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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BAR ㅣ 길윤형의 알고싶어]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의 일제 시기 굴곡된 삶
창씨명 ‘백천의칙’은 윤봉길이 죽인 일본 대장과 같아
간도특설대의 대게릴라전 “특필할 성과 거둬”
“한국인 토벌…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
일부서 주장하는 ‘야스쿠니 합사’는 불가능한 일
아직 건강하던 시절의 백선엽 장군(왼쪽). 2005년 6월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맞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0일 작고한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은 일제 시기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단죄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지금껏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공백’은 최근까지 학계에서 백선엽의 창씨명을 특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2009년 보고서에도 그의 창씨명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던 백선엽의 창씨명이 밝혀진 것은 <한겨레> 대기자를 지낸 김효순이 2014년 저서 <간도특설대>를 펴낸 뒤였습니다. 이 책에서 김효순은 백선엽의 상사였던 옌지 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을 인용해 그의 창씨명이 백천의칙(白川義則)이었다고 밝혀냅니다.
‘백천의칙’을 일본어 이름을 읽는 관행대로 읽으면,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됩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요?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홍구, 지금은 루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죽은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입니다. 둘의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이 일치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무언가 깊은 곡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1920년에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영명한’ 백선엽이 당시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윤봉길의 의거와 그 희생자의 이름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백선엽이 왜 자신의 이름을 백천의칙으로 바꿨는지 너무 궁금하지만, 100살의 나이로 숨지는 순간까지 백선엽은 자신의 창씨명은 물론, 창씨명을 그렇게 정한 이유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이듬해 만주국 장교가 될 수 있는 만주 펑톈군관학교에 입교합니다. 당시 똑똑한 조선인 청년에게 일본군 혹은 만주국 장교가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의미했습니다. 박정희는 신징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박정희도, 그보다 세살 어렸던 백선엽도 매우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1941년 12월 2년제인 펑톈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 1월까지 만주 북부의 자무스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배치됐습니다.
백선엽은 이후 여러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시절 생활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인(본문에선 한국인)으로 여러 민족적 모순을 느끼면서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 백선엽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펑톈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하여 자무스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뒤 간도특설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과 베이징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는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충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다.나는 45년 8월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1989년)
간도성 옌지현에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 일부가 일계 군관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독립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부는 잠임,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김일성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9~11월 사이 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 작전에 못 이겨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영토로 피신했다-편집자 주)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 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 특설대였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 회고록>(2000년, 일본어판)
1939년 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년, 일본어판)
일부 시민단체에서 백선엽은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이 아닌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1868~1869년 보신전쟁 이후 일본 내외의 여러 전쟁에서 일왕을 위해 숨진 이들을 모시기 위해 만든 신사입니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된 여러 전쟁에서 숨진 이들이 합사돼 있습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이들은 246만6000여명으로 이 가운데 2만1000여명이 조선인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백선엽은 자연사했으니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대상이 아닙니다. 재미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순직한 자위대 대원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성격의 신사인지 잘 보여줍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한 여러 침략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이런 시설에 전후 순직한 자위대원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보신전쟁 [戊辰戦争, ぼしんせんそう ]은 1868년 무진년에 시작된 維新 정부군과 구((舊))幕府군 사이에 벌어진 16개월여에 걸친 내전(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明治 천황에 의한 통일 국가로의 길이 열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