름의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집을 떠나서 낯선 모험 길에서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며 믿음의 조상이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곧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로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예로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표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4:13)
여기에서 믿음이란 절대의존의 상태를 표명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단순히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의존하듯 절대적인 의존적 정서로 묶여 있는 것으로 착각할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그러면 대단히 믿음이 건실해 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의존 감정을 믿음이라 칭하는 것은 불완전한 정의입니다. C.G. 융은 《인격의 발달》에서 믿음의 심리학적 의미를 진술합니다.
인격의 발달은 괴물을 부화하는 것 또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법에 대한 신실함을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 내가 선택한 ‘신실(fidelity)’이란 말은 신약성서에서는 피스티스(πιστις)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믿음(faith)’라는 말로 잘못 번역되었다. 그것은 ‘신뢰’(trust) 또는 ‘신뢰로운 충성’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의 법에 신실하다는 것은 이 법, 즉 성실한 인내와 확실한 희망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종교적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 하는 태도인 것이다.
[CW.17, 인격의 발전, paras.295-296.]
믿음이란 신뢰로운 충성이란 뜻입니다. 마음이 분열되지 않고 가지런히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충직한 신뢰로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길을 가다보면 우리는 그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와 시험받는 자
모든 것이 충족된 아브라함의 삶에 또 하나의 시험이 들이닥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에 보시려고 부르십니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청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대단히 역설적인 하나님의 모습과 마주하였습니다. 이삭을 통하여 셀 수 없는 후손이 날 것임을 약속하고나서 이제는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라고 기록되지만, 이런 구절로도 납득할 수 없는 역설적 특성입니다.
당시 맏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은 셈족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들의 신에게 드릴 최고로 기쁜 경배로 간주되었습니다. 미가서에서도 이런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허물을 위하여, 즉 그들의 영혼의 죄로 인하여 그들 몸의 첫 열매인 맏아들을 드리는 것이었다(미 6:7).” 이것은 전형적인 고대신들이 인간을 향해 요구했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명칭이 바뀌는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1절은 하나님, 원어에서는 ‘엘로힘(Elohim)’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11절부터는 ‘주님의 천사’ 14절에서는 ‘여호와이레’, 주님, 즉,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성서비평학자들은 E문서와 J문서가 성서에 결합되었다고 진술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그대로 경험 심리학적으로 읽어가면, 하나님의 변형, 곧 신의 변형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어서 더 이상 이삭의 희생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두가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원시적인 초기의 엘로힘 하나님과 분화되고 자애를 가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시험하는 자가 시험받는 자를 통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 신학적 입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행위 혹은 작용을 통해서 인간이 이해될 수 있지만, 전체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늘 숨겨진 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포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작은 부분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역설적인 하나님, 하나님의 변환과정에 대한 정신적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무자비한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모습, 그 이름이 변환된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잔인하고 무섭고 무자비한 얼굴을 드리밀고 나타날 때, 우리는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부과된 시험을 기꺼이 받아들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시험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은 우리 안에 태어나시고 새롭게 변환됩니다. 우리 밖에서 안에서 다가오는 이런 신성한 충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적 변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 개성화된 인간으로 여정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희생
아브라함이 그런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아무런 고민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출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일찍이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부터 8절까지 긴 절을 할애하며 아버지의 고통스런 과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아이가 다칠까봐 위험한 물건인 불씨와 칼은 자신이 들고 갑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서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아이는 드릴 제물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지만, 아버지는 하나님이 준비해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진짜 답변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걸어갑니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가지 깊은 침묵이 내려 앉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말없이 행동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아버지의 심경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긴 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역설 속에 빠진 인간의 전형입니다. 때로 마음 속에서는 눈물로 저항하고 있지만, 그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부과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침묵 속에서 그저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내적 갈등과 역설적 모순의 상황을 넘어서 힘들게 진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 위에 아들을 묶고 죽이려고 했을 때 천사가 그를 다급하게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말합니다. 그리고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을 잡아 아이 대신 번제를 드립니다. 교부들은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숫양을 유대인들이 씌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제물로 바쳐진 예수로 연상하였습니다. 결국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이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삭은 자신이 바쳐져야할 숲인 희생의 장소로 스스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이런 제물로 바쳐진 이삭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의 가치를 모든 인생에게 가장 진보된 인격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과제를 세상에 수행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하셨듯,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는 위치 놓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과제를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자아의 팽창적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의식적으로 행해지만, 스스로 기꺼이 짊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생이 됩니다. 자아가 그런 과제를 받아들일 때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파괴적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높은 목적와 삶의 가치에 희생해야하는지를 잊은 채,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지나친 자기애적으로 이기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수단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기꺼이 하나님이 부과한 과제를 받아들임으로써 희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조금씩 변화시켜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