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약자로 살아왔다.
여자로, 아빠의 딸로, 이혼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아버린 두 남동생의 누나로, 성소수자로, 그리고 그러한 내 위치들로부터 비롯된 각종 폭력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로. 나는 ‘나’로 태어났을 뿐인데 22살 그다지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너무 많은 종류의 약자인 ‘나’로 존재해왔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아니, 분명히 나뿐이 아니다.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여성’으로서의 여러 역할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며, 많은 순간에 나 자신이 아닌 그 ‘역할들’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그 역할들에 마땅한 기대치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 또한 지니고 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들로, 누군가의 순종적인 딸로, 엄마 같은 누나로, 한 남자의 아내로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른다. 나는 항상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나는 내 삶에서 내 이름으로 만으로는 불릴 수 없는 걸까? 오롯이 나로는 존재할 수 없는가? 왜? 어째서?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더 강해져야 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고, 끊임없이 말해야 했다. 스무 살 이후의 내가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또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캔버스와 붓은, 종이와 연필은 나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못한다. 나를 어떠한 역할로써 제한해버리고는 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것들은 나에게 어떠한 억압도 하지 못하고, 어떠한 제약도 주지 않는다. 내게 보여지는 사회가 아닌, 내가 보여주는 캔버스 안에서 비로소 나는 자유롭고, 비로소 그때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직접 경험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내게 보여지는, 나를 둘러싼 사회는 나를 쉽게 부정했다. TV를 보면 수많은 화목한 가정이 드라마에서 웃고 있다. 수많은 이성애 커플들이 행복해하고 있다. 순종적인 딸과 아내, 그들의 남편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일상적이라고 받아들여질 그들의 모습들. 집에서 온갖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나는 금방 혼란해졌다. 어떤 드라마를 틀어도 그곳에는 화목한 가정이 있었다. 첫사랑이 여자아이였던 나는 금방 혼란해졌다. 어떤 방송을 틀어도 이성애 커플들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또, 그 누구도 ‘나’를 ‘나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나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피하거나, 동정하거나,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로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나는 '내가 겪은 나'와 '사회가 바라는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정체성은 사춘기 이후에 완성되는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그 시기가 다소 늦은 편이었다. 치아가 제자리를 찾고, 뼈가 자라나기를 멈추고서도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나와 나의 여자친구 사이의 어떠한 관계. 내가 남자였거나 그녀가 남자였다면 남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그 관계. 그 관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또 그들의 시선 때문에 나는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내가 여자를 사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기독교 학교였던 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너무 당연하게 동성애를 부정했고, 컴퓨터로 뉴스를 보던 아빠는 성소수자 관련 글자를 보기만 해도 정신병자들이라며 혀를 차고 욕을 했다. 만약에 우리 집에 동성애자가 있으면 어쩔 거냐는 내 물음에 대한 아빠의 반응은 ‘있을 수 있지’하는 반응도, ‘있으면 정신병원에 보내야지’하는 반응도 아닌 ‘없어 그런 거.’하는 단정이었다. 고등학교까지의 삶에서, 나는 스스로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표현해야 했고, 나는 나를 드러내도 좋을지 계속해서 불안해해야 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처절하게 약자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나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1년 동안의 긴 고민 끝에 나는 극단적인(어쩌면 바보 같은) 결심을 했다. 여기서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다면,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그 바보 같은 생각과 함께 나는 종이 위에 나를 풀어놓았고, 놀랍게도 여기에서 나는 ‘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 곳.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곳으로 나가는 문은 종이와 캔버스 위였다. 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놀랍게도 나를 나로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생겼고, 자신 역시 퀴어라며 밝혀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조금 늦은 깨달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체성은 자기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작용이 아님을 그때서야 알았다. 타인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타인과 ‘나’를 공유하는 과정에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은 형성된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내가 ‘나’일 수 없었던 인간관계, 내가 ‘나’임을 밝혔을 때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렸던 그 관계들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던 나는 ‘나’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나를 막지 않는 캔버스와 붓 덕분에, 드디어 나는 나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해서 내가 약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에서 약자이다. 나는 여전히 여자이고, 여전히 아빠의 딸이고, 여전히 성소수자이고, 그리고 여전히 어떠한 폭력들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피해자이다. 그 사실들에서 도망 치려 발버둥 치던 나는 이제 내가 약자임을 인정한다. 약자인 나 역시 나임을. 놀랍게도 그것을 인정한 순간부터 나는 강해질 수 있었다. 이 사회가 지워버린 나의 이야기, 약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 약자들의 이야기를 모른 척 지워버리고 어떠한 틀 속에 가둬버리는 이 사회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어린시절의 나처럼 흔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제 나는 내가 누군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여자입니다. 어쩌면 범성애자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일단은 양성애자입니다. 아직 공부를 더 하고있어서 확신을 가지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친구들은 나를 보고 성소수자 여성이라며 약자 중의 약자라고 농담을 하고는 하지요. 나는 미대생입니다. 나는 나를 그리는 사람입니다.사람들이 외면하고는 하는 수많은 ‘약자의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를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림과 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들과 나를 나누며 더 단단해지는,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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