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들이,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더 나아가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도 자기 소견이나 이기가 중심이 될 수 있고, 세상적인 인본주의나 민족주의 등에 몰입함으로 인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모양이 참 우습게 되곤 하며, 상처와 갈등들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상 오늘 본문의 요나 선지자야 말로 요나서 처음에 보면 자신의 소견과 감정과 입장이 최고 중심이 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명령까지 거역하면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다가 그 자신 뿐 아니라 함께 배에 탄 모두를 위태롭게 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오늘 본문에 보면 박넝쿨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처지와 입장과 고통에 함몰한 나머지 죽을 듯 성을 내고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하면서 원망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것인데 사실 그 이면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봤을 때, 더욱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고 절박한 사안이었으며, 진정 그 요나의 박넝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니느웨의 십이만 여명을 요나가 함부로 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더군다나 그들을 목숨까지, 어떤 면에서는 영혼까지 달린 중대하고도 또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게 하찮게 여겼거나 멸절까지 당연 시한 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에 더욱 모순되고 결코 작을 수 없는 패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서, 특히 선지자들이나 오늘날의 목회자들, 항존 직분자들 등과 같이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 앞에 서 있고, 많은 것들을 받은 자들일수록 최대한 자신의 소견과 이기들 등은 부인할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전적인 중심이자 우선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악을 반복하고 실수하며 그 자신이 초라해 지거나 다른 사람들까지 위태하게 하는 일들 등은 적잖이 막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안전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대신 다른 그 누구보다 만복의 주인이신 하나님,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만 사실상 그것부터가 내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로는 애초에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분별하고 인정하면서 실제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마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더욱 자신을 부인하고 정욕과 세속 등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말씀을 가장 최우선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함과 함께 갈수록 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해 지고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이 됨으로 인해 더욱 더 죄악들, 악한 세력들, 유혹과 시험들, 소견과 세속들 등과 싸우고 더더욱 치열하고 뜨거운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의 선순환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공유된 예배 및 설교 활용, 참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공유된 것은 행복카페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2024년 7월 28일(주일) 주일 오전 예배 전체('자기중심의 패착'/욘4:9~11/음성)입니다
https://youtu.be/gUsKQqOeoqQ?si=hD2hEPTYs5Fwol6U
(혹 설교 부분만 필요하신 분들은 바로 위에 유튜브 링크 눌러 주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