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05:1-4 여호와께 감사하며 : 칼빈
시인은 세계의 모든 민족 중에 한 백성 택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로 언약하신 것이 말뿐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저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도 계속 저희에게 많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행하신 의도는 구원받은 자들이 그들 편에서 스스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1. 본문 1-3절은 “(1) 여호와께 감사하며(찬양하고 - 칼빈)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입니다.
1절의 목적은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그들이 받은 모든 복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양육되며 그의 손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받았다는 것은 훨씬 더 특별한 특권이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는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여러 말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선지자는 앞 시편에서 그랬듯이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다루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녀들을 향해 나타내신 아버지와 같은 은총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행사”와 “기사”를 열거하나 그 모든 것들을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선택하신 영적 언약에 제한시킵니다.
시인은 그가 언급한 하나님의 기사들 가운데 해와 달과 별들이 매일같이 세상에 빛을 비추어 주고 땅이 때에 맞춰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모든 좋은 것들로 풍성히 공급받고 인간의 가족이 관대하게 많은 편리한 것으로 공급받는 일 등을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 아버지로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류들 중 일부를 독자적으로 택하신 그의 절대주권적인 은혜를 찬양합니다.
시편 105 편
시편 기자는 저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에게 간구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만이 구별되게 갖는 하나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다름 아닌 신자들에게 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의 특별한 보호아래 두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본문 4절은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입니다.
시인은 앞 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 “여호와를 구하는 자” 라는 명예로운 명칭을 주었음에도 여기에서 다시 저희에게 신실하게 그를 구하라는 권면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한 권면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모든 참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이 구별되는 증표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비록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구한다 할지라도 더욱더 열심을 내도록 항상 자극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구하라고 독려하는 자들은 변덕스럽거나 나태하거나 땅의 불결함에 집착한 자들이 아니라 만반의 마음 자세를 갖추고 이미 이 일에 착수한 자들입니다.
선지자가 이들을 그와 같이 독려하는 것은 저희가 충분한 열심과 속도를 가졌다 해도 나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에 부닥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우리의 나태를 바로잡아 줄 자극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입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과 “그 얼굴”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시대의 형편에 따라 참 신자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실 때에 저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가리킵니다.
언약궤는 여러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힘과 얼굴’ 로 불립니다.
이는 그 상징에 의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며 또한 실제로 백성들이 그의 권능을 체험했음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을 친밀하게 나타내 보여 주실수록 더욱 민첩하고 활기차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연약을 담당해 주시는 도움은 우리 열심을 일으키는 촉진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태만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길로 나가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이끌어 가시는 그의 섭리의 손길을 멸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아무도 이 일에 싫증내거나 자기가 완전에 이르렀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05 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어느 정도 원숙해진 다음에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서 마치 자기가 천사들 위에 뛰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외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우리가 경건의 외적인 도움에 소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 새롭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 ‘그의 행하신 기사를 기억할지어다’ 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입의 판단” 이라는 구절을 율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 즉 기사와 이적과 입의 판단이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이 바로의 교만을 꺾으신 이적들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식으로 말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의심되는 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적들이 하나님의 입의 판단으로 불린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저희에게 예언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취하는데 이것은 아주 가능성이 있는 견해입니다. 동시에 그 표현은 보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이적들 속에서 특수하게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이적들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모세의 사역을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인들에게 한 선지자로 세우셔서 그를 통하여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리셔서 아무것도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적들의 분명한 특징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비록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신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편 105 편
시105:5-11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본 서론은 박윤선의 강요입니다.
1. 시인은 모든 신자들더러 여호와의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하라고 합니다(1, 2).
여기 이른바 여호와의 행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인도하시고 또 거기서 구원 해 내기도 하시어 필경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권능을 의미합니다.
이 권능은 천하 사람들이 믿어야 할 참된 것이기에 시인은 만민에 전파하라고 합니다
2. 시인은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자랑”하고 여호와를 구해야 된다고 합니다(3, 4).
“여호와를 구하는 자” 란 말은 부지런히 찾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과거에 놀라운 은혜를 주신 분이시니 현재와 미래에도 그리하실 하나님이십니다.
1. 본문 5-7절은 “(5-6)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 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선택으로 자기와 연합하게 한 동족의 이름을 불러서 언급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제쳐놓고 저희가 택하심을 입은 것은 더욱더 신성한 연합이었습니다.
저희를 “아브라함의 후손”과 “야곱의 자손”으로 부름으로 시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희 조상들의 거룩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저희 조상들이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고 확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진리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첫째로 저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기 전에 저희의 거룩한 조상들에 저희 기원을 두고 있는 고로 이미 그 언약의 상속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조상들이 저희의 공로나 가치로 이 특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선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 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비록 아브라함 또한 여기서 ‘하나님의 종’(창26:24)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그가 순전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반절에서 이 구별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명예를 주신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시편 105 편
이 언약에서부터 시편기자는 비록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에 미치고 그가 모든 곳에서 그의 심판을 행하실지라도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8,9)라고 한 말에 의하면 그 여호와는 특별히 이스라엘 한 백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다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난 것은 저희가 그들보다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기 때문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지구의 모든 곳에 미친다면 모든 민족들의 입장은 동등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언급된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타 민족보다 뛰어난 근거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비록 온 땅의 합법적인 소유주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통치하기 위한 한 백성을 택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를 부르신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 자신 밖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실 이유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신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택하신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본문 8-10절은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민을 동등히 통치하시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다는 계약의 성취와 그 결과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종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신실하게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었다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어떻게 수많은 이적들을 통해 능하신 팔을 나타냈겠습니까?
그렇다면 옛 언약이 택한 족속들에게 임한 구원의 동기였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신실히 지키기 위해 자비를 베풀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경과되었으므로 선지자는 “기억하셨으니”라는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약속들은 시간이 경과되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것을 이미 무효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전적으로 잊혀졌다고 생각할 때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억하시며 적절한 시기에 성취하기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더욱 강력하게 확증됩니다.
그곳에서는 그 언약의 형식이나 진행과정이 성취되었음을 찬양합니다.
시편 105 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하루 이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언약의 기간을 한 사람의 생애에 국한시킨 것도 아니며 자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저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이 성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어도 하나님은 결과를 통해서 그의 약속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변치 않고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 최초로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러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뒤에 그 언약이 아브라함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에게서 역시 확증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고 아브라함 자손의 하나님이 되기로 맹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약속에 대한 사실을 더 확실히 보증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 그것을 되풀이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욱 깊이 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하심을 이같이 자주 확증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에게 더욱 분명하고 확실히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이 언약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하게 되었는가? 가 지적됩니다.
이는 각 족장에게 확증된 바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에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지 않으셨던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영영한 언약”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 언약이 이전에는 다만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이었는데 본질상 변질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한 생각은 거룩한 시편 기자의 의미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같이 색다른 표현으로 시편기자는 그 언약이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혹시 한 사람에게는 그 부르심이 모호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증거를 자손 대대에게 전해 주셨기에 더욱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이는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그 언약의 사실이 보다 잘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크게 인자를 베푸사 우리 연약을 감안하시고 맹세로 또 그의 말씀을 자주 반복하셔서 그가 일단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실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아니라 맹세로 우리에게 확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불신한다면 더없이 배은망덕한 처사입니다.
시편 105 편
3. 본문 11절은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입니다.
이것은 조상들에게 베푸신 복 중에 지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기에 선지자는 한 영원한 기업의 소망에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언약을 너무나 제한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비유적 제유법을 써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의 일부가 그 완전한 성취를 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취지는 저희가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어떤 권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의해 아브라함이 합법적인 기업이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계약에 신실한다면 그 계약을 파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가시적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종들과 헛되이 언약을 맺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소망을 저버리지 아니하시며 언약 속에 포함된 다른 복을 폐기하거나 배제하지 않음을 입증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었기에 상속자의 권리로서 가나안땅을 차지했다는 말을 들을 때 저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별하기 위해서 베푸신 모든 특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약속들을 성취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한 아버지로 나타내 보여주실 때마다 항상 그는 실제로 우리의 마음에 그의 말씀의 권능과 효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저희와 맺으신 언약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실을 아는 고로 이스라엘 자녀들이 가나안 땅을 마땅히 천국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는 모든 약속들이 예와 아멘이 되는’(고후1:20)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인칭대명사가 단수에서 복수로 바뀐 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소수의 개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일반적으로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음을 지적해 줍니다.
그것은 앞서 그 언약이 하나의 법령 혹은 영원한 율법이었음을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거룩한 족장들은 약속을 손에 맡은 최초의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베풀어진 은혜를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알지 않고 저희 자손들도 저희와 함께 공동으로 나누게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시편 105 편
시105:12-15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더러 여호와의 행사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5-44).
그 행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들입니다.
1. 약속받은 족장들은 약속 받던 당시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유리했습니다(12, 13).
유리객으로 대국(大國) 강토를 약속받을 때 믿은 것은 만고에 모본이 될 신앙입니다
2. 그들이 유리객이었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실들에 신앙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신자는 외롭지만 초자연적 위로를 받는 한 방면을 가지고 있습니다(14, 15).
1. 본문 12-13절은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조상들에게 부어 주셨던 은총을 열거하면서 애굽에서 해방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언약은 효력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 속에서 그가 의도하고자 하는 주요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일단 자기의 보호아래 두신 이후 그를 기이한 방법으로 품어 주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 같은 사랑과 보살펴 주신 다른 두 족장들에게도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여”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런 상황을 통해 크게 드러났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신 이유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즉 유대인들이 권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조상들이 육신적으로 여러 면에서 가난하고 연약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을 선지자가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신7:7, 8)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선택받은 것은 수효나 우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보잘것없으나 단지 아브라함의 집이라는 점밖에 없습니다.
이삭은 두 아들 중 하나가 자기에게서 멀리 떠나가야만 했고, 다른 한 아들은 자기 가문에서 잘려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편 105 편
야곱의 집은 실제로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낯선 땅에서 주위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를 받았고 기근이나 다른 것의 부족 때문에 자주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자 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은 다른 어떤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또 이 사람의 요인을 하나님 자신 밖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토록 주의 깊게 하나님의 은혜를 이런 세상 복속에서 펼쳐가신다면 선지자가 말한 주제가 하늘의 기업이라 할 때는 이 법칙이 얼마나 더 존귀한 것이 되겠는가!
“그 땅에 객이 되어 ........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그들을 지켜 주실 때 얼마나 놀랍게 나타났는지를 분명히 암시해 줍니다.
그들이 만일 쉴만한 평안한 곳을 찾았다면 그 위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고귀한 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흩날린 겨처럼 그들이 여러 나라에 유배되고 쓰린 아픔을 맛보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유리했을 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보호는 더 현저히 나타났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들의 생명은 매우 위태로왔으며 그들의 거주 장소가 때때로 바뀜으로서 그들은 새로운 위험을 만났기에 그들이 안전하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2. 본문 14절은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단지 두세 명의 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 공격을 당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시인은 막연하게 사람들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사람으로 번역된 אדם (아담)은 보통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열왕들을 대적하심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그들까지도 용납지 않으신 것을 볼 때, 그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복지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거룩했던 조상들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시편 105 편
그러기에 하나님은 열왕 보다는 그들에게 많은 인자를 두드러지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은 조상들을 보아 겸손케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것은 자기들의 공로에 의한 것으로 생각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본문 15절은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입니다.
시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위하여 열왕들을 대적해 싸우실 때에 그의 종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비참하고 부당하게 압제당하는 자들을 건져주시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보호아래 두셨기 때문이었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되 일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값없이 선택하사 지켜 주시겠다고 선포하셨기에 보호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은 거룩한 족장들이 “나의 선지자”와 “나의 기름 부음받은 자”라는 두 가지 칭호로 영광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 아무에게도 잘못한 일이 없는 이 사람들을 만지지 말며 그들 손에 그러한 처우를 받을 이유가 없는 이 불쌍하고 가엾은 피조물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 주는 다른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름부음 받은 자” 라고 부르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특별한 백성으로 잘라 세워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지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창20:7 에서 이러한 칭호로 불려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더욱 가까이 게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주위에 전파했고 이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갔으며 그들이 죽은 후에도 이 진리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기름 붓는 일은 그 당시에는 없었고 후대 율법시대에 비로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후대 율법 의식에 나타내신 것을 아브라함의 행위 속에 실제로 자기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 성결의 표로 인쳐 주듯 나타내셨음을 가르쳐줍니다.
아직 율법이 제정되거나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하나님의 내적 기름부음이 이토록 강력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독생자 안에서 기름부음이 풍성히 우리에게 나타난 이후 오늘날 그의 종들에게는 얼마나 더욱 크신 보살피심으로 지켜 주시겠는가!
시편 105 편
시105:16-19 그가 또 기근을 불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하여,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팔려갑니다(17-19).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 때까지 신앙 연단을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1. 본문 16절은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입니다.
영감을 받은 기자는 언약이 폐기되고 취소된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현저하게 나타났음을 말합니다.
가나안 땅의 기업은(위에서 말한 것처럼) 확증에 대한 담보나 증거입니다.
애굽으로 간 야곱의 후손들은 땅위의 집은 잃었으나 언약은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이 더욱 명확하게 비춰집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을 통하여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지켜 주시기 위해 어떻게 섭리하고 계시는지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하나 따로 떼어서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야곱을 애굽으로 가게 한 기근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여기서는 단 한 번의 특이한 기근을 다루고 있으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손길을 거두사 보호의 수단을 제거해 버리시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유지되기가 불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근을 불러”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기근이 하나님의 저주 담당 도구로 하나님의 명령을 대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근이나 온역, 그리고 다른 하나님의 채찍이 우연하게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오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라는 말씀은 기근을 불러일으켰음을 가리킵니다. “양식” 이란 비유는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지탱해 주기에 알맞은 비밀스런 힘에 의해 사람을 강하게 하는 힘과 요소를 양식에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기 기뻐하는 한 그 양식은 끊기지 않습니다. 이 양식은 두 가지 방법으로 끊어집니다.
시편 105 편
첫째로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곡식 공급을 끊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겔4:16)
둘째로 빵 그 자체에 진노를 불어 넣으사 빵으로 만족하려는 자들에게 굶주림이 가시게 하는 대신 계속해서 굶주리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보통 이 두 번째 것이 가해졌습니다.
즉 빵 속에 있는 생명력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은 빵 자체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은밀한 힘을 빌어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7절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입니다.
이 구절 전체는 백성들에게 일어난 일은 어느 것이든지 다 하나님의 손과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역력히 가르쳐 줍니다. 이 구절을 언뜻 보기에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이후에 기근이 그 땅에 임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요셉이 아버지의 집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에 팔려갔으며 그 이후에 기근이 임했음을 밝히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모든 인간사에 있어서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교회를 다스리고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를 찬송한 것입니다.
한편 선지자는 시간적으로 볼 때 먼저 있었던 사실을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내셨다’는 대과거인 ‘보내셨었다’(He had sent) 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근으로 치시기 전에 벌써 그의 종 야곱과 그의 집을 구원하기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도록 요셉을 보내셨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의 대조되는 두 말씀은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보다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요셉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던가? 그 방법은 그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을 때 그의 형제들은 그를 우물에 매장시키기 보다 그를 팔아 버렸습니다.
이 사건 자체만 볼 때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켜 모호하게 하는 구름과 같습니다.
요셉을 죽이기로 결의되었을 때 누가 요셉을 그의 아버지의 집을 지켜 줄 자라고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를 잔인하게 죽이지 않기 위해 우물 또는 웅덩이에 던져졌었습니다.
시편 105 편
그러한 상황에서 요셉이 달리 어떻게 남을 구원할 수 있었겠습니까?
최후의 소망은 웅덩이에서 나와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또 다시 감옥에서 오랫동안 보냈습니다.
이 복잡하고 우회적인 진전 과정을 누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자는 요셉이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는 ‘팔렸으나’ 사실상은 미리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내졌다고 말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비뚤어진 어리석음을 하나님의 섭리와 대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반절을 언뜻 볼 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며 만사가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요셉에 대한 기록을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는 베일처럼 삽입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슨 일을 담당하건 그 일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실예로 설정된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가 결정한 것은 꼭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도 형제들에게 기꺼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하신 능력으로 인간 만사를 다스리며 인간들의 악한 죄악이 바른 목표로 지향하도록 감찰하시나 그의 판단력은 인간 타락에 의해 오염되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하여 그를 팔았으므로 과오는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섭리하시고 다스리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이 형제들의 손으로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위해, 모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선한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의도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의 죄악으로 오염되거나 얼룩지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나중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라고 말했습니다(창50:20).
3. 본문 18절은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려 하는 자들을 방해하듯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야곱의 우여곡절도 많은 초기과정을 시인이 말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05 편
그토록 정면으로 대립되는 우여곡절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가 계획했던 것을 성취하셨다고 믿는 것보다 더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짧고도 평탄한 길로 모든 것들을 급속히 처리하시는 것보다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통하여 굴복하도록 하셔서 더욱 현저하게 이루어집니다.
만일 요셉이 애굽에 도달하자마자 왕 앞에 나아가 애굽의 치리자가 되었다면 그 다음의 앞길은 평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감옥에 갇혀 사람들과 교통이 끊긴채 반쯕 죽은 사람으로 살았을 때, 또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의 예상을 초월한 급작스런 변화는 이것이 이적이었음을 보다 명확하게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말하는 이런 우여곡절은 당면한 문제를 적지않게 설명해 줍니다.
요셉은 팔리기 전에 여러 차례 죽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는 요셉을 구원하심으로서 교회를 향한 자신의 관심을 자주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이후에도 그가 또 다른 무덤에 떨어질 때까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겨진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졸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그의 종들을 가장 엄격하게 감찰하시며 곧 바른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또 빠른 걸음으로 달리는 것보다도 이러한 우회적인 여러 방법을 통해서 그의 뜻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아가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에서 선지자는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의 글에 이런 말씀이 언급되지 않았다 해도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없는 많은 말들이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해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가 나중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 관대한 처분을 받지 않고 가혹하게 감금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었으니” 라고 하든지 또는 ‘쇠사슬이 그의 혼을 매었으니’(칼빈)라고 하든지 그 의미는 똑같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착고에 상해 그의 생명이 마치 칼에 던져진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그의 생명의 안전은 죽은 육체에 생명이 회복되는 것 만큼이나 절망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본문 19절은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입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육신적 판단에 의해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의 발걸음이 너무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최고 관할권을 주장하고 계시므로 적당한 때에 이르면 마침내 그가 작정한 바를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시편 105 편
여기서 “말씀”이란 교훈이나 교리를 가리킨 말이 아니고 하늘 나라의 작정을 가리킨다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관계 대명사 “그”는 요셉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이 말이 요셉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추어져 있던 요셉의 시련이 밝히 드러나게 될 때까지 요셉이 감옥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운명이 맹목적으로 변덕스럽게 인간만사를 주관한다는 악한 생각에서 사람들이 돌이키도록 하는 것임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복보다 더 명확한 것은 있을 수 없기에 요셉이 정죄받은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음에도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높여 감추인 말씀, 즉 아직은 그때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정해진 때와 기회가 오면 나타나게 될 작정을 바라보라고 명합니다.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는 말씀도 같은 방법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을 요셉을 가리켜 예언하는 것으로 보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는 억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감추어 두셨고 마음을 졸이게 한 복이 실현될 때까지 요셉의 인내가 호되게 연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인간 만사의 주관자로 여기지 않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운명’(fate)이라 부르는 것을 선지자는 “말씀” 즉 각 사람의 말씀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말 destinée(운명)를 사용이 적당한가 하는 문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스토아(Stoics) 학파들이 운명에 대해서 말하거나 논할 때, 자신과 사물을 복잡한 미로 속에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진리까지도 혼미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인들이 서로 연쇄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에게서 세상 통치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원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상호간에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는 불경한 사상은 하나님 자신까지도 이 원인에 지배를 받는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에 의해 만물이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구애받지 않고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또 이 구절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을 계속 시련으로 훈련하시되 그들이 이를 통하여 철저하게 연단 받을 때까지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05 편
시105:20-24 왕이 사람을 보내어
요셉이 옥에서 석방되어 애굽의 주관자가 됩니다(20-22).
하나님은 신자가 당한 고난에 인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복으로 영광을 얻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고 강해지자 애굽 사람들의 미움 받습니다(23-24).
우리 본문은 이렇게 되는 일들도 전부 하나님께서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샐 틈 없이 그 약속 성취를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1. 본문 20-22절은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입니다.
시인은 요셉의 구원을 고상한 말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했던 군주가 한 이방인을 감옥에서 해방시켜 그에게 자기의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해주고 그를 바로 자기 다음가는 영광스런 지위로 올려 주었던 것보다 더 진기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22절의 “임으로 백관을 제어하며” 라는 구절은 일반적으로 요셉이 정부 고관 중에서 가장 권세있는 자리에 오른 후에 그의 임의대로 그 나라의 고관들까지도 감옥에 던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해석이 약간 무리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모세가 사용한 לאסור (레소르) 라는 동사가 ‘묶다’ 라는 뜻을 가진 אסר (아사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교육하다’ 란 뜻을 가진 יסר (야사르)에서 온 것으로 י (요드) 와 א(알렙)이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단어 모두가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비유, 즉 요셉이 그의 임의대로 애굽의 군주들을 제어하고 있었으며 자기 권세에 복종하도록 했다는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착고가 아니라 방백들과 다른 모든 자들이 그의 뜻에 의해 제어 당했고 복종할 책임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05 편
조금 후에 나오는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라는 표현은 요셉이 폭군처럼 통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고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게 치리권을 행사하여 고삐를 늦추는 일이 없이 고관들에게까지 국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높은 수준으로 본을 보여주었음을 증거 해 줍니다.
2. 23절은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땅에 객이 되었도다”입니다.
선지자는 모든 역사를 나열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역사에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의 설화를 읽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자는 거의 소수입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온 집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애굽에 팔려간 후에 야곱이 애굽에 도달했을 때는 모든 것들이 훌륭하게 정돈되어 먹을 것이 없이 모두가 죽어가는 때에 그들은 풍성한 양식을 얻었다고 모세는 말합니다.
이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의 행동이 느리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가장 적합한 시기에 그의 사역을 성취시키기 위한 의도 외에 별다른 뜻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본문 24절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입니다.
이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단시일 내에) 택한 백성의 수효가 단시일 내에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찬송을 받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백성들의 많은 수효를 말한 것을 오만하게 비웃는 개들의 짖어댐은 가장 위험스럽습니다.
이 사건은 사물의 일반적인 과정을 초월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백성들이 일반적인 비율로 증가되었다면 이러한 자들은 즉각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들이 트집을 잡아 제기하는 반론은 하나님의 복은 이 사건과 관계가 없음을 믿게 하려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력에 의하여 또는 자연의 일반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리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이 비상한 하나님의 손의 사역을 겸손히 받아들여 마지 않습니다.
시편 105 편
하반절의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라는 의미는 약간 불명료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하고 형통하게 살았던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모욕적이고 야만적인 취급을 당하던 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장차 일어나야 할 것을 지적하는 예언으로 생각합니다.
다음 구절은 애굽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잔인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애굽사람들이 뚜렷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해 잔인한 대우를 하지 않았지만 선지자는 애굽사람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핍박자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처럼 압제를 당하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출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학하고 부당한 압제를 당할 때에도 하나님의 복은 여전히 그들에게 나타났었음을 밝힙니다.
시편 105 편
시105:25-30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바로 왕궁과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십니다(25-30).
하나님께서 그 때에 재앙을 열 번이나 내리게 되신 것은 바로의 강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시는 마당에는 강퍅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강퍅한 자라도 결국 진압하시고 그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는 재앙을 열 번이라도 내려서 그의 뜻을 관철하십니다.
1. 본문 25절은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잔인한 원수로 변했는데, 선지자는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봅니다.
애굽 사람들은 분명히 오만하고 악감(惡感)을 가진 생각, 즉 교만과 탐욕에 의해 이런 행위에 빠져들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하나님의 섭리없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어둠에서 나오도록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구절의 표현 방법이 약간 무리이기 때문에 동사를 수동태로 하여 “저희 마음을 변하여”(즉 애굽 사람들의 마음)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빈약하고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감받는 저자가 말하려는 주제는 모든 교회의 정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주관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가 귀에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성령께서 여기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분명히 확증하는바, 사람의 마음은 은밀한 충동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기에(시21:1)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인간의 이성에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만을 행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싫게 된다면 하나님 말씀에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기에 이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시편 105 편
또 어떤 사람들은 무지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 동요를 일으키거나 우리가 무지한 자들에게 반감을 갖도록 이 사실을 일부러 오도(誤導)하기도 합니다.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에 이 교리가 매장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들은 분명히 전혀 다른 생각으로 잘못 나아갑니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의 학자들이 복음의 순수하고 순전한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이교 철학으로 빗나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훌륭한 교부들이 악한 말을 하거나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 거룩한 성경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자유로이 고백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아니고서는 어디에서 자유 의지의 교리와 공로의 교리가 나왔겠는가?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어거스틴을 막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거스틴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거슬러 머리를 쳐드는 어리석은 지혜를 망치로 치듯 치셔서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애굽 사람들이 심히 악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도록 하셨다고 성령께서 확증하십니다.
온건한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한 논쟁을 피하고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것은 그가 허락하셨다고 말함으로서 논쟁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악의를 이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그 방법을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의 강조를 없애고 그 말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나타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본문의 교리가 이상하게 여겨진다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켜 “측량치 못할 것”(롬11:33) “큰 바다”(시36:6 , 큰 깊음)라고 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능히 하나님의 심판의 높이에 도달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비함과 복잡함이 그것의 특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악의의 근원은 애굽 사람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과오가 하나님께 전가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악한 자들이었고, 다른 어떤 것에 강제로 선동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 이유를 다 헤아려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도 모든 일들 가운데 그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에 의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잠자코 경외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충고의 말을 배워 마음에 간직하기만 한다면, 교만한 자들이나 자기 견해에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요소가 내포된 문제들을 제거해 버리고자 하는 과민한 자들이 공격하고 있는 신비한 것들을 우리는 아무런 논란이 없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5 편
선지자는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 일으킨 재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드러나게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궤교와 권력을 사용하여 조금씩 조금씩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표현은 모세에게서 직접 빌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악인들의 마음이 제재를 받지 않고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치닫는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마귀와 악인들이 우리들을 대적하려고 무슨 계교를 꾸미든지 하나님이 결단코 그들의 노력을 다 짓눌러 버리신다는 생각에 분명히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손만 묶인 게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님께 매인바 되어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밖에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 믿음은 확고해집니다.
2. 본문 26절은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에 특별히 주의해 살펴볼 가치를 말합니다.
만약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의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도록 해주었다면 모세의 수고나 이적들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사 자신이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해준 장본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모세가 스스로 직분을 맡지 않았으며 모세 자신의 권위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음과 도리어 하나님의 사역자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론에 대해 ‘그가 택하심을 받았다’고 하신 말씀도 같은 내용을 명확하게 해 줍니다.
탁월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특별히 부여된 것은 없고 똑같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 모세와 아론을 보내신 것은 그들의 타고난 우수성이나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겠다고 나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교회를 위해 활동적이고 유익한 봉사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혼자만 그 일을 하도록 준비를 갖추었거나 재량에 따라 그 일을 하도록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일으켜 세운 것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모세는 영웅적인 미덕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05 편
그러나 그 사람 하나만을 두고 본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아론 뿐 만 아니라 모세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오로지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교회의 번영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 능력을 빌어온 자들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인자로서 그들에게 이러한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를 즐겨하십니다.
3. 본문 27-28절은 “(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땅에서 기사 를 행하였도다
(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모세가 오랫동안 길게 말했던 것을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선지자는 역사적으로 행해졌던 사건의 순서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택한 백성들의 구원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선지자는 또 하나님의 능력과 모세와 아론의 사역을 구분합니다.
선지자는 이 사람들이 “기사”를 행했다고 말하지만 이 이적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하늘의 권세가 이들이 기계로 사용된 사실에 의해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이적들 중에 하나를 언급하는데 순서상 처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적에서는 자연의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빛이 어둠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뒷부분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용감하게 수행했던 모세와 아론의 신실함을 말합니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는 말씀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과 이 하나님의 두 종의 순종 사이에는 가장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본문 29-30절은 “(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입니다.
이 재앙이 애굽 사람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물이 생명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볼 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애굽 땅에는 물이 가득했고 애굽 땅에는 물이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목마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밝히 빛나게 해줍니다.
시편 105 편
다음 구절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기사를 행하는 자가 자신임을 밝히 입증하셨습니다.
온 애굽이 개구리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할지라도 왕의 궁실은 이 불쾌한 물건에서 예외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왕”(왕들) 이란 말은 그 나라의 고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면 앞으로 왕위를 내다보고 있는 왕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오직 한 왕이 온 애굽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육신적인 것을 자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손쉽게 낮춰 버리시는가, 마치 일종의 웃음거리로 삼으시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을 대적하기 위해 싸울 군대를 소집하시거나 그의 팔을 천사들에게로 뻗치시거나 하늘에서 천둥을 발하지 아니하시고 개구리를 번성케 하사 온 세상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민족의 교만을 여지없이 짓밟으셨습니다 그들이 막강한 원수들에게 정복을 당했다면 수치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개구리에게 추방을 당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을 멸망시키는 데에 힘센 군대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어느 때고 장난치듯 이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5 편
시105:31-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실 때에, 그들에게 여행상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역시 기사와 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경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31-48).
1. 본문 31-33절은 “(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 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입니다.
“말씀하신즉”은 “파리”와 “이”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세의 입을 통하여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전달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명령을 발하실 때에도 자신이 직접 하늘에서부터 천둥을 내리시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말씀에 효력을 부여하십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넣어주시는 것만을 전함으로 신실하게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한다면 그들의 밖으로 나오는 말씀 속에는 성령의 내적인 능력이 함께 합니다.
또 한 가지 점은 애굽 사람들을 파리와 이의 재앙에 곤욕을 당하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역과 오만함을 더욱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내리치셨다는 사실입니다.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는 우박이 자연 현상이 아닌 것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애굽은 다른 나라들처럼 이 성가신 우박이 자주 내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나일강을 범람케 하는 비와 함께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나라가 우박으로 채찍을 맞았다는 것은 애굽인들에게 심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재난을 더욱 두렵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또 여기에다 화염을 섞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박은 맹렬한 회오리바람을 수반하여 다른 이적에는 완악했던 애굽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여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들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2. 본문 34-36절은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입니다.
시편 105 편
전토(田土)에 임했던 이 재앙은 운명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황충들이 갑자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로 나타나 온 애굽 땅을 다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이것이 이적이었음이 매우 분명해집니다.
아무도 이것이 지존자께서 하신 일임을 의심치 못하도록 이 재앙이 임하기 전에 앞으로 이 재앙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따라서 황충과 메뚜기가 마치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나팔소리를 듣고 돌진해 나아가듯 몰려온 것은 하나님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이러한 해충(害虫)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땅의 소산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난 특별한 역사라는 점입니다.
끝으로 선지자는 마지막 이적 즉 천사가 밤에 모든 애굽의 장자를 죽이고 백성들을 죽게 한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앞 구절에서 다른 사건들을 다루었던 방법과 같이 이 사건에 대해서도 잠깐 지나가는 정도로만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하게 취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경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여 반복할 때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기력은 대를 이어 나타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 우리가 창세기 49장 3절에서 해석한 것처럼 처음 난 것을 가리켜 “기력의 시작”이라고 불렀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3. 본문 37절은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입니다.
한편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들 가운데서 택한 백성들이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 은혜에 대해 찬송합니다.
만약 두 백성들에게 차별이 없이 재앙이 임했다면 하나님의 손길이 그처럼 의미깊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재앙들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신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05 편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또는 ‘떠는 자가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애굽은 신속히 멸망하고 주의 백성들은 강력해져 모든 병폐(病廢)에서 벗어났습니다.
4. 본문 38절은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 함이로다” 입니다.
시인은 애굽 사람들이 택한 백성을 떠나도록 기꺼이 허락했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수백 번씩 없애 버리려 했으나 진퇴양난에 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보복에 대한 공포는 그 백성들에 대한 생각을 말살해 버리도록 더욱 채찍을 가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즉시로 전에 가졌던 자기들의 계획을 포기해 보린 사실을 통해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 절의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는 같은 취지로 언급됩니다.
애굽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는 자기들이 기쁨으로 생명을 착취해 왔던 자들을 자기들의 것으로 배불려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움직임에 의해 세상의 모든 부귀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을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자신들의 것을 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라는 말씀은 수동적인 의미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서워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인함과 포학한 정치로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불굴의 용기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이 갑자기 애굽 사람들에게 비상한 공포심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형통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이 전에 맹렬한 분노로 이글거리던 것을 굴복케 하시고 자기들이 잔인하게 다루어 노예로 부려 마치 여우 앞에 두려워하는 양처럼 만들었던 자들을 떠나도록 허락해 준 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시편 105 편
시105:39-43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시인은 이스라엘더러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의 여정(旅程)에 나타난 이 이적들(39-41)을 인하여 감사하라고 이 시편 초두(1-4)에서 이미 말하였습니다.
1. 39-41절은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계속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타난 특별한 이적들을 일일이 열거합니다.
이 순서는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여행의 인도자이심을 계속해서 보여주신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구속사역에 대한 확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도 낮에는 구름을 펴사 태양의 열기에서 보호해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추어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계속적인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나타남은 확실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였으며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택하사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품어 주심을 밝히 입증해 준 것이었습니다.
“메추라기”에 관한 말씀은 같은 사건을 다룬 78편 26절과는 다른 의도입니다.
78편에는 하나님께서 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많은 메추라기를 보내어 백성들이 고기를 배불리 먹도록 해주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그곳에서는 이 사건을 백성들에 대한 책망조건으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선지자가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행위를 간과한 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계속해서 나타나신 것을 찬송합니다.
이 구절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여기에 군집되어 있는 구속을 인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특출한 방법으로 만나를 주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편 105 편
우리가 먹는 양식을 얻는 방법은 땅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손을 펴사 하늘에서 양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주렸을 때 양식을 배부르게 먹었어도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그들은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렸으니” 가 덧붙여집니다.
2. 본문 2절은 “이는 그 거룩한 말씀(약속 - 칼빈)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왜 그 백성들을 그토록 은혜롭게 대하셨고 부드럽게 보호해 주셨는가
왜 그의 언약을 성취하셨는가? 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값없는 언약에서 구원과 계속적인 백성들의 복이 나왔음을 알게 해주기 위해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잘 알려집니다.
이 사건들은 갑자기, 예고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4백 년 전에 주신 약속의 성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 시대에 그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빛을 주시사 그의 은혜와 진리가 보다 명확하게 보여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이유 때문에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도록 계획하심으로서 그 언약이 성취되었음과 그 언약이 유효적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구원하셨다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땅에서 자기가 묻었던 보물을 캐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 동족들에게 더 큰 믿음을 얻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그들의 후손들이 모든 의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 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하신 그의 약속에 대한 순전하고도 실재적인 진리를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입증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조상들도 지난날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약속을 가리켜 “거룩한 약속(말씀)”이라 말하여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에도 그 약속의 아름다움이나 효력이 경감되지 않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셨으나 언약의 효력은 그와 더불어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족장의 후손들에게도 자신이 신실함을 계속해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시편 105 편
3. 본문 43절은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입니다.
선지자는 ‘기쁨’과 ‘즐거움’을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높이 드러냅니다.
애굽 사람들이 지독하고 무시무시한 재앙을 당하던 바로 그때, 온 나라가 눈물과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으며 거의 모든 집에 시체가 있었을 때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 환난에 신음해 왔고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자들이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 라는 말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들에게 임한 것은 자기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하셨기 때문임을 기억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편 105 편
시105:44-45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목적(44-45절)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계명)를 지키며 하나님의 법을 좇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본문 44-45절은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 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쫓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입니다.
시인은 왜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심에서 놀라우신 능력을 그토록 여러 방법으로 나타내셨으며 광야에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보호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는가?
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게 해 주셨는가? 마지막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몸 바쳐 헌신토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이 땅에서 우리들을 불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감사드릴 수 있도록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위대함을 높여 말하기를 그들이 멀고도 넓은 “열방의 땅”을 점령했으며 큰 수고를 수반했다고 여러 차례 말한 모든 말씀이 이제는 상속권으로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땅”과 “열방”이란 말은 모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 밝게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짤막하게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라고 정의하며 끝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경건이 부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에 따르는 모든 종교적인 경배를 멀리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