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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5.18 때
광주에 내려 왔던
북한
특수군 534
폭풍 군단 우레3여단
부대의 158 명의전사자와
전투 기록 물을
2017년 12월 20일에 올린
참깨 방송에서 들어 보세요
시간 18분 걸린다
1980년은 내가 양구에서
군대 생활 할 때 였다
양구는 소양호 옆에 있다
1980 이니까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요즈음 30 대 전후의 젊은 이들은
이건 뭔대 대한 애국당에 올려 놓고 말썽이 많은데
할 것이다
그 5.18 거짓말로 지금 정부는 정권을 빼 앗아서
붕어 대가리들을 시켜서
나라를 이끌어 갈려고 하니
학교 다닐 때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만 앞장 섰던 인간들을
세워 놓고 하는 짓들이
나라 말아 먹고자 하는 짓들이다
북한의김정은은 34 살로
남한으로 쳐서
아직 취직도 못하는 햇병아리 이다
그 풋내기 한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적어도 50 살은 넘어 되고
시회 생활 경험이 많아야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어 보고
자기가 다스리는 인민들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는데
자기가 뭐 잘나서 자기 맘대로 하는데
멍청한 웃음 거리 이다
왜 70-80 살 되는
나이 많은 자기 부하들이
자기 맘대로 하도록 놔 두는데
뚱띠이 김정은은 가만 되어도
과대 비만으로 뒤지게 되어 있다
소양호 길이는 대충 40 킬로이다
박정희는 정주영과 같이 그 댐을
만드는데 노력 하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전 1973년
그 댐을 완공하였다
댐을 만들고 5년 다음인 1978년에 물이 꽉찼다
우리를 실은 배가 그 때 갔으니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댐의 역할을 거의 모르고 산다
그 댐은 일종의 북한으로 부터의 방어선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 나도 북한은
그 쪽으로 남한을 내려 올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양구는 6.25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내가 군 대 생활 하면서 그 옆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아주머니로 부터
이야기 들었다
그 아주머니의 오빠들이 6.25 전에
강물이 얼마 되지 안았을 때
가끔 소양강을 건너서 다녔다고 하였다
니는 북한강 파로호에도 몇 개월 있었다
그 파견대 몇명 안되는 부대를 담당 하던
선임 하사가 엄청 겁을 주었다
1960 년대 초인가
북한군이 남한에 넘어 와서 화염 방사기로
벙커 안에서 근무하던
우리 군인들을 다 죽였다고
내가 근무 했던 부대에서
대암산에 벙커 만드는 곳에 지원간 곳이 있었다
대암산 너머에 펀치볼이란 마을이
북한과 휴전선 바로 아래 민통선 안에 있었다
미 제10군단장은 1951년 8월 중순 군단 정면
해안분지(펀치볼) 북측 고지군에 연한
작전통제선을 설정한 다음
각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군단예비로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이 해안분지(펀치볼)를 공격하게 되었다.
미 해병 제1사단(배속: 국군 해병 제1해병연대)은 1951년 8월 30일까지 국군 해병 제1연대와
미 제7해병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2개 연대를 예비로 확보한 채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사단이 부여받은 공격목표는
해안분지 북쪽 일련의 횡격실 능선상의
1026, 924고지와
해안분지 북동쪽의 702, 660고지군이었다.
이 무렵 이곳에는 적도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인민군 제3군단이 제2군단 지역을 인수하였으며, 그 중 제1사단이 해안분지(펀치볼) 북쪽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1951년 8월 31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제3대대가 793고지에서 출발하여 월산령에서
전초중대와 합류한 다음 924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9월 1일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는
09:00에 702고지 공격을 재개하여 견고한 진지에서 집요하게 저항한 적을 격퇴하면서 전진을 하다가 백병전 끝에 10:55 702고지를 점령하였다. 대대는 다음날 공격 개시 3일 만에 702고지 전방의 602고지도 점령함으로써 사단목표를 모두 점령하였다.
6.25 이전에는 북한 땅이어서
6.25 끝나고
남한에서 북한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자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세어 봐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그 마을 여자들은 서울쪽으로 올 수
없었는데
오로지 방법은 군인들과 결혼 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끔 결혼도 하였지만
남자들이 여자들 유혹에 넘어가서 사고 쳤다가
집에 와 있으면
여자가 물어 물어서 찾아 오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했다고.
내가 초등학교 5 학년 때 군대 갔다가
제대한 지금의 70 대 후반의 아저씨는
군대 있을 때 고향 옆 마을에서 같이 입대 하였던
사람이 북한군이 몰래 와서 벙커 안에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 사람이
고깃 덩어리 처럼 되어 죽어간 것을 보아서
그랬는지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자기가 보았던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아서 그랬는지
몇년동안 정신병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 하였다
몇년 전 그 아저씨로 부터 그 때의
이야기 좀 듣다가 말았다
내가 처음 근무 하였던 곳은
지금 평화의 댐이 있는 곳에
물자를 실어다 주는 곳이 었다
내가 1979년 초에 소양호로
오면서
나는 그곳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전두환 때
엄청 큰
북한의 금강산 댐을 그 상류에
만들어서 그 곳으로 흘러서 남한 쪽으로 오던
북한강 상류 물을 유역 변경하여
동해쪽으로 흐르도록 만들었다
남한을 물바다 만들겟다고 하여서
남한에서는 평화의 댐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북한의 말을 그 때 믿었겠는가
지금도 거짓말만 흘러 내리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놀러 가는 지역이 되었다
박정희는 1979년 초에 우리 부대 옆을 지나 갔다
자기가 군생활 할 때 인제 쪽에서
근무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양구 대암산 너머의 펀치볼 이라고 한
마을은 6.25 때 미군들이 공중에서 내려다가
보면 펀치볼 술 잔 같이 생겨서
펀치볼이라 불렀다고 한다
내가 박정희가 죽은 10.26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해 추석 전에 양구 근처에 북한 무장 간첩이
나타나서 대암산으로 들어가서
비상에 걸리는 바람에 병력이 몇명 않되는
부대에서 보초가 한거 번에 4 명씩 나가니
하루 저녁에 보초를 2 번이나
나가야 했다
내무반에 와서 4 시간쯤 자면
또 다시 보초 나가라고 깨웠다
그것도 한달정 도 말이지 3 개월 가까이 되니
너무 지루 했다
그래도 실탄은 5 발 밖에 주지 않았다
잘못 하다가 총기 사고 난다고
정말 우리 부대에서 1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헌 병 초소에서 총기 사고가 났다
한 밤중에 "탕!" 총소리가 한방 나서
전 부대원이 긴장 하였다
그 다음날 알고 보니
초소에서 캄캄한 중에 잘못 하다가
총기 사고를 내었나 보다
그리고 그 간첩은 잡지 못하였다
그만큼 훈련된 특수 군인들은 작전을 잘한다.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10월 26일 저녁 뉴스에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에 참석 하였다는
뉴스도 보았다
그리고 삽교천 행사 다음에
바로 서울로 오지 않고
포항 제철소 다음으로 만들 광양만을
둘러 보고 왔다고
박정희 경호실 측근이
유튜브에서 이야기 하는 것 들었다
공양만 제철소의 간단하게 별로 기술은
별로 들지 않는 것을
내가 다니던
부산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부피가 추레라 50 대 분량으로 너무 많아서
부산 다대포로 해서
바지선으로 옮겼다
결국 내가 다녔던 회사는 적자를 못이기고
몇년 뒤 문을 닫았다
또
비상이 연기 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12.12 사태
그러다가 다음해 즉 1980년
5월에 5.18이 일어났다
부대 내무반에 있는 요즈음 20 인치 정도
크기의 테레비에서 자주 광주 소식이 나왔다
최규하 대통령이 헬기 타고
광주 시민에게 호소 하는 내용도 나왔다
그러다가 나는 그해 8월에 제대 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5.18 작전에
군인들이 엠 16 총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죽였다는 것이다
그 다음해 부터는 회사 다니고
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회사 생활 마치고
요즈음은 유튜브가 많이 나오니
여기 저기 들어 보고
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광주 문방구 아지매 이야기도 들어 보고,
광주에 특수군으로 내려갔던
문병소 중사 이야기도 들어 보고
통신대대장 이야기도 들어 보고
그런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군대에서훈련도 받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 그 때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 차리기 힘이 든다
지만원은
육군 사관학교 졸업 하고
월남전에도 참전하고
그리고 미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한 베테랑이다
그리고 20 년 가까이 5.18을 연구 하였으니
대한민국에서 지만원 만큼 군대 생활에서
환하게 잘아는 사람은 잘없다
대한 민국 군인들은 군대에서
진급할려고만 애쓴다
군인 경험도 북한 군에게 따지면
남한 군인은 거의 10년 안에 제대 다 한다
북한은 직업이 군인이니
어떻게 북한 군인들을 잘 알 수 있으리요
5.18 때 남한의 특수군들은
5.18 때 남한에 왔던 특수군들은 1953년 -1948
태어나서 5.18 당시 29살-32 살의
특수 훈련을 받은 북한군소위나 대위 같은
장교 출신경력 13년 이상의
직업 군인인데,
남한의 광주 진압 하러 갔던
특전사는약 26-30 살의 군인 경력 10년 미만의
하사관 들이나
장교 몇명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허술 했던 부분은
광주는 재대군인들과
대학생이 었던 것으로 착각 하였기 때문에
광주 에 투입 되었던
많은 특전사 군인들이 죽어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데모데 진압으로
실탄을 지급 받지도 못해서
김대중 빨갱이들의 속임수에
속았던 것이다
전두환은 그런 빨갱이들이 섞여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보고 받지 못하여서
왜 하필 광주 교도소를 5 번이나 공격해서
그 안에 잡혀서 감옥 살이 하던
광주 교도소를 습격 하였는가
그것 하나 만이라도 광주는 민주화를 가장한
폭동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장기로 갇혀 있던
빨갱이들을 다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것도
비전향 장기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전두환은
결국
김영삼 시절에
노태우와 같이 감방에 가게 되었다
덕분에 2006년 쯤 산악회 따라서
설악산 갔다가
대청봉으로 봉정암- 백담사로 내려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봉정암은 백담사의 암자여서
조그마한 줄로 알았다
엄청 규모가 크다
백담사에서 걸어 오려면
약 2 시간 걸린다
돌길로 계속 올라 와야만 한다
그래도 찾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봉정암 뒤의 큰 바위는 엄청 멋있다
유명 정치인들도 그 곳에 왔다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백담사에서 버스 타는 곳 까지 다시 1 시간 정도 걸어서 내려 와야만 한다
백담사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었다
전두환 때문에 유명해 졌다
1967
그리고 김일성은 자나 깨니 남한 때려 부수겠다고
박정희 죽일려고 1967년 1 월의 1.21 사태
1968년 삼척 주문진으로 약 120 명의 무장 공비 침투
등등
박정희가 자유체제로 다스리는 남한이 북한 보다
더 잘사는 꼬라지를
볼수 없었다
이리역 폭파 사건, 강원도 사북 탄광 사태.등등
야단 치다가 늙어 뒤져 버렸다
그 런 썩어 빠진 대가리 통을 받아 가려는
인간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뒤지기 전에
그리고
앞에서 일하는
조원진, 변희재, 정미홍, 조사철
서석구는 힘을 합하도록 노력 해야만한다
변희재, 저미홍은 서로가 맞다고 우기지 말고 조금씩 물러서서 의견을 모아야
대한 애국당이 잘 될 수 있다
변희재 이야기 들어 보면 변희재 이야기도 맞고
정미홍 이야기 들어 보면 정미홍 이야기도 맞다
두 사람 사이의
좋은 공통점을 만들어야만 한다
다른 당들이 서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싸울 때
대한 애국당이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은 때
부엌에 가서 며느리 말을 들어면
며느리 말이 맞고
바에 와서 마누라 말을 들으면
미누라 말이 맞다고
우리 집에도 4 명이 같이 살다가
큰에는 결혼 해서 나가서 산다
4 명의 의견이 같을 수 없다
다 각각 아니면 2:2 1:3 으로 나누인다
회사서도 그렇고
어떤 모임에서도 긇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좋은데
언제나 좋은 지도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살아 가도록 노력 하여야 한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
책에서 김일성은 가짜 이름이고
실제 인물과 다르다는 것으로 배웠는데
정미홍- 조사철이 밝히는 사진으로 이해가 갔다
해방되고 1945년에 이승만은 70살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박사, 그리고
미국으로 간 이유가 고종 황제가 절못 한다고
만민 공동회에서
서재필의 제자로 따지다가
서재필과 이승만은 미국에 가서 독립 하였는데
김일성은 그냥 햇 병아리로 북한의
김성주를 김일성이라 속여서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는데
요즈음은 이승만은 독재자로
마구 잡이 엉터리 교육으로
다 거짓으로 가르키고 있다
내가 국민 학교 들어갈 1961 년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록 하였다
우리 엄마 아버지도 국민학교도 졸업 하지
못 해서
한글을 잘 읽지 못하였다
왜 그랬느냐고요?
고향의 국민학교는 1929년에
4 년제로 문을 영었다
그런데 아버지 나이가 10 때 즘 1 회로 들어 갔는데
당시에는 월사금으로 벼 몇되를 낼 형편이 못되어서 그만 두었다고 아보지가 이야기 하였다
그저 밥이나 먹고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머슴 사는 사람도
수두룩 하였다
해방 될 때 아버지 나이가 25 살 이었다
그리고 일본 천황이 보낸 총독이 다스리던 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니
독재가 뭔지를 어떻게 알았으리요
맨 처음 대한민국 헌 법을만든 사람들도 나른대로 여기 저기서 한법을 연구 해서 만들었겠지요
북한은 소련이 시키는 대로 김일성을 앞세워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고
머리에 든 것이 없는 햇병아리 선생들이니까
김일성은 33살 간도 용문 중학교 졸업생이었다
빈대파들은 당신들이 분열되어
판 깨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손석희는 그만 놔도도 됀다
제풀에 뒤질지 모르니까
박근혜는 제주 4,3 폭동을 그냥 넘겨 주다가 보니 빨갱이들이 더 설쳤다
전두환 처럼 잡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것을 경험 삼아서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힘을 기를 수 잇는
기회가 되었다
전화 위복 이라고 해야 하는지
무조건 태극기만 흔든다고 나라 사랑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야 나라가 잘 될 수 있는지
연구를 해야 한다
어째던 이제 박근혜는 임기 끝나가고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월등하게
이길수 있도록 노력 해야만 한다
서울 시장과 각 구청장 그리고 각 지역구
시장이나 단체장 마다
대한 애국당 당원들이 많이 당선 되도록
노력 하여야만 한다
전두환 대통령 되던 해에
내가 군에서 재대 했으니
그 당시 군대 생활 하였던
사람들은
기억이 많을 것이다
특수군은 보통사람
찔러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다
적 후방에 침투 하는
특수 훈련이다
나도 논산 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 받고
후반기 교육 받을 때는
특수군 훈련 하는 것도
가끔 보았다
보통 훈련병 보다 엄청 강하게
훈련 받는다
한번은 식당에서
특수 훈련 받던 사람이
취사장에서 일하는 방위병을
좀 팼는가 보다
그 부대 교관이 나와서
의자에 앉혀 놓고
여러 사람이 보는대서
막대기로 몇차례 때 리는 것도
보았다
그 대신 그 당시 밥은 잘 주었다
그런 훈련을 받고 광주에 갔던
나와 비슷한 나이의
특수군들에게
온갖
나쁜 죄를 다 뒤집어 씌웠다
물론 당시
폭도들을 진압 하도록 한 것이
전두환 이었다고 믿었으니까?
당시 전두환은 군인들을 통수할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박정희를 대신 해서
남은 기간을 통치하고 있었다
각종 나쁜 유언 비어는
북한 특수군이 저질러 놓고
남한의 전두환에게 다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이 앞장 서서
북한의 특수군을 불려 들였는데
자기는 민주화 투사라고 그런다
거짓말은 다 들통 나게 나게
되어 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것은
유튜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알수 있다
2016년 7월의 광주에 살았던
김규철이야기도 들어 보아야
한다
국회에 있는 사람들은
군대도 가지 않았던 사람도 많고
특히 특수 훈련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북한의 특수군
실력을 알 수 가 없었다
나는 제대 하고 예비군
훈련 받으면서
광주 시민군들이 제대 군인들과 시민들이 무장한 것이러고 하지만
제대 군인들이 그렇게 하질 못한다
물론 선동에 이끌려
시위 현장에 나온 사람들도
많았겠지
그런 시민들에 섞여서
북한 특수 군인들은 자기들만
알아 차리도록 비표를 하고서
다녔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25 때 지리산 빨치산 후 손들 가운데
공산당을 좋아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가 고향에서 한번은 엄마 아버지 한테 놀러온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만 바꾸면 어떻한다고 하였다
6.25 때 고향 면 사무소는
인민군들이 들어 와서 설쳤고
면 사무소에서 일 하였던 사람들은 도망 갔다가
유엔군 인천 상륙 자전 다음에
다시 사람들이 바뀌고
공산 정권 하에서 일하였던
많은 사람은 죽었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까
요근래 일본을 욕하는
사람 많지만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정직하다
옆에 사는 할아버지도
91 살 인데
국민학교 졸업하고 일본에가서
공부 하다가
해방되고 나왔는데
그 때 부산은 엄청 지저분 하다고 하였다
나도 10 년전 전쯤 일본
후쿠오카에
1 박2일로 갔었다
우리나라 처럼 차를 아무대나
주차하는 것은 없었다
며칠 전 청주 화재 사건도
주차 문제 많았다지요
왜 그런가
거짓말도 얼마나 한국 사람들은 많은지
내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본에 한 번 갔다가 오세요
비석은 청진역 북쪽 600 미터
해발 70 미터의 낙타산 기슭에
있었다가 몇년전 공개 되고
그 후에
6.25 전사자 비석으로
바꾸어 버렸다
(비석은 청진역 북쪽 600 미터
해발 70 미터의 낙타산 기슭에 있다
북위 41도 47분 54.3초
동경 129도 47분 59.3 초 지점에 있다
묘지는 여군 왼쪽
남자 오른쪽에 있다
전사자 명부 및 전투 기록장 접수 김주호 박사 팀
세로로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 묘
비석 왼쪽 세로로 두줄로 : 사람들이여 ! 걸음을 멈추고
용사들의 불멸의 애국정신을 추억하라
피로써 조국을 지킨 인민군 렬사들의 혁명 정신과
찬란한 위훈은 후손만대에서 길이 빛나리라!"
(158명의) 동무외 삼백삼십이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
오른쪽 끝에 세로로
"여기에 청춘의 고귀한 심명을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님일세"
북한 폭풍 군단 우레 3 여단이 한 일
1.1980년 4월 28일밤 함남 신포항 출발
29일 남포 도착
2.군단장, 군단 정치 지도원 등이 마중나옴
3. 1980년 5월 2일 새벽 3시 잠수정 이용 남포 출발
잠수정 크기에 따라 승무원 3-10명
특수군 3-10 명 승선
다음날 새벽 2시 전남 영광군 염전면 두우리
백바위 해변 상륙, 미리온 대기자 및 안내원을 따라
1차 집결지 무등산 X 호 지역에 모임
4. 육지로 침투한 자는 강원도 철원군 땅굴로 침투후
전주 부근 대둔산에 야영
땅굴 출구에는 노인이 대기하고 있었음
1980년 4월 28일
5월 21일 오전 8시 : 20 사단 지휘부 차량 공격
아세아 자동차 공격
장갑차 6 대
군트럭 305 대
버스 100 대
고속 버스 5 대 탈취 및 운행
군 부대 무기고 등 40(47) 개
4. 전남 도청 점령 작전
5. 광주 교도소 5 차례 공격
6, 장흥 교도소 공격
8. 전남 도청 지하실에 8 톤 트럭 1 대분
(약 2,600 상자)폭탄 설치
9. 잔혹한 시민 학살
전사자 등 총 490명
475명 광주 근교 암매장
11 명 망월동 묘지
4명은 귀환중 사망
(조선무력부 534 부대) 폭풍 군단 우레 3여단은 참전자 300명중
생존 귀환자 57명(이중 부상자는 46명)
( 사망 : 165 명 , 행방 불명자: 78 명 )
4. 참가자 관리 부대
534 부대에서 전사자 150 명
108 부대에서 전사자 112 명
806 부대에서 전사자 74 명
직전종결
1980년 6월 19일
8월 1 일자로 인민군 렬사묘 조성
2013, 2014년은 인민군들의 열사 비석은
6.25 참전 묘비로 바꿈
(2012년 남한에서 비문 사진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대외비 한함) 남조선 통일 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한
조선 인민군 열사자료 조선무력부 534 부대 (1980. 8. 1)
더 많은 비문 자료는 방송 참조
(대외비 한함) 남조선 통일 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한
조선 인민군 열사자료 조선무력부 534 부대 (1980. 8. 1)
번호 성명 난 곳 생년 월일 입대 년도 전사한 연월일 군사 칭호
1 홍성표 청진시 송편구역 강덕동 4반 1950. 1.18 1967. 7.26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2 김석준 청진시 송편구역 송평동 2반 1951 2. 6 1968. 7.30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3 한창준 청진시 수남구역 어항동 3반 1948.12. 4 1965. 9.30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좌
4 오부진 청진시 청암구역 청암동 5반 1950. 5. 2 1967. 9.17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5 김윤선 청진시 포항구역 역전동 6반 1949. 8.10 1966. 7. 5 1980.6 19 조선 인민군대위
6 김웅수 청진시 성편구역 성암동15반 1949. 9. 9 1966. 8.14 1980.6 19 조선 인민군대위
7 김국식 청진시 송편구역 송편동 7반 1948.11. 6 1965. 9.17 1980.6 19 조선 인민군중좌
8 김한수 청진시 포항구역 역전동 12반1947.11. 3 1964. 8. 9 1980.6 19 조선 인민군상좌
9 서대석 청진시 송편구역 사구동 3반 1950. 6. 6 1967. 7 4 1980.6 19 조선 인민군중위
나머지 인원 비석에 새겨진 158명 명단 참조
1. 김석준 한창준 오부진 김운선 김응수 김국식 김한주 서대석 우준선 조영규
2. 염종식 유해윤 김종돈 천수만 유리극 김귀옥 서진남 김창록 김영석 김수전
3. 김용성 전순돌 리계찬 림한석 김진우 박원용 황송열 김동철 리진석 강원철
4. 최귀환 리창용 송원백 현태룡 박경화 김수근 김인준 방동환 전성규 남창섭
5.강일권 리봉섭 주창동 김인현 윤장우 리정부 김은태 최은신 김태환 김명규
6.리동근 김승미 리동철 리양수 허명신 염철남 염홍식 리정환 최철순 염근원
7.김학준 조기림 리숭봉 림용현 주장실 최진숙 백창덕 김두표 허죽순 최윤일
8.김길만 김일춘 리신전 김귀삼 리손직 박려원 리창근 리광주 박경준 김한옥
9.김영학 리인걸 림대식 박재준 리학권 염인순 홍인준 최리순 염운신 리광춘
10.라하권 리종문 박광용 림종문 노훈문 황명환 김두관 임원표 배은호 최영도 서용규
11.김기성 최재복 김원형 김종환 최봉준 최규학 김상혁 김기남 현원식 김옥현 유풍준
12. 김영식 김황로 김화룡 리순희 김종순 백기준 김길선 김우철 박일진 리은지 김종린
13. 김장복 최갑진 박두길 리도화 김현룡 안경찬 최도진 천지춘 김영호 리일호 전기천
14. 마진선 홍종묵 신안석 김허준 김월빈 백순옥 리춘식 류길산 김인도 김옥린 김동준
15 김영화 윤성화 림영훈 최중선 한승택 차준옥 김병천 김영옥 김두천 박은학 조영학
16. 홍성표 리진혁 (총 158멍)
530 지오피 총기 사고도
다시 조사해야 한다
북한군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혀서 있는
김동민 씨는
감옥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김동민을
최순실 보다 먼저
석방 시켜야 한다
아시안 게임 마치는 날
김정은 전용기로 서울에 와서
김관진 만난 것
다시 조사 해야 한다
김동민 일병 사건도
그 때 벌어진 일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지만원이 말하기를
박근혜가
제주 4.3 폭동을 역사 공부도 안하고
판정 내린 어리석은 판단이다
지만원은
육군 사관 학교 졸업하고
월남전 참전하고
미국 가서 해군 대학에서
공부하고
5.18에 대하여 20 년 이상
공부한 사람이다
조갑제는 군대나 갔다 왔는지
모른다
자기가 특수군 경험이 없으니까
생각 나는 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기가 특수군 경험이 없으니까
홍준표도 그렇고
특수군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하는
정치 꾼이다
정치꾼은 정치나 하면 되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될 때 재대 하였다
그해에는 참 비가 많이 와서
온 논에 깜부기들이 많았다
우리 집 논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3 공수 옆 양구에서 있어서 어느정도 안다
세월호도 그렇고
맘 내키는 무식한 사람들의 울부 짖음이다
1980 년대는 대기업도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