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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었던 한 주간을 보내시고 거룩한 주일에 주님 전에 나오셔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이신 이 자리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한없는 사랑이 차고 넘치어서 위로부터 주시는 평강과 위로로 우리의 영혼과 육이 회복되는 귀한 거룩한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서라고 하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는 말씀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한 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원이나 욥기와 같이 지혜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도서 1장에서 전도자는 그의 탁월한 지혜로 평생을 인생에 대해 탐구하였으나 그가 얻은 대답은 허무였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헤아려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이렇게 인생의 삶 자체가 모두 허무와 공허와 같았던 전도자가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찾은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며, 이것을 찾을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그가 살고자 하는 인생은 어떤 인생인지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 1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읽으신 11절의 말씀은 전도서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적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허무와 회의가 가득 찬 늪에 피어난 장미꽃과도 같다라고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였고라는 전도자의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때를 따라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고는 보기에 아주 좋다.
너무 좋다.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하나님의 외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시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생명이 자라지 않는 생명체가 없는 거친 광야인지 사막인지 깊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혼돈 그리스어로 카오스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빛이 창조되어 혼돈의 질서를 공허한 곳의 생명을 어둠의 빛을 시면의 경계를 만드시어 생명이 태어나고, 그렇게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이곳에서 살아야 할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치를 부여해 창조된 사람은 아름다워집니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은 품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품격은 그 사람의 바탕과 성품과 인격이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성질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사회는 자신의 권력과 성공 혹은 외모가 타인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시대입니다. 그런 외적인 것들로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애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처럼 과도하게 그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품격은 집착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러우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제 보아도 어디에 있어도 자연스러우며 가지런한 질서가 있는 삶의 사람입니다. 이 아름다운 품격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혼을 사모하는 종교심을 주십니다. 종교심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 우리의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며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있고, 그 위를 넘어선 불가지 영역의 세계는 결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수많은 부분이 반드시 있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일부분의 세계는 믿음이라는 종교심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분이지만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크고 아름다운 창조의 뜻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깨닫게 된 것은 바로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요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미미한 티끌로 만드신 그 연약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생명을 보어 신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 우리를 보시며 하나님은 토 너무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씀은 그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계신 우리 아버지요라고 부르는 것 또한 바로 그 두 줄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쉽지 않은 인생에 순간마다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당연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종종 잊습니다. 하지만 고민이 쌓이면 직관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걱정일기로 불리는 것이 나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매사에 고민하였습니다. 너무 고민하다 보면 좌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인간은 다 소심합니다. 그러나 그 고민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질적인 고민이 쌓이면 우리 안에 거대한 직관 체계가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어떤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이론입니다. 직관 체계라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자동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정을 무모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숱한 고민을 통해 내린 결정은 용기 있는 사람의 직관 체계를 통한 좋은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허무와 공허와 우울함이 수시로 밀려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고민하게 하더라도 전도자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며 외치신 도 아주 좋다를 나의 직관 체계에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외침을 듣지 못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더 아주셨다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나의 직관책에 끊임없이 새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인간의 가치와 의미는 상실되며 품격을 가질 수 없고, 오직 무례함과 졸렬함만이 나타나는 헛되고 헛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12절과 13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소원을 전도서는 1장 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구절로 인해서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통하여 대략 기원전 3~5세기에 예루살렘에 근거를 두고 지혜 문구를 편집해 저술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가 요즘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서의 저자는 인간의 도덕적인 기준과 행동에서 나온 인과 응보나 권성, 지각과 같은 전통적 관습과 전통적 지혜가 하나님이 품고 있는 생각과 사상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품은 뜻에 진의를 알 수 없기에 인간의 관습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이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도자의 말입니다. 이렇게 전도서는 전통적 지혜에 반대하는 전폭적 또는 회의적 지혜서라고 볼 수 있었기에 이단적인 책으로 오랫동안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주 100년, 100년경의 암리아 회의에서 전경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성경에 실리게 되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혜서가 된 것입니다. 전도자가 지금까지 자기의 지혜로 해석한 인생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그래서 곡식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계속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는 내가 알았고 또한 알았도다라며 하나님의 지혜로 깨달은 일상의 삶의 가치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기뻐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 일상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나와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고, 그리고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놀라운 사상적 비약이었습니다. 낙을 누리는 것 논다는 것은 향락주의적 사고이기에 그 시대에 스토이즘 시대의 삶의 지혜를 충구하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요즘에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의미하는 이올로의 타운이 쾌락주의적인 태도가 이해되는 지금과는 거리가 먼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깨달은 것은 이 네 가지를 매일 균등하게 규칙적으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충분히 잘 사는 즐거운 인생,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번아웃 증후군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로지 그 일만 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인만 번아웃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업 주부도, 학생도 번아웃 증후군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뻐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바라시며 인간이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 걱정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즉 각 사람은 자기가 마음과 힘을 쓸 수 있는 범위에 삶의 크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범위가 커서 버겁다면 줄여서 살아있는 동안에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어 즐겁게 잘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리는 행복을 논하는 이른바 행복 경제학을 말합니다. 개인의 행복은 기본적으로 가정생활, 건강, 경제 상황, 즉 돈이라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행복의 답은 가정생활과 건강의 건강을 위해서는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이 세 번째 돈을 위해서는 시간을 덜 쓰는 게 답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인간의 삶의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풀며 공언하는 데서 오고, 행복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풀며 공헌한 데서 온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2500년 전에 전도자 코일렛이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한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세상 사는 동안 선을 행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고, 먹고 마시며 적당한 수고를 통해 인생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의미이자 가치이며, 또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2500년 전에 제자와 지금의 학자가 발견한 이 말씀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잘 깨달아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14절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본 말씀에서 전도자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의 절대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시연에서 질서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사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며,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사람이 가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완전하여 부족함도 과함도 없으며, 완벽한 조화와 목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보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과 전능하심을 깨닫고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외입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자신을 빼어 닮은 형상을 보시고 기뻐 외치십니다. 토 힘이 좋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영이신 창조주를 닮았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풀기 어려운 인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을 닮은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서 살아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모순이며 인간의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으려는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잃어버린 피조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탈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없고 취할 수도 없기에 오직 하나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형상을 취하시고 인간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며, 그의 가르침과 행위와 삶과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제시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가치를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형상 가치를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에 존경과 사랑과 온마음을 다해 나아가는 전 인격적인 자세. 그것이 또한 경우의 자세입니다. 14절의 말씀은 인간이 어떤 일을 도모하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하심은 불변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재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거스르고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지몽매한 일에 매달립니다.
여러분의 앞날은 어느 누가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느 누가 거스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외치시는 포부를 듣고 이 땅에 존재하시는 분들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신비로운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자 은총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다른 종교와 수많은 무교도들과 수많은 영의 혼탁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기를 그치지 마시고 매번 계속 노력하시기를 정말 바랍니다.
전도자는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공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 좋은 날이 오면은 충분히 즐기고, 공고한 날이 오면 그때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묵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우리 국민 모두는 공고한 날들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우리는 되돌아보고 묵상하여야 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가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하여야 하였는가 창조 때 하나님의 토부를 우리는 날마다 경청하고 있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는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고난과 지금 우리 마음의 공고함은 앞으로의 우리 모두를 더욱 성숙하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바라기는 상처 입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성령께서 위로해 주시고 주님의 생수 부으셔서 회복해 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일상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쁘고 선한 일을 하며, 또한 먹고 마시며 일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물로 더욱 풍성해지는 대강절 기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