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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천불천탑의 미스터리 - 전남 화순 운주사를 찾아서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나라였으며 잠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가 탄압당하기도 했지만 불교는 가히 국교라 칭할 수 있을만큼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이다. 그때문인지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는 이름난 사찰들이 평지에 산속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런 사찰들은 대부분 조계종이나 천태종 원불교 소속의 사찰들이고 특정한 가람 배치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운주사, 구름이 머무는 절, 또는 배가 움직여가는 절이란 가진 이 사찰은 그런 일반 사찰의 가람 배치 양식과는 완전히 벗어난 파격적 사찰 양식을 보여준다.
운주사의 비밀을 밝혀 보다.
1금당 1탑, 1금당 3탑, 3금당 3탑 등 전통 가람 배치는 양식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인데 유독 운주사는 왜 이런 전통 양식을 벗어나 마치 장난을 쳐놓은 듯 사찰 이곳 저곳에 아무렇게나 탑과 부처를 뿌려 놓은 것일까? 혹시 이러한 무질서한 배치에도 일정한 배치의 법칙은 있는 것은 아닐까? 운주사를 어떻게 무슨 이유로 건립한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오늘은 바로 그 운주사에 얽힌 여러가지 설화 및 전설들을 살펴보면서 운주사의 신비에 대해 알아보러 전남 화순의 운주사로 떠나는 기행이다.
전남 화순 지명만 보면 사실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낯선 이름이 바로 화순이다.
맨 앞의 사진에서 본 풍경을 지도로 만들면 이렇게 되어 있다. 주요 탐과 불상들의 배치를 보면 정말 종횡무진이란 이런 거구나 싶을 것이다. 특히 높은 언덕배기 꼭대기에서 다른 곳의 돌을 옮겨워 아슬아슬하게 탑을 쌓아놓은 것을 보면 그냥 대충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 치밀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약 3년전에 한가한 저녁에 운주사에 가보았다. 주변에 변변한 관광시설도 없어서 약 30분가량 깜깜한 시골길을 꼬불탕 꼬불탕 겨우 겨우 찾아갔더니 이미 출입은 끝나고 그 앞에 매점이나 음식점 몇곳도 모두 문을 닫아 동행한 후배와 한참 다시 가까운 읍내라도 나가야 하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금 내려와 한 음식점에서 민박을 부탁하니 방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막걸리 한잔 먹고 1박을 했다. 계획없이 낭패를 볼 뻔했지만 그래도 그런게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ㅋㅋ
운주사의 절입구
사찰에는 보통 일주문이 있고 사천왕문이 있고 해탈문이 있고 그렇게 절 안으로 들어서게 마련인데 운주사는 첫인상부터 완전 파격이다. 높다랗게 서있는 9층석탑과 석불 몇기가 절 입구에서 절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렇게 둘러친 담장도 절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도 갖지 않는 것이 또한번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큰 가르침 중 하나가 무엇이던가? 바로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 이세상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원효의 일체유심조이기도 하다.
부처와 마구니가 둘이 아니고 안과 밖이 둘이 아니며 성역과 지옥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 이렇게 아차싶게 넘어가면 악한 마음에 치우쳐 악마의 일을 하고 또 마음 하나 곧게 세우면 천 사람 만사람에게 선행을 쌓아 적선을 하는 그런 세상의 이치를 가만히 설법하고 있는 듯하다.
운주사 9층석탑
운주사 9층석탑은 우리가 접해온 일반적인 탑의 형식 중에서 원나라의 양식영향을 받은 고려탑의 모양을 비교적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석탑과 석불들의 조형시기가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이 사찰은 삼국시대말이나 고려초에 창건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부분의 견해이다.
운주사는 언제 지어졌는가?
도선국사
도선국사는 통일신라말의 승려로서 고려 태조 왕건과 깊은 인연을 가진 승려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곳의 역사문화기행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초로서 중국의 풍수지리와는 달리 길지와 흉지를 나누지 않고 흉지라면 흉함을 막고 길함이 덜하다면 고쳐서 길하게 만드는 이른바 비보풍수의 시조로서 유명한 일화를 많이 가지신 스님이다. 그리고 도선비기라고 하여 태조 왕건에게 군사전략이나 국가의 군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학습시킴으로써 왕재인 왕건의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성인이 될 무렵 찾아가 제자로 맞아 들여 왕이 되도록 많은 가르침을 준 스님이 바로 도선국사이다. 운주사의 설화는 이 도선국사가 바로 운주사를 창건했다고 말한다.
도선국사 창건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로 유명한 스님이니, 당연히 운주사도 풍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세운 이유에 대해 조선시대에 쓰여진 ‘조선사찰자료’라는 책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형은 떠가는 배와 같으니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요, 월출산과 한라산은 그 배꼬리이다.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며, 영남의 지리산은 그 삿대이고, 능주의 운주는 그 뱃구레(船腹)이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물건으로 그 뱃구레를 눌러 주고 앞뒤에 키와 삿대가 있어 그 가는 것을 어거해야 그런 연후에 솟구쳐 엎어지는 것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건립하여 그것을 진압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 아래로 서리서리 구부러져 내려와 솟구친 곳에 따로 천불천탑을 설치해 놓은 것은 그것으로 뱃구레를 채우려는 것이고 금강산과 월출산에 더욱 정성을 들여 절을 지은 것도 그것으로써 머리와 꼬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최완수 저, 명찰순례)
글은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창건한 이유와 그렇게 많은 불상과 불탑을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운주사의 이름은 구름 운 머물 주 절 사에서 운주사이지만 원래는 움직일 운 배 주 절 사에서 운주사였다고 전하는 전설이다. 이는 운주사 창건의 여러 설화 중에 하나이며 내용은 갖지만 창건한 승려가 각각 다른 설화도 이 지역에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정확히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상들은 이렇게 절 입구의 한켠에 따로 모아놓았다. 운주사는 이런 풍경 때문이지 사찰이라기 보다는 탑이나 불상의 야외 전시장같은 느낌을 준다. 다양한 불상들과 새로 조성해 가져다 놓은 불상들의 다양한 모습이 흥미를 자아낸다.
그밖의 운주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온 절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 다음으로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운주사가 하늘의 별자리와 불교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하늘의 별자리를 땅에 옮겨 오는 형식으로 조성된 별자리설에 의한 창건설이다. 이는 98년쯤에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어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다시금 부정되기도 하는 가설이다.
어느 천문학자가 제기한 가설로서 운주사의 칠성바위에 착안하여 이것이 칠성신앙이 있던 시절에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연치 않게도 칠성 바위의 각 위치에 있는 바위의 지름이 별의 밝기의 정도에 따라 크고 작다는 것이 정확히 북두칠성과 일치하며 우연히 칠성바위를 중심으로 가장 밝은 주위의 별자리 위치와 칠성바위와 그 주위의 석탑 석불들의 위치를 대조해 보니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더라는 학설이었다.
고래 토템 등 민간 신앙에 기반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소개할 운주사 관련 설화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고래 토템 신앙이나 태양의 여신이나 바다 용왕신 등 비록 불교의 불탑 불상의 양식을 빌어오기는 하였지만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민간 신앙 등의 상징 등이라는 학설로서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부처의 상징인 연꽃 문양 대신 교차문이나 기타 기하학적 줄 무늬같은 것이 새겨진 불상 석탑 등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불교의 형식을 빌어 무언가 다른 신앙 대상이나 신성시 한 그 무엇을 형상화 한 것일 뿐 결코 전통적인 불교의 사찰은 아니라는 가설에 의한 학설이다.
가령 위의 와불과 아래의 고래 어미와 새끼의 사진을 잠깐 비교하며 감상해 보시라. 무언가 같은 이미지가 연상된다면 고래 토템이 있던 전남 해안 지역의 고래 토템 사상에 기인한 뱃사람들의 숭배 대상으로서 고래를 부처로 형상화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울산 암각화에 나타난 고래 형상을 단순히 기하무늬로 하면 석탑 등에 새겨진 줄무늬, 마름모 무늬 등의 이상한 비불교적 무늬 등이 보여주는 고려 관련 문양임을 알 수 있다는 학설, 그리고 장보고 시대의 용신 사상에서 바닷사람들이 뱃길을 안정시키려 해 배에다 모시고 다니는 신상이 들어있는 감실의 모습이 바닷사람들의 상여의 모습, 그리고 이 운주사의 석조불감에서 볼 수 있는 감실의 형태로 남아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출처 : 오두의 역사산책>
처음에는 설마하겠지만 나름 오랜 비교 연구와 나름대로의 조사결과와 자료조사를 토대로 설정된 가설이니 만큼, 운주사의 현재 모습을 단순히 불교에서만 찾지 않고 민간신앙과의 결합이라는 포커스로 들여다 보면 매우 그럴 듯한 추정과 고고학적 상상력의 결과가 낳은 창의적 해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 다음과 같은 제목을 검색해
운주사(雲住寺)는 신라시대 항해자들의 고래장 상여행렬
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게시글을 한번 필독해 보시기를 ㅋㅋ
운주사의 전역에 다양하게 있는 천불 천탑
다양한 석탑들
물론 운주사에 탑이 천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정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다고 가정할 경우 보통은 천불이나 천탑을 채우기 위해 조성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천불천탑으로 부른다.
우선 운주사 경내와 주변에 있는 다양한 석탑들을 조금씩 알아보도록 하자.
운주사에는 통일신라시대말 또는 고려 초중기 양식을 보여주는 7층 석탑도 있으며 사진 우와 같이 6층석탑도 있다. 짝수를 쓰지 않고 홀수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음양오행의식에도 벗어나는데 왜 6층의 탑을 이렇게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좁은 언덕배기 공간에다 세워야 했는지 사람들이 추정하다 보니 혹시 일정한 설계도에 맞게 억지로 세운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하여 별자리를 따라 탑이나 석불을 세웠다는 가설을 가정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에 의한 기운의 보강이나 보전하기 위한 배치라는 가설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본다.
쌍교차문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탑에는 보통 불교 관련 문양들이 도들새김 되는 경우가 많다. 불상, 사천왕상, 팔부신중상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장식으로 연화문 등이 새겨지는 것이 보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운주사의 탑에는 희한하게도 엑스자 두개가 떡 하니 탑을 장식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장식없이 단순화시킨 단순함의 미학을 위해서라고 그냥 평가해 버리기엔 파격도 지나치다 싶은 파격이라 사람들은 과연 운주사의 석탑들이 부처를 나타내는 불탑이 맞는가라는 의문을 당연스레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일명 호떡탑
호떡을 여러층 쌓아 놓은 듯한 탑이라고 해서 일명 호떡탑이라 불리우는 탑
탑은 부처의 사리나 부처의 설법인 불경 등을 봉안하는 장치이며 탑은 그대로 부처로 연결되면서 모두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운주사의 탑은 고구려 신라 백제를 통해 처음에는 목탑이었다가 점차 석탑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가 지켜온 여러 가지 탑 관련 양식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듯이 자유분방하게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일명 실패탑
마치 실패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애칭이 실패탑인 탑의 모습이다. 정말 실패모양을 담지 않았나? ㅋㅋ
일명 항아리탑
마치 항아리를 층층이 쌓아 올린 듯 생겼다하여 일명 항아리탑이라고 불리는 탑이다.
탑의 상부가 없어져서 정확히 몇층의 탑이었는지 알 수 없음으로 해서 대웅전 앞 다층석탑이라고 명명된 탑,
다양한 석불들
어떻게든 직접적인 비를 피해 주기 위해 가능한한 큰 바위 밑이나 들어간 곳에 불상들을 세워 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천불 천탑의 전설이 애처로운 것일까? 이 곳 운주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천불천탑을 채워보고 싶은 듯 틈만 보이면 어느 곳이든 손 수 작은 돌탑들을 세우고는 한다.
자연에 그냥 방치된 듯한 느낌의 불상들
비록 그냥 방치되어버리고 쇠락한 종교의 마지막 자락을 엿보는 듯 아스라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처연함을 잠깐 꾹 누르고 들여다 보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설지 자연도 아니고 인공도 아닌 그런 어떤 경계를 볼 수 있는 곳이 혹시 운주사라는 공간이 아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불상들이 걸치고 있는 장삼의 물결무늬가 마치 고래의 배에 있는 줄무늬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 어떤 주장자는 운주사가 고래 토템의 뱃사람들의 신앙 대상으로서의 신상들로 이 불상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불두들
이곳 운주사도 역시 불교 탄압의 시대는 비껴서지 못했던 것일까? 여기저기 불두만 있는 부처님들이 어느 하나 같은 모습 없이 그리고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전문가의 정교함은 사치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운주사를 지키고 있다.
운주사의 석탑 석불들은 대부분 주위 산의 암반에서 떼어온 돌들을 석재로 삼고 있다. 실제로 사찰의 주위 암반들에서는 오래전 석재 채취 작업을 하며 남았던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돌을 떼어내기 위해 정으로 구멍을 뚫고 물을 부어 겨울에는 얼음으로 얼리 부피가 팽창하는 힘으로 떼어내고 여름에는 잘 부풀어나는 나뭇가지 등을 우겨 넣어 떼어냈다는 이야기들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운주사 석조불감
석조불감
불감은 인공적으로 감실을 만들어 부처를 안치한 것을 말하는 데 석조불감보다 목조불감이 훨씬 많이 인식된다고 볼 수 있다. 감실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안치한 모습이다. 이 석조불감은 석조라는 특징 이외에도 등을 맞댄 쌍불감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광배석불좌상
광배 석불좌상
운주사의 석불들 중 유일하게 광배가 남아 있는 불상으로서 유명한 불상이다. 광배란 원광이라고도 하며 불(佛)의 초인성을 형용해서 ‘불신이 광명에 빛나다’ 혹은 ‘원광일심’의 말(뜻)을 불상배후의 광상(光相)으로 조형화한 것이다. 시쳇말로 후광이라 할 것인데 왜 다른 불상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 불상에만 후광이 남아 있는지는 미스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명 항아리 석탑
마치 항아리들을 쌓아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석탑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땅위에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한다.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의 각 별의 밝기까지 세밀하게 표현해낸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 있던 하나에 무려 십몇톤씩 하는 바위를 이곳에 까지 임의적으로 옮겨와 배치한 것 하며 와불을 북극성이라고 특정했을 때 그 위치가 실제 하늘에서의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배치와 맞아 떨어져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형상화해 이 바위들을 가져다 놓았다고 추정하였으며 지금도 가장 그럴 듯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칠성신앙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별토템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북두칠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민간 신앙은 불교가 유입되면서 곧바로 사라지기 보다는 기존의 토속 민간 신앙을 불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포교하였기에 우리 민족에게 불교가 그렇게 큰 장애를 겪지 않고 민간에 받아들여졌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란 점을 꼭 알아두기를 바란다. 이런 칠성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칠성이 그려진 자리에 부처를 한명씩 그려넣은 칠성불 탱화 등이 고려 때에 제작된 것이 지금도 전해진다는 점이다.
와불
와불로 가려면 다시 대웅전으로 내려와 왼쪽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와불은 낮은 산등성이에 길게 누워 있는 두 기의 불상이다. 누워 있는 형태로 보아 본래 누운 형태의 와불로 만든 것은 아니다. 세워 놓을 요량으로 만들었는데 세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이 두 기의 와불을 부부 부처라 부르기도 하는데, 살펴보면 두 불상은 특정한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와불을 뜯어내서 세우지 못한 것을 보면 운주사 천불천탑의 대공사가 미완의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와불에도 전설이 실려오고 있다.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이다. 이 전설로 와불은 억눌리며 힘겹게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 이 와불에 미륵의 희망이 더해지기도 하고, 수많은 민초들의 설움과 애환이 덧씌워지기도 했다. 황석영은 자신의 소설 장길산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노비들이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새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운주사의 못생긴 불탑과 불상을, 새 세상을 향한 소외된 민초들의 염원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이다.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이 정도 규모의 큰 불사를 이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운주사는 그 창건부터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석탑 조각하나 불두 하나에도 무언가 신비스러움이 담겨 있는 신비의 사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명약관화하고 쉽게 이해되어버리는 시대에 이렇게 알 수 없고 직관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사람들에게 묘한 동경감을 부여한다는 것을 이 곳 운주사에 가면 여러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운주사는 그 의미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미지가 있기에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약간은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천불천탑의 신비가 언젠가 밝혀진다고 하면 운주사는 가장 큰 매력인 신비와 미지라는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운주사는 더이상 운주사가 아니리라.
운주사에 가면 상상해 보라. 왜 이렇게 꾸밈없고 존엄성이 없고 신성시 되지도 않는 깎다만 돌, 다듬다 만 돌, 만들다 실패한 돌 덩이들 같은 것으로 이 사찰을 건립하게 되었는지 이 사찰을 건립하고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무엇이 일어날 것이라 그들은 상상했던 것인지 그런 무한한 상상력의 연속 속에서 당신은 어느새 현실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주사를 다녀와서 지은 졸시 한 편을 소개하며 운주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디 잘 감상해 주시라.
사랑 22
- 운주사 와불
홧엠아이
128억 광 년의 광대무변한 우주가
고작 너를 지나고 나니 끝이었다
그 끝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또 끝은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네가 세상의 슬픔을 삼키는 동안
같이 앉지도 못하고 서서 우두커니
네 곁에서 너를 지키는 일이
나는 사랑인 줄 알았고
너는 일어설 줄 모르고
서로의 앎과 모름이 엇갈리던 그 때는
비로소 너를 일으켜 세우면
내가 시작될 것 같았으나
사실 일어서고 말고는
끝내 네 마음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니
대저 이 우주가 그저 견딤이라서
여기 누워 너를 하냥 아파한 것은
네가 아니라 섣부른 나였을 뿐이었구나
시작도 끝도 사랑은 아니었구나
너, 어쩌자고 여기 나투고 있느냐
그 머리 댕겅 베어 바람 속에 묻고
이름도 없이 견뎌야 할 사랑이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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