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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영감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1898~1971
「프랑스의 뛰어난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북서해안 브르타뉴 지방에서 성장했다. 소로본 대학교에서 수학. 1922년 철학분야 대학교수 시험에 합경 뒤 아비뇽, 알제, 나폴리에서 교편을 잡았다. 젊은 시절 이런 지역들에 머문 경험은 지중해 세계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고, 1928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터키, 그리스 등지를 여행한다. 이 무렵 파리 문단 사람들과 교류하며 <N. R. F>지를 비롯해 여러 잡지에 글과 논문을 발표했다. 1930년 다시 알제 그랑 리세(중고등학교)의 철학교사로 부임해, 당시 학생이던 알베르 카뮈를 만나 스승으로서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후 릴 대학교와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를 거쳐 소로본 대학교의 미학 및 예술학 담당교수로 재직하다가 1968년 은퇴했다. 사색과 글쓰기로 평생을 보낸 인문주의자답게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카뮈를 작가의 길로 이끈 유명한 산문집 <섬>을 비롯해 <정통성 정신에 대한 논고> <지중해의 영감> <자유의 선용에 대하여> <절대와 선택> <도의 정신> <모래톱> <어느 개의 죽음> <카뮈를 추억하며>등이 있다.」
[옮긴이의 말]
-침묵과 망설임의 형이상학-
나는 2012년에 카뮈 전집의 부록 편처럼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번역 소개했다. 그 후 6년 만에 또 한 권의 그르니에 작품 <지중해의 영감>을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빛과 어둠, 흰색과 검은색, 북쪽과 남쪽,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절대와 일상, 행동과 명상, 확신과 의혹..., 이처럼 다양한 면에서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찢기고 흔들리는 어떤 정신의 망설임과 모험을 암시적인 문체로 형상화한 산문집이다. “펄과 진흙의 광대한 공간을 남겨 둔 채 아주 멀리까지 뒤로 물러나는”, 항상 출렁거리고 흐린 브르타뉴(대서양)의 바닷가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자가 고향을 떠나 문득 마주한 것은 “수평선이 너무나 뚜렷한” 빛의 지중해였다. 저자가 서문에서 “절대의 숭배로부터 그리고 행동의 숭배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의 계시를 줄 수 있다”고 말한 그 균형의 지중해 말이다.
이 판이한 두 개의 바다와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감수성에 대하여 지중해변에서 자란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곁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과연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의 ‘프로방스 입문’에서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인간이 그토록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죽음을 자신의 행동들을 위한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둘 중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 쪽도 이해되지 못한다. 언제나 목전에 존재하는 그 종말에 대한 첨예한 감각만이 욕망에 윤곽을 부여한다. 쌍을 이루는 이 힘들로부터 어떤 비극의 철학이 생겨났다.” 이 감동적인 전언이 참다운 삶을 위하여 ‘의식적인 죽음’에 그토록 집착했던 젊은 카뮈에게 얼마나 강한 영감을 주었을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이 책의 표지에서 우리가 만나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인간들에게 충고와 계시들을 가져다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서 나오는 숨결, 그리고 그 초자연적인 충동에 영향을 받은 영혼의 신비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때 지중해가 그르니에를 통하여 카뮈에게 불어넣어준 영감은 진정 ‘계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카뮈는 새로 펴낸 <섬>의 재판 서문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한 것처럼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감은 행운이 온 것을 기뻐할 뿐이다.”
우리는 해 지는 저녁 시다부사이드의 망루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눈 앞에 펼쳐진 바다의 ‘태평스러운 무심함’을 관조하는 사람<히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과 처음으로 저 세계의 정다눙 무관심을 향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사형수 뫼르소<이방인>를 겹쳐놓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뫼르소는 이미 신부에게 절규하듯 소리쳤었다. 미리부터 예정된 죽음이 ‘한 줄기 어두운 바람’처럼 지나가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말이다. 그 절규에 대한 계시처럼 장 그르니에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코르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죽어가는 마당에 그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든 안 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지금이 정오라면 촛불을 한 개 켜든 백 개 켜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2018년 6월. 김화영
[1961년 판에 붙이는 말]
이 책은 1940년 처음 출판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이제 와서 이 책을 다시 출판하게 된 것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들의 표현 방식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 뒤에도 그 느낌들 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이 오로지 책을 쓴 저자의 느낌들만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서문]
사람들 저마다에게는 행복을 위하여 미리부터 정해진 장소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단순한 삶의 즐거움을 넘어 황홀에 가까운 어떤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존재한다. 플로베르는 그 기쁨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끔 삶을 초월하는 어떤 영혼의 상태를 엿본 적이 있다. 그 상태에서 보면 영광이란 아무것도 아닐 것 같고, 행복 그 자체도 거기서는 부질없을 것 같다.”
지중해는 그런 영혼의 상태를 영감처럼 불어넣어줄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감정의 혼란으로 인하여 풍경 속에서 어떤 정신적 지양이나 심지어 어떤 신적인 것의 직감을 발견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중해가 그런 감정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염려는 없다. 지중해는 그 특유의 선들과 형태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으로 진리를 행복과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든다. 그곳에서는 빛의 도취경 그 자체가 명상의 정신을 고양시킬 따름이다. 그래서 지중해는 절대의 숭배로부터 그리고 행동의 숭배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의 계시를 줄 수 있다. -1939년 7월
[북아프리카]
-산타 크루즈-
레탕의 산책길에서 나는 자주 뱃머리에 조가비가 박힌, 그 뒤집힌 나룻배의 빛나는 존재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나는 무용한 작업의 시간들을, 생산적인 게으름의 시간들을, 배움에 바쳐야 했을 시간들을, 그리고 망각에 기울여야 했을 시간들을 생각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행동하는 것과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
태양이 아프리카의 산 위로 다갈색 색조를 솟아오르게 하니 그 색조는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바닷물에 발이 잠길 정도로 기지개를 켜는 이 짐승을 쓰다듬어주고만 싶어진다. 빛은 아직 짙어지지 않았고 당신 뒤로 남아 있던 빛의 자취는 즐겁게 조잘대다가 움츠러든다.
얼마나 영광에 찬 대낮인가! 나는 술잔 속에 담긴 한 송이 꽃처럼 태양이 진종일 내려와 쉬는 팔레르모의 금빛 소라 고동을 생각한다.
-카지노 바스트라나-
시와 쾌락은 같은 것이다. 아니다, 시는 지속되고 고동치는 쾌락이다. ~~~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화려한 감각세계 속에 펼쳐놓고 보면 인간의 욕망은 더 이상 덧없는 그림자가 아니라 어떤 빛이 흘러간 자취, 가장 먼 세상의 얼굴 위로 흘러가 스러지게 될 기쁨의 외침이었다. 밤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밤을 벗어나 빛 속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그 밤을 감당할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기 위하여 빛 속으로 들어갔다.
-알제의 카스바-
이 카스바에서 얼마나 많은 저녁들을, 얼마나 많은 아침들을 보냈던가!
모하메드 셰리프와 클레베르 거리가 교차하는 프로망탱 카페에 앉아서 나는 자주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터로, 또는 쾌락을 찾아, 샘가로, 또는 기도하러 서둘러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주위의 사물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모두가 다 고대극의 합창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에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나 우리 안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다고 여길 수 있다. 무덤에 들어가면 원치 않아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터인데 말이다.
나는 식물들의 삶처럼 그렇게 늘어져 느리게 흐르는 삶이 무엇보다도 시에 어울린다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비스크라의 어느 날 저녁-
남쪽 지역은 여행자에게 실망스러울 수 있다. 여행자는 사실 무언가를, 가령 모래사막이나 오아시스를 보려고 여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제리 남부 지역 대부분은 모래도 오아시스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바위투성이의 땅들과 석회질의 돌들뿐이다.
젤파에서 라구아트로 내려가는 코스, 종려나무들의 낙원을 호위하는 그 산들의 위엄과 진정한 사막의 문턱을 잊을 수가 없다.
사막의 광막함은 인간의 정신에는 어떤 심연과도 같다.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 광막함에 일단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인간은 그것에 끌리는 느낌을 갖게 되어, 처음에는 그 매력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여겨지고 다음에는 충족시켜야 할 호기심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 더 이상 떨쳐버릴 수 없는 황홀함으로 보인다. 이 비정한 풍경들은 아침 이른 시간에 해가 떠올라 이슬을 빨아들이듯 인간을 마셔버린다. 인간에게 세계는 헛된 소란으로 가득한 무대 같아 보인다. 그는 오직 그 무대에서 물러나고 싶을 뿐이다.
-메디나의 밤-
세상의 어떤 정신들은 자신의 목적을 향해 곧장 나아간다. 그리하여 어떤 예술가는 비가 내리는 어느 날 튀니스에 도착했을 때 색깔의 마술적 매혹 때문에 진정한 오리엔트와 자신의 첫 만남을 망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좋아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색깔의 매혹 따위와는 무관한 상태이기를 바랐다. 나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아 무뎌지는 일이 없는 그런 지성들의 예리함에 감탄한다.
***
튀니스에서, 그 아랍의 도시에서, 밤이면 나는 더 이상 앞을 잘 분간하지 못한 채 오직 이 램프 불빛에서 저 램프 불빛으로, 또는 흐린 달빛에만 의지하여 걸어 다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실제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그러나 어둠에 닿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는커녕 어떤 기이한 충만감과 빛의 느낌을 맛보기에 이르렀다. 하얀 집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밀집하여 마치 금요일 날 묘지에 무어인들이 운집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그 골목들에서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아무 상관없었다.
이따금 막다른 골목 저 안쪽에서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고독의 은빛 종소리였다. 그 소리가 내 마음t고에 불러일으키는 메아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나절 포근한 그늘에 잠긴 무어인 카페들의 정겨움, 사람들은 그곳 돗자리 위에 웅크리고 앉아 기억도 욕망도 없는, 물같이 흐르는 시간을 보낸다. 과거와 미래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미친 짓 같아 보이는 쪽은 오히려 부산한 행인들, 의미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몸짓만 기계적으로 계속 되풀이되는 무언극 속에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법석이다.
오늘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것은 밤의 매혹이 아니다. 그 매혹 이상으로 밤은, 즉 영원하고 본래부터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밤은 우리의 인식을 가로막는 그 밤의 성벽 앞에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 자를 처음에는 미지의 어떤 세계 속으로 안내한다.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 습관인 그가 여기서는 망설이고 뒷걸음질 친다.
고정되고 확실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 광막함 속에서 자신이 쌓아온 경험이 무너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만약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연히 깊은 밤 속으로 내려간다면 그는 평온의 바다보다 더한 것을, 즉 시인들을 흔들어 재우듯 다독여주던 그런 평온의 바다를 발견하리라. 시인들은 그 바다에서 마음이 통하는 곳을 찾나냈고 그리하여 노래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요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인 물과 구름과 침묵, 그리고 밤을 그대는 사랑하게 되리라.” 그렇다 바로 그거다. 아랍과 페르시아의 시인들이 노래는 그 모든 것, 즉 소리 내며 흐르는 샘물, 빛나는 별들, 서늘한 타일이나 물 같은 것은 오늘 밤 우리와 상관없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상징들로밖에 보이지 않ㄴ느다. 그리고 실제로 오리엔트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상징으로밖에는 제시한 적이 없다.
밤은 우리에게 통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밤은 낮이 뚜렷하게 한정하고 서로 갈라놓은 존재들을 통합하고 혼합한다. 빛은 실낱 같은 질투의 기미처럼 슬며시 사물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물들은 마치 위험에 처한 배에 함께 탄 승객들처럼 한 덩어리가 된다. 그와 동시에 밤은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었고 우리가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던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데, 메디나(도시)의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며 우리가 인간보다 더 거대한 그 무엇에 다가가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밤을 통해서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로마와 티볼리 사이의 들판은 아름답다. 사비니 산맥 기슭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그 들판은 고대에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그리고 더 가까운 과거에는 그토록 많은 화가들이 거쳐 가며 지난 날 뜨겁게 달아올랐던 곳이다. ~~~나도 예술가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페허와 걸작품들 가운데서 맛보는 고독, 자유, 햇빛....
그대는 다르 자루크의 밤들을, 달빛이 바다의 수면에 거품 같은 빛을 뿌려놓던 그 투명한 밤들을 기억하는가. 그 많은 페허들 위에, 그 많은 추억들 위에, 그 많은 살아있는 존재들과 그 많은 희망들 위에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평원에서-
나는 샤토브리앙이 달빛을 받으며 로마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었던 그 크리스마스의 밤을 즐겨 머리에 떠올려보곤 한다. 종말을 맞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여겨지는 이 달님은..... 로마의 고독 저 위로 그의 창백한 고독을 이끌고 간다. 달님은 인적 없는 거리들, 담장에 에워싸인 땅들, 광장들, 지나가는 이 아무도 없는 정원들, 더 이상 수도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수도원들, 콜로세움의 회랑들만큼이나 텅 빈 수도원들을 비추고 있다...
샤토브리앙, 또는 그런 부류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 고독의 감정에 흠뻑 젖어 취한 듯 여행한다.
견딜 만한 직업이란 일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고, 하는 일 속에 내밀한 시를 섞어 넣을 수 있으며, 어떤 주어진 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창조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모든 고독한 산책자들은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속에서 잘 삭힌 부엽토, 즉 곁에 함께 있어줄 상대가 필요하다. 여행자를 압도하는 저 엄청난 과거의 무게를 덜어낸다면 과연 로마의 매력이 그토록 강렬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티베레강과 폰티노 습지로 환원시켜버린다면 로마의 풍경이란 고작 그곳에 비치는 빛과 그곳의 황폐함으로 겨우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전부일 터다. 그러나 지금,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아마도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덜 외롭다고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우리는 외면의 허물을 벗어던질수록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동물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중에는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식물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아진다. 숲은 한 생애 전체에 화두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근원적인 삶과 제아무리 거리가 먼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증인이 필요하다.
샤토브리앙 같은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웅변적으로 그런 예를 보여 준다. 티볼리에서 그는 어떤 묘비명을 따라 읽고 나서 이렇게 말을 보탠다. “이보다 더 헛된 것이 어디 있으랴? 어느 돌을 들여다보니 산자가 죽은 자에게 전하는 애석한 마음이 새겨져 있구나. 이번에는 그 산 자 또한 죽었고, 그 후 이 천년 세월이 지나 찾아든 나..... 버려진 은거지에서이 묘비명들을 뜯어읽고 있나니.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이에게도 그 애도의 대상이 되었던 이에게도 무심한 나, 나 또한 내일이면 이곳에서 영원히 멀어지리니. 그리고 머지않아 이 지상에서 영영 사라지리니.”
죽은 사람 그 자신들이 산 사람들을 증인으로 삼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내 곁으로 무심히 지나가는 그대 길손이여. 미안하지만 그대 또한, 그렇게 걸어가 봐야 소용없으리라. 그대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말 테이니.
나는 다시 라테라노 바실리카 성당에서 알바니 산에 이르는 평원을, 지난날 황폐했었고 지금도 어지간히 황량한 모습인 그 광막한 공간, 그리고 오후가 되면 보라색 라일락 빛깔로 물드는 그 평원을 생각한다. 아! 아피아 가도를 따라 늘어선, 이씨가 자라 틈이 벌어진 그 석판들을, 그리고 햇빛 잘 드는 그 무덤들의 고독을 제 그림자로 더욱 두드러지게 하며 드문드문 늘어서 있는 그 파라솔 소나무들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로마의 평원을 이리저리 거닐면서도 나는 어떤 다른 나라를, 다른 휴식과 명상의 장소들을 생각하곤 했다. 그리하여 내 마음 속에는 알제의 엘 케타르 묘지가, 언덕 위에 내려앉았다가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의 그 하얀 비상이 눈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곳의 빛은 그러나 훨씬 더 강하고 하늘은 더 뿌연 푸른색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시간도 장소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오랫동안 산책할 수 있다. 더운 계절의 금요일이면 무어 여인들은 그곳으로 와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떤다. 무덤들은 아피아 가도의 무덤들과 강한 대조를 보인다. 그곳에서는 정말이지 인간 존재는 중요성을 상실한다. 때로 이름조차 없는 하나의 묘석에 불과하다. 묘석의 윗부분은 우묵하게 파여 그곳에 빗물이 고이고 새들이 목을 축일 수 있게 되어 있다.
남쪽 지역으로 좀더 깊숙이 들어가고, 짙은 녹색의 풍경이 진흙 빛으로 변하고, 하늘 빛이 퇴색하면서 한낮에도 흐린 색깔을 배경으로 가장 미묘한 색조들을 띠게 되면 그때 불룩하게 나온 땅 위로 길을 따라 가끔씩 바닥 여기저기 던져져 있는 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누군가가 씨를 뿌려 심듯이 장난삼아 조약돌들을 던져놓은 듯 보이는데 그게 바로 무덤들이다. 음자브 지방에서는 몇 개의 깨진 도기들이 거기에 죽은 자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오직 땅과 하늘뿐이다. 낮에는 가득한 빛의 세상이고 밤에는 오직 무수히 빛나는 별들뿐이다. 여기서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비문으로 무얼 하겠는가? 이 영원한 대면, 이 끝없는 포옹, 고백도 질투도 없는 이 결합들 앞에서 오직 침묵만이 버티고 남아 있을 수 있고, 오직 침묵만이 어떤 의미를 지닐 뿐 일체의 말은 거짓이거나 과장이다. 그래서 아랍인은 지나가면서 한 송이 꽃을 꺾기를 좋아한다. 그는 소멸하기 마련이고, 그 무엇으로도 붙잡아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의 이미지로서 꽃에 애착을 가진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자세는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런 자세의 숭고한 면을 느낄 수 있고 그 깊은 w니실을 굳게 믿어도, 그것을 우리 삶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로마는 다시 말해 고대 로마는 여전히 사나이답게 살다가 죽고자 하는 자, 그 삶이 어떤 그림자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아는데도 그것을 꿈으로서의 현실로 간주하는 자의 고향임에도 변함이 없다. 유럽사람, 즉 지중해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필요를 느낀다. 삶을 하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는 어쩌면 가지고 노는 한낱 장난감, 그러나 깨져버리면 영원히 그만이게 되는 장난감에 불과했던 그것에 대한 초연함을 표현할 필요를 느낀다. 쓰라림과 자존심이 뒤섞인 어떤 금욕적 절망감을 말이다.
-베로나에서 세비야까지-
(공허)
이탈리아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주위에 텅 빈 공간을 만들어놓는다. 인간은 자기 욕망과 함께 혼자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물 한 잔 앞에 놓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여러 해 전부터 마음속에 끓이고 있는, 아마도 끝내 만족시키지 못할 어떤 비밀스러운 열정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밤)
(묘비명들)
모든 묘비명은 명예와 이승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지난여름, 베로나에서 본 묘비명이다. 그곳 산 체노 수도원에 있는 베빌라콰(1568년 사망)의 무덤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 이제 나는 다 살았노라. 그들은 말한다. 명성을 얻어 살아남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 역시 두 번 죽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내가 육체 가운데 나의 구세주 하나님을 만나게 될 심판의 그날까지 주님 안에서 단 한 번 죽는 것이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명예란 이승의 삶과 거의 마찬가지로 덧없는 생명 연장에 불과하고, 유명한 사람도 명성이 다하면 한 번 더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생각이 여기에 기막힌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슨 소용인가, 라고 베빌리콰는 말하고 있다. 심판의 날을 기다리면서 단 한 번 죽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절망이 아니라 의연한 체념을 표현한다. 이 말은 그 뒤에 믿음과 사랑의 증명이 따르고 있기에 더더욱 감동적이다.
또 다른 하나의 비문은 위대함에 대한 향수보다는 오히려 성스러움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세비야의 가장 번잡한 광장에서 불과 이 분 거리에 있는 산타 카리다드 신심회 성당 입구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의 뼈와 유골이 여기에 묻혀 있도다, 신에게 명복을 빌어다오.”
(전부 아니면 무)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에 따라다니는, 이른바 ‘검은 전설’에 대하여 항변하고 나서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전설은 숱한 작품과 사람들에 의해서 확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사실 이상으로 그 나라에 대해 훨씬 더 적절한 생각을 갖게 해준다.(가령 빈 하면 왈츠가 생각나고 코르시카 하면 복수가 생각나는 등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물론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도록(마치 인도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하듯이)미리부터 그런 토양이 마련된 나라들로 간주할 뿐이다. 그런 느낌들은 어디서든 생겨날 수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토록 강력하게 솟아날 수는 없으며 그토록 대단한 결과를(정신적 결과) 가져올 수도 없으리라. 환멸로 끝나버린 사랑, 기대에 어긋난 야망은 파리에서, 런던에서 (그리고 뮌헨에서, 빈에서는 더욱 더)다른 방식으로 만족시킬 수많은 방법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게 불가능하니....
인간은 자신의 척도에 맞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 삶을 버려야 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이란 없으니 말이다. 이곳에서는 몸과 마음의 그 가당치도 않은 혼합물들이란 더 이상 없다. 육체적 욕망과 사랑은 절대적으로 나뉘어 있다. 빛이 감정들을 오려놓은 듯 분명하게 드러내니 우리는 실수보다는 위반 쪽을 선호하고 죄는 받아들여도 어정쩡한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위험부담)
<고백론>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느 한 페이지는 매우 감동적이다. (그 대목은 다른 곳보다 피학적인 허풍의 냄새가 난다). 그건, 베네치아에에서 어떤 창녀가 루소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졌는데(그 여자가 사랑했던 어떤 남자가 루소를 닮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루소가 욕정이 극에 달하여 그녀를 소유하려는 순간,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이 기막힌 미녀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창녀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그 대목이다. 지체 높은 사람들, 고귀한 왕족들도 이 여인의 노예가 되어야 마땅하리. 왕구너을 쥔 이도 이 여인의 발아래 꿇어야 마땅하리. 그러나 이름 없는 대중에게 함부로 몸을 맡기는 비참한 여인이 아닌가. 장삿배를 타는 선장도 이 여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잇으니.... 그리하여 절망을 이기지 못한 루소는 그녀를 극도로 멸시할 그 무언가를 그녀에게서 찾기 시작한다.
내가 어느 한 나라를 좋아하자면 그 나라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알제리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는 풍속상의 거리감 때문에 행복감이 덜할지 모르지만 그런 나라에서 내가 고통을 느낀다면 적어도 더 능동적인 고통일 테고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이리라. 중요한 사실은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충만감이 비록 고통일지라도.
도피해야 할 것인가? 창조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각자 자신의 내밀한 필요성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스탕달은 이탈리아에서는 자기를 실현 한다. 파리나 모스크바에서는 자신을 찾지 못한다.
어느 날 아침 - 아니 아직 밤이라고 해야 할 시간에 - 시에나를 떠나려니,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들판에는 안개가 끼어 있는데 난느 향수에 젖어 가슴이 저렸다. 풍경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나는 그 풍경에 완전히 압도된 듯한 느낌이 되어 라오파르다(19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가 노래했듯이 그 점령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바다에서의 난파가 나에게는 감미롭구나.”
(로마)
나는 내가 보았던 것을 모두 다 잊었다. 황소가 살아남은 투우장에 대해서는 오직 그에게 상처를 입혔던 투우사의 리본 달린 창들에 대한 기억만 간직하고 있듯이 나는 오직 나를 괴롭게 했던 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토록 많은 교회들, 박물관들, 기년물들, 관광명소들을 보고 난 뒤에, 다시 말해 영혼 없는 몸이요 심장 없는 아름다움에 불과한 이 모든 혹들을 보고 난 뒤에, 물에서 나온 한 마리 개처럼 몸의 물기를 털어내는 일은 얼마나 기분 좋은가! 트라스테베레에서 산타마리아 광장까지 서민의 거리를, 허름한 옷을 걸친 행인들 사이에 뒤섞여 지저분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산책하는 일은 얼마나 기분 좋은가! 더 이상 감탄하며 쳐다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있다. 옛 로마인들의 직계후손으로 보이는 건장한 젊은이들, 낮은 이마와 거기에서 곧장 흘러내린 오뚝한 코, 햇빛에 그을린 통통한 두 뺨, 아주 커다란 입, 긴 속눈썹 아래 검고 그윽한 두 눈을 가진 이른바 ‘포풀레네’라고 부르는 서민 아가씨들, 그리고 특히 행복한 동물성의 분위기, 건강한 삶의 기쁨이 볼 만하다. 로마에 온 괴테는 말한다. 이곳에서는 사물들이 주는 무거움의 느낌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근엄한 쾌락, 즐거움 속에서도 일종의 심각함 같은 것을 느낀다. 로마는 농익은 과일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사람들은 따분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고,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는 사람들과 상종하고 있으며, 떠날 수 없는 한 장소에 발이 묶여 있고, 남들에게는 무익하고 자신에게는 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책한다. 하지만 낙오자가 아닌 한 오직 자신 만을 탓할 뿐이다. 말이야 뭐라고 하든, 따지고 보면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혹시나 사람들이 위험부담 없이 즐기려는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안락함과 편리함에 끌리는 마음, 사회와 세게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뭐든 노력하지 않고도 연기를 바라며 그저 식탁에 가 앉기만 한면 된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갔다가는 완전히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무언가 위대한 것을 실현했거나 느껴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복은 내가 실에 꿰어 하나의 묵주를 만들지 못하는 낱알들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지만 한순간만 지나면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부, 그러므로 전무.
[프로방스]
-프로방스 입문-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이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갖는 첫 번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는 다른 곳으로 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복해지고 사랑하기 위한 장소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이런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 쯤은 우습게 여긴다.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되는 고유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젊음은 젊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믿고, 그래서 스스로 믿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돌시네아가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선언하기에 앞서, 그녀를 만나봐야겠다고 하는 상인들에게 돈키호테는 말한다. “만약 내가 당신들에게 그 여자를 보여준다면, 이미 그토록 널리 알려진 진실을 새삼 고백하는 게 당신들에게 무슨 소용이겠소?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그녀를 보지 않고도 그 진실을 믿는 일, 그 진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맹세하고 옹호하는 일이라 이거요...”
젊은이들의 목적 없는 충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런 도피가 없다면 삶은 멈춰버린다. 그러니 도피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는 얼마나 행복한가! 나 또한 다른 무엇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 아니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그 모든 것과는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
생명이 넘쳐흐르지 않는 한, 젊은 시절 낯익은 이미지들로는 자신의 고독에 자양분을 공급할 수가 없다. 오직 온갖 꿈들만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하늘과 땅과 물이 합쳐져 그 어떤 혼합물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우리들이 몸담아 사는 풍토를 형성한다.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면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지고 마음은 활짝 피어난다. 침묵하던 대자연이 돌연 노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알아본다. 흔히 말하는 연인들의 벼락같은 사랑이 그렇듯 어떤 풍경 앞에 서면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달콤한 불안, 오래 지속되는 관능을 느낀다. 강변에 널린 돌들, 찰랑거리는 물소리, 갈아엎은 흙의 따뜻함, 석양 무렵의 구름에 대해 어떤 우정이 솟아난다. 나에게 그런 풍경들은 바로 지중해의 풍경들이었다.
***
헐벗은 풍경들, 돌투성이의 언덕들, 장난감처럼 영약한 신전들, 커다란 고통들 같은 극도의 단순화, 나 자신과 인간의 우연한 일치. 드디어 나는 매일매일의 가식과 거짓을 여기에 내려놓고 내 인간됨과 대면할 수 있다. 마침내 나에게서 해방되어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어떤 우정이 가능해졌다.!
-들판에 돋는 풀-
어느 날 저녁 나는 루르마랭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다. 구월의 짧은 황혼녘이라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마자 어둠이 내려 구덩이들에 발부리가 부딪치고 퓌베르 마을 목장의 오솔길은 어슴푸레하여 잘 보이질 않았다. 뒬아스 강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로리스 마을 저 발아래에서 깨진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등 뒤에는 뤼베롱 산이 그 야성적인 겉모습을 걷어내면서 엷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내가 꺾은 이 들꽃은 벌써 시들고 말라버렸어. 그건 이제 버려야겠네. 내게는 모든 것이 이 들꽃과 같다네.
[그리스]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다-
인간이란 오직 삶의 너그러움을 통해서만 승자가 된다.
***
우리 인간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자신을 극복할 수 잇을 뿐이다. 희망 없이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가능한 승리는 덧없고 일회적인 시간 속에서 영혼의 소용돌이를 억제함으로써 거둘 수 잇으며, 우리가 맞을 최후의 순간은 그런 순간들 중의 하나일 테므로.
-그리스의 묘비명-
시대를 통틀어 그리스의 가장 큰 매력, 그 무궁무진한 매력은 단순 소박함에 있다. 그리스는 오직 유혹의 부재를 통해서만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자 한다. 유혹한다는 것은 정도에서 벗어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인데 그리스는 오로지 우리를 정도 쪽으로 되돌리려고 애쓴다.
어느 날 국립박물관에서 스코파스 시대의 비장한 묘석들과 초상화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염소들이 다니는 오솔길을 따라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다가 나는 그 남쪽 한구석에 숨어 있는 아주 조그만 그리스 정교회 예배당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보이는 것은 십자가 하나가 위로 솟아 있는 철책뿐이었다.
[탐구]
-가시 없는 장미-
모든 것을 헐벗음 속에 뒤섞어놓은 겨울의 무기력보다는 봄의 눈부신 불화가 좋았고, 만족감에 젖은 무르익음보다는 알에서의 깨어남과 꽃의 피어남이 더 좋았고, 둥근 공의 조화보다는 눈물 섞인 환희가 더 좋았고, 안정된 날들보다는 초조한 날들이 더 좋았다.
오늘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일 찾으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내게 추상화할 능력이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혜를 열망하는 이에게 희망보다 더 불가능한 것은 없다. 이상보다 더 진실과 상충하는 것은 없다. 아니 그보다는 그의 희망은 지혜에 이르는 것이며 그의 이상은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해두자. 그는 시간 속에서의 성취 대신에 시간 밖으로의 도피를 원한다. 차례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대기를 쓰고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그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일에 그보다 더 부적격인 사람은 없다.
시대가 혼란스럽다고? 모든 시대는 다 혼란스러웠다. 혁명과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어왔다. 시는 덧없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스탕달은, 러시아 원정에 따라갔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소설<파름 수도원>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는 더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일상의 생활을 눌러 짜보라. 그러면 거기서 시가, 시작 없는 날들이, 끝이 없는 밤들이, 서정적인 삶이, 어둠과 섞인 빛이 뿜어 나올 것이다.
등장인물을 쳐다보지 말자. 그들은 고작 무대 위로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은 영원하다. 천박한 카르멘이 늙은 돈 호세에게 던져주는 꽃, 그녀는 내일 또다시 그 꽃을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시라고 하는 몸짓이다.
이렇게 시인은 순간을 통하여 영원에 이른다. 그는 우리들처럼 운명의 완성을 다음날로 미룰 필요가 없다. 나는 그의 운명이 완전하게, 그리고 즉시 실현됨을 본다. 그런데도 대양의 깊은 밑바닥에 가라앉은 병 하나 때문에 바닷물이 줄어들거나 불어나지도 않는 것처럼 이 세상 어느 하나 변한 게 없다. 벌써 여러 달째 나는 산책을 하면서 -조금도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보들레르의 이런 기원을 혼자 되뇌고 있음을 발견한다. “오, 나의 천사 나의 열정이여.”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속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 누구를 향해서 내뱉는 기원의 말이 아니다. 심지어 정호가한 시구조차 못된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귓가에 속삭이듯 이 말이 들린다. 그것은 마치 어떤 충동과도 같고 나를 들어 올리는 그 무엇과도 같다. 그리고 대단히 심각함과 그리도 대단한 열광이 결합된 그 말은. “하지만 그대는 이 오물과 비슷할지니-----그대 나의 천사 나의 열정이여.”
이 이중의 운동, 죽음과 부활,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서로 대립되는 검은색과 흰색,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시가 지닌 지적 특성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빵과 물처럼 필요로 하는 것, 우리가 어떤 육체에 대하여 느끼듯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대상은 바로 우리를 탁 트인 하늘로 내닫게 하고 우리의 마음속 고백을 해방하는 저 가벼운 충동이다.
신의 세계에 다가가는 방법은 분명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우리는 닫힌 문앞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역시도 아세디아(도덕적, 종교적, 심리적 개념으로 기독교에서는 사막에서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경험하는 영적 슬픔과 비탄의 원죄, 영혼의 병을 의미한다.)를 경험했다. 앙젤리크 수녀는 15년 동안이나 자신의 가족 친지들의 종교적 신심을 뜨겁게 달구어보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없었고 그녀 자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박탈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인간을 향한 자신의 열정 속에서 톨스토이가 느꼈던 회의와 고통을 여기서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열망의 높이를 좀 낮추는 일이다. 곧 우리의 영원함만큼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아니 차라리 우리 욕망의 끝없음과 우리 삶의 연약함 사이에서 자신이 찢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그 덧없는 결합을 사랑에서 우러난 결혼으로 만드는 일이라고나 할까.... 그런 계시의 장소가 되자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가. 아마도 그 장소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별것 아닌 r서으로 보일 테고 또 우리는 너무나도 별것 아닌 것이라고 여기도록 노력해야겠지만.... 깊어서 가벼워진다, 라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항상 시인을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는 낙엽처럼 바라본다. 그래서 진정으로 시인에 관한 문제일 경우, 그 시인이 받게 되는 모든 은총은 그가 받을 자격이 있기에 받는 것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세상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것....
“시는 익숙한 대상을 더 이상 익숙지 않게 만드는 것이니.... 신의 자연이 우리의 자연 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그건 마치 바람이 바다 위를 스치는 것과 같아서 바람 지나간 자리에는 아침의 고요만 남는데 오직 q마사이 모래 위에 팬 주름들만이 바람이 지나갔음을 말해준다.
나는 셸리가 한 말을 믿고 싶다. 그를 믿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들꽃을 꺾었던 그 여름날을 기억한다. 그 꽃들은 선명한 모습으로 향기를 내뿜으며 그때 막 꽃잎을 열었다. 나는 그 꽃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언제까지나 대지의 모든 모공들을 뚫고 뿜어 나오는 그 시의 상징들인 양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그 꽃들이 내 손가락들 사이에서 하나하나 시들어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R초들을 차례로 버려야 했다.
옂너히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다. 이제 내게는 이 세상이 거울들의 미로 같아 보였는데 나는 미로를 뚫고 달려가면서 순간의 서정적 충만 그 자체인 저 가시 없는 장미를 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코르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변신-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집에 잇을 때, 창문들이 들판 쪽으로 난 커다란 방에서 지내기를 좋아한다. 내가 거기, 높은 책상 앞에서 펜을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러나 종이는 백지로 남아 있고 나의 상념은 무작정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지만 마주치는 것은 공허뿐이다. 나는 고적한 공간들,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난 호수들, 지평선이 아득히 멀어지는 모래언덕들을 누비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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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나는 의기소침하여 집을 나온다. 지금 나는 낮과 밤의 이 순간적인 일치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나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느낀다.
나무들 가운데로 산책할 때 내가 즉각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건 바로 나무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동의하고 있는데 비해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나무들은 어떤 숭고한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에 가담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의 줄기는 어떤 의지의 표명인데 나의 몸은 어떤 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죽어가는 마당에 그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든 안 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지금이 정오라면 촛불을 한 개 켜든 백 개 켜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론 나도 위계와 서열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는 나쁜 점수보다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아이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아니 어쩌면 아이는 끝내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것이 같은 높이에 있다. 꼭 이 말을 해야만 할까? 이 동등함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나는 씁쓸하지만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진지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경박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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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무심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사정은 완전 딴판이다. 끊임없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만 하고 결국은 나를 배반하고야 말 한 생애를 지탱하자면 얼마나 많은 술수들이 필요한가! 미리부터 단죄받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인 줄 알면서 얼마나 조심조심했던가! 매순간 그 부질없음이 내 눈에 뻔히 보이는 연극인데도 거기에 관객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 나는 마치 자기가 그 자리에 없으면 대신 박수 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봐 걱정되어서, 출연하는 친구들에게 박수를 쳐주려고 연극 구경을 가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코르넬리우스의 답장, 혹은 창조-
우리는 영화의 하찮으면서도 편안한 무기력 상태, 즉 가난한 사람들이나 까다롭지 않는 사람들 특유의 아편에 빠져 있었다. 스크린에 보이는 것은 어떤 노천 카바레에서 춤추는 장면이었다. 춤추는 사람ㄴ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화면 속에서 춤추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코르넬리우스의 두 번째 편지의 단편들-
관조적인 삶은 가장 손쉬운 해결 방식을 따르는 무기력이며 체념에 불과하다. 선택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선택 하도록 방치하는 일이니 말이다. 중립적인 행동이란 없으며 중립적인 사고도 없다. 핵심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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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어느 선원은 내게 자기가 어떻게 하여 선원이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수평선이 어딘지 정확히 경계 짓는 것이 불가능해서 그는 선원이 되었다. 그는 브르타뉴의 어느 황무지에 자리한 농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양이 파고 들어오는 그 땅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자기 자신의 삶 이상으로 그 황폐한 공간들, 그 음울한 지평선들, 불모의 세계라는 점에서는 하늘이나 바다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을 몸소 살면서 경험해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세계를, 세계라 할 수도 없는 그 세계를.... 인간이 계속 목숨을 부지하고 살려면 결국 도망쳐버릴 스밖에 없는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모든 것이 그토록 잘 분류되고 미리부터 예정된 고장, 튤립 하나도 지정된 자리 지정된 시간에 피는 그대의 고장에서 과연 그대는 그 선우너처럼 공허함의 감정을 느껴보았는가? 절대로 못 느꼈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잘 분할된 창유리들을 통해서만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단 한 번도 땅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그 하늘이 대야를 뒤집어엎을 때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해설]
-장 그르니에와 지중해-
지중해는 장 그르니에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그가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은 프랑스 북부의 브르타뉴다. 그는 열일곱 살 때 그곳을 떠나 파리로 와서 소로본 대학교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브르타뉴는 언제나 그에게 고르지 못한 날씨 때문에 삶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땅으로 여겨졌다. 나직하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 거센 바람, 너무나 짧은 여름은 그에게 일찍이 그 공장에 오래도록 눌러 살 용기를 꺾어버렸다. 반면에 지중해는 빛과 열기와 확신의 절박한 욕구에 응답해주었다.
이 빛 밝은 세계는 그에게 글쓰기의 열정을 고무하는 동시에 삶을 즐기도록 부추겼다. 바이런, 샤토브리앙, 괴테, 지드 같은 많은 북쪽 출신의 작가들이 남유럽 나라들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보다 즐겁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작품세계를 성숙시킨다는 점에서 이중의 매력이었다.
브르타뉴 군도에서 배태된 어두운 상념들의 표현인 <섬>(1993)은 부지불식간에 남유럽의 공간들을 향하여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이미 그때 모든 감각들로 메아리치는 리듬과 육감의 시적 산문을 드러내 보였다. 바로 <지중해의 영감>(1994)에서 장 그르니에는 훗날 카뮈가, 아마도 니체에게서 힌트를 얻은 듯, “정오의 사상”이라고 명명하게 될 문체로, 자신만의 체험을 통해 얻은 감동과 감각과 성찰들을 표현하고 발전시킨다.
그르니에가 체험한 지중해는 계속하여 절제와 조화의 교훈을 주지만 또한 아폴론의 얼굴을 한 우리 인간조건의 어두운 몫을 암시하고 있다. 모든 색체들을 다 태워버릴 듯 태양이 작열하는 바닷가에서 지중해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어떤 헐벗음을 가르쳐 준다. 제한된 현실 가운데 살고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헐벗음, 이 작가가 “인간적인 것의 여백”이라고 지칭하는 그것 말이다.
(프로방스)
“내가 브르타뉴를 떠난 것은 오직 프로방스에 정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르니에가 이렇게 표현한 프로방스를 발견한 것은 1921년이었는데, 그때부터 이 젊은 작가는 종교적 감정을 재구성하는 길고 긴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프로방스는 그르니에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들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재검토하고 그 생각들을 고치거나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도록 자극한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속에 떠도는 주제들을 다시 검토하고 변주시키거나 순서를 바꾸는데, 이 주제들은 <섬>에 실린 마지막 몇 편의 글에서 이미 프로방스를 예고하고 있다. 이 고장의 모든 것이 긴장을 풀도록 권한다. “나는 이 고장에 올 때면 내 속에서 뭔가 맺혀 있던 것이 풀리고 마음속의 불안이 걷힌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마치 누군가 상처에 확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을 갖다 대면서 그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어떤 신선함의 감각이다.”
엄격한 가정, 딱딱한 학교 교육은 정신적인 상처를 유발할 수도 있었지만 그르니에는 모종의 무관심에 기대어 긴 시간에 걸쳐 극복 할 수 있었다. 그 무관심은 그로 하여금 회의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했다. 자신을 모든 것에 개방함과 동시에 경계하는 태도가 바로 회의주의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는 인간과 사물 들의 복잡함을 뚜렷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세계와 분리된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어떤 거리를 만들어내는 이런 입장은 지탱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차례로 그 거리를 단축시키기를 요구하고 또다시 그 거리를 벌려놓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 그르니에의 내면에 공존하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몰두하는 작업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철학자는 이상적인 것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거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반면 예술가는 존재하는 것을 고양시킨다. 프로방스는 바로 그 땅에 이상적인 것을 강요할 수 있었던 고장이다. 그리하여 가령 로마네스크 건축은 그르니에가 찬양해 마지않던 지연적 형태를 정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중해의 영감)
이 세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지중해는 그에게 순간순간의 계시들을 촉발한다.
그르니에는 이 책에 붙인 짧은 서문에서 저마다의 인간은 어떤 예외적이고 드높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장소들을 알고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가 이 책에서 의도하는 바를 밝히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가끔 삶을 초월하는 어떤 영혼의 상태를 엿본 적이 있다. 그 상태에서 보면 영광이란 아무것도 아닐 것 같고, 행복 그 자체는 거기서는 부질없는 것이다.”
<지중해의 영감>에서 글쓰기의 체계는 광범한 고전적 키케로 시대를 따라 전개되고 있다. 수다한 주제들의 그물망은 책 전체의 광원인 에피파니와 그 표현을 중심으로 촘촘히 짜이고 글쓰기는 그 광원을 번역 표현한다.
그르니에는 자연의 대 파노라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깊이를 보여주며 교환과 상응의 지역을 고안해낸다. 지중해 풍경의 장관 속에서 그르니에를 그토록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그 풍경이 돌연히 담아내는 내재적 깊이다. “우리가 빵과 물처럼 필요로 하는 것, 어떤 몸처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 그것은 우리를 개방된 하늘로 내던지고 우리의 고백들을 봇물처럼 해방시키는 저 가벼운 떠미는 힘이다.
(지중해에 던지는 시선들)
그르니에는 자신이 지중해 세게에 대하여 느끼는 매력을 “바람직한 세 가지 S,즉 침묵(Silence),태양(Soleil), 고독(solitude)이라는 유명한 공식으로 압축하여 표현했다. 이 세 가지 덕목은 발레리아가 언급한 세 가지 신들, 즉 바다, 하늘, 태양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결국 소멸하고 말하지만 근본적인 재화들인 바다, 태양, 빛에 대한 카뮈의 애착을 예고한다.
카뮈는 <안과 겉>에서 “나의 왕국은 송두리째 이 세계의 것이다”라고 소리쳐 말했다. 하늘의 왕국이라는 기독교적인 개념의 이 같은 영역 이동은 죽음 저 너머의 영원한 삶이라는 생각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의미한다. 영원은 지금 여기에 눈부신 모습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장 그르니에의 경우, 경험은 다름 아닌 부재의 경험인바, 그 부재의 한가운데서 애타는 부름이 솟아오른다. 이 두 작가는 주어진 자연의 여건들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재현을 구축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삶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 카뮈의 경우에는 은밀한 절망으로, 그르니에의 경우에는 은밀한 희망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 상관관계의 차이로 방향이 갈라진다. 한쪽은 서정적이고 다른 한쪽은 암시적인, 그 상이한 스타일로 자기를 표현하지만 둘 다 감각을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 보이는 방식에서는 유사하다.
카뮈는 “이 세상 최초의 아침처럼” 충동과 만남들의 신선함. 접촉과 감동의 놀라움을 되찾았기에 새로 태어난 영혼이 되어 높은 언덕을 내려온다. 그르니에는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자신을 다른 결흔들과 ‘간극’을 끊임없이 헤아린다.
카뮈는 자신이 목도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믿음은 인간에게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할애하는 어떤 휴머니즘의 모습을 갖춘다. 이 점에서 기이하게도 과학 정신과 가까운 그르니에는 에너지의 증가란 오직 에너지의 외적 원천에서만 올 수 있다고 믿는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개인은 그 자신보다 더 나은 무엇이 그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이것이 바로 그르니에의 휴머니즘이 갖는 의미다- 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철학자에 따르면 아마도 지중해가 주는 영감이란 바로 이것일 터다.
그리스는 인간을 신과 갈라놓는 거리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둘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리스의 철학, 예술, 과학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를 매개하려는 노력들이다. 우리가 조화, 비율, 척도 같은 개념들을 중계라는 개념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바로 그 중간적인 지점에서 그리스 사람들의 조직자적인 사랑과 기독교도들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사상은 다 같이 지중해의 산물이다. 그 둘은 모두 그들의 자양분인 빛에 매료되었고 그 빛을 눈부시게 반사했다.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을 편력하면서 예외적인 장소들을 찾아냈다. 나폴리에서처럼 세비야에서, 레바논에서처럼 이집트에서, 시디부사이드에서처럼 튀니스에서, 그는 돌연 획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했다. 지중해가 어느 날 분열과 대결의 장소이기를 그치고 특별한 만남들의 장소가 될지 어떨지는 미래가 말해주리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지중해는 몇몇 개인들과 집단들에게 있어서 수용, 통과, 교환의 공간이었다. 장 그르니에는 사상, 장소, 행동 들이 인간을 한데 결집시킨다고 믿는 쪽에 속한다. 사람들이 그의 지중해적 작품 속에서 유산의 전달과 사상의 순환이라는 바탕 위에 어떤 공통의 역사를 건설하는 데 힘이 될 어떤 상징을 읽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남쪽에 기원을 둔 유럽이 그 토대가 되는 가치들을 훼손하는 새로운 도전들에 대처해야 하는 이즈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적 예지의 교훈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8년 5월 파리에서. 프트리크 코르노
[Review]
“사람들 저마다에게는 행복을 위하여 미리부터 정해진 장소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단순한 삶의 즐거움을 넘어 황홀에 가까운 어떤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존재한다.”(본문)
프랑스의 뛰어난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장 그르니에’는 젊은 시절 지중해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사색과 글쓰기로 평생을 보냈다. 릴 대학교와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를 거쳐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및 예술학 담당 교수로 재직했다.
이 책에는 그가 여행했던 지중해 여러 도시들로 부터 받은 신의 계시와도 같은 사색의 글들이 철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는 그것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 책은 빛과 어둠, 흰색과 검은색, 북쪽과 남쪽,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절대와 일상, 행동과 명상, 확신과 의혹..., 이처럼 다양한 면에서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찢기고 흔들리는 어떤 정신의 망설임과 모험을 암시적인 문체로 형상화한 산문집이다.”(본문)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적절한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얼마나 영광에 찬 대낮인가! 나는 술잔 속에 담긴 한 송이 꽃처럼 태양이 진종일 내려와 쉬는 팔레르모의 금빛 소라 고동을 생각한다.” (본문). ‘장 그르니에’가 본 대서양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모두 달랐다. 빛과 어둠의 세계는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희망과 절망의 세계이기도 했다.
“나는 이 고장에 올 때면 내 속에서 뭔가 맺혀 있던 것이 풀리고 마음속의 불안이 걷힌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마치 누군가 상처에 확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을 갖다 대면서 그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어떤 신선함의 감각이다.” (본문)
여행은 시각적인 풍경을 보는 것만이 아니다.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의 자양분이 되어 인간 정신을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여행은 삶의 훈련과도 같다. 그래서 저자는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삶의 욕망이라고 했다.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이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갖는 첫 번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는 다른 곳으로 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복해지고 사랑하기 위한 장소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본문)
그러나 행복해지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장소에서 얻어지기보다는 느낌에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것은 마치 우리가 연극을 볼 때 배우의 얼굴보다는 그의 몸짓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도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모든 행복은 내가 실에 꿰어 하나의 묵주를 만들지 못하는 낱알들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지만 한순간만 지나면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부, 그러므로 전무.” (본문)
사유는 기술이 필요하다. 스스로 터득되기보다는 남들의 생각을 알고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이런 책을 읽는 이유다. 사유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정신은 고양되고 삶은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철학적 산문이기에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하나하나 모두가 가슴 깊이 다가온다.■
(본문)
“지중해는 그 특유의 선들과 형태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으로 진리를 행복과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든다. 그곳에서는 빛의 도취경 그 자체가 명상의 정신을 고양시킬 따름이다.”
“사막의 광막함은 인간의 정신에는 어떤 심연과도 같다.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 광막함에 일단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인간은 그것에 끌리는 느낌을 갖게 되어, 처음에는 그 매력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여겨지고 다음에는 충족시켜야 할 호기심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 더 이상 떨쳐버릴 수 없는 황홀함으로 보인다. 이 비정한 풍경들은 아침 이른 시간에 해가 떠올라 이슬을 빨아들이듯 인간을 마셔버린다. 인간에게 세계는 헛된 소란으로 가득한 무대 같아 보인다. 그는 오직 그 무대에서 물러나고 싶을 뿐이다.”-북아프리카 알제리-
“밤은 우리에게 통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밤은 낮이 뚜렷하게 한정하고 서로 갈라놓은 존재들을 통합하고 혼합한다. 빛은 실낱같은 질투의 기미처럼 슬며시 사물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물들은 마치 위험에 처한 배에 함께 탄 승객들처럼 한 덩어리가 된다. 그와 동시에 밤은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었고 우리가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던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데, 메디나(도시)의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며 우리가 인간보다 더 거대한 그 무엇에 다가가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밤을 통해서이다.”p54
“나는 샤토브리앙이 달빛을 받으며 로마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었던 그 크리스마스의 밤을 즐겨 머리에 떠올려보곤 한다.”
“인간은 자신의 척도에 맞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 삶을 버려야 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이란 없으니 말이다.”
“도피해야 할 것인가? 창조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각자 자신의 내밀한 필요성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스탕달은 이탈리아에서는 자기를 실현 한다. 파리나 모스크바에서는 자신을 찾지 못한다. ”
“나는 내가 보았던 것을 모두 다 잊었다. 황소가 살아남은 투우장에 대해서는 오직 그에게 상처를 입혔던 투우사의 리본 달린 창들에 대한 기억만 간직하고 있듯이 나는 오직 나를 괴롭게 했던 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따분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고,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는 사람들과 상종하고 있으며, 떠날 수 없는 한 장소에 발이 묶여 있고, 남들에게는 무익하고 자신에게는 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혹시나 사람들이 위험부담 없이 즐기려는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안락함과 편리함에 끌리는 마음, 사회와 세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뭐든 노력하지 않고도 연기를 바라며 그저 식탁에 가 앉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갔다가는 완전히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무언가 위대한 것을 실현했거나 느껴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돌시네아가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선언하기에 앞서, 그녀를 만나봐야겠다고 하는 상인들에게 돈키호테는 말한다. “만약 내가 당신들에게 그 여자를 보여준다면, 이미 그토록 널리 알려진 진실을 새삼 고백하는 게 당신들에게 무슨 소용이겠소?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그녀를 보지 않고도 그 진실을 믿는 일, 그 진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맹세하고 옹호하는 일이라 이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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