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10 실족하게 하는 것
실족의 사전적인 의미는 ‘발을 잘못 디디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스칸달리조’라 해서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스캔들 하면 남녀문제를 떠올리는데 본래의 뜻은 ‘남을 넘어지게 하고 거리끼게 하고 거침돌이 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누군가 나의 잘못으로 시험 들게 하여 주님을 떠난다면 그를 영원한 멸망의 스캔들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각자 자신의 문제다. 나의 잘못으로 나를 절망의 수렁에 빠뜨린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나와 타인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될까?
1. 실족의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1-2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맷돌도 무거운데 몇 톤씩 나가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나의 잘못 때문에 누군가 실족하여 주님을 떠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벧후2:3에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하셨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네로,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그리고 수많은 영혼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적그리스도나 사이비 이단들이 당할 심판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실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해서 나의 영혼을 깊은 시험의 수렁에 빠뜨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늘 예배 생활, 기도 생활을 해도 부족한데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멈추는 순간 나 자신이 실족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흐르던 물이 멈춰 고이게 되면 썩게 됨) 나의 부족으로 주변 사람들이 시험에 들거나 타락한다면 그 책임은 나의 책임일 것이다. 그러므로 늘 깨어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2.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셨다. 주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용서하지 않으면 형제가 실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일곱 번은 꼭 일곱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7이 완전수다. 용서를 빌면 몇 번이든 온전히 용서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일흔 번에 일곱 전까지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심) 그런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용서하지 못하고 심한 죄책감에 빠져 깊은 시험의 수렁에 빠져 고통을 당하고 있다. 죄책감처럼 절망을 주는 것은 없다. (나와 타인을 다 용서하자) 눅6:37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하셨다.
3. 믿음이 있어야 실족하게 하지 않는다.
5-6절에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셨다. 유대인들은 큰 문제를 산으로 비유했다. 산과 같은 문제가 다가오면 누구나 실족할 수밖에 없다. 왜, 예수님께서 실족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이야기하셨을까? 믿음이 없으면 반드시 실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으면 절대로 실족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행한 대로 보응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요일5:4-5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4. 자기 정체성을 알 때 실족하게 하지 않는다.
7-10절에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자기 분수를 모르면 실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보면 주인이 종의 밥상을 차려놓고 “밥 먹어라” 하지 않는다. 종은 종일 일했지만 주인의 밥상을 먼저 차려주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수종을 들었다. 그렇게 해도 주인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얼마나 불합리한가? 이것이 당시 사회적 배경이입니다. 이와 같이 종의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자기 정체성을 알면 시험들 일이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 섬기고 대접하면서 절대로 서로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는 VIP(귀빈)란 없다. 오히려 직분이 클수록 섬기는 곳이 교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이야... 하는 순간 실족하게 한다. 도리어 세상에서의 힘을 교회와서는 다 내려놓고 종의 자세로 섬겨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막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큰 상 받을 일을 했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사람이 알아주길 바란다면 하늘의 상이 없다. 요13:16-17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셨다. (말씀을 알고 행하면 절대로 실족하게 하지 않음) 옛날 황해도 재령에 있는 동부 교회에 정찬유라는 장로님이 계셨다. 학교 앞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경영하면서 어렵게 살았고, 가난하게 살다 보니까 헌금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특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그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먹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도 배가 고프고, 저래도 배가 고프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배가 고픈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아예 굶을 각오를 하고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형편이 피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느 정도 자금이 모였을 때, 그동안 하던 문방구점을 문을 닫고서 그 대신 건축자재 상회를 열었다. 때마침 건축 붐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자기가 살던 집을 신식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그는 떼돈을 벌었다. 건축자재가 없어서 못 팔정도가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황해도에서 몇째 가는 큰 갑부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사는 허름한 집도 현대식으로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 마당에 건축자재들을 잔뜩 쌓아놓았다. 그는 흐뭇한 심정으로 건축자재를 바라보던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허름한 채로 내 버려두고서 내가 내 집만 새롭게 고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짓기 전에는 자기의 집을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즉시 그동안에 모아놓았던 모든 돈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그 당시 그 헌금이 3만 환이었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30억이 된다. 교회는 그 돈으로 새로운 교회를 구입하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로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었다. 성도들은 그의 귀한 뜻을 기르기 위해서 예배당의 머릿돌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정찬유 장로님의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장로님은 그 교회에 다니지 않고,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목사님과 성도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부랴부랴 목사님과 성도들은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니 장로님,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정장로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동부 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 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정찬유 장로가 지은 정찬유 개인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 있는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 그제서야 목사님과 성도들은 그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 즉시 예배당의 머릿돌에 있는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는 글씨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정찬유 장로님은 예전처럼 본 교회 출석을 하면서 더욱 충성을 다했다고 한다. 정찬유 장로님은 내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임 -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리므로 자신도, 목사님도, 성도들도 동부교회도 실족하게 하지 않은 것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에 있어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범사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과 행동에 조심하고 종의 자세로 주님처럼 교회와 성도들을, 주변 사람들을 온전히 잘 섬기므로 더욱 은혜와 사랑이 넘쳐 나는 우리 가나안교회가 되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