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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대 영화제로 우뚝 선 부산 국제 영화제]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짜인 조직위원회의 자율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 김동호 명예 집행위원장과 이용관 집행위원장, 전양준·김지석 부위원장 등 영화 전문가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운영을 맡고 부산광역시는 행정 및 재정 지원만을 전담한 철저한 역할 분담이 주효하였다. ‘저비용 고효율’을 지향한 운영 방침과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상업성을 배제한 것도 성공의 주요인이다. 또 작품을 선정해 순위를 정하는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의 경쟁 영화제 대신 비경쟁 영화제를 선택한 것도 성공에 힘을 보탰다. 여기에 부산 시민의 영화에 대한 강한 애정과 자발적인 참여, 영화 전문가 및 행정 기관 등의 하나같은 의지를 잘 조화시킨 점도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해가 바뀐 1998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알리슨 다코다지 기자는 「아시아의 칸[The Cannes of Asia]」이라는 과감한 제목을 뽑으며 이렇게 썼다. “아마 그것은 수천 명의 사람들과 별빛이 가득한 해변이었거나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6층 높이의 대형 야외 스크린이었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홍콩의 관금봉이나 중국의 티안 주앙주앙, 그리고 인도의 수디르마슈리갈 같은 보기 힘든 아시아 감독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또 다르게는 접시에 가득 담긴 부드러운 회와 좋은 술이 끊임없이 제공되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어쨌거나 부산 국제 영화제의 화려한 개막식은 이 8일간의 행사가 ‘아시아의 칸’으로 발돋움하려는 서막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1999년 4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전후해 언론들은 부산 국제 영화제를 아시아 최고로 손꼽기 시작하였다. 『조선 일보』는 부산 국제 영화제 결산 기사[1999년 10월 25일]에서 「아시아 대표 영화제 자리 굳혔다」라는 제목을 뽑으며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23일 폐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관객과 부산 시민, 국내외 영화인들이 한데 어울린 풍성한 영상 축제였다. 부산 영화제는 4회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열흘 동안 관객은 18만 명, 작년보다 1만 명가량 줄었지만 상영관이 밀집한 남포동은 젊은 관객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각국 영화 관계자와 기자들을 포함한 해외 게스트 400여 명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르몽드』의 자크 만델봄 기자는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부산에서의 움직임」이라는 제목과 「부산, 한국의 영화제는 18만 5000명의 관객을 모으면서 그 중요성을 확인시켰다」라는 부제의 글을 통해 이 해 영화제를 유럽 전역에 알렸다. “한국의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열린 부산 국제 영화제는 예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 영화의 가장 큰 진열장으로 소임을 확인받는 자리였다. 한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이후로 18만 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53개국으로부터 온 208편의 영화들을 선보였다.” 2002년 부산을 찾았던 홍콩의 유력지 『명보』는 홍콩이 아시아 최고 영화제 자리를 부산에 내주었음을 인정하는 기사를 작성해 눈길을 끌었다. 「영화 세력 한국에 모이다」라는 제목의 부산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2002년 11월 30일] “11월 하순, 한국 동남쪽의 연해 도시인 부산이 평일의 항구가 아닌 아시아 최고의 주목을 받는 영화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 영화계의 주요인물[감독, 배우, 영화 배급사, 영화진흥위원회] 및 제1회 때 400명 정도에서 3,000명까지 증가한 해외 언론 매체 관계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미 부산 국제 영화제는 7회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에게 아시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 인식되어 수준이 낮은 상하이와 태국 등은 물론 도쿄, 홍콩의 수준도 앞질렀다. 7년 전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에 초점을 둔 홍콩 국제 영화제를 모델로 하였다. 그러나 7년 후인 지금, 부산은 아시아 영화의 대표 시장이자 기초가 되었다. 한국 영화의 풍성한 발전적 상황은 홍콩 국제 영화제의 탄생이 당시 홍콩 영화의 새로운 물결과 혁명의 바람을 일으킨 것과 같다.” 아무래도 언론의 평가는 2005년 제10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에 맞춰 절정을 이루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2004년 11월 22일]은 ‘PIFF,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부산 국제 영화제 사람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타임』의 ‘BEST OF ASIA’는 ‘정신, 몸, 영혼’의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각 부문별 장소와 이벤트 등을 선정하였는데 부산 국제 영화제는 이 중 정신[BEST FOR YOUR MIND] 부문에서 ‘최고의 영화제’로 뽑힌 것이다. 당시 『타임』은 “컨테이너 항구로 잘 알려져 있는 부산에서는 매년 10월 일주일 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필름 페스티벌인 부산 국제 영화제가 개최된다.”고 소개하며 “지난 9회 행사에는 262개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16만 6000명의 관객이 부산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10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맞자 언론은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한편 ‘변화’, ‘재도약’, ‘미래’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부산 국제 영화제의 내일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부산의 언론이 먼저 움직였다. 『부산 일보』는 「PIFF 10살, 제도약 어떻게」라는 고민 속에 칸, 베를린, 베니스, 로테르담, 토론토 등 세계 5대 영화제를 현지 취재해 이를 12회 시리즈로 다루었다. 그리고 「PIFF 미래를 찾아서-세계 영화제서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영화제 성공 비결 작품 선정이 반이」, 「관객, 축제를 움직인다」, 「필름 마켓은 필수 영양소」, 「전용관은 성장 버팀목」, 「스폰서를 찾아라」, 「지역을 살찌운다」, 「경쟁이냐 비경쟁이냐」, 「영화제의 사령탑」, 「연중 타오르는 영화 불꽃」, 「PIFF, 새 도약을 향해」 등의 제목을 뽑으며 약 석 달간 시리즈를 이어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