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산답사기 선운사 편>
선운사 부도전 백파율사비문에 얽힌 사연
부도전의 백파율사 비는 지방유형문화재 122호(·86.9.9)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에 위치하며, 여기에는 추사(秋史)와 백파(白坡) 초의(草衣)의 삼각관계가 비문에 새겨져 있다.
부도전은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부다-붓다-부처-부도로 변형된 말이다. 탑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무덤을 말한다.
민가에서 화장을 불가에서는 다비라 하고, 다비식을 한 결과 나온 뼈를 민가에서는 그냥 뼈라 하지만, 불교에는 사리라 한다. 이빨은 ‘치아사리’요, 산 사람 몸은 ‘생사리’이다.
큰 탑에 사리를 보관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땅도 많이 차지하고, 공력도 많이 들어, 세월이 가면서 종 모양, 연꽃 모양, 등(燈) 모양의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사리를 보관하여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 바로 부도전이다. 그러니까 부도전은 절의 공동묘지란 이야기다. 선운사 부도전에는 추사 선생이 짓고 쓰신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波大律師大機大用之碑)'가 있다. 이 비문에는 백파와 추사, 초의선사와의 삼각관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면은 해서체이며, 뒷면은 자유분방하지만 간결하고 깨끗하다.
비문은 추사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써 놓았고, 돌아가신지 1년 후에 세웠다(1858년). 그 3년이란 세월 동안 끝의 한 줄이 마모되어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華嚴宗主白坡大律師(화엄종주 백파 대율사)의 大機大用之碑(대기대용지비)는 대법의 신묘함과 큰 작용을 일으킨 비문이란 뜻으로, 대기는 ‘대법의 묘기(妙機)’로 ‘깨달은 데서 얻어진 큰 진리’ ‘자유자재한 마음의 작용’ 대용은 큰 작용을 일으킴을 말한다. 대기대용은 기용(機用)이라고도 한다.
채근담(菜根譚)에 대기취(大機趣)란 말이 있다. 깨닫는 데서 얻어지는 큰 진리. 자유자재한 마음의 작용이란 말이다. 대기를 국어사전에서는 1) 천하의 정권. 정사(政事). 2) 중대한 계기(契機). 3)[불]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들을만한 자질 또는, 그 자질을 갖춘 사람이란 뜻이다.
대용은 국어사전에 1) 크게 쓰이는 것. 2) 큰 벼슬에 등용되는 것이라 쓰여 있다.
대기는 마음의 청정함을 대용은 마음의 광명을 말하기도 하는데, 본 비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함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으로 해설하는 게 옳을 것이란 생각이다.
비석 후면의 해석은 여기서는 하지 않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누가 들으려 하지 않을 것 같고 실익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자구를 해석함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추사가 왜 이런 비문을 썼는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자못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추사와 백파, 초의선사와에 얽힌 삼각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백파(1767-1852)선사는 고창에서 태어나 지리산 영원사의 설파(雪坡)(1707-1791)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50세 때에는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어 불교계에 일대 논쟁을 일으키게 한다.
백파의 선사상(禪思想)은 마음의 청정함을 대기(大機), 마음의 광명을 대용이라 하고 그 청정함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을 기용제시(機用濟施)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백파(白波)는 조사선에서는 대기대용이 베풀어지면서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살활(殺活)자재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백파의 선사상에 초의의 반박논란
이러한 논란 속의백파율사의 대기대용지비는 본래 순창 복흥의 구암사(龜岩寺)에 있었던 것을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로 옮겨온 것이다.
순창 구암사에서는 설파(雪坡) 상언(尙彦), 백파(白坡) 긍선(亘璇), 설두(雪竇) 유형(有炯), 석전(石顚), 운기(雲起) 등 많은 고승이 이 사찰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도 선운사 부도전에 안치되어있다.
백파의 선문수경에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의순(草衣意恂,1786-1866)선사의 《사변만어(四辨漫語)》이다.
초의선사는 불교는 물론 유학과 도교까지 섭렵하였고 그 시대의 정약용, 신위, 추사 등과 교류, 다(茶)문화를 일으켜 동다송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추사(秋史1786-1856)김정희(金正喜)는 누구나 알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하였던 금속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제학자이기도 하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갈 기회를 가졌고, 이 때 중국의 유수한 학자들과 사귈 수 있게 된다.
특히 당대 제일의 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과 깊이 사귀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도 서신왕래가 잦았다. 옹방강의 호가 완원이어서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강했던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어서 썼으며, 이외에도 예당(禮堂), 시암(時菴), 과파(果坡), 노과(老果)등등 수 백 개의 아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질은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등이 경술문장이 바다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하였고 이들로부터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그러나 젊은 시절 중국의 문물과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우리나라를 「답답하고 촌스런 나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의 발견과 금석학에 대한 책자를 내었으며, 병조판서의 자리에도 오르는 등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으나, 그의 아버지가 옥사의 배후조종자로 연루됨에 따라 그도 관직에서 밀렸다가 순조의 배려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졌다. 추사는 제주도, 북청 등에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대략 그 기간이 13년이었다고 하며, 귀양살이 하는 동안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서도(書道)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아 일세를 대표 할만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귀양살이에서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아픈 마음속에서 잉태한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 돋보여진다.
그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니 글씨나 그림이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1851년에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에 2년간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절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과 이곳 등성이 넘어 앵무봉에 있는 화엄사에는 추사의 필치가 찾는 이를 맞이해 준다.
초의와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으며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차를 배웠고,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가장 좋아했으며,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하기도 하였다. 제주도 귀양길에도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으며 그때 이광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글씨를 보고 형편없다고 떼어버리게 하고 자기의 글씨를 달게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하였다.
초의선사는 교(敎)와 선(禪)은 다른 것이 아니며,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祖師禪)이고 교(敎)면 여래선(如來禪)으로 된다면서 “깨달으면 교가 선이되고 미흡하면 선이 교가된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초의는 선을 넷으로 나눈 ‘선문사변만어’를 펴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벗이자 불교에 박식함이 있는 추사 김정희가 끼어들어 백파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 것이다.
추사와 백파의 여러 번에 걸친 왕복서한 논쟁은 그 당시 유명하였다. 특히 추사는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면서 15가지로 일일이 논증한 ‘백파망증(白波妄證) 15조’에서오만 방자한 말투로 백파와 그 문도들을 힐난하였던 것이다. 백파는 화엄사에서 세수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사와 백파의 관계는 이렇게 치열한 논쟁을 벌인 관계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추사가 69세(1855년)에 쓴 백파비문을 보면 공손함과 스님에 대한 존경이 극에 다다른 내용으로 완연히 다른 감정을 보여준다. 틀림없이 추사가 9년여 동안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모난 성격의 오만함과 방자함이 인격적인 수양를 가져왔다고 보며 백파를 보는 관점도 달라졌으리라 본다.
추사가 백파비문을 쓴 시기는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고 추사체로서 미적 감각이 절정을 이룬 시점인 타계하기 1년 전의 글씨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엄격함과 방정함이 느껴지는 해서체로 힘차게 썼으며 뒷면에는 변화무쌍하고 마치 불균형 속에 조화를 이루 듯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추사체의 행서가 멋들어지게 쓰였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이었다. 따라서 ‘숭정 기원 후 사 무오 오월 일입(崇禎 紀元後 四 戊午 五月 日立)’이란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며 완당학사 김정희(玩堂學士 金正喜)라는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새로 쓰여 졌다고 보여 진다.
마지막 줄의 글씨는 앞의 일곱 줄의 글씨와 행간의 간격이나 조형성에서 확연히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추사의 글씨는 빽빽한가 하면 시원하게 트이고 자간 간격이 자유자재하고 운필 또한 힘차면서도 활달하고 변화무쌍한 독창적인 추사체의 맛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줄은 틀에 짜여진 느낌의 답답함과 자간의 간격도 답답하리 만치 빽빽하기만 하다.
추사가 비문을 써놓은 지 3년 뒤에야 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모방하여 썼을 것으로 보여 진다는 예기다.
나는 문화관광해설사를 할 때 이 비문 해설을 많이 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비문 앞에서 추사와 백파 초의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세월에 떠밀려가는 인간사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함을 허무(虛無)와 무상(無相)에 고개 숙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가 되어보는 흉내를 내어보기도 했었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이 시간, 언제나 아깝고 아쉽기만 하다.
※ 후에 시간과 지면의 여유가 생긴다면 ‘화엄종주백파율사대기대용지비’의 우리말 풀이도 한번 상정할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