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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의 입술은 촉수처럼 낭자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랐다.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숨소리는 가빠졌다.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산속 외딴집 방 안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꽈르르 꽝 ! 번개가 문을 하얗게 만들었지만 장보는 낭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밖에도 안에도 폭풍우는 끝없이 이어졌다. 우르르 쾅 ! 천지를 쪼개는 벼락과 함께 방 안에서도 낭자와 장보는 한몸이 돼 천길만길 허공으로 떨어졌다.
장보의 품에서 빠져나온 낭자가 숨을 가다듬으며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소첩이 머리를 올렸습니다. 낭군께서 비녀를 꽂아주십시오.” 장보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나무젓가락이었다.
“낭자의 머리에 이런 비녀를 꽂아줄 수는 없소이다.”
장보는 제 상투에서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식)을 뽑아 댕기를 감아올린 머리에 꽂아줬다. 원래 동곳은 짧지만 장보는 제 어미가 이승을 하직했을 때 은비녀를 뽑아 동곳으로 붙이고 다녔다. 그날 밤 장보는 한 일이 너무나 많아 금방 코를 골았다. 장보가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하룻밤, 그 방에서 잤건만 방 구경은 그제야 처음이다. 통나무 벽 사이는 진흙으로 때우고 방바닥은 멍석 위에 돗자리를 깔았지만, 방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지난밤 만리장성을 쌓은 낭자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 세칸 너와집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낭자는 보이지 않았다. 옷을 빨아 깨끗이 다림질까지 해놓았다. 방으로 다시 들어가 자던 이불을 개다가 장보는 깜짝 놀랐다. 요 위에 새빨간 핏자국! 천하의 잡놈, 장보는 팔도강산 노름판을 전전하며 이 여자 저 여자 수없이 치마를 벗겨왔지만, 숫처녀는 처음이고 칠흑 속에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윗목에 보자기를 덮어놓은 개다리소반에 정갈한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삼계탕에 산삼이 세뿌리나 들어 있었다. 배를 두드리며 먹어 치웠다. 지난밤, 마작판을 휘어잡아 긁어온 전대에서 백냥을 꺼냈다가 삼백냥을 만들어 이불 속에 찔러놓고 길을 떠났다. ‘낭자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 걸. 벌교 장날 장 보러 갔나? 아니야, 나를 그 집에 눌러앉히든가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지.’ 장보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벌교 마작판에서는 큰 재미를 봤지만, 금산에서는 골패판에 끼었다가 왕창 나갔다. 노름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한몫을 잡았다 해도 좀 모자라는 것 같고 찾아온 끗발을 포기하는 것 같아 한번만 더 끌어모으겠다고 패를 계속 돌리면 허탕질이 되고 전대는 가벼워지는 게 노름꾼의 속성이다. 장보도 그렇게 날리고 고향땅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전답을 헐값에 팔아서 또 노름판에 처박고 함경도 무산에서는 투전판에서 사기도박을 하다가 들통이 나 양손 엄지·검지가 작두에 잘려나가는 낭패도 당했다.
마지막 남은 집마저 날리고 그는 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고 부모님 묘소에 마지막 절을 올리러 고향땅 산청으로 가 산에 올랐다. 과거에 여덟번 떨어지고 주색잡기에 빠졌다가 노름꾼이 돼 조상한테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몽땅 탕진하고 제 목숨 끊으려니 눈물이 절로 났다. 어머니 묘에 큰절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 은비녀가 생각났다.
벌교 조계산 속 외딴 너와집에 저녁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열두어살 먹은 아이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장보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발을 들여놓자 마당을 쓸던 아이가 장보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서로의 눈빛은 따듯했다. 부엌에서 아이의 어미가 나왔다. 얼굴 오른쪽 반쪽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번들거렸고 오른쪽 눈도 없었다. “그분이시군요.” 여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여인의 올린 머리엔 어머니의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장보가 방에 들어가 좌정하자 그 여인이 아들을 보고 “너의 아버지시다. 큰절을 올려라”고 했다. 한 많은 36년, 제 목숨 끊으려던 장보가 뜻밖에 얻은 아들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어릴 적에 부엌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져 장작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에 얼굴을 처박아 괴물로 살아온 그 여인과 호롱불 아래서 얘기를 나누며 밤을 꼬박 밝혔다. 마지막 남은 수수께끼를 물었다. “임자, 그날 차려놓은 삼계탕에 산삼이 세뿌리나?” “산삼이 아니고 장뇌삼입니다. 심마니였던 아버지가 산삼씨를 열두군데 남모르는 곳에 뿌려두고 손수 지도를 그려뒀습니다. 이제 모두가 50년근이 돼 우리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습니다.” 장보가 부인을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꼬끼오~” 새벽닭이 울었다.
#사랑방이야기
첫댓글 누구는 조큿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