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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나는 조금 ‘진보적’이었다. 장사를 하는 아버지 덕분에 크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일제(日帝) 말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일제는 청소년들이 조금만 똑똑해도 소년전차대나 소년항공대, 소년해병대에 지원하라고 강요했다.
그런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일본 땅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관련 책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 레닌, 볼셰비키 혁명사…. 조선 땅에서였다면 한 권만 소지하고 있어도 단박에 ‘요시찰(要視察) 대상’으로 찍히기 십상이었을 게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공산주의 운동의 조직 원리나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알 수 있었다. 혁명은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노동운동의 전개, 사회민주주의 등에 관련된 책들도 많이 읽었다. 그런 책들은 한때의 과격한 투쟁이나 급진적인 슬로건들도 결국은 현실에 맞게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나는 광복 공간에서의 격렬한 좌우익 대립에서는 한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고 배운 젊은이로 알려졌지만 어떤 단체나 정당에 몸담지는 않았다. 주변의 많은 친구가 민청(민주청년동맹)이나 그 후신인 애청(조선애국청년동맹) 같은 남로당 외곽 조직에 몸담았다가 비명(非命)에 갔다.
전쟁
전쟁이 터졌다.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예비 검속(檢束)한다기에 6개월 정도 숨어 살았다. 마침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었다. 포탄 탄피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장을 관리할 인력이 필요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을 고급 인력이라고 배려해 주었다. 나는 석 달 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공장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병역을 대신했다. 당시에는 그걸 귀휴병(歸休兵) 제도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던 1953년 나는 동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해 경제학을 계속 공부했다. 전쟁 직후였는지라 학업에 전념하기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대학을 졸업해도 변변한 직장도 없었다. 공부는 석사 학위를 받는 것으로 끝냈다. 후일 정계에 입문한 후, 박사 과정을 밟으라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박사 학위는 학문을 계속할 사람이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박사 학위를 따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1955년 극동경금속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가정용 식기, 기계 부품 제작 및 수리 등을 하는 회사였다. 크게 실패한 사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자본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난민주택 건설
부산 동삼동에서 난민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도 했다. 6·25 이후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부산 곳곳에는 판잣집이 들어섰다. USOM(주한 미 경제협조처)에서는 전국 여러 곳에서 전재민(戰災民)들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을 추진했지만, 지지부진했다. 거기에도 부정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1957년 어느 날 배상갑(裵上甲) 부산시장, 이영언(李榮彦) 국회의원 등이 나를 찾아와서 난민주택 건설 사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사라호 태풍 이재민(罹災民) 구호, 고등공민학교 및 무료예식장 운영 등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동삼동 난민주택 건설 사업은 부산시에서 내놓은 10만 평의 땅에 600동(棟)의 난민주택을 짓는 사업이었다. 집은 물론 공장, 시장, 경로당, 유치원, 미장원, 목욕탕, 창고 등 부대(附帶)시설까지 함께 짓는, 당시로서는 대단위 지역개발사업이었다. 집은 대지는 50~100평이었고, 건평은 6~7.5평 정도였다. 방 둘, 마루와 부엌이 있는 작은 집이었지만, 전재민들에게는 둘도 없는 보금자리가 될 터였다. 나로서도 영리사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봉사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목재와 시멘트는 USOM이 대고, 주택부지는 부산시가 제공하기로 했다. 인건비와 운영비 등은 이영언 의원이 맡기로 했다.
2년 안에 끝낼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우선 부산시가 내놓은 땅이 굴곡이 심한 산비탈이었다. 집 설계를 놓고 USOM 관계자들과 의견 차이가 있었다. 미국인인 그들은 너른 들판에 집을 짓는 데 익숙해 있었다. 산비탈에 짓는 집과는 구조가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그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USOM 관계자들로부터 건자재를 확보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이영언 의원이 인건비 등을 해결해 주기로 했지만, 서울의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는 그에게 마냥 기댈 수도 없었다. 소소한 경비는 내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거기에 4·19와 5·16 등 정치적 격변이 이어졌다. 부산시가 당초 약속했던 여러 행정적 지원은 거의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5·16혁명 이후에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시행된 난민주택사업들 가운데 유일한 성공사례라는 평가는 큰 위안이 되었다. 이러한 평가가 후일 부산에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청년문제연구소
사회문제연구소라는 게 있었다. 나중에 3공화국 시절 문화공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하게 되는 신범식(申範植)씨가 소장이었다. 각 대학에서 학생회장 등을 지낸 유망한 젊은이들이 회원이었다. 그들 중에는 남재희(南載熙) 전 노동부 장관, 김일성 연구로 유명한 이명영(李命英) 전 성균관대 교수 등도 있었다. 남 전 장관은 나중에 나와 사돈이 된다.
사회문제연구소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진보적인 색채가 있었는데, 나중에 가서 자유당과 선이 닿았다. 자유당 온건파였던 이재학(李在鶴) 국회부의장 등이 이 사회문제연구소를 통해 자유당에 ‘젊은 피’를 수혈(輸血)하려 한 것이다. 사회문제연구소는 청년문제연구소로 개편됐다. 신범식씨는 전국의 대학 강사들을 주로 영입했다. 당시 부산 동아대, 부산대, 수산대 등에 출강하던 나는 경남지부장을 맡았다.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洪璡基)씨가 초대(初代) 회장, 김용우(金用雨) 전 국방부 장관이 2대 회장을 맡았다. 신범식씨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가, 자금을 대는 이재학 부의장의 아들 이교성씨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대한노총 등 여러 사회단체를 엮어 대한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을 만들었는데, 청년문제연구소도 여기에 합류시켰다. 나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청년문제연구소에 몸담았던 이들로는 신범식씨 외에도 박규상(朴奎祥), 정태성(鄭泰成), 김호칠(金好七)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당초 자유당에 ‘젊은 피’를 수혈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청년문제연구소가 공화당 인맥(人脈)의 요람이 된 셈이다.
7·29총선 출마했으나…
4·19 후인 1960년 7월 29일 민의원과 참의원을 뽑는 제5대 총선이 실시됐다. |
1960년 3·15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는 4·19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하야(下野)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린 4·19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4·19는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뚜렷한 주체도, 이념도, 비전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가 없었기에 4·19의 결과물은 이승만 정권 시절 야당이던 민주당이 가져갔다. 자유당 정권 시절에 민주당이 반(反)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것은 사실이지만, 4·19에서 민주당의 역할은 미미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4·19의 결과물을 독식하려 했다.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나는 부산 영도에서 출마했다. 사실 정치에 딱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도 출신 국회의원이 나와야 한다”는 친구들의 성화에 출사표(出師表)를 던졌다.
그러자 민주당 쪽에서 방해공작이 들어왔다. 내가 후보로 등록하자, 경찰은 내 주변 친구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친구들 중에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걸 빌미로 삼은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등록 사흘 만에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당시는 허정(許政) 과도정부 시절이었다. 정권 차원에서, 경찰에서 민주당 편을 들라고 지시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일선 경찰은 민주당 후보와 야합(野合)했다.
곳곳에서 자유당 출신 후보의 등록을 막거나 사퇴를 촉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3·15 부정선거야 자유당 정권이 잘못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결국 민주당이 모든 걸 차지하겠다는 얘기였다.
기가 막혔다. ‘자유당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를 외쳐온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내 눈에는 민주당은 자유당과 다를 바 없는 정치집단이었고, 7·29총선도 3·15선거 못지않게 부정이 많았던 선거였다.
이 일은 내게 과거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 민주당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었다. 하긴 친일지주(親日地主) 계층에 뿌리를 둔 민주당은 원래 내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70년 전통 야당’을 주장하는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을 보면 때때로 고소(苦笑)를 머금게 된다. ‘몸은 진보적인데, 뿌리는 극우(極右)’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여튼 7·29총선은 내게 씁쓸한 기억을 남겼다. 후일 정치를 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정치’를 외치는 민주공화당에 공명(共鳴)한 데에는 아마 이때의 기억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신파(新派)와 구파(舊派) 간의 다툼으로 편한 날이 없었다. 시민들도, 학생들도, 심지어는 국민학생과 경찰들까지도 거리로 나와 데모를 했다.
李在鶴 전 국회부의장
1961년 3월 31일 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정에 선 이재학 전 국회부의장. |
청년문제연구소를 설립해 자유당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 했던 이재학 전 국회부의장은 자유당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 야당이었던 민주당과도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난 후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하게 됐을 때, 그도 단죄의 칼날을 받게 되었다. 그가 체포되던 날, 나는 그의 집에 있었다. 이 전 부의장이나 그의 아들 이교성씨와는 청년문제연구소 등으로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잡혀가면서 이 전 부의장은 소리쳤다. “유진산(柳珍山)이! 그렇게 안 보았는데,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이 전 부의장은 자유당 말기에, 민주당 구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진산 의원과 함께 내각책임제 개헌을 모색했었다. 그 때문에 민주당 사람들과는 신뢰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도 잡혀가게 되자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후일 나는 이재학 전 부의장과 함께 낚시를 다니기도 했다. 이 전 부의장이 민주당 대표였던 조병옥(趙炳玉) 박사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 생각난다. “조병옥 박사는 참 훌륭한 분이었소. 나라를 위해 꼭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할 법이 있어 조 박사를 찾아뵙고 협조를 요청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니, 최선을 다해 우리 당 의원들을 설득해 보리다. 정 설득이 안 되면, 나 한 사람만이라도 꼭 찬성표를 던지겠소.’”
여야(與野) 간에 극한대립만 계속될 때면, 이재학 전 부의장이 말해주던 조병옥 박사 생각이 난다.
재건국민운동
1961년 8월 재건국민운동본부 전국시군촉진회 부회장회의. 왼쪽부터 유진오 본부장,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송요찬 내각수반. |
혼란은 해를 넘기고서도 계속됐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쿠데타 소식은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혁명공약들은 인상적이었다. 부패와 구악(舊惡) 일소, 민생고(民生苦) 해결, 국가 자주경제 재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인텔리’로서 쿠데타에 찬성할 수는 없었지만, ‘아, 이 사람들이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게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5·16은 분명한 주체세력과 비전이 있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쿠데타 직후 좌익인사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었다. 나도 우리 집에 통일운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등 나름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던 터라 경찰에 잡혀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왔다. 동삼동 난민주택건설 사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나를 붙잡아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공약에서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고 선언했던 5·16군사정부는 재건국민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본부장이 됐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한 부산대·동아대 출신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 동참을 요청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어떻게 쿠데타한 사람들하고 일을 하나?”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는 육군 대령 한 명도 한 달을 찾아왔다. ‘16인 하극상(下剋上) 사건(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이 4·19 후 부패한 육군 상층부의 퇴진을 요구했던 사건)’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냥 마다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심 깊게 공부한 영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보면, 그 발전 과정에서 요맨(yeoman·자영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생적 국민운동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던 필리핀에서는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사회발전을 위한 국민운동을 제창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국민운동이 있어야만 구악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재건국민운동은 위로부터의 국민운동이라는 점에서 다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함께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건국민운동 경남지부 운영부장이 된 나는 열심히 뛰었다. 군사정권에 협력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경상남도 내 시·군(市郡)에 재건국민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토론하던 일들이 떠오른다. 재건국민운동본부 경남지부 사람들만큼 열정, 참신함, 의욕을 갖고 일하던 사람들은 다시 없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재건동지회
그러던 어느 날 박규상 동아대 교수가 찾아왔다. 그와는 평소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다소 생활에 여유도 있고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대인(對人)관계가 좋아 따르는 젊은 사람도 많으니, 생활환경을 바꾸어보면 어떨까?”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박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며칠 후 누가 찾아올 테니, 얘기를 들어보라”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며칠 후 부산대 출신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김영복(金永福), 김살모이(金撒母耳)씨 등 두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게 “박 교수로부터 무슨 얘기를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별 얘기는 없었고, 누가 찾아올 테니 얘기를 들어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 선생님을 모시고 일을 좀 했으면 하는데, 꼭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부산 동광동에 있는 한 건물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사무실 입구에는 ‘동양화학’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사무실에는 박규상 교수가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박 교수는 “군사정부가 민정(民政)이양을 앞두고 때묻지 않고 참신한 인사들에게 정치를 맡기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지식과 신망, 능력이 있고 깨끗한 인사들을 찾아 조직화하고 있다”면서 동참을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평소 그의 성품이나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참 동안 그 일의 필요성을 강조한 박 교수는 유인물을 한 장 내보이면서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일에 어떻게 도장을 찍느냐?”고 거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민정 이양에 대비한 정당 준비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공화당 사전(事前)조직이라는 것은 몰랐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박 교수 등을 다시 만났다. 4·19와 5·16의 역사적 의미, 새 정당 세력과 5·16 주체세력 간의 관계, 민정 이후 정치가 해야 할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지도세력이 나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나는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의 충정과 양심, 의욕을 정직하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일 그들의 언행(言行)에 불일치가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나의 길을 걷겠다”고 말한 후 동참하기로 약속했다. 박 교수는 다시 일전의 유인물을 내밀면서 서명해 달라고 했다. 그 내용을 보니 조직의 이름은 ‘재건동지회’라고 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경남 지역 책임자 요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무국 요원 교육
1962년 5월 15일 서울시청 앞에서는 재건국민운동의 한 축인 재건청년회와 부녀회의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렸다. |
조직 확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던 1962년 하반기 어느 날, 중앙에서 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당한 기회에 중도하차할 생각이었던 나는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서울로 올라가 재건동지회 5기생 교육을 받았다. 교육 장소는 서울 낙원동의 유명한 한정식집 오진암 옆에 있는 큰 집이었다.
윤천주(尹天柱) 서울대 교수 등이 강의를 맡았다. 강사들은 정치학 원론에 해당하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각국의 정당론, 외국의 사례와 비교한 한국 정당의 문제점,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 4·19와 5·16의 불가피성, 민정 이양의 문제점과 5·16혁명 이념의 계승, 새 정당의 조직 원리와 실천방법, 한국 경제 현실에 대한 분석과 경제발전 청사진 등에 대해 강의했다. 눈이 뜨이는 느낌이었다. 수강자는 30여 명이었는데, 5~6명씩 소그룹으로 편성되어 워크숍을 했다.
교육은 매우 유익했다. 솔직히 재건동지회 활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건 5·16혁명의 이념에 마음에서부터 동의해서는 아니었다. 박규상 교수 등과의 인간관계 등 때문에 억지로 끌려갔다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때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일주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내려올 때에는, 나는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역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이건 되는 일이고,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무장해 있었다. 재건동지회 조직이 민정 이양 후 새로운 여당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교육을 마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화당 事前조직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된 공화당 사전조직이다. 후일 야당 등에서는 “군사정부가 야당 정치인들은 정치규제로 묶어놓고 자기들은 비밀리에 공화당 조직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 상황에서 정치활동이 재개될 경우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은 옛 야당 세력이었다. 그들은 정치활동이 재개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옛날 인맥과 조직을 다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5·16 세력은 당장 권력을 잡고 있기는 했지만, 민정 이양 시 가동할 수 있는 정치적 인프라는 없었다. 때문에 혁명 주체세력 입장에서는 민정 이양 후 정치를 계속하려는 이상 정당 사전조직은 불가피했다.
공화당은 기존 정당들과는 달리 ‘사무국 중심의 정당’을 지향했다. 이는 김종필(金鐘泌) 중앙정보부장의 발상이었다. 그는 기존 정당들이 ‘국회의원 중심 정당’으로 운영되다 보니, 각종 이권(利權)이나 청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바람에 정치가 왜곡됐다고 생각했다.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 되면, 특정 정치인의 사당(私黨)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공당(公黨)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조국 근대화라는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사무국 조직요원 인선 기준은 상당히 엄격했다. ① 전에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일 것 ②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일 것 ③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일 것 ④ 일정한 재력(財力)을 가진 사람일 것 등이었다. 국회의원 지역구마다 사무국장을 비롯해 세 명의 필수요원을 확보해야 했는데, 당시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수, 초·중·고교 교장, 시·도 국장급 간부 등밖에 없었다. 이미 안정된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국회의원도 아니고 사무처 요원으로 일해 달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정 이양 후 새로운 집권여당의 사무처 요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 있어도 좋았겠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에둘러서 “나라를 위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래도 용기 있게 동참해 주신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JP와의 만남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며 공화당 사전조직을 지휘했던 JP는 이 문제로 논란이 커지자 1963년 2월 25일 외유를 떠났다. |
1962년 11월 29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날 정오에 부산 동래관광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호텔로 갔더니 지부장이 “김종필(이하 JP) 부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JP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누군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을 구속, 수감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 등을 구속했다는 보고였다. 《한국일보》는 그 전날, 5·16 주체세력들이 신당(新黨) 창당을 준비하고 있으며 신당의 가칭(假稱)은 사회노동당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안 그래도 공화당 사전조직이나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JP의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에 대해 별의별 소문이 다 돌던 시절이었다. 미국이나 옛 야당에서도 의구심(疑懼心)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노동당’이라니, 군사정부로서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일보》는 오보(誤報)였다면서 정정(訂正)보도를 크게 내보냈지만, 군사정부는 사장, 편집부국장(편집국장은 장기영 사장이 겸임), 정치부장, 담당 기자 등 네 명을 구속했다. 내가 JP와의 만난 때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JP는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 “잘 오셨습니다. 김종필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것이 JP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지적이고 냉철하다,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조용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JP와 수인사를 나누고 보니, 군인으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사내가 옆에 앉아 있었다.
JP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전에 하던 일, 전공, 가족관계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어 재건동지회에는 언제부터 참여했는지,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물어본 후, 5·16혁명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나는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했지만,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는 의문”이라고 대답했다.
JP는 내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한동안 창밖 금정산을 바라보다가 재건국민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영국, 인도, 필리핀 등의 예를 들면서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국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JP는 표정없이 내가 하는 말을 메모하다가, 이번에는 중앙에서 구상하는 새 정당의 성격을 어떻게 보는지, 그 정당을 통해 5·16 혁명공약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자유당·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나는 평소 생각하던 바를 소신껏 이야기했다.
JP는 재건동지회의 조직 요강이 비현실적이거나 지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조직 확대 과정에서 애로사항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도 물었다. 솔직히 말해 중앙정보부 -정확히 말하면 이영근(李永根) 차장- 가 공화당 사전조직을 지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JP 자신은 구체적 실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장의 사정을 성심껏 설명했다.
김형욱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될 무렵의 김형욱(앞). 뒤는 이후락 당시 최고회의 공보실장. |
어느덧 4시간이 지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에 땀이 배어 있었다. JP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계속 열심히 해주십시오.”
그때였다. JP 옆에서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사복 차림의 사내가 벽력같이 소리쳤다. “됐소! 자신이 붙는군!”
그제야 JP는 그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최고회의 내무위원장 김형욱(金炯旭) 장군입니다.”
김형욱은 내 손을 힘 있게 잡으면서 말했다.
“참 수고 많이 하십니다. 믿음직합니다!”
후일 3선 개헌을 둘러싸고 악연(惡緣)을 맺게 되는 김형욱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JP가 부산을 찾아온 것은 새해부터 허용되는 정치활동 재개를 앞두고 그동안 서류로만 보고를 받아온 공화당 사전조직의 조직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부산이었는데, 이는 경남의 조직이 가장 모범적이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후일 김형욱은 박정희 대통령과 척을 지고 미국으로 나간 후 회고록 등을 통해 “최고회의는 말할 것도 없고,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재건동지회 조직을 주관한 이영근 차장 외에는 공화당 사전조직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사전조직과 관련해 JP가 독주(獨走)했다고 비판하면서, 공화당 조직이 공산당식 점(點)조직으로 구축되었다고 주장했다. 최고회의 내무위원장 자격으로 JP와 함께 공화당 사전조직 실태를 점검하러 다녔고, 열광적으로 나를 격려했던 그가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참 어이없는 일이다.
JP와는 후일 정치적으로 함께하다가 길이 어긋나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특출한 사람이었다.
JP는 불세출의 혁명가
나는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을 보면서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자유당 때도, 민주당 때도, 중앙정보부와 같은 국가중앙정보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는 있었다. 이후락(李厚洛)씨가 그런 조직을 만들기 위한 기관의 장(長)을 지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국내 보안, 방첩, 해외정보 등은 물론이고, 공화당 사전조직 같은 일까지 해내는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중앙정보부도 창설 초기에는 경찰 정보를 가져다가 쓰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보를 생산해 내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가 한 일 중에는 부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조직을 만들어낸 JP의 능력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JP는 5·16 주체이면서도 군정(軍政)이 마냥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 군인들의 힘만으로 계속 나라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혁명주체로서 그는 당초 약속했던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숙제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이라는 정당을 통해 민간의 참신한 인재들을 영입해 그들과 함께 혁명과업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공화당을 ‘사무국 중심 정당’으로 만들어 기성(旣成) 정치인들의 구태와 절연(絶緣)하고 당이 공당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게 하려 했다.
JP는 당대의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말을 잘했다. 언변은 JP가 김영삼(金泳三·YS)씨는 물론이고 김대중(金大中·DJ)씨보다도 윗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선거 유세 때에도 골자를 제시해 주기만 하면 자기가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덧붙여 멋있는 연설을 했다. 한일(韓日)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JP는 서울대에 가서 학생들과 한일수교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물론 JP는 대학생들을 설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학생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자신의 주장을 펴는 담대한 사람이 있었던가?
내가 보기에 JP는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 같은 ‘불세출(不世出)의 혁명가’였다.
최고회의와 공화당의 갈등
1963년 2월 26일 공화당은 창당대회를 열었지만, 이후에도 최고회의와의 갈등은 계속됐다. |
1963년이 밝았다. 이와 함께 5·16 직후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동안 물밑에서 움직이던 공화당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월 10일 발기(發起)를 위한 집회가 열렸다. 1월 18일에는 발기인 총회가 열려 위원장으로 김종필을 선출했다. 이와 함께 중앙과 지방의 사무국 조직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나는 부산 지역 책임자가 됐다. 1월 1일부로 부산이 경남에서 분리되어 직할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남 조직은 박규상 교수가 맡았다.
2월 2일 공화당은 창당준비대회를 열어 위원장으로 김종필, 부위원장으로 정구영(鄭求瑛) 변호사를 선출했다. 대한변협 회장 등을 역임한 정구영 변호사는 당시 각계의 존경을 받는 원로(元老)였다. 나는 이후 정치적 고비마다 정구영 변호사와 행동을 같이했고, 평생 그분을 존경했다.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정국(政局)은 시끄러워졌다. 지난 1년 반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옛 야당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도 원인이지만, 더 큰 원인은 집권세력 내부에 있었다. 정치 참여를 앞둔 최고위원들은 공화당이 사무국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최고위원들뿐 아니라 공화당에 참가하기로 한 많은 이가 국회의원이 아니라 사무국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동하(金東河) 최고위원 등이 앞장서서 JP를 비판했다.
박정희 의장은 시국 수습을 위해 9개 항의 수습안(案)을 제시하면서 정치인들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18선언이다.
JP는 박 의장의 정국 수습 노력에 발맞추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최고위원 측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JP의 측근이자 공화당 사전조직을 담당했던 이영근 재건동지회장이 공화당 사무국의 사무차장 자리와 4개 부장 등 다섯 개 자리 중 두 개를 최고회의 측에서 지명하는 사람에게 내주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피로에 지친 JP가 입이 부르튼 모습으로 우리를 설득했지만, 우리는 응하지 않았다. ‘사무국 중심 체제’를 당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던 우리 사무국 요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중앙당 사무국 4명, 시·도 사무국 5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구성해 장시간 토론한 뒤 이영근 안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표결을 했다. 결과는 4대 5, 부결이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에 대한 최고회의 측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표류하는 政局
1963년 3월 16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
이 무렵 박정희 의장이 종로의 요정 오진암 옆 사무실을 방문했다. 박 의장은 우리에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공화당 중심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 의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사무국 요원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최고회의 측과 공화당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JP는 창당준비위원장직에서 물러난 후, 그해 2월 25일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외유(外遊)를 떠났다.
그래도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박정희 의장은 2월 27일에는 대통령 불출마와 민정 불참을 선언했다. 이어 김동하·박임항 장군 등 5·16 주체세력 중 일부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3월 15일에는 현역 장병 60여 명이 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군정 연장을 촉구하는 데모를 했다. 3월 16일 박정희 의장은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박정희 의장이 곤경에 처하자 민기식(閔機植) 1군 사령관 등 군부(軍部)는 박 의장에게 어떤 경우에도 그를 확고하게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보선(尹潽善), 허정, 변영태(卞榮泰) 등 야당 지도자들과 친분이 깊은 정구영 공화당 총재가 야당과의 타협에 나섰다. 결국 그는 박정희 의장이 3·16 선언을 철회하는 대신, 야당은 그해 6월경으로 예정된 민정 이양을 하반기로 미루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해서 한숨 돌리게 되자, 이번에는 공화당 안이 시끄러워졌다. 당시 공화당을 둘러싼 잡음이 계속되자 송요찬(宋堯讚) 전 육군참모총장, 김재춘(金在春) 중앙정보부장 등은 박정희 의장의 승인 아래 자유민주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공화당, 특히 사무국 요원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가 당이 해체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확산됐다.
한번은 시도 사무국장을 포함한 사무국 확대회의 자리에서 김정렬(金貞烈) 당의장이 “당의 체질 개선과 정계 개편을 위해서는 ‘고로모가에(일본말로 ‘옷을 간다’는 뜻)’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로모가에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고함을 질렀다. 다른 사무처 요원들도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장내는 난장판이 됐다.
朴正熙 대통령과의 첫 만남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회의에 동석했다(뒷줄 가운데). |
박정희 의장을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나는 재건동지회 경남 지역 책임자로 있을 때, 울산 출신인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를 잠재적 영입대상자로 생각해서였다. 공화당과 최고회의가 갈등을 빚게 되자 나는 그에게 힘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덕분인지, 어느 날 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정태성 공화당 충북사무국장과 함께 들어갔다.
박정희 의장은 군복 차림이었다. 첫인상은 과묵하고 빼빼 말랐다는 것이었다. 입술이 터져 있었다. 정국 때문에 고민이 많은 듯 싶었다. 박 의장은 공화당의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성의껏 대답했다. 박 의장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가 많다”고 감탄하면서 “확신을 갖고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했고, 박 대통령도 나를 좋아했다. 제3공화국 시절 나는 청와대에 수시로 불려 들어갔다. 새벽 1시, 2시에 불려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육영수 여사가 몸뻬 비슷한 바지를 입고 술상을 내왔다. 오징어포나 족발에 소주였다. 내외가 모두 소박한 분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형이 동생을 대하듯 나를 대해주었다. 한번은 내 지역구인 부산 영도 판자촌에서 큰불이 났다. 하지만 일이 많아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이 “지역구에서 큰불이 났다는데,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아직 다녀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더니, “갔다 와”라면서 L-19 비행기를 주선해 주었다. 박 대통령은 내게 봉투를 하나 주었다. 열어 보니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거의 조그만 집 한 채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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