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풀역사문화 탐방길에서
3월 23일 (사)질토래비(이사장 문영택)가 주관하여 진행하는 한수풀역사문화 탐방 길에 참석하여 나의 어린 시절 고향의 향수를 느끼며 또 4·3이라는 아픔을 함께할 수 있었다. 참석자 250여 명에 이르며 한림중학교 학생들과 한림여성농업인센터 등에서 참석하여 힘찬 발걸음으로 옹포 포구에서 10시에 출발신호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여 약 2시간 반 동안 걸었다. 나의 하루 이력서를 써보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부끄러운 글이 될까 염려되어 조심스럽다. 내용은 탐방길 자료집을 중심으로 인용하여 써 보기로 한다.
1. 한림읍의 대략적인 변천사
▷ 과거
石川村(귀덕리), 立石村(선돌마을 대림),
泮村(명월리)으로 이뤄졌었고,
신라진흥왕 때 5도 15현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가 군으로
1153년 다시 군과 현으로 격하 되었으며
1416년 태종 16년에는 제주 3읍 개편 시 귀덕현, 명월현으로
1437년 세종 19년에는 명월방호소 설치
1510년에는 명월진성을 설립
1702년 이형상 탐라순력도에는 명월조점, 명월시사, 비양방목이 그려져 있고
1608년 현촌제 폐지로
1877년 신우면, 구우면 개편에 따라 구우면으로
1928년 면사무소가 옹포에 있다가
1936년 지금에 한림리로 이설
▷ 한림이라는 지명 : 한수풀, 큰 숲(翰林)
대림리 : 한수풀
입석촌 : 대림리
상대림 : 종고실
중대림 : 선돌마을 대림리
하대림 : 한림, 수원, 조물캐
甕浦 : 명월에서-독개-독포-덕포 등으로
2. 출발하는 옹포포구
비양도가 옹포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멀리서 밀려오는 너울성
파도는 옹포포구에 도착하여 흰포말을 일으키며 산산이 부서진다.
방사탑이 보인다. 일행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들이댄다.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 나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서북풍에
시달려 가지는 온통 동남방향을 향하여 자라고 있다.
오늘 걸어야 코스 확인.
역사문화 길에서 만나는 역사의 유래
마대기빌레가 눈에 들어온다.
월계정사도 찬찬히 살펴보고
그리고 명월포를 뺄 수 없겠다.
제주도 9진 중 명월성 빼고 또 무엇을 논할까?
비양도가 바로 앞에 있어 다소
거센바람은 막아줄 것이며
조업을 나가지 않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는 선착장의 작은배들
포구에 대략 250여 명이 모였으며
정자 위에서 문이사장께서
핸드마이크로 안내방송을
출발 직전이니 간단하게 오픈식
참가자 인사소개와 함께
오늘 걸어갈 길을 설명하고 안전을 지키면서
마무리할 때까지 함께하면 좋겠다고
3. 방사탑은 어떠한 기능을 부여하고 있을까?
문이사장께서 시작부터 열변을 ‘吐’한다. 한발 앞으로 다가가서 열심히 듣고 심지어 놓칠세라 녹음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의술이 발달하기 이전문화는 자연과 싸우고 神에 의존하며 부지런히 농사지어야 살 수 있었던 시절 풍수사들 말에 의하여 제주는 한라산 북쪽에는 북방(바닷가)이 허하여 마을에 재앙을 준다고 해서 東西 또는 南北 그리고 男女 등으로 짝을 이뤄 방사탑을 세워서 마을에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다. 옹포리 역시도 바닷가 마을이라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옹포포구에 방사탑인데 재현하여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정감이 가지 않는다.
포구 곁에는 '바른물' 표지석이 있고 물통이 보존되고 있었다.
현무암석 큰 바위에 ‘바른 물’이라는 글과 그 아래 작은 안내판이 있었으며 오른편 벽은 집 울타리에는 바닷바람을 이겨내면서 담벼락에 붙어 모진목숨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바른물이라는 내용을 한림읍 역사문화지에서 찾아보았다. '바렛물, 바릇물'로 바르(바다)+ㅅ(사잇소리)+물이 구성이라고 쓰여있다.
한림읍역사문화지에는 바릇. 바렛으로
요기는 바른으로 되어 통일성이 없다.
지금도 활용이 가능한 것인지?
바른물 앞에서 기념촬영
옹포포구에서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어
4. 최영장군과 명월포
명월포는 해상의 요충지다. 삼별초의 이문경 별장과 김방경 장군 부대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 하고 고려말 1374년(공민왕 23)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최영장군께서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제주는 약 100년 동안 원나라의 탐라총관부 서치로 직할식민지 시대를 맞이한다. 목호들 수천명이 제주여인들과 통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도 하며 살아간다. 1366년 100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목호를 굴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인 1374년 명나라가 말 2천 필을 요구하자 이를 목호들은 반대하였고 결국 공민왕은 목호정벌에 나선 것이다.
최영장군 전적지로 향하는 참가자들
멀리서 날아오다 멈췄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飛揚島
표지석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삼별초 항쟁과 목호의 난 때 상륙전을 치른 전적지. 1270년(원종 11) 11월 이문경 장군은 삼별초의 선봉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 고려 관군을 무찔러 승리함으로써 제주를 점거하게 된다. 그 뒤 1374년(공민왕 23) 8월 최영장군이 314척 전선에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상륙, 몽고의 목호 3천기(騎-말 탄 사람)를 무찌른 격전지 땅이다.
2007년 북제주군 문화원에서 세웠다는 기록도
당시 북제주군 문화원장은
김찬흡 선생님이시다.(나의 고등학교 은사)
최영장군께서 목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표지석이 세워 있다.
다음은 수전소와 수전소 자리에는 해방 후 한림공고의 발상지로
장다리 꽃(갯무)이 피어나는 바닷가
바다 매립지
급 커브를 돌아서 대략 500m 가면 한림항이 있다.
수전소 옛터
한림공고 발상지
성산포에 이어 제2감태공장이 있었던 장소
1953년 한림공고가 개교식을 갖는다.
이곳은 일본인이
1942년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해초류인 ‘감태’로 염산가리, 옥도(沃度)‘를 제조, 생산한 곳이다.
1952년 5월 6일
한림공업고등학원 토건과, 기계과 각 3학급씩 도지사 인가를 받아 한림읍장 김창우를 기성회장으로 추대하여
1953년 4월 7일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4월 19일에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한림중학교 강석용 교장이 겸직을 했으며, 당시 우에무라 제약회사의 공장부지 2,240평, 공장건물 72평, 제1창고 24평, 제2창고 22평, 주택 36평을 수리하여 관리실과 교실로 사용하다가
1954년 현재 한림공고자리로 이설한 것이다.
감태공장 창고로 보이는데 슬레이트 지붕으로개량하여 확인이 필요하다.
196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초가지붕이 함석(양철)으로 교체했지만
비가 올 때는 빗소리가 너무 요란하여 슬레이트로 바꾼계기다.
흉물로 남아 있는 건물
과거에는 화려했겠지만 ~~
과거에 화려한 건물이 현재는 쓰레기 더미처럼 흉물로 전략한
창고건물에서 학교건물로 지금은 버려진 건물로 추락
잘 보수하여 과거의 명성을 찾기 바란다.
아마도 개인소유라 이렇게 방치하고 있을 것이다.
질토래비 일행은 이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잠깐 해설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