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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성도는 말씀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복을 받은 사람
장코뱅 추천 5 조회 382 25.10.04 07:57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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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10.04 08:07

    첫댓글 즐거운 추석 명절 연휴 되세요!

    이 포스팅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25.10.04 09:20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5.10.04 08:10

    <호크마 주석: 시편>

    =====1:1
    복 있는 사람 - 시편은 이처럼 서두(序頭)를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히브리어 '아쉬레이 하이쉬'(* )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즉, '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솨르'(* )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의 연개형인데, 여기에서는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명사가 뒤따르는 단어와 의미상 소유격 관계에 놓일 때 앞의 명사를 연계형으로 만들어 '...의'로 해석한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븍'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 와 '아솨르'(* )가 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1:22; 2:3; 12:2; 17:16; 22:17;25:11;35:9; 민 6:27; 대상 13:14; 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다(창 27:4;47:9; 출39:43; 신1:11; 삼하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8;왕상 1:47;잠 3:33).

  • 작성자 25.10.04 08:11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바라크'를 '율로기아'(* )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 )로 사용되었는데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유기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온다(욥 5:17;전 10:17). 이 단어는 신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대하 9:7;사 30:18;32:20;56:2;단 12:12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Weiser).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 )로 번역되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 작성자 25.10.04 08:12

    사용되었다는 점이다(Kittle).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 )는 '유죄한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Kraus, Twot).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 )이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 )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 )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 )은 '조롱하다',

  • 작성자 25.10.04 08:12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한다(Kraus).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사 28:15;말 3:14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 , 할라크), '서다'(* , 아마드), '앉다'(* , 야솨브)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Weiser).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 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다.

    =====1:2
    1절이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했다면, 본절은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 -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 )는 유대인들에게 흔히 모세 오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계시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교훈 또는 훈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시가 전체 시편의 서문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 용어는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 작성자 25.10.04 08:13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Kraus, Craigie).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 의인의 특성이다. 그 특성은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2) 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수 1:8). 여기서 '즐거위하여'라는 말은 의인이 토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즐거음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의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싫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이다(112:1). 한편, '묵상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 )는 '묵상하다'는 뜻 이외에 본래 '말하다', '속삭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로 볼 때, 의인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하게 암송한 듯하다.

    =====1:3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이는 의인의 복된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즉,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항상 기쁨을 공급받는 상태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다 비유한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언제든지 생수를 공급받는다.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 작성자 25.10.04 08:13

    히브리어 '팔라그'(* )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헐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水路)를 말한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 '시절을 좇아'란 문자적으로 '그의 때에'이며 이는 곧 인생의 추수기를 의미한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1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다(Calvin).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이다.

    =====1:4
    1-3절에 묘사된 의인의 행복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실패 및 불행을 기록한 부분이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곡식을 까부를 때 낱알은 지면에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따라서 여기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개념은 3절의 시냇가에 심기운

  • 작성자 25.10.04 08:14

    나무의 견고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겨는 성경에서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말로서 많이 언급되어 있다(35:5;욥 21:18;사 5:24;17:13;29:5;33:11;41:15;렘 23:28;단 2:35;호 13:3;습 2:2;눅 3:17).

    =====1:5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 여기서 '심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 )는 '공의' 또는 '심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또한 '견디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 )은 '서다', '일어서다'라는 뜻이다. 이 두 용어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해석이있다. (1) 혹자는 '미쉬파트'를 공의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공의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즉, 악인은 의인의 공의로운 일에 동참하지 못하며(Craigie) 또는 의인들의 공의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해석이다(Calvin). (2) 혹자는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최후 심판 때에 서지 못하는 것, 곧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iggs).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악인이

  • 작성자 25.10.04 08:14

    하나님의 '율법'(* , 토라)을 대적하는 악인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악인을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쭤겨나는 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해석한 (2)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최후의 심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심판의 사역을 행하시고 있기 때문이다(Kraus).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 하리도다 - 여기서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총회를 말한다. 이들은 곧 1, 2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사상과 행동에서 구별된 자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이를 생활화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모여 하는 일은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111:1;118:19, 20). 그리고 15편은 이 거룩한 곳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다'(* )는 '지명하다', '...에서 만나다', '두다'는 의 동사 '야아드'(*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 작성자 25.10.04 08:15

    장소적인 개념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다'는 거룩한 장소, 곧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성소나 성전을 지시하는 것이며 또한 최종적으로 메시야께서 모든 성도를 불러모으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것이다(Kraus). 의인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회중에 들어가나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1:6
    의인의 길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의인의 복과 악인의 멸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인정하시므로 그가 복을 받는 것이며 반대로 악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한다. 이처럼 시인은 이 시구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Weiser). 한편, 여기서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 )는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악인의 최후를 암시한다. 즉,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다.

  • 25.10.04 09:31

    무난하고 합당한 설명으로 공감이 됩니다.

  • 25.10.04 15:45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10.04 09:08

    <매튜 헨리 주석>

    = 복있는 사람 (시편 1:1-3)

    Ⅰ. 경건한 사람의 정신과 그 길의 특성.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시험할 수 있다. 여호와는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아시나, 우리는 그들의 특성으로 그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특성에 응하기 위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시련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다. 즉 그 특성은 우리가 의무적으로 순종해야 할 율법의 요구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성취하도록 되어 있는 한 약 속의 조건 두 가지를 뜻한다. 선한 사람의 특성은 여기에서 그가 선택한 길과 그가 택한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의 일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가 언제나 지침으로 택하는 것은 구체적인 결과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규범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에서 생기는 잘못은 근원적이고도 치명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옳다면 우리는 옳은 길로 잘 행하게 된다.

    1. 경건한 자, 그는 악을 피하고,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완전히 절교할 것이며 결코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1절). "그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그의 특성 가운데 이 부분이 제일 먼저 제시되어 있다.

  • 작성자 25.10.04 09:08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명을 지키려는 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나를 떠날지어다"(시 119:115)하고 말해야 하며 악에서 떠날 때 비로소 지혜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는 행악자들이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본다. 세상은 그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각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는 세 가지 특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경건함이 절정이 어느 단계에까지 이르는 가를 보라. Nemo repente fit turpissimus-즉, 단번에 악의 극치에 이르는 자는 없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던져버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악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믿음의 봉사를 젖혀놓을 때, 그들은 "죄인"이 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개적인 반역의 일에 돌입하여 죄와 사단을 위한 봉사에 종사하게 된다. 태만은 범죄의 길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태만으로 인해 마음이 매우 경화되어서 마침내 그들은 "오만한 자"가 된다. 즉 그들은 거룩한 모든 것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전하며, 믿음을 비웃고 죄를 즐긴다. 불의로 향하는 길은 이러하다.

  • 작성자 25.10.04 09:08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지고, 죄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유혹하고 바알 신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악인"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고정되지 아니하고, 어떤 확실한 규범에 의해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정욕의 지배와 유혹에 따라 행하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여 그것을 그들의 업으로 삼고 있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오만한 자"란 "하늘을 대적하여 입"을 벌리는 자들이다. 선산 사람은 이러한 자들을 슬픈마음으로 본다. 그들은 그의 의로운 영혼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2) 그러나 선한 자는 어디서 그들을 보든지 간에 그들을 멀리한다. 그는 그들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1]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의 모의에 참석치 아니하며 그들과 의논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재치 있고 민첩하며 학식이 있다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다면 그들은 그의 상담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저희의 결의에 가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눅 23:51) "저희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의 원칙에 의해 행동하지 않으며

  • 작성자 25.10.04 09:08

    그들이 주고받는 충고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경건치 못한 자들, 즉 악인들은 믿음에 위배되는 충고를 하기에 서슴치 않으며 그것은 매우 교묘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물들거나 사로잡히기 않게 되는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처럼 행하지 않도록 피한다. 그들의 길이 그의 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그 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는"(36:4) 죄인처럼 그 속에 계속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가능한 한 그들이 있는 곳을 피한다. 그가 그들을 닮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교제하려 하지 않으며, 그들을 그의 동료로 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그들의 길에 서지도 않는다(잠 7:8). 그는 감염될까 두려워하며 역병에 감염된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멀리 피한다(잠 4:14, 15). 해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해로운 길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3] 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그는 악한 자리에 편히 앉아서 자신의 마비된 양심을 즐기는 자들과 함께 쉬지 아니한다.

  • 작성자 25.10.04 09:09

    그는, 마귀의 나라를 돕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찾아 철저히 음모를 꾸미거나 의로운 세대들을 정죄하기 위해 강압적인 태도로 공개 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과 사귀지 않는다. 취한 무리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며(69:12), 결코 그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호 7:5).

    2. 경건한 자, 그는 선한 것을 행하고 그것을 신봉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그것과 친숙하도록 할 것이다(2절). 이것은 그로 하여금 악인들의 길에서 벗어나고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해 준다.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17: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제하고 하나님과 할게 그의 말씀에 의해 교제를 가질 때에는, 즐거움이나 발전을 위해 죄인에게 우정을 청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할 것이다"(잠 6:2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여기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우리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살펴보자.

  • 작성자 25.10.04 09:09

    (1) 선한 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전념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로다." 그는 그것이 율법, 하나의 속박일지라도 그것이 거룩하고 의로움고 선하며 그가 허심탄회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에, "속사람으로는" 그것을 즐거워한다(롬 7:16, 22).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계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인도해 주는 성서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해야 한다.

    (2) 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사귄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그리고 이것으로써 그가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119:97).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훌륭한 것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마음에 철저히 적용시키고 또 그것들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에 훌륭히 감동될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의 향기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야로"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행동의 규범과 위로의 원천으로

  • 작성자 25.10.04 09:10

    여기고 그에 대해 꾸준하고 습관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밤이든 낮이든,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아도 될 시간이란 없으며 또한 그것을 묵상하기에 불합당한 시간이란 없다. 우리는 낮과 밤의 시작인 아침과 저녁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일의 업무와 대화 속에 그리고 매일 밤의 휴식과 잠 속에도 이러한 생각들을 해야 한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나이다."

    Ⅱ. 경건한 자의 행복에 대한 확신.

    우리는 이러한 확신으로써 경건한 자의 성품에 달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1. 일반적으로 경건한 자는 "복"을 받는다(1절). 하나님은 그를 축복시키고 그 축복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를 완전히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모든 종류의 축복, 즉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의 모든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 있어서도 행복의 요소들이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자를 묘사하고자 할 때, 선한 자를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진실로 거룩한 자가 결국 진실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 작성자 25.10.04 09:10

    우리는 어디에 행복이 있을 것인가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선함과 거룩함은 행복으로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계 22:14). 행복 그 자체이다. 이 후에 다른 생이 없다할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지키는 자는 행복하다.

    2. 그의 축복은 여기에서 비유로 예증되어 있다.(3절) "그는" 과실을 맺으며 무성한 "나무와 같다."

    (1) 이것은 그의 경건한 행실의 결과이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상하고 그것을 "즙과 피로" 변하게 하였으므로 그것은 그를 푸르른 나무처럼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제를 나눌수록 우리는 모든 선한 말과 사업에 대해 더욱 훌륭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2) 또는 이것은 약속된 축복에 대한 결과이다. 그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으므로 "나무와 같이 될 것이다." 거룩한 축복은 현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경건한 자의 행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본래 들감람나무였으며, 그것들이 새로 접목되고 하늘로부터의 능력에 의해 심어질 때까지는 그러한 나무로 머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나무라 할지라도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없다.

  • 작성자 25.10.04 09:11

    그것은 "여호와가 심으신 나무"이므로 그는 그 속에서 영광 받으셔야 한다(사 61:3). "여호와의 나무는 수액이 가득하다."

    [2] 그가 은총에 의해 자라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시내"로 불리우고 있다(46:4). 여기에서 선한 자는 힘과 권력을 공급받으나 그것은 분별할 수 없는 은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3] 그의 행실은 유익하도록 번성한 과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빌 4:17). 하나님은 제일 처음 축복하신 자들에게 "생육하라"(창 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생육에서 오는 즐거움과 영예는 그 수고의 보답이 되고 있다. 은총의 자비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마음의 평정과 생활의 지침에 있어서 그 은총의 의도에 순응하여 과실을 맺을 것이 기대되어 진다. 그리고 포도원의 훌륭한 일군에 대한 찬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선을 행하되 합당한 때에 행할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용한 과실을 (그들에게 요구되는) "시절을 좇아" 맺는다.

    [4] 그의 사업은 손상되거나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잎사귀 또한 마르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업에 있어서 유익한 과실이 없이 잎만을 내는 자들에게는

  • 작성자 25.10.04 09:11

    그 잎마저 마를 것이며, 그들은 그 사업을 자랑했던 것만큼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속을 다스린다면 그것은 그 사업을 푸르게 하며 우리에게 위안과 신뢰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렇게 획득된 월계수들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5]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함, 곧 영혼의 형통함이 그를 따르리라는 것이다. 율법에 순응하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형통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사악하고도 위험한 성품에 쉽게 물들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 즉 거룩한 율법의 초월적인 탁월함과 우리의 열매가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과 효력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와 서로를 가르치고 권고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경계하고 죄를 향하는 모든 접근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과 많은 교제를 나누고 의로움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악한 말과 일에 대비하여 충분히 우리를 강화하고 모든 선한 말과 일로 우리를 무장하기 위해 하나님께 그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 작성자 25.10.04 09:11

    = 악인의 멸망과 그에 대한 해설 (시편 1:4-6)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Ⅰ.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4절).

    1. 일반적으로 그들의 성품과 상황은 의로운 자들과 반대이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다." 칠십인역에는 이것이 강조적으로 반복되어 있다. "불의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악인의 꾀를 좇으며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지도 않는다. 그들은 소돔의 포도 이외에는 과실을 맺지 못한다. 그들은 땅을 해친다.

    2. 특히, 의인은 귀중하고 유익하며 실과를 맺는 나무인 반면에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즉 그들은 가장 가벼운 겨로서 집주인이 쓸어버리고자 하는 티끌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그들을 귀중히 여기겠는가? 그들을 중요시하겠는가? 악인들은 겨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 마음의 상태를 알고자 하는가? 그들은 가벼우며 무익하다. 그들은 실속이 없으며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다.

  • 작성자 25.10.04 09:12

    그들을 바람이 불고 유혹이 올 때마다 쉽게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확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그들의 종말을 알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곡간에 거두어 들여지거나 돌봄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그들을 사악함 속에 버려두실 것이다. 겨는 잠시 동안 밀 속에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오고 있으며 "자기 타작마당을 철저히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겨와 같이 만드는 자들은 회오리 바람과 거룩한 진노의 불 앞에서 그렇게 될 것이며(35:5), 그것 앞에 서거나 그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사 17:13).

    Ⅱ. 악인의 파멸(5절).

    1. 그들은 패역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과 같이 심판에서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악인이 심판에 견디지 못한다." 즉 그들의 유죄함이 발견될 것이며 수치와 당황스러움 속에서 교수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탄원과 별명은 경멸스러운 것으로서 제재당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각 사람의 성품과 일이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어지고 위장되었을 지라도 그 때에는 그것이 사실 그대로 모두 발견될 것이며

  • 작성자 25.10.04 09:12

    그들의 거짓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각 사람의 미래의 상태는 결코 변경될 수 없는 판결로써 영원한 세상을 위해 결정될 것이다. 악인은 그 심판에 나타나 육신으로 행한 일에 따라 판결 받아야 한다. 그들은 영예롭게 사라지기를 바랄지 모르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을 배반할 것이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될 정도로 그들에 대한 증거는 명백하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심판은 매우 공정하며 치우침이 없을 것이다.

    2. 그들은 영원히 복 있는 자의 모임에서 제외될 것이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이다. 즉,(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심판"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 법정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입회자가 된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시어 "뭇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유14; 고전 6:2). 또는 그들은 "하날 나라"에 들지 못할 것이다. 강력히 말해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의 총회," "의인의 회중,"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 있을 것이나 성도들 이외는 그 누구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완전한 자들의 회중이 될 것이다(살후 2:1).

  • 작성자 25.10.04 09:13

    사악한 자들은 그 회중에 자리잡지 못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부정하거나 성별되지 아니한 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의인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볼 것이나, 그들 자신은 쫓김을 당하여 영원히 괴로워 할 것이다(눅 13:27). 사악하고 불경스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의인과 그 회중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의인들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것이다. 이 세상의 위선자들은 그럴듯하게 가장하고 의인의 회중에 잠입하여, 방해받거나 결박되지 않은 채로 그곳에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속일지라도 그리스도는 속일 수가 없다. 그가 "양과 염소," "가라지와 곡식"을 분리하실 날이 오고 있다(마 13:41, 49 참조). 그 "위대한 날"(갈데아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은 발견하는 날이 될 것이며, 구별하는 날, 그리고 마지막 구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할 것이나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때로 힘이 드는 것이다(말 3:18).

  • 작성자 25.10.04 09:24

    Ⅲ. 거룩한 자와 사악한 자가 이처럼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이유(6절).

    1. 하나님은 의인의 형통함과 행복으로 인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길을 인정하시기" 때문에 축복받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택하시어 그 길로 가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 길을 택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하시며 그들의 모든 발걸음을 명하신다.

    2. 죄인들은 그들 자신의 멸망에서 오는 모든 치욕을 겪어야 한다. 그들이 택하여 가기로 결심한 그 길은 직접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멸망한다. 그것은 자연히 파멸로 기울어지므로 필연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므로, 그의 은혜로운 미소에 힘입어 그 길은 형통하여 좋은 결과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인의 길에 노하시며 그들이 행하는 것은 모두 그를 불쾌하게 하므로 그 길과 그 속에 있는 자들은 망할 것이다. 각 사람에 대한 판단은 주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가 못 받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좋게,

  • 작성자 25.10.04 09:25

    혹은 나쁘게 내려질 것이며 그것은 영원한 세계에서도 계속 적용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길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며(렘 12:3), 은밀한 기도를 아시고(마 6:6), 사람들의 비난에 의해 그들의 마음이 아무리 검게 되고 더럽혀졌다 할지라도 그 본심을 아시기 때문에 곧 세상에 그들과 그들의 길을 드러내시어 그들의 영원한 기쁨과 영예가 되도록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낙심하고 있는 의로운 영을 위로해 준다. 또한 죄인의 길이 비록 지금 즐겁더라도 결국엔 망한다는 사실은 유쾌한 상태에서 방심하고 있는 죄인들을 위축시킨다.

    이 구절들을 노래하고 그것들을 기원함으로써 우리들 스스로 악인의 분깃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며, 장차 올 심판에 대한 확고하고 생명 있는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멸시하도록 하자. 또한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심판에 대한 준비를 하고, 거룩한 관심을 갖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도록 우리 스스로 분투노력하자.

  • 25.10.04 09:49

    한편의 긴 강해설교를 듣는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 25.10.04 15:59

    @노베 공감합니다^^

  • 25.10.04 09:51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복을 받은 성도가 되고자 소망합니다! 아멘!!

  • 작성자 25.10.04 10:08

    아멘 🙏 🙏

  • 25.10.04 10:30

    아멘 🙏 🙏

  • 25.10.04 10:51

    복 있는 자 의인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대신에 주야로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한다는 이 구절이 1절에서 바로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군요. 시편 전체를 한 절로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성경을 대표하는 구절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가 심판을 견디지 못하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마는군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는 것이 복 있는 자인 것을 잘 알겠습니다. 주의 계명을 곱씹으면서 충분히 소화를 시키는 삶이 복된 삶이란 걸 느끼며 오늘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 25.10.04 11:41

    공감합니다. 포스팅 본문과 시편1편을 한 큐에 잘 집어 주셨습니다!

  • 작성자 25.10.04 13:54

    @노베 네, 공감합니다!

  • 25.10.04 15:47

    아멘으로 화답하는 묵상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을 두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25.10.08 12:46

    아멘!

  • 작성자 25.10.10 11:44

    아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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