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5:20-27(엘리사와 게하시)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 곧 제자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사 선지자와 게하시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엘리사 선지자를 오늘날 주의 종으로 해석하고, 게하시의 순종을 교회 직분자들의 순종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성경 속의 엘리사 선지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모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등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모형이듯이, 엘리사 선지자 역시 예수님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를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실 구원사역을 미리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당시 엘리사 선지자가 행한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엘리사’의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란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 역시 ‘구원자’란 뜻이다. 그리고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쳐주었고, 예수님 역시 많은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셨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행하였고, 예수님 역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곧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푸셨다. 엘리사가 죽은 후 그 시체가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닿았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많은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 결국 엘리사 이야기는 다 예수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눅 24:27절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럼 엘리사 선지자가 예수님의 모형이라먄 사환 게하시는 누구를 의미할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형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가룟 유다의 모형이다. 왜냐하면 게하시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요 종으로 쓰임받음과 같이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제자로 쓰임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물질에 눈이 멀어 범죄 한 후 나병에 걸린 것과 같이 가룟 유다도 물질로 타락하여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짓고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그럼 본문을 통해 나타난 복음은 무엇일까?
열왕기하 5:23-24절을 보자.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을 치료받은 후 감사해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선물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때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달려가서 ‘은 두 달란트와 두 벌 옷’을 받아 집에 감추어 두었다. 이는 곧 게하시가 물질에 대한 욕심과 탐심으로 인해 범죄 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 역시 물질에 눈이 멀어 탐심으로 인해 마귀의 미혹을 받아 스승 곧 예수님을 종 한 사람의 몸 값인 은 30에 팔아 넘겼다(마태복음 26:14-16).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게하시의 범죄를 미리 알고 있었다. 열왕기하 5:26.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범죄를 미리 아셨다. 마태복음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럼 성경이 엘리사 선지자와 게하시 이야기를 기록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결국 예수님 이야기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게하시가 그러하듯, 가룟유다가 그러하듯, 모든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에 빠져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성전정화 사건’이다. 요 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어 쫓으시는데, 이 모습은 구약교회는 물질의 미혹을 받아 타락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다를까? 오늘날 세상을 보자. 다 돈을 사랑하고, 다 부자 되기 원하며, 다 돈의 종이 되어 살아간다. 더군다나 계속되는 세계적 코로나 사태로 이러한 사고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오징어 게임’이다.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456명의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현 세대의 모습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누구를 밟고, 죽이고 쟁취하고자 하는 세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이 게하시며 가룟유다 이다. 그러므로 게하시에게 나병이 발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게하시가 나병에 걸린 것은(왕하 5:27)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나병은 구약시대에 죄를 상징하는 대표적 질병이다. 결국 하나님은 게하시의 탐욕을 통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탐욕의 결과 나병,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추방 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야기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나병환자의 정결예법을 통해 다시 회복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신다. 마 8:1-3절을 보자. 예수님은 마 5-7장에서 산상수훈을 하신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 오시는데, 그 첫 번째 만나는 인물이 나병환자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산상수훈은 산,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따른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신다는 것은 산으로 오르셨으니 당연히 내려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나병환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렇다. 주님은 원하신다. 죄인이 치유, 즉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 손을 대시는 것이다. 환언하면 죄인에게 있는 그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죄인을 치유(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눅 5:14)”라고 명하신다(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예물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었다).
복음은 항상 죄인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여 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울을 벗은 우리의 본 모습을 보게 한 자들은 복음은 아름답고 최고의 기쁜 소식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끌리기 시작한다. 순종의 삶의 시작인 것이다. 복음을 깨닫고 그 은혜로 순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 역시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판 후에 자신이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을 알았으나 회개하지 않고 후회만하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게하시와 가룟 유다가 주는 교훈은 바로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에는 범죄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