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대 후반에서 1600년대 초반에 걸친 명나라 말기 시대는 여러 면에서 주목해야 할 시기다.
상업이 발달해서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었고, 지역마다 특화된 상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양자강(장강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하류 연안에는 대규모 상공업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이 도시에는 아직 기계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직물업을 비롯한 비교적 규모 있는 공장이 생겨났고, 따라서 임노동자(‘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줄인 말 – 옮긴이)도 출현하고 있어서 공개적인 인력시장까지 도시의 한켠에서 형성될 정도였다.
이들 도시는 관아가 있는 전통적인 도시들과는 전혀(완전히 – 옮긴이) 다른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했고, 북경(北京)이나 남경(南京)의 위정자들이나 성리학자(다른 이름은 ‘주자학자’ - 옮긴이)들이 내뱉는 설교에는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급격히 팽창한 대중 소설이나 연극 문화의 주인공들이었는데, 이를 통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공기를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명 말에는 도시민들을 사상적으로 대변해 주고 성리학자들의 이데올로기(이념/사상 – 옮긴이) 공세로부터 지켜 줄 학파가 마침내 출현했다(나타났다 – 옮긴이). 그 우두머리가 ‘왕간(王艮)’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명나라 사람들은 – 옮긴이) 그의 고향 이름을 따서 이 학파를 ‘태주학파’라고 불렀다.
그는 양자강 하류 지역인 지금의 강소성(省) 출신이었는데, 집안은 대대로 제염업(소금을 만드는 일 – 옮긴이)에 종사해 왔다. 나이가 어릴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형을 따라 소금을 만드는 인부로 지냈다. 이것만 보더라도 새로운 사상의 배경이 지주 집안 자제가 대부분인 성리학(다른 이름은 ‘주자학’ - 옮긴이)과는 퍽이나 다르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사방을 유람하면서 장사를 했고, 그 와중에 의술을 배워 의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노력한 덕분에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지자, (그는 – 옮긴이) 학문에 대한 관심을 키워 갔다. 주로 혼자 공부하면서 달리 스승을 두지도 않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 궁금증을 풀곤 했다.
그는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거기에 붙어 있는 수많은 주석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당시 성리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어 꼭 지켜야 하는 규칙 – 옮긴이)처럼 여기던 송나라 사람 주희(朱熹. 존칭 ‘주자[朱子]’. 성리학을 만든 사람 – 옮긴이)가 달아 놓은 주석을 시시하게 여겼다.
그는 당시 정부 고관이던 ‘왕양명(王陽明. 본명 왕수인[王守仁]. 양명학을 만든 사람 – 옮긴이)’을 만났는데, 왕양명은 성리학에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양명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왕간은 왕양명과 학술 토론을 벌인 끝에 그의 제자가 되어 8년 동안 그 문하에서 수업했다. 이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은 태주학파를 ‘양명학 좌파’라고도 부른다. 왕간은 두 사람의 하인과 함께 허름한 옷을 입고 수레를 타고 유랑하면서 가는 곳마다 자신의 학설을 전파했다.
그가 (당시 명나라의 도읍인 – 옮긴이) 북경에 나타나자, 북경 사람들은 ‘괴수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했다. 스승인 왕양명도 그에게 지나친 행동을 삼가라고 충고했다.
비록 왕양명의 문하에서 수업을 했으나, 그의 사상은 독자성을 매우 짙게 풍기고 있었다. 먼저 왕간은 자신의 학문을 전하는 데 노인이나 어린이나 귀한 집 출신이나 천한 자이나 명민(明敏. 밝고 총명함 – 옮긴이)하거나 어리석거나를 가리지 않고 평등함을 강조했다. 제자 가운데서도 사대부뿐 아니라 상인, 중인, 노동자 등 다양한 신분 출신의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제자 가운데 ‘주서’는 나무를 베는 사람이었고, ‘한정’은 도자기공(줄여서 ‘도공’ - 옮긴이), ‘하정미’는 농민(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기’ - 옮긴이)이었다. 또 그를 계승해서 태주학파를 이끈 ‘하심은’은 구리로 징을 만드는 집안 출신이었다.
신분제도에 억눌려 기를 못 펴고 살던 사람들, 특히 재능과 실력이 있으면서도 출세길이 막혀 있던 도시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태주학파는 진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성리학자들이 경전의 권위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주석을 달고 해석해(풀이해 – 옮긴이) 놓은 주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탄압을 가하자, 태주학파는 진리는 경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대응했다.
이들은 책을 다 버리라고 외쳐 댔다. 진리는 책이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잘 살핌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사상을 (‘마음 심[心]’자를 써서 – 옮긴이)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성리학자들의 홈그라운드인 경전의 울타리를 벗어난 이들은 광범한 도시민의 요구와 지지를 배경으로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포문을 열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도(道)의 신성성을 강조하여 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군자뿐이라고 해서 군자와 백성을 구분하고, 인간은 원래부터 차이가 있음을 설파했다. 그러나 왕간은 도의 신성성을 부인하고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알고 행하는 것이 바로 도라고 갈파(喝破. 잘못된 주장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밝힘 – 옮긴이)했다.
그는 “백성의 생활을 벗어난 고담준론(高談峻論. 고상하고 준엄한 이야기 – 옮긴이)은 모두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상적인 일들이 바로 학문이고 일상적인 일들이 곧 도라고 가르쳤다. 이로써 군자, 즉 성리학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도를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인간의 선천적인 차별을 부정했다.
또한 성리학자들의 금욕주의를 반대하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다. 먹고 싶어하는 것(식욕 – 옮긴이)이나 성욕 등을 ‘천성적인(선천적으로 타고 난 성품인 – 옮긴이) 것’으로 여겼고, 그 밖의 물질적 욕망도 긍정했다. 이는 당시 도시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주학파의 사상 공세는 (명나라 – 옮긴이) 지배층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근대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태주학파를 계승한(이어받은 – 옮긴이) 하심은은 조정의 실력자 장거정과 대립하다 체포되었고, 다시 석방되었으나(풀려났으나 – 옮긴이), 무창에서 호광 지방의 지방관인 ‘왕지원’에게 잡혀 살해되었다(죽임을 당했다 – 옮긴이). 그리고 안균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으며, 이탁오(본명 ‘이지[李贄]’ - 옮긴이)는 옥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요망한 말로 백성을 유혹한다.’는 죄명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하심은의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은 당시 백성들이 이들에게 신뢰와 기대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무창 시민들 중(가운데 – 옮긴이) 하심은의 억울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길가에다 그의 죄상을 적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게 했지만, 그 글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무고하다고 탄식하며 (명나라 – 옮긴이) 조정을 질타하고, 그걸(하심은을 비난하는 글을 – 옮긴이) 다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 『 상식 밖의 동양사 』(‘박윤명’ 지음, ‘도서출판 새길’ 펴냄, 1994년)에서
- 음력 7월 6일에, 아사달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