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6월 18일 ·
두 눈을 뜨고 산 게 부끄럽지 아니한가?
[박도 칼럼 제17회] 맹인 백낙구 의병장 (1)
부끄러운 고백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아는 이가 없을 테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여 교단에서 30여 년 중고교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친 훈장이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 특히 근현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었다.
특히 독립운동사에 대해서는 까막눈으로, 내 고향 출신 왕산(旺山) 허위(許蔿) 의병장을 쉰이 넘은 뒤, 그것도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가서 동북 제일의 항일 명장 허형식(許亨植) 장군이 왕산 허위 선생의 집안 조카라는 사실을 석주 후손 이항증 선생을 통해 알고서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귀국한 뒤 사학자 강만길 교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런 나의 부끄러움과 무지를 솔직하게 말씀 드렸다, 그러자 강 교수님은 "그것은 박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남의 강제 지배에서 벗어난 민족 사회는 당연히 전체 교육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사'를 따로 가르쳐야 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해방 후 우리 근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육 당국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셨다.
몇 해 전, 내가 현직으로 있을 때 한 학생이 대학 수시 입학시험을 치른 다음날 등교하였는데 표정이 밝지 못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면접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물었는데 답변을 제대로 못했다면서 아무래도 시험에 떨어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순간 '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꾸중하려다가 이내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50여 년을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한결같이 배우고 가르쳐 온 나도 독립지사나 의병장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그런 부끄러움에 뒤늦게나마 내가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지사나 항일 의병장 전적지와 후손을 찾아다니면서 그때의 일들을 듣거나 보고 배운 뒤 그런 사실들을 알기 쉽게 글로 가다듬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까닭이다.
맹인 의병장 백낙구
나는 유독 의병이 많은 호남지방 전적지 답사에 앞서 여러분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뒤, 그 답사 순서를 고심하다가 그때 내린 결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열의 공훈 순서를 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어느 한 분의 목숨도 귀하지 않으랴. 그래서 대원칙은 후손 연락이 가능한 곳부터 먼저 찾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 맹인 백낙구 의병장의 기록을 보고는 감동과 함께 적잖은 의문에 싸였다. 보통사람의 경우 팔이나 다리 한쪽을 상해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아예 병역 면제를 받고, 군 복무나 훈련도중 그런 부상을 당하면 의가사 제대나 상이군인으로 명예제대를 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내가 전방에서 소대장을 할 때 소대원 가운데 야맹증 병사가 있어서 지휘 계통을 밟아 그를 제대시킨 바도 있었다. 그런데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용맹한 의병장으로, 끝내 일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와 프로에 나올 이야기가 아닌가.
더욱이 일제로부터 해방 후 분단국가에서 병역의무도 마치지 않은 사람이 국군통수권자로 무등 병이 현역 사성장군의 신고를 받는,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현실에서 맹인 의병장이라니….
나는 그런 역사에 감동한 나머지 백낙구 의병장을 먼저 취재하자고 길 안내자 녹천 후손 고영준 선생에게 부탁드렸다. 며칠 후 강원도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고 선생은 전남 광복회 등 여러 의병 후손에게 사방 수소문을 했으나 백낙구 의병장의 후손은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당시 국가보훈처(현, 보훈부) 민족정기선양센터 공훈심사과 당당자에게 전화로 문의하였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국가보훈처에도 백낙구 의병장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이전에 의병에 대해 자문을 받은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에게 문의하였더니, 그분 역시 후손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광복회원으로 의병정신선양회 조세현 부회장의 자문에 따르면, 그 무렵(2007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분은 모두 10,972 분으로, 이 가운데 약 2000여 분이 훈장 미전수라고 했다. 곧 서훈 대상자의 후손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행방불명으로 훈장도 전하지 못할뿐더러, 국가의 보훈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참 세상 고르지 못한 것은 조상의 역사를 왜곡하여 훈장을 받는 이나 그 후손이 있는가 하면, 족보나 서류를 조작하여 남의 훈장을 가로채는 이도 있었다. 분명 훈장을 받고 국가의 보훈 혜택도 받아야 할 분이나 그 후손은 여태 그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이런 분을 더욱 심층 취재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두 눈의 시력도 잃은 장애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누가 그분의 의로운 희생을 보상해 줄 것인가. 의병을 연구한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에 치열하게 항쟁한 분일수록 대가 끊어지거나 일가친척조차도 화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그 방법을 곰곰 생각하다가 백낙구 의병장을 깊이 연구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와 대담으로 그분의 생애를 더듬기로 하였다. 홍 교수에게 전화로 나의 이런 제의를 말씀 드리자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두 눈을 뜨고 산 게 부끄럽지 아니한가?
[박도 칼럼 제18회] 맹인 백낙구 의병장 (2)
부끄러움에서 출발한 의병 연구
그분(순천대 홍영기 교수)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2007년 11월 5일) 이른 아침, 숙소의 커튼을 걷자 날씨가 쾌청했다. 그날 일정을 잔뜩 기대하면서 짐을 쌌다.
그 흔한 내 차도 없으면서 노트북은 물론 스캐너까지 가방에 넣자 짐이 만만치 않다. 임시로 정한 호남의병 답사 베이스 캠프인 전남 창평의 한 숙소를 출발한 뒤 주암휴게소에서 아침을 들고 곧장 순천으로 향했다.
지리산 일대의 단풍이 절정이었다. 이런 금수강산을 지켜주신 조상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섬진강에 아침 햇살이 비치자 더욱 눈이 부셨다. 약속 시간 10분 전인 10시 50분, 순천대 홍영기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당시 홍 교수는 50대 초반임에도 10대 소년 마냥 수줍은 기색에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우리를 위하여 녹차를 끓이던 중이었다. 연구실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대담을 나눴다.
- 역사 전공 분야는 대단히 넓은데 왜 하필 호남의병을 전공하셨습니까?
“군에서 제대한 뒤 곧장 교사 발령을 보성 문덕중학교(현재는 폐교)로 받았습니다. 제 반의 한 학생이 원호대상자였습니다. 그때는 보훈대상자라고 하지 않고 원호대상자라 하였습니다. 그 학생에게 누구 때문에 원호대상자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증조할아버님이 의병‘염재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나는 그때 그분을 잘 몰랐습니다. 역사 교사가 내 고장의 유명한 의병을 모르는 게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나중에야 그분이 안규홍 담살이(머슴) 의병부대의 염재보 부대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그 부끄러움이 의병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홍영기 교수의 역사 강의’란 저서를 보니까 백낙구 의병장이 맹인이라고 나오는데, 정말 그런 분이었습니까?
“저도 그런 사실을 알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맹인이 아니라 의병 활동 중 (동학농민혁명 이후) 악성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었습니다. 보통사람으로 시력을 잃으면 의병 활동을 포기할 텐데, 그분은 불굴의 의지로 일제에 끝까지 항쟁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순간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묵념을 드렸다. 내가 감히 그릴 수 없는 위대한 영웅이시다. 일제 강점기 때 두 눈을 뜨고 산 게 부끄럽지 아니한가. 친일을 한 이들이여, 맹인 백낙구 의병장 앞에서는 그대들의 어떠한 변명도 구차하지 아니한가.
[백낙구 의병장 행장]
- 백낙구 의병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은 전주의 이족(吏族 향리, 아전) 출신으로 짐작되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을 쫓는 초토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 관군이었다가 의병이 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사실 그 무렵에는 그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백낙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와 썩어빠진 정치의 난맥상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관말직에다 당신 혼자 힘으로는 불가항력이라는 점을 깨닫고 아예 관직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후 그분은 청나라 요동과 심양을 넘나들며 시세를 관망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악성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는 광양의 백운산에서 은거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라는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소식이 산중에까지 전해지자 그분은 비록 앞을 볼 수 없을지라도 당신 목숨이 살아있는 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06년 1월, 장성 기우만이 주도하는 곡성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에 참여하였으나 호응이 적어 무산되자 다음날을 기약한 뒤 광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면암 최익현 선생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찾아가던 도중에 최익현이 패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 시각장애인으로 대단한 투혼입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초인이었습니다. 19세기 말, 왜적 침략에 당신의 신체장애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광양에 돌아온 그는 일흔 나이에도 의병을 일으킨 면암에 견주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고 생각을 하면서 직접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먼저 거의에 적극적인 장성의 기우만, 창평의 고광순 등과 연락하여 창의 날짜와 장소를 물색하면서 이전의 의병들이 패전한 원인을 훈련 미숙과 무기 열세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산중에서 의병들에게 일정한 훈련과정을 거치는 게 필요하다는데 다른 의병장과 의견을 모은 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의병 훈련장을 만들었습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1906년 단행된 관제 개편으로 실직한 향리들을 적극 설득시켜 의병대열에 합류시키는 한편, 가을걷이가 끝난 농민들을 모아 1906년 11월 5일, 약 200여 명을 이끌고 구례 중대사로 갔으나 기우만, 고광순 의병장과는 연락 과정에서 날짜가 잘못 전달돼 그들의 부대는 도착치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광양으로 되돌아가 군아(郡衙; 지금의 군청)를 점령하고 군수를 결박한 뒤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순천의 관아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그새 날이 밝아오자 이를 취소하고서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로 돌아오다가 구례군수 송대진에게 체포됐습니다. 곧 바로 순천분파소로 압송되었다가 광주로 이감, 신문을 받았다. 당시 백낙구 의병장 말씀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오늘날 이른바 대한국(大韓國)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을미년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가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여 국모를 시해하였다. 만국이 이 소식을 듣고 실색하였다. 팔도 백성들이 애통해 한지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의 거의(擧義)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통감(統監)’이라 한다. 그‘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종사(宗社; 종묘사직의 준말로 나라 또는 국가)와 삼천리강토와 이천만 동포가 이웃나라 적신(賊臣; 도적의 신하) 이토(伊藤)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나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로잡아 대마도에 유배중인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장이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7일자‘敗將口供’을 필자가 알기 쉽게 다듬어 고침-
- 그분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말씀으로 지금 들어도 아부 통쾌합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낙구 의병장은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에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의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고금도에서 돌아온 그분은 전주 의병들과 합류하여 전북 태인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때 전투 형세가 불리해지자 의병들이 백낙구 의병장을 부축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자, 이에 그분은‘그대들은 떠나시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오’라고 하며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분이 왜군을 향해 ‘백낙구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순간, 왜군 총에서 불을 뿜었습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때가 1907년 섣달이었습니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하여 교자를 타고 도주하다가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가 결국 왜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광양 사람들은 백낙구의 발발한 기운을 두고두고 못 잊어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요컨대, 백낙구는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맹인 의병장으로, 그의 항일 투쟁 정신은 호남 의병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모르십니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박 선생님 글로) 직계나 가까운 방계 후손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남짓 홍영기 교수의 백낙구 의병장 강의가 끝났다. 강의료 대신 점심을 산다는 게 오히려 염치없이 순천대학교 정문 앞의 한 밥집에서 대접을 받고 곧장 순천을 떠났다.
이 글은 대한민국 순국선열회발간 월간 <순국> 2024년 5월호에도 게재돼 있습니다.
사진 ; 위, 구한말 당시 의병들로 농민, 유생, 포수 등이 많았다.
아래, 순천대 홍영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