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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통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2차대전 이전의 해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함종은 아마도 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전함의 상징은 두터운 장갑으로 상징되는 방어력과 대구경 주포에서 나오는 강력한 ‘화력’이라 할 수 있겠죠. 이중에서 아무래도 방어력보다는 화력 쪽이 겉으로 좀더 잘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전함이 해군의 주력으로 자리잡았던 시절부터 아이오와급 4척이 노익장을 과시하던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함의 주포 사격장면과 그것의 위력은 비단 해군 관계자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해군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함 주포의 막강한 위력에 대해 여러 홍보물이나 책자 및 인터넷 자료들이 구구절절히 설명을 늘어놓긴 해도 대부분의 자료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주로 포탄의 ‘관통력’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전함이라는 함종이 다른 수상함(=장갑화된 목표)을 상대하기 위해 발달해왔기 때문이겠죠. 그렇지만 그 덕분에 ‘전함’이라는 배의 크기나 구조 등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주포의 위력이란게 상당히 막연하게 돼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대전차포의 경우 ‘88mm포는 ○m 거리에서 ○mm의 관통력을 가진다.’ 식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그러면 전차라는 병기는 그럭저럭 주변에서 실물을 보기도 어렵지 않고 대개 ‘관통=격파’나 마찬가지이므로 위에서 언급된 ‘관통력’이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실감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16인치 함포는 20,000m 거리에서 현측장갑에 대해 500mm의 관통력을 가진다.’는 문장이 주어졌다고 가정합시다.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서 16인치 포탄이 20,000m 거리에서 500mm의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갑판을 관통한 다음은 어떻게 되는걸까요? 상대 전함은 그 1발로 인해 그대로 가라앉는걸까요? 만약 가라앉지 않는다면 포탄 1발은 관통된 내부에 얼마나 피해를 입히는걸까요?
저는 강릉에 전시돼있는 기어링급 구축함을 빼고는 실물 군함, 특히 전함은 전혀 본 일이 없습니다. (해군에서 복무하지 않았거나 외국에 나갔다오신 분이 아니라면 대부분 비슷하시겠지만...;;) 길이나 폭 같은 수치나 내부 도면 같은건 많이 봐왔지만 그게 실제로 얼마나 큰건지, 실제 공간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는 감이 잘 와닿지 않죠. 때문에 위의 질문에 대해 ‘관통한 포탄이 격벽을 손상시키고 주변에 스플린터 데미지를..’ 같은 설명이 주어져도 문자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고, 결국에는 이렇게 되묻게 될겁니다. ‘그래서 결국 16인치 포탄 1발의 위력이 얼마나 되는건데?’
즉, 전함이 어떤 것인지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는 사람에게 관통력 위주의 설명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친숙하고 일반적인 목표물을 예로 설명을 한다거나, 16인치 포탄의 효과를 겪어보거나 주변에서 체험한 사람의 경험담 등을 들어본다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포탄 1발은 ○○○m의 살상반경을 갖습니다.’ 라던가 ‘착탄으로 인해 생기는 구덩이의 지름이 대략 ○m에 깊이는 ○m 정도..’, 아니면 포탄이 명중한 결과물의 사진을 제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죠.
2. 16인치 포탄의 위력 : 개요
수많은 전함들 중에서 일반인 레벨에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전함들 중 가장 오랜 기간을 살아왔고 또 최근까지 얼굴을 내밀었던 아이오와급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아이오와급은 그 연륜 탓에 자료도 풍부하게 남아있으므로 이제부터는 아이오와급의 16인치 50구경장 함포를 위주로 설명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16인치 포탄의 크기]
아이오와급의 16인치 주포 역시 다른 함포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포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장갑화된 목표물을 위한 철갑탄(AP : Mk8)과 비장갑 목표물을 위한 고폭탄(HC : Mk13)이었습니다. 철갑탄은 중량이 1.2톤에 달했지만 작약은 불과 18kg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주로 대형 수상함이나 해안의 토치카, 요새화된 포대 등을 타격하기 위한 포탄이었죠. 화력지원 임무시 16인치 철갑탄은 10m 두께의 강화콘크리트를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력지원 임무에서는 보통 고폭탄이 더 많이 사용되곤 했는데, 이것은 중량이 862kg(0.8톤)에 지나지 않았지만 70kg의 작약이 충전돼있었기 때문에 착탄시의 폭발력과 충격파로 반경 100m 내의 구역을 초토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연신관을 사용했을 때는 지면을 파고들어가서 지름 10~15m, 깊이 5~7m에 달하는 크레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죠.
지름 10~15m, 깊이 5~7m 짜리 크레이터란 저런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림 3은 1944년에 괌 함락 후 어느 피난민 캠프에서 촬영된 사진으로써, 16인치 포탄이 폭발하여 만들어진 구덩이에 빗물이 고여 작은 연못이 생긴 장면입니다. 그림 4는 노르망디의 ‘Point Du Hoc’ 이란 장소에 남아있는 15인치 포탄의 크레이터입니다. 보시다시피 사람 1명이 완전히 들어가고도 남죠.
참고로 Mk13 HC탄이 AP탄에 비해 유달리 가벼웠던 것은 그것이 본래 1910년대 말에 건조된 콜로라도급의 16인치 45구경장 함포에서 쓰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무거운 탄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준화를 위해서 노스캐롤라이나급 이하의 신형 16인치 전함에서도 그냥 예전에 개발된 HC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죠. 이후 2차대전 기간 내내 별다른 개량이 없었다가 한국전쟁에서 함포의 화력지원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난 후 Mk13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가지 신형 포탄이 개발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인마살상용의 Mk144 ICM(Improved Conventional Munition)탄이었는데, 이것은 Mk13의 내부에 400개의 자탄을 채워서 비행장, 개활지, 병력집결지 등의 광역제압을 노린 것이었죠. 1980년대에는 아이오와급 4척의 부활과 동시에 중량 1,015kg에 사정거리가 46km나 되는 신형 HC탄의 개발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90년대까지 테스트만 하다가 결국 실전배치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좀더 반칙에 가까운 포탄도 있었는데, 바로 예전에 배군님께서 언급하셨던 ‘핵포탄’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배군님의 이글루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metalfleet.egloos.com/1909368 )
[(좌) Mk23 핵포탄. 통칭 ‘Katie' / (우) 원형이 된 W-9 핵포탄의 폭발 광경]
이 포탄은 육상용의 W-19 280mm 핵포탄을 모체로 하여 개발된 ‘전술핵’이었으며, 원형인 W-19와 W-9의 역할이 유럽의 전면전 상황에서 더 이상 전선을 지탱할 수 없을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써 전선 앞에 밀집한 적 제파를 ‘소멸’시켜버리는 것이었으므로 이것 역시 비슷한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혹은 당시의 상륙전 교리로 추측컨대, 재래의 화력지원 임무를 대신하여 상륙 예정지의 해안방어에 단숨에 구멍을 내는 공격적인 전법을 상정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핵포탄의 위력은 15kt으로써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리틀보이와 동등한 위력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 사격한 예는 없었지만 원형이 된 W-9의 실험결과(W-9도 15kt이었음)로는 유효 살상반경이 2~3km, 지상폭발시 착탄으로 형성되는 크레이터의 지름이 105m, 깊이가 11m였다고 하는군요. 전함의 화력으로는 사상최대라 하겠지만 사용되지 않고 끝났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3. 16인치 포탄에 관한 체험담과 증언 :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태평양 전쟁 중에도 전함의 화력지원 작전이 수행되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작은 섬 단위의 고정목표를 타격하는 것이 주였기 때문에, 탄착수정이나 지원요청 절차 외에는 화력지원 교리 및 전략과 관련해서 기여한 점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반면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는 전장 자체가 화력지원에 이상적인 환경을 지니고 있었고 (태평양과 달리 적 수상함이나 항공기의 공격이 거의 전무했으므로) 보급선 차단, 해역 봉쇄, 악천후와 산악 지형 하에서의 지상군 지원, 상륙전 지원 등 항공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전함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과시했죠.
한편 전쟁 당사자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은 처음으로 접해보는 놀라운 것이었고, 군인이나 민간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기의 입장에 따라 공포심, 경외감, 마음 든든함 등 다양한 시선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함포보다는 주로 폭격에 대한 것이 많긴 하지만) 이번 장에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개인적 증언이나 기록들 중 16인치 함포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을 정리함으로써 함포의 위력에 대해 간접적으로 짚어보도록 할까 합니다.
1950년 6월 당시, 아이오와급 전함 4척은 미주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비함으로 모스볼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서양에 있던 미주리가 회항하여 1950년 8월에 동해안에 도착했고, 나머지 함들도 차례차례 재취역 하여 뉴저지와 위스콘신이 1951년 말, 아이오와가 1952년 4월에 동해 해역에 도착하여 작전에 투입되었죠. 비단 전함만이 화력지원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타 소구경 함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16인치 함포는 할 수 있었습니다.
[(좌) 위스콘신의 일제사격으로 파괴된 철교. 화살표는 크레이터. / (우) 8인치 함포가 교량을 파괴하는 순간]
이를테면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동해안의 철교나 교량을 폭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구축함의 5인치 포로는 위력이 너무 낮아서 지지부진 하다가 8인치 포 중순양함과 전함이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폭파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으며, 전쟁 후반기의 동부전선에서도 최대 40km까지 사격이 가능한 16인치 함포가 없었다면 동해 쪽의 휴전선은 지금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을 것입니다. 각 함포를 105mm 야포의 포탄 수로 환산해본 다음 표 역시 16인치 함포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사례 1 : 영덕-포항 공방전의 경우]
16인치 함포가 그 위력을 발휘했던 국면 중 하나는 1950년 8월~9월 사이의 동부전선입니다. 낙동강 교두보의 최우단 거점인 영덕에서는 1950년 7월 중순 이래 북한군 5사단과 국군 3사단간에 도시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북한의 ‘8월 총공세’가 시작되면서 8월 5일 이후부터 동부전선도 위급을 고하게 된 상태였죠. 다음은 당시 3사단 참모장이었던 공국진 중령(전 헌병사령관, 예비역 준장)의 증언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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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에 영덕을 적에게 처음 빼앗겼어요. 공식 기록으로는 영덕을 네 번 빼앗고 빼앗긴 것으로 돼있지만 실제로는 밀고 당기고 한 것이 몇 번인지는 기억도 못할 만큼 여러 번이에요. 시체를 치울 틈도 없어 피아 시체가 산하에 즐비했으니까요. 특히 영덕 북방의 308고지 쟁탈전이 심했지요.”
... (중략) ...
“우리 사단 전면의 적은 1개 사단반 가량의 병력인데 화력이 대단히 우세해요. 그래서 적의 공격을 받으면 우리가 밀려서 영덕이나 고지도 빼앗겼지만 미군의 엄호로 우리가 반격, 다시 탈환하곤 했지요. 이때 미주리 전함을 비롯한 4, 5척의 미영 순양함과 구축함 등이 함포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보통 8인치 함포로 쏘아대는데, 때로는 미주리 전함의 16인치 주포도 쏩디다. 새우젓통만한 포탄이 떨어지면 직경 10미터 이상의 큰 웅덩이가 푹 패어요. 우리가 함포의 덕을 크게 입긴 했어요.
[영덕시에 난 포탄 웅덩이. 지프의 크기와 비교해볼 것.]
적의 집결지나 갓 점령한 지역에 함포가 작렬하면, 적들은 간담이 떨어지고 국군은 사기가 올라 반격을 하게 마련이죠. 그러나 함포는 야포와 같은 명중효과는 아주 적어요. 이유는 정찰기가 관측을 해서 통보해주면 쏘는데 지․해․공의 3각 관측이 잘 안되기 때문이었나 봐요.
국군에 함포를 정확히 유도할 만한 통신 및 관측설비가 없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구요." ... (후략)
(출처 : 『민족의 증언 : 제 2권』, 중앙일보사, 1983, pp. 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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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전쟁 해전사』에서는 영덕-포항 지역에서의 함포지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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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서의 구조작전 후에, 미주리 함은 계속 동해안에 있는 북한군들을 포격했다. 한국 3사단은 포항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하는 북한 5사단, 북한 7사단, 그리고 101보안부대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한국 3사단은 포항 남쪽에 있는 형산강 상류 지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쪽은 적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군들이 이 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하는 해안 도로를 점령하지 않으면 동해안에서 유엔군이 전진할 수 없었다.
미주리함은 한국군 군사자문단의 화력 지원요청을 받았다. 육상 참호에 은신한 화력 통제팀의 에머리히 중령의 통제를 받아 미주리가 강 건너 300야드 지역에 있는 적군을 향하여 함포사격을 실시하였다. 미주리 함에서 9마일에 있는 목표물에 16인치 포탄 380발을 발사하여 그곳이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되었다.
에머리히 중령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월 17일에 우리는 강둑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 미주리 함의 화력은 공산군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우리는 강을 건넜다. 포항 남쪽에 있는 강변과 도시에 있었던 파괴가 해군 화력의 효과와 정확성을 증명해주었다.”
(출처 : 말콤 W. 케이글, 신형식 譯, 『한국전쟁 해전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3, pp. 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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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 원산의 경우]
원산 지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0년 12월에 포기된 후, 휴전 때까지 미 해군의 함재기와 함포사격에 의해 봉쇄 및 초토화 상태에 놓였습니다. 다음 내용은 전쟁 중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하셨던 분이 쓰신 수기에서 발췌한 것으로써, 원산 근처에서의 포로생활 중 함포사격에 대한 언급이 있어 올려봅니다.
[청진 근해에서 함포를 퍼붓고 있는 미주리]
[함포사격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
[1952년에 촬영된 원산시. 단, 함포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폭격도 가세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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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수많은 조명탄이 밤하늘에 수를 놓고 있다. 흰 낙하산에 매달린 조명탄이 흰 연기를 내뿜으면서 바람에 일렁거리며 내려오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면 얼마나 보기 좋은 불꽃놀이일까. 조명탄은 원산 앞바다에 있는 미 군함에서 쏘아올린 함포 조명탄이었다. 수백 개의 조명탄은 처음엔 높은 곳에서 불꽃을 튕기다가 점점 내려오면서 불꽃이 없어졌다. 그러면 금방 또 쏘아올렸다.
안변(安邊) 지역은 원산(元山)과 거리가 꽤나 멀다. 그래도 함포가 ‘쿵’ 하고 내는 저음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원산 가까이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비행기 폭격보다는 함포사격이 더 겁났다고 한다. 비행기는 처음부터 목표를 정해 폭격하기 때문에 비행기의 위치를 보면 대강 어디를 폭격하는가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함포사격은 하늘에서 무작정 내려오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포사격이 더 겁이 나는 것이고, 비행기 폭격보다 위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 함포사격을 하기 전에, 비행기가 목표물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한 다음에 포를 쏘기 때문에 명중률도 높았다. ... (후략)
(출처 : 박진홍, 『돌아온 패자-6.25 국군포로 체험기』, 역사비평사, 2001, pp. 기억안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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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3 : 전쟁 후반기 동부전선의 경우]
1951년 이후 전쟁이 고지 쟁탈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하면서 동부전선에서 함포사격은 고지 탈환에 필수적인 지원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산악의 기복이 심한 이곳에서는 목표물이 고지 후사면에 위치할 경우 육상으로부터의 야포 지원이나 항공기의 공습이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함포가 포격의 방위상 이런 목표물에 대해 대단히 유용하게 작용하곤 했죠. 다음은 『한국전쟁 해전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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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반 동안 포격라인에서 함정들은 적들의 전선을 포격했다. 1952년 4월 7일에 셀더 장군은 마틴 제독에게 이 결과를 보고했다.
(1) 위스콘신 함은 평균거리 16마일에서 43개의 임무 동안 16인치 포 977발을 발사하였다. 이 함포로 적군 약 70명을 죽이고 359명을 부상시켰다. 적군의 포대 3개가 파괴되고 7개가 손상되었다. 81개의 벙커와 참호가 파괴되고 105개는 손상되었다. ... (중략)
[(좌) 지형상의 곤란점 / (우) 후사면에 떨어지는 포격]
셀던 장군은 ‘이 시기에 우리를 도왔던 해군의 지원은 아주 훌륭하고 효과적인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적들의 사기에 끼치는 영향은 컸다. 공산군들은 산 반대에 있는 경사면에 구축한 요새가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벙커와 지휘소, 포대들이 순양함과 전함의 함포사격을 당하자 당황하였다. 해군 함포의 결과에 대하여는 탄착수정 요원들 보고뿐만 아니라 붙잡힌 포로들도 진술하였다. 한 포로는 1월 25일에 위스콘신 함의 함포사격중 1발이 자기 사단 지휘소에 명중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했다. 다른 포로는 대규모 함포사격 후에 자기 부대의 많은 대원이 부상을 입어 항복해야 했다고 했다. 사실은 포탄 하나가 그들의 옆에 떨어졌지만 터지지 않았다. 그는 16인치 포탄의 크기를 보고 항복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하였다. 또다른 포로는 자기 사단의 정치요원이 16인치 포탄이 만든 큰 구덩이를 보고 원자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었다고 말했다. ... (후략)
(출처 : 말콤 W. 케이글, 신형식 譯, 『한국전쟁 해전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3, pp. 39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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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의 함포사격은 현지주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마침 당시 강원도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 쓰신 회고록 중 당시 정황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있어 해당 내용을 발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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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3월 말쯤 설악산 대청봉 아래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대낮에도 하루 종일 계속 되었다. 유명한 설악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요즈음도 나는 가끔 설악산 등산을 했는데 그 때를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 포탄이 어떻게 떨어졌고 어디에서 양쪽 군대가 총을 쏘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섭게 터지던 폭탄소리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소총 소리만 내 귀에 아른거릴 뿐이다.
바다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데 비유하자면 흡사 무슨 소북과 대북으로만 형성된 타악 연주단의 연주 소리와 같았다. 리드믹컬하게 장단을 맞추어 규칙적으로 쿵닥 쿵닥 쿵닥 쿵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쿵쿵쿵... 슈잉 슈잉 솨아아... 하고 소리가 나면 조금 있다가 우리 동네 상공으로 슈아악 슈아악... 씨잉 씨잉.... 후아악! 후아악... 하며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주로 밤에 났는데 며칠씩이나 걸렸다. 해상에서 설악산 내륙을 향해 쏜 해군의 함포소리가 그렇게 났던 것이다. 설악산 전투에서 함포의 지원 사격이 없었으면 우리 국군이 도저히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포격으로 쑥대밭이 된 고지]
설악산으로 날아가는 포탄이 오발되어 송암산을 넘지 못하고 산 아래 떨어져 불발탄이 된 것을 윗마을에서 주워다가 마을 공회당 앞마당에 일렬로 세워 놓았는데 작은 것도 있었지만 큰 것은 웬만한 사람이 들기조차 어려운 그렇게 무거운 것들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우리들은 그것들을 들어가며 기운 자랑들을 하였다. 참으로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그 때였었다. 불발탄이라고 위험하지 않은게 아닌데... (후략)
(출처 : 「내가 겪은 6.25 동란 전후의 이야기」- http://blog.ohmynews.com/olcc/124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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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이어가다 보니 어째 함포의 위력보다는 한국전쟁에서의 공헌도 쪽으로 흘러가버린게 아닌가 싶지만 그럭저럭 16인치 함포의 위력에 대해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저런 증언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왜 아직까지 미 해병대가 전함을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지 납득이 되기도 하네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민족의 증언 : 제 2권』, 중앙일보사, 1983
- 말콤 W. 케이글, 신형식 譯, 『한국전쟁 해전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3
- 박진홍, 『돌아온 패자-6.25 국군포로 체험기』, 역사비평사, 2001
- http://en.wikipedia.org/wiki/Iowa_class#Main_battery
- http://www.navweaps.com/Weapons/WNUS_16-50_mk7.htm
- http://www.strategypage.com/htmw/htmurph/articles/20020306.aspx
- http://www.eugeneleeslover.com/USNAVY/CHAPTER-22-B.html
-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1/KMC.htm
- http://nuclearweaponarchive.org/Usa/index.html
출처 : 이사무의 해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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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