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십자군(1096-99)
볼론의 곧프레(Godfrey of Bduilon)가 인솔한 주력부대는 1096년 크리스마스날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고 1097년 6월에 니케아를 함락시켰다.
10월에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8개월만에 함락시켰다.
1099년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내의 모하멜 교도들을 멸절시켰다.
동년 8월 12일에 에집트의 원병을 아스칼론 근처에서 격퇴시키고 성지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곧프레는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예수 묘지의 보호자’(Protector of the Holy Sepulchre)로 선택되었다.
곧프레는 그의 대관식에 금관을 쓰기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주께서 가시관을 쓰신 곳에서 금관을 쓰고 다스릴 수 없다는 신앙적 자세 때문이었다.
1100년 7월에 곧프레는 죽고 후계자로 동생 볼드윈(Baldwin 1100-1118)이 계승하였다.
볼드윈은 라틴왕국을 세우고 안디옥, 트리블리, 에뎃사등 팔레스틴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인들이 식민되고 봉건제도의 정치형식이 채택되었다.
예루살렘에는 라틴 교회의 대감독이 있었고 전국에는 4개의 대감독구와 10개의 감독구가 설정되었으며 수처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이 라틴왕국은 88년동안 지속되었다.
• 제2차 십자군(1147-1148)
교황 유게니유스 3세(Eugenius Ⅲ)에 의하여 제창되고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uaux)의하여 모집되고 프랑스왕 루이 7세(Louis Ⅶ) 독일의 콘라드(Conrad)황제에 의하여 지휘된 십자군이 1147년에 출정의 길에 올랐다.
이 원정은 회교군이 데뎃사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의 동북부의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성지의 안전이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출정은 처음에 보인 종교적 열심도 사라지고 바다에서 파선을 당하고 육지에서는 패전을 당하여 소아시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많은 병력의 소모가 있었다.
팔레스틴에 도착한 부대는 1148년 다마스커스를 침략하려다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라틴왕국이 잔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회교도 군부의 내분(內紛)때문이었다.
• 제3차 십자군(1189-1192)
1187년 7월 회교도의 장군 살라딘(Salsdin)이 거느린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의 민심은 다시 제3의 원정을 요청하는데 한데 모였다.
영국의 리차드(Richard)왕과 독일의 프레데릭(Frederick Barbarossa)황제와 프랑스의 필립(Philip Augustus)왕이 거느린 3국연합군이 출정하였다.
그러나 독일 왕은 실리시아에서 익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두 국왕은 서로 지휘권 문제로 다투게 됐다.
필립왕은 자국의 정치적 불안을 핑계로 귀국하고 말았다.
잔유 병력을 이끌고 리차드는 3년 8개월동안 살라딘군과 대결하여 싸웠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싸움에 지친 양군은 조약을 체결하고 리차드는 철병을 하였다.
조약의 결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는 보호와 세금 면제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나 실상은 실패한 원정으로 끝난 셈이었다.
• 제4차 십자군(1202-1204)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 Ⅲ)의 주장으로 플랑데르(Flanders)의 볼드윈(Balwin)에 의하여 지휘된 십자군이 출정했다.
전략상 애굽 원정 다음에 성지 탈환을 계획했으나 군대 운송의 난제에 부딪쳤다.
결국 성지 탈환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우스 3세(Alexius Ⅲ)를 폐위시키고 이곳에 라틴 왕국을 세워 볼드윈이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라틴 감독이 임명되고 희랍교회는 교황에게 50여년간 예속되었다. 이로써 동서교회의 감정 대립은 더욱 심각하여졌다.
• 제5차 십자군(1212)
주로 소년층으로 구성된 군대였으므로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프랑스의 목동 스데반과 독일의 소녀 니콜라스가 불과 수천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도중에 흩어지고 애굽으로 출정한 많은 소년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다.
• 제6차 십자군(1227-1229)
독일 황제 프레드릭 2세(Frederick Ⅱ)가 성지에 도착하여 싸우지도 않고 협상으로 10년간의 휴전 조약을 애굽의 군주(Sultan)와 맺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지중해 해안 통로등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1244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는 회교도의 손에 들어간 채 1947년 이스라엘군에 의하여 탈환되기 까지 700년간 이교도에게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Ⅸ)는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으나 카이로 도상에서 포로가 되어 1만여명의 부하 군인들의 시체를 뒤에 둔채 거액의 속전(贖錢)으로 겨우 풀려 돌아갔다.
1270년 다시 군대를 일으켜 투니스(Tunis)로 향해 진군했으나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에드워드 Ⅰ세(Edward Ⅰ)가 원정하여 나사렛을 빼앗고 10년간의 강화 조약을 맺고 돌아왔다.
1291년에 팔레스틴의 최후 점령지가 상실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약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군사적으로 평가할 때 실패하였다.
성지 회복이 감정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끝내는 성지 탈환의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만 이러한 계속적인 접전으로 말미암아 군사력을 소멸시킴으로써 회교군의 유럽진출을 저지시키는데 제동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만일 십자군의 계속적인 출정이 없었던들 콘스탄티노플은 훨씬 전에 회교군의 손에 함락되었을 것이다.
비록 성지의 영구적 탈환은 실패하였을지라도 십자군 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 교황의 세력 강화 : 교황의 호소와 주장에 의하여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각국 군왕들이 다 교황의 명령을 따라 출정하게 되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출정하 는 군병들의 부동산을 저렴 가격으로 매입하거나 위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러나 많은 경우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의 재산은 교회의 소유화되어 교 회는 많은 재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2. 민족과 국가의 단결을 촉진시켜 기독교국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과거에는 서구 각국이 피차 고립되어 있었으나 이제 교류와 연합으로 공 동 운명체 의식이 새로워졌다.
3. 봉건제도가 쇠퇴하여지고 중산층의 소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봉주시대에서 중앙 집권의 군주시대로 옮겨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4. 해운의 발달을 촉진하여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 특히 이태리 도시들의 번영이 뒤 따랐으며 무역의 발달과 함께 공업, 상업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5. 모하멭교 국가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수입하고 동양과의 접촉할 기회를 얻어 동 서 교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지성의 각성이 일어나고 스콜라 신학의 발달을 촉 진시켰다.
이상과 같은 밝은 결과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은 어두운 측변의 역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성지 탈환이란 드높은 이상에서 시작한 원정은 세월이 갈수록 십자군들의 종교적 열심의 변질로 횡포와 약탈 등의 탈선으로 얼룩졌다.
십자군들의 지휘관들 사이의 내부적 알력은 원정의 중도(中途)실패를 야기시켰고 콘스탄티노플에다 세운 라틴교구 설정은 동 서방 교회 분리의 원인(遠因)이 되게 하였다.
모슬렘에 대항하는 싸움을 장려하므로 교회의 목적에 대한 의아심이 생겨지고 십자군의 군사적 실패는 그 운동 자체의 성경적 타당성에 질문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교황권의 일시적 신장이 따르기는 했으나 군복을 벗은 군왕들이 교황의 명령에 끝내 따르기를 거절하므로 교정(敎政)투쟁의 어두운 중세사를 남기게 하였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